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로 글목을 돌다 - 2011년 제3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공지영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맨발로 골목을 돌다>인 줄 알았다.
기성 유명 작가이고 읽히는 재미와 반비례해 문학적 성과에 있어서는 때로 혹평을 받는 공지영이 대상을 받았다.
아주 힘들 때 밤을 서성이다 인터넷 화면보다 훨씬 못해 실망했던 티테일블에 엎어져 있던 에세이집에서
그녀는 힘든 고백을 하며 울고 있었다. 나는 한잠도 자지 못했고 그녀의 아픔을, 이제는 마침표를 찍은
과거형의 고통들은 선뜩하게 나의 가슴으로 배어 들고 있었다.
독자와 작가로서가 아니라 그 순간 만큼은 우리 둘다 어느 지점에서 절절하게 교감하는 여자들이었다. 
지천에 허벅지게 피어난 산수유를 배경으로 독사진을 찍고 이제 그만 아파하기로 했다.
산수유를 처음 봤을 때 상상했던 붉은 빛이 아니라 개나리 같은 노란색임을 알고 나는 배신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맨발로 글목을 돌다>였다.
글목은 사전에는 없는 공지영만의 어휘였다. '글이 모퉁이를 도는 길목'
작가에게는 삶이 선회하는 곳이기도 했다.
작품 속 '나'는 적나라한 '작가 공지영'이었다. 소설의 일본판 출간 기념으로 일본을 방문한 길, 공항에서 처음 만난 H는 북한에 납치되어 이십사 년간을 살고 돌아와 한국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게 된다. 그의 삶 속에서 벌어진 그 무자비한 폭력은 그의 선의에 의해 수긍되고 적절히 체념된다. '나'는 삶을 덮치는 그 가혹한 운명의 파고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던 지난 날들을 갈피 갈피 사이로 끼워 놓으며 '살아가고 쓴다는 것'의 의미를 더듬는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우는 것이 하찮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에, 가슴을 좀 웅크리고 편한 자세를 취해보았는데, 그때 문장들이, 장대비처럼 내게 내렸다. 

 
   

폭력으로 망가진 결혼생활의 회고, 위안부 할머니들과의 대면, 언어로 하는 일들이 맞닥뜨리는 궁극의 한계, 평범하고 행복하고 무난한 결혼생활로 잔인한 비교우위를 보여주는 친구의 모습, 고통이지만 정확히 과녁을 맞추는 것들이 주는 쾌감,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 남았지만 노년에 자살하고 마는 프리모 레비,  <토니오 크뢰거>... 

이 짧은 소설 안에는 공지영 작가의 무수한 고백들과 좌절들과 그럼에도 밀고 나아가 생을 긍정하는 그녀의 모습이 고스란이 축약되어 있다.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서사 대신 작가 자신의 삶에 대한 진성성 어린 고백들이 서사의 도식을 해체하고 포박해 들어온다. 소설 아닌 소설은 그래서 심사위원들도 독자들도 뭉클하게 만들고 말아 버렸다.  

정지아의 <목욕 가는 날>은 친정 엄마와 함께 목간을 가는 자매의 정감어리고 훈훈한 정경이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따사롭게 그려진다. 늙고 무기력해진 어미와 이제 장년의 어미를 복기하는 듯한 두 딸이 서로를 어루만지는 풍경은 주머니 속에 던져 넣고 오래도록 조물락대고 싶어진다. 

김숨의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은 역시나 놀라웠다. <간과 쓸개>라는 단편에서 노년의 심리의 결을 사무치게 그려냈던 저력은 병든 시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의 이중적 심리 상태를 적나라하고도 여실하게 보여주고 끝내 돌아오지 않는 남편과 시아버지의 사연을 꿀꺽 넘겨버리고 마침표를 찍어 버리는 능청스러움으로 애닯게 한다. 오랜만에 결말이 궁금해 초조하게 하는 단편이었다. 

김언수의 <금고에 갇히다>는 금고를 열었다고 신나서 뛰어다니다 실수로 버팀목을 발로 차버려 금고 안에 갇혀 버리는 도둑 두 명과 여자의 얘기다. 상황 설정 자체도 극적이고 코믹하지만 유통되고 가치가 매겨지지 않는 물질들의 무력함을 일거에 조롱해버리는 작가의 기지가 번뜩였다. 도둑들이 심심하다고 화툿장을 찾아 헤매다 금으로 만든 주사위를 가지고 뱀놀이를 하는 풍경을 보고 빵 터져 버렸다.  

