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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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안 풀리는 수학문제의 해답지를 보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스무 살에 뜰 무지개를 생각했다. 스무 살에는 도저히 서른 이후의 나를 상상할 수 없었다. 서른까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면 죽어 버릴 거라던 친구와의 우정은 일 년을 넘지 못했다. 그 아이의 얘기를 들으며 지금 찾을 수 없는 그런 것들이 그 때까지 해답을 품고 있을 리가 없다고 조용히 뇌까렸다.  

서른 하고도 몇 년이 흐르고 이제는 내가 마흔도, 쉰도 심지어 여든도 될 수 있음을 수긍한다. 때로는 저만치 뛰어가버린 내가 지금의 나를 물끄러미 관찰하고 있기도 하다. 무지개를 타고 싶다고 얘기하며 미미인형을 안고 잠든 아이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미래이고 나중에는 한없이 그리워할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잠재태다. 이제 숨쉬고 바라보고 느끼고 때로 분노하는 순간들이 눈물겹게 소중하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커피 머그잔을 텅 내려놓는 저 아가씨는 언젠가는 자기 팔에도 검버섯이 피고, 혈압약 때문에 오줌이 자주 마려워져 커피도 조절해서 마시게 되리란 걸, 인생에 갑자기 속도가 붙고 그러다 보면 인생이 어느덧 훌쩍 지나가버려 정말로 숨이 가빠진다는 걸 알지 못한다고.
                                                                                                                                                                            -p.225~226 

 

<중략> 불현듯 아이스크림 가게의 어린 소녀들이 부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디를 건네는 여종업원의 지루한 눈빛 뒤에 엄청난 열망과, 엄청난 욕망과, 엄청난 낙심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런 혼란이, 그리고 (그들을 더욱 지치게 만드는) 분노가 그들 앞에 놓여 있었다. 오, 그들은 무엇이든 끝나기도 전에 책망하고, 책망하고, 또 책망하곤 또다시 지쳐버릴 것이다.
                                                                                                                                                                               -p.250 

뉴잉글랜드 지역의 작은 해안마을 크로스비를 배경으로 중학교에서 수학을 삼십이 년 가르친, 결코 사과하는 법이 없는, 또 아무도 감히 눈물 흘릴 거라고 상상할 수 없는 올리브 키터리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지역주민들의 삶을 열세 편의 짤막한 연작 형식의 이야기들로 그려내고 있다. 올리브의 남편으로 약사인 헨리 키터리지의 햇살 이른 아침 안온한 그만의 공간인 약국으로의 출근 장면의 아름다운 묘사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사춘기 외아들 크리스토퍼가 족부전문 의사가 되어 결혼과 이혼, 재혼하는 과정, 헨리의 뇌졸중 투병, 올리브의 황혼의 사랑으로까지 전개된다. 각각 독립된 이야기처럼 펼쳐지는 단편들은 지역 주민들의 삶과 애환을 그들의 시점과 각각 올리브의 시점에서 다양하게 변주하며 긴밀한 연결고리를 갖는다. 인간의 삶을 단편적이고 일방적으로 다루기 쉬운 소설적 허구의 맹점을 입체적이고 종적 횡적으로 섬세하게 터치하게 되는 구성적 장점은 작가의 예리한 시선이 하찮고 반복되는 일상들을 각개격파하는 필력과 조우하여 놀랍도록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낳는다. 누구나 경험하는, 하지만 의식의 표면에 언어로 조립하여 감히 떠올릴 수 없는 것들을 마주칠 때는 정말이지 이 작가가 신기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묘한 의구심까지 생긴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몇 해 전, 충치를 때우면서 치과 의사가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턱을 살며시 돌리는데, 외로움이 너무 깊어서인지 그것이 마치 죽도록 깊은 친절인 것처럼 느껴져 올리브는 샘솟는 눈물을 숨죽이며 삼킨 적이 있었다.
                                                                                                                                                                                 -p.403 

올리브 키터리지가 매력적인 것은 그녀가 사랑을 느끼게 되는 남자 앞에서 자신의 커다란 등이 보일 것을 걱정해 자신이 마치 고래 같다고 느끼거나, 되바라진 며느리가 얄미워 그녀의 속옷과 신발을 몰래 훔쳐내어 던킨도너츠의 화장실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사과하는 법이 없다고 퉁박을 주는 헨리 앞에서 " 이렇게 지랄맞은 마누라라서 진짜 미안해!"라고 외쳤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구린 인간(부시를 연상시킴)을 뽑았다,고 분노하며 "이젠 끝이야"라고 외쳐댔던 남자에게 '언젠가'는 다른 모든 심장처럼 멎을 심장을, 그 '언젠가'를 지워버리고 다시 느끼고 사랑을 갈구하는 이른넷 할머니의 모습, 지쳤지만 여전히 파도를 느끼는 그녀의 모습은 나이들어가고 열정과 생의 의지, 활력을 조금씩 반납하며 존재를 갉아먹어가는 그 허망함에 대한 삶, 생의 작은 승리를 보여주는 것만 같아 눈물난다.  

