알라디너분의 홍릉수목원 관련 페이퍼를 보고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일요일 아이와 길을 나섰다.
집 처에 바로 고가도로가 지나고 있어 공기가 여간 안 좋은 것이 아니다. 소음도 소음이지만 환기를 한번 시키면
방바닥에 새까만 먼지가 가라앉는다.  숨쉬는 게 때로 꺼림칙하다.   

 

 

녹음. 구태여 피톤치드라는 거창한 용어를 빌리지 않더라도 사람은 때로 흙을 밟고 녹음 속에서 호흡을 해야 한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더웠다. 정수리에 내려앉는 햇발이 아직은 날카로웠다.
아이는 화장실에 가자고 보챈다. 

화장실은 강렬한 햇빛을 맞으며 작은 둔덕 하나를 올라가야 하는 곳에 있었고
자연발효식 재래식 변기였다. 

아이는 기겁을 한다.
솔직히 나도 적나라한 구멍을 보고 멈칫하긴 했다.
희한하게 주장대로 냄새가 하나도 안 나긴 했다.
참아 보겠다,고 해서 데리고 내려와 보니 또 화장실에 올라가 보겠단다. 

시범을 보여주었는데도 ㅋㅋ
역시나 무섭다고 싫단다.
순간 짜증이 올라왔다. 참지 못하고 구시렁구시렁 하나마나한 잔소리를 시작했다. 

엄마는 실망했다.
새로운 것들을 그런 식으로 두려워하면 세상 사는 거 재미었다,는 둥.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며. 그건 진짜 아이를 위한 훈계가 아니라
더운 날씨에 부려보는 치사한 신경질이었다. 새로운 것들을 두려워하며 재미없게 사는 건
정작 나면서. 조그만 꼬맹이는 입가를 실룩이며 울음을 참는다.
낯선 재래식 화장실에서 쉬 못했다고 야단치는 엄마 앞에서.

예쁜 싱그러운 연인. 팔랑거리는 꽃무늬 원피스에 짧은 커트머리의 아가씨는 
배시시 웃으며 연인과의 사진촬영을 부탁했다.
두 장을 각기 다른 구도로 찍어주며 한숨이 나왔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을까?  
요즘은 과거가 마치 전생 같다. 아니면 거짓말 같은 이야기.

그리고 우사인 볼트
나는 그 청년이 좋다.
장난스럽고 좀 우악스럽고 에너지가 넘치고
그 청년 앞에서는 세상이 쉬워 보인다.
자신을 찾으려면 자메이카의 나이트 클럽을 찾으라던 너스레도 귀여웠다. 

그런데 그 모든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 것 같았던 우사인 볼트가 
부정출발로 실격 당했다. 출발선에서 뛰어 나오며 스스로도 바로 깨달은 듯
바로 윗옷을 벗어던지고 포효한다. 

음. 세상은 누구에게나 쉬운 게 아닌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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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8-29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세상은 쉬운게 아니예요. ㅠㅠ

blanca 2011-08-29 22:36   좋아요 0 | URL
아, 시국도 그렇네요--

페크pek0501 2011-08-29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몇 번 들어온 곳인데, 댓글은 처음 남겨요. 오늘은 순오기님의 방에서 뵙고 오게 됐어요.

제목이 맘에 들어 댓글 남깁니다. '세상은 누구에게나 쉬운 게 아닌거야.'

누구에게나 쉽지 않지요. 어젯밤 오세훈 시장은 잠을 푹 자지 못 했을 것이고,
오늘 시합이 있는 운동선수 역시 그랬을 것이고,
오늘 무슨 시험이 있는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고,
지금쯤 어느 장례식장에선 울음바다가 됐을 것이고,
화장터에서도 그랬을 것이고,
학교생활을 시작하고 있는 초등학생 저학년들도 자기 나름대로 고충이 있을 것이고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그럴 것이고...
부부싸움 또는 연인싸움을 한 사람들은 속이 좋지 않았을 것이고

다 그렇지요. 그래서 이렇게 불러 주고 싶군요. '가엾은 사람들이여!'라고. ㅋ

blanca 2011-08-29 22:38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예, 남들 문제보다 자신의 문제가 더 절실하고 크게 보일 뿐 다들 고만고만한 문제들로 고민하고 고통받고 그러면서 살아가는 건 비슷할 것 같아요. 그런데 댓글이 마치 시 같아요^^

블루데이지 2011-08-29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우사인 볼트 결승전보려고 tv틀었다가 실격되는 거 보고 주저 앉았네요^^
아~ 아까운 기회!!
인생이든 스포츠경기든 지나간 것에 후회하며 살지는 말아야할텐데...그 게 잘 안되요!!ㅋㅋ

blanca 2011-08-29 22:39   좋아요 0 | URL
블루데이지님, 본인은 또 얼마나 허탈했을까요. 담대한 척 모션을 취해 봤지만 결국 우사인 볼트도 긴장하고 부담 느끼고 그랬던 것 같아요. 기록갱신을 보고 싶었는데 참 아쉬워요.

pjy 2011-08-29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씨가 시간대에 따라서 변화무쌍하더라구요~ 타이밍은 중요한거죠^^;

blanca 2011-08-29 22:39   좋아요 0 | URL
아, 요새 날씨는 다시 한여름으로 가고 있더라고요. 타이밍을 완전 잘못 맞추었어요. 정말 푹푹 찌더라고요.

노이에자이트 2011-08-29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허...아직 블랑카 님은 연인들을 보며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던가'하고 한숨쉴 나이는 아닌데...왜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요...

blanca 2011-08-29 22:40   좋아요 0 | URL
노자님, 그럴 나이 맞아요 ㅋㅋㅋ 저보다 한 십 년은 어려 보이던걸요.