올해의 <이상문학상 작품집>은 예전의 그 읽는 재미와 여운을 다시 상기시켰다. 참신해야 한다는 강박도 한동안 멀미를 일으켰다. 다시 이야기다운 이야기로 회귀한 느낌이다. 다만 바로 들어와 꽂히는 영상 이미지와 대적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에 대한 명료한 대안은 여전히 찾기 힘든 것 같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글을 쓰고 읽는 행위는 생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노력과 만나는 것 같다. 무언가를 어루만지려는 노력이 계속되는 한 이야기는 쭈욱 계속되지 않을까.

 


댓글(2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2011-01-30 0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공지영은 자신의 이야기로 이상문학상을 탔군요. 궁금했어요, 어떤 이야기일까. 그러면서도 뭔가가 마음에 계속 걸려있어 이 책을 사진 않을 거란 생각을 줄곧 했었거든요.

"다시 이야기다운 이야기로 회귀한 느낌"은 황순원문학상 작품집에서도 그랬어요.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의지, 그런게 느껴졌거든요.

blanca 2011-01-30 13:03   좋아요 0 | URL
황순원문학상!도 그렇군요. 저는 이런 돌아옴이 더 좋아요. 전위적, 해체적, 이런 것들이 전 영 낯설고 그렇더라구요. 구수하고 재미있고 진진한 이야기들이 좋아요. 그 예전의 즐거움, 재미. 사실 그 땐 이 정도로 자극적인 재미들이 없었으니 상대적으로 더 재미있게 느꼈을 수도 있지만요.

반딧불이 2011-01-30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상하게 공지영의 책은 관심이 안갔어요. 그래서인지 읽은 책이 하나도 없는데 이번 책은 보고싶은 생각이 드네요. 블랑카님 리뷰때문일까요? '글목'이라는 단어도 마음에 들고요.

blanca 2011-01-30 13:02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 일단 공작가의 글은 잘 읽힌답니다. 그게 비판의 지점이기도 하고요. 한번 접해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글목! 저는 골목으로 알고 시작해서 더 기억에 남네요^^

순오기 2011-01-30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9년 8월 공지영작가 강연회 가느라고 열심히 찾아 읽었는데...이상문학상을 받아서 좀 놀랐어요.
리뷰를 보니 읽어보고 싶네요~ '글목'이라니 신선한 느낌!!
추운날 이사하느라 고생하셨어요~ 그곳에서도 편안하고 곧 익숙한 느낌을 갖게 되겠죠.^^

blanca 2011-01-30 13:00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공지영 작가 강연회 가셨었어요? 서재에서 한 번 찾아볼게요. 아저씨들과 아주머니가 고생 많이 하셨어요. 정리안되던 저의 살림의 각을 잡아 두시고 가셔서 찬장 문을 열어 볼 때마다 괜히 맘이 뭉클해요. 기억난 김에 아줌마 칭찬글을 올려야 겠어요^^;; 예, 그렇게 되겠죠? 방금 새로운 버스 노선을 발견하고 좋아하는 중이랍니다.

세실 2011-01-30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뭐래도 전 공지영 팬입니다. 그녀의 아픔을 감싸주고 싶었어요. 그래야만 할꺼 같아서요.....
그녀의 이야기였군요.

blanca 2011-01-30 12:59   좋아요 0 | URL
세실님, 공지영 팬이셨군요. 저도 잘 몰랐을 때는 그저 잘 읽히고 재미가 있다, 이 정도로 그녀의 글을 생각했었는데 과거의 아픔들을 알게 되니 또다르게 보이더라구요. 그녀에게는 글이 세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생계수단이기도 하다는 면. 아픔을 뚫고 나온 절절함. 이런 것들. 그리고 트위터에서 가끔씩 날려주는 날것의 말들도 그렇고요.

stella.K 2011-01-30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별 세개군요.
하긴 요즘 작가 재미없더라구요. 고만고만한데 상을 준다는 게 쉽지 않은 것 같아요.(너무 심했나...ㅜ)
공지영은 제 취향은 아닌데 그녀가 이제 이상문학상을 받았다는 게 새삼스럽더라구요.
이건 김연수 보다 늦은거라 더하더라구요.
작가로서 존재감은 공지영이 먼저인 것 같은데, 비교할건 못 되지만
김연수는 이제야 꽃을 피우는 것 같고, 공지영은 그전부터 꽃이 피우긴했는데
잘 몰라본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 들더라구요.

