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
사드 카하트 지음, 정영목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8년 5월
평점 :
팔아요, 팔아. 자리도 비좁고!
아버지는 내키지 않는듯 머뭇거린다.
그래도 할머니가 사 주신 건데......
좁은 집에서 세 형제가 십 년 가까이 방치하고 있던 밤색의 삼익 피아노는 그렇게 실려 나갔다.
 |
|
|
| |
우리는 피아노에 꿈을 투자한다. 지나가다 내키면 건드려본다. 그 위에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나 귀중한 물건을 올려놓아 집안의 성전으로 꾸며 놓는다. 이런 피아노가 우리 삶에서 사라지면 그것은 사실 대체할 수가 없다. 거기 포함되어 있는 우리 삶의 흐름의 한 부분을 돌이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p.217
|
|
| |
|
 |
만 다섯 살도 되지 않아 피아노 가방에 바이엘을 넣고 가정식 피아노교습소를 들락거리게 됐다. 어렸을 때 너무나 피아노가 배우고 싶었지만 팍팍한 생활로 좌절당한 엄마는 벼르고 있었다는 듯 이사만 갔다 하면 제일 먼저 근처의 피아노 학원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엄마의 딸은 절대음감과는 거리가 멀었고 아버지가 눈물의 피아노라고 우스꽝스러운 농담을 던질 만큼 언제나 야단맞고 흐느끼며 피아노를 쳤다. 그 부작용의 여파로 지금도 나는 아이의 의사에 반하는 조기 음악 교육에 반대한다. 공부하는 것보다 피아노 연습하는 게 더 싫고 지겹고 힘들었다. 소질이 있냐, 소질이 있다, 피아노 선생과 엄마 간에는 희망없는 모종의 공모와 속임과 속아줌이 있었다. 콩쿨 예선에서 바로 탈락한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소위 좀 쪽팔려서 조금 울고 말았지만 의외로 야단치는 사람도 없고 기대했던 사람도 없었던지 하나의 해프닝이 되어 버린 일. 나는 피아노에 소질이 없었다.
 |
|
|
| |
이런 종류의 발표회는 모든 피아니스트 지망생이 제2의 호로비츠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엄청난 신용사기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극소수의 독주자만이 정상에 이르러 음악을 업으로 삼는다. 그럼에도 어린아이에게 재능이 좀 있다고 하면 지레 그런 능력, 그 모호하고 진귀한 재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랜 세월에 걸쳐 수없이 많은 어린 음악가가 억지로 되풀이하여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하는 그 엄청난 시련을 겪는 체계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p.90
|
|
| |
|
 |
파리의 한 동네 좁은 거리, 피아노를 수리하고 중고 피아노를 사고 팔기도 하는 아뜰리에를 방문하며 저자는 (작중 화자)는 '피아노'를 살아 숨쉬는 하나의 유기체로서, 유년기의 역사를 오롯이 복원해 내는 하나의 매개체로 다시 만나게 된다. 피아노의 역사, 구조가 지루하거나 사변적으로 흐르지 않고 매우 흥미롭고 평이하게 그려진다. 언제나 한 발치 물러서서 조금은 겁먹은 상태로 바라봤던, 다시 끌려 들어갈까봐 스리슬쩍 도망칠 준비를 했던 피아노 건반 위에 다시 손을 올렸다. 쉬운 연습곡을 조율이 안 된 상태로 다시 치게 되었다. 형편없었지만 색다르고 소중한 느낌이었다. 전적으로 이 책 덕택이었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성인이 되어 재회한 피아노와의 사연을 담담하게 고백한 에세이에 가까워 보인다. 중고 베이비 그랜드를 데포르주 공방에서 구입하고 다시 교습을 받게 되며 '나'는 피아노에 헛된 꿈을 투자하고 비현실적인 기대를 거는 대신 '나'를 투명하게 보태고 자기 규율이 주는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그건 어린 시절과는 분명 또다른 피아노가 주는 즐거움이었다고 고백한다. 초등학교 4학년 어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좌절감을 맛보며 덮었던 바하인벤션은 중학교 1학년때 쉬운 대중음악곡이나 초보용 재즈 연습곡으로 돌아왔다. 당시만 해도 번성했던 레코드점에서 <라붐>의 주제곡 악보를 삼백원 주고 사와 연습하여 음악 실기 시험 시간에 치며 아이들의 호응을 얻어내며 참 오랜만에 피아노 배우기를 잘 했다,고 으쓱했다. 그런 대중음악들을 연습하기 시작하면 손을 망친다,고 겁을 줬던 사람들도 있었지만(망칠 손도 없었지만) 즐기며 평이한 유행가들을 가끔 쳐대며 유년 시절 울며 억지로 피아노를 쳤던 시간들 덕을 조금씩이라도 봤다.
 |
|
|
| |
마지막 화음들이 허공에 머물다 서서히 물러나는 동안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내가 소유하기는 했지만 결코 정복하지 못한, 언제 보아도 낯설어 보이는 악기 안을 들여다보았다. 당연히 음악이 중요했다. 모차르트는 모차르트였다. 그러나 나는 내 피아노로 어떤 음악을 연주한다는 게 얼마나 깊은 만족을 주는 일인지 다시 깨달았다.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적으로, 영적으로. 그 만족은 무한했고, 그것이 내 삶에 주는 영향은 깊디깊었다. 나는 방 건너편에서 피아노를 바라보면서, 그 모퉁이가 텅 비었을 때를 기억해보려 했다. 전생의 일 같았다.
-p.345
|
|
| |
|
 |
텅빈 모퉁이. 그 모퉁이를 채웠던 밤색의 삼익 업라이트 피아노는 지금 어디에서 누군가의 손 밑에서 또다른 의미와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을까. 아님 아예 죽어버렸을까. '너'의 행방을 궁금해하며 너가 있었던 그 시간들을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더듬거리며 그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