2011-08-29 18: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9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1-08-29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은 어린 분홍공주 데리고 나들이 하시느라 고생하셨어요. 토닥토닥^^
그래도 피톤치드는 좀 마신거죠?

blanca 2011-08-29 22:42   좋아요 0 | URL
너무 조금 마셨어요. 또 마시러 가야 하는데 자기는 거기 안 갈 거라고 오늘도 두 번이나 다짐받듯 얘기하네요--;; 화장실도 무섭고 벌도 많대요. 에혀. 피톤치드는 또 집 근처 영휘원에 할머니처럼 혼자 마시러 가야 겠습니다. ㅋㅋㅋ

2011-08-29 2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30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08-30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막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 수목원은 재래식 화장실인가 봅니다.
어릴적에 꽤 오래 재래식 화장실을 썼어도 지금 다시 그렇게 쓰라면 전 좀 .. 이상하고 막 그럴듯 싶습니다
또 급해서 들어가면 아무렇지도 않게 나올지도 모르겠어요~

설명해주신 다양한 장면 생각하며 혼자 웃어봅니다. 씨익하고욥!!

blanca 2011-08-30 22:55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초절정 적나라한 재래식이었어요. 저도 사실 처음 보고는 놀랐답니다. 그래놓고 꼬맹이보고 해 보라고 했으니 얼마나 이기적이고 배려없는 마음인가요. 이래저래 제 컨디션 안 좋다고 아이의 마음을 읽어 주지 못해 참 미안합니다.

2011-08-30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누구에게도 세상은 쉬운 게 아니라는 게, 못됐게도 위안이 되네요.

과거가 전생같다니... 실감나는 표현!
모든 과거는 그런가 봐요.
그곳에서, 세월에 휩쓸려 너무 멀리 떠내려온 느낌이에요. 과거에 비하면 이 현재가..

blanca 2011-09-01 12:22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 걸로 위로 받아요, 섬님! 섬님, <신화의 힘> 정말 너무 좋아요. 정말 고마워요....이런 좋은 책을 만나게 해 주셔서...

yamoo 2011-08-31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우사인 볼트가 좀 아깝습니다. 조금 늦게 출발해도...금메달은 따놓은 당상일터인데...
뭐, 순간적인 실수였겠죠...
200미터에서는 충분히 기량 발휘를 하겠죠?^^

blanca 2011-09-01 12:23   좋아요 0 | URL
야무님, 저는 한번 더 기회를 줬음 하는데 그게 논란거리더라고요. 상습적인 부정 출발로 경쟁자들 집중력을 흩뜨려 놓는 경우가 있다면서요. 그래도 너무 가혹해요. 그런데 200미터는 언제 하는지 모르겠네요.

비로그인 2011-09-01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blanca님! 저도 제목이 와닿아서 이렇게 덧글 남겨요. 정말이지 한 순간 한 순간은 사는 게 더럽게 힘들다 싶을 때도 있어요. 사소한 사건 하나 때문에 하루 종일 마음 졸이기도 하고요. 그러다가도 또 사소한 일 하나 때문에 마음이 금세 행복나라로 급변하고...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요. 오늘은 거리를 걷는데 문득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무서운 거에요. 그래서 마음이 무겁고 우울했는데, 혼자 공원 가서 산책하니까 자연의 기운을 받아서 그런지 또 상쾌하더라구요. 진짜 인간 마음이 간사하죠? ㅎㅎ 아참 그런데 프로필 사진은 사강인가요?

ps. 육상 200m 결승 경기는 토요일 밤 9시 20분에 한답니다 :)

blanca 2011-09-02 22:42   좋아요 0 | URL
말없는수다쟁이님 반갑습니다.^^ 아, 예 저 맞아요 ㅋㅋㅋ 사강 맞아요. 한창 이쁘고 사랑스러울 때 모습이더라고요. 맞아요. 사소한 일 하나로. 기분이 나빠졌다가 좋아졌다가 해요. 특히나 인간 관계에서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아. 완전 유용한 정보입니다. 정말 고마워요.

순오기 2011-09-02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에게나 세상은 쉽지 않지만, 꼬맹이에게 재래식 화장실의 공포만 하겠습니까?^^
더운 날에 고생하셨네요~ 원래 가을볕이 더 따갑습니다. 그래야 나락도 익고 가을 과실도 단맛이 들거든요.

blanca 2011-09-02 22:44   좋아요 0 | URL
아, 순오기님의 따가운 가을볕에 대한 이야기는 또다른 깨달음을 줍니다. 그럼 좀 잘 견디어 볼까요? 그죠. 여학생들도 무서워하는 곳인데. 지금도 거기는 절대 안 간다고 몇 번이나 그러네요. 너무 이쁜 수목원인데. 아쉬워요.--;;

소하아녜스 2011-09-04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치 우리 아이이야기 같아요^^

우리 아이는 결국 나무에 oooo했거든요..

ㅋ.ㅋ 새로운것을 쉽게 받아들이기엔 너무 다른 환경과 사회에서 커 버린걸요...

아마도 다음엔 용기를 낼 수 있을거예요.

그래도 한번 보기라도 했던 경험이니까요...

저도 어리적 시골에가면 너무 무서웠답니다.

blanca 2011-09-05 11:37   좋아요 0 | URL
혹시 소하아녜스님 세례명이세요? 그렇죠. 저는 커서도 재래식 변소에서 일 보라고 하면 망설였을 것 같은데 꼬맹이보고 새로운 것 운운하며 참, 아이의 눈높이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입으로는 잘도 떠들면서 반대로 가고 있었어요. 소하아녜스님,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