blanca 2011-01-30 12:56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말씀 잘 해주셨어요. 제가 별점을 잘못 매겼어요--;; 죄송합니다. 네 개를 입력한다는 게 세 개를... 이상문학상은 공지영 작가가 참 늦게 받았죠. 과거 이상 문학상 수상작품들을 보니 참 흥미롭더라구요.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도 보이고. 최근 몇 년간 재미가 좀 덜해진 것 같긴 해요. 다 못 읽은 경우도 있었으니까요. 이번 것은 잘 읽히고 재미도 있었어요. 김연수 작가는 상을 참 많이 받았더라구요. 저번에 한겨레에서 보니가 문학성에서 아주 높은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고요.

노이에자이트 2011-01-30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김숨의 소설 '투견'읽어보셨어요? 기분이 참 묘한 소설이에요.식용견 농장 이야긴데...음산하기도 하고...

blanca 2011-01-31 22:23   좋아요 0 | URL
신형철의 평론집에 소개된 걸 보았어요. 그것만 읽어도 정말 음산하던걸요. 김숨이라는 작가 저력이 있는 것 같아요. 나오는 작품마다 놀라워요.

cyrus 2011-01-30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번에 처음으로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어보게 되었는데요,,
이 상의 권위를 어느 정도 알겠더라구요. 원래 저도 스텔라님처럼
한국소설 잘 안 읽는 편인데,, 제 생각이지만 우수상 작품들도 대상 못지 않게 좋더군요.
왜 이상문학상 작품집이 많이 읽혀지는지 알게 되었어요.


blanca 2011-01-31 22:24   좋아요 0 | URL
시루스님, 저도 요 몇 년 간은 식상하다, 지루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올해는 정말 좋은 작품 일색이더라구요. 역시 기성작가들의 힘일까요? 올해는 신인이 한 명 정도밖에 안 보였어요.

무해한모리군 2011-01-31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황순원문학상작품집을 읽고 있어요. 신선했습니다.. 이상문학상 작품집은 공지영이라는 이야기를 듣고(사실 그닥 선호하는 작가가 아니라서.. 하긴 제 또래가 공지영을 선호해요 한다면 그 친구가 다소 특이한 거겠지요 ^^;;) 사지말까 생각했는데.. 읽어보고 싶네요. 연휴때 한번 도전해봐야겠어요.

blanca 2011-01-31 22:25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 황순원문학상작품집 재미있어요? 저는 지금 책 다 떨구고 휘모리님 추천하신 만화책 주문할 생각에^^ 신나 있어요. 공지영 작가도 이제 나이가 제법 들었죠. 386세대라는 수식이 예전에는 젊음으로 통했는데 그렇게 되버렸네요.

프레이야 2011-01-31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골목이 아니라, 글목!
어감이 좋으네요. 예전엔 그저 그랬는데 갈수록 느낌이 좋은 작가에요.
지리산행복학교를 찜해놓고 있어요.

blanca 2011-01-31 22:27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지리산행복학교 사인회 하러 나온 공작가를 교보에서 봤답니다. 저는 예전 상사가 '봉순이 언니' 읽어 보라고 해서 참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요. 나오는 족족 신간을 챙겨 봤던 시절도 있었는데 요새는 좀 심드렁했었어요. <맨발로 글목을 돌다>는 줄을 많이 긋데 되더라구요.

마녀고양이 2011-01-31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긴 한동안 참신해야 한다는 강박증, 우리나라 문학계를 지배하는 듯 했어요.
이번 이상 문학상 작품집 좋은가 보네요. 방금 사이러스님 서재에서도 보고 왔는데.... ^^

블랑카님 이사 잘 했지만, 좀 외로운가 봐여? 곧 내 집처럼 될거예요~
분홍공주님 유치원 잘 알아보셨나요? 어제가 막바지 추위였대요.
즐거운 설 연휴 되세요.

blanca 2011-01-31 22:29   좋아요 0 | URL
그러셨어요? 전 집에 정이 많이 들었나 봐요. 오늘도 지나쳐 오는데 불쑥 들어가 보고 싶어지더라구요. 오시는 분들도 인상도 좋고 그러셔서 행복하게 잘 사시겠지만. 저는 이상한 욕구가 예전에 살던 집들을 어떻게 바꿔서들 사시나 한 번씩 방문해 보고 싶은 충동을 가끔 느낀답니다. 신혼때 살던 집도 너무 궁금하고.ㅋㅋ 마고님도 잘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