나는 이제 여든의 나를 생각한다. 삶의 모든 희로애락을 초월한 척하며 느긋이 젊은 사람들에게 조언이랍시고 잔소리와 우는 손리를 던져 대고 "요즘 젊은 것들이란!"를 외쳐대며 은근히 그들의 젊음과 남은 시간들을 시샘하며 "나를 봐달라."고 애걸하는 대신  

조금은 주책맞아도 들이닥치는 파도를 반갑게 조금 머뭇거리는 척하며 맞아줄 테다.  

사람들은 노년의 시기는 고요와 평온의 시기라고 자주 말한다. 나는 이런 태도가 오해를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중략> 흥분을 하면 더 크게 흥분하고, 근심이 있으면 더 깊이 근심하게 된다. 상처는 더 아픈 것 같고, 고통은 더 강렬하며, 눈물은 더 쉽게 흐르고, 즐거움은 더욱더 절정에 이른다. -칼 로저스 <사람-중심 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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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2-27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403쪽의 글은 부끄럽지만 저도 경험한 적이 있었어요. 제 치과의사의 손은 따스하기까지 하더군요.
전혀 모르던 작가였는데 블랑카님 덕분에 알게되었네요. 남은 한해도 건강하시고 부지런히 읽고 쓰시는 모습 새해에도 여전히 보여주시리라 믿습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blanca 2010-12-28 21:37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도 그런 경험이 있군요. 저도 있어요. 잊고 있었던 느낌이었는데 여기에서 만나네요. 반딧불이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역사 쪽으로 뻗은 반딧불이님의 독서의 길이 새해에도 시원하게 쭉쭉 뻗어나가기를 바랍니다.

다락방 2010-12-27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제목만 보고 혹시 [일곱번째 파도]의 리뷰인가 싶어 들어와 봤는데 오, 올리브 키터리지 군요! 이 책 드디어 읽으셨군요! 별 다섯을 보고 제 마음이 다 흡족해요. 이 책 정말 좋지요? 포스트잇 붙인 곳을 저는 지금도 가끔 꺼내어 펼쳐보곤 해요. 며칠전에 깐따삐야님이 쓰신 리뷰에서도, 그리고 blanca님의 리뷰에서도, 제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인용하신 걸 보고, 역시 각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은 다르구나 하는걸 새삼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다른 부분들에 밑줄을 그어도 이 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만나네요.

이 책 정말 좋았어요, 저도. 가끔 꺼내어봐도 후회 없는 책이에요. 아, 잠들기전에 이 리뷰를 읽어서 무척 좋아요!

blanca 2010-12-28 21:41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저는 사실 이 책이 좋다는 말에 큰 기대 없이 읽었기에 더 화들짝 놀랐답니다. 정말 와우! 라는 말이 절로 나오더라구요. 퓰리처상을 주는 작품은 이유가 있구나, 싶었구요. 저는 참 이상하게요. 마지막에 올리브와 그의 늙은 남자친구가 아이를 때린 일과 성장한 자식들에 대한 서운함을 나누는 대화 부분이 참 와닿더라구요. 소설을 읽으면서 자신을 이처럼 돌아보게 된 경험은 정말 처음인 것 같아요. 엘리자베스들은 다 글을 잘 쓰나 봐요^^;; 저는 이제 다 정리하고 권해주신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녀고양이 2010-12-27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브 키터리지 너무 괜찮다면서요?
나두 책장에 꽂혀있어서, 지금 때만 노리는 중인데...
아아, 거기다 칼 로저스의 <사람-중심 상담> 이야말로, 읽으려고 벼르고 벼르는 책인데
블랑카 님이 먼저 읽었군요. 아하하. 역시.

blanca 2010-12-28 21:42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있어요? 그럼 당장 읽으셔용! 재미있고 감동적이라는 진부한 추천을 드립니다. 칼 로저스는 아기 낳고 대화법 모임을 엄마들이랑 하다 읽게 되었어요. 전반부는 정말 눈물날 만큼 감동적이었는데 후반부는 졸리더라구요--;;

cyrus 2010-12-28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에 눈길만 주고 있었는데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blanca 2010-12-28 21:43   좋아요 0 | URL
cyrus님 꼭 읽어 보세요. 연말 독서용으로 제격이랍니다. 마음이 훈훈해지고 삶이라는 것에 조금 진지하고 조용한 되새김질을 할 수 있게 한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어요!

비로그인 2010-12-28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의 두 문단을 여러 번 반복해 읽느라 리뷰를 제대로 읽지 못했네요.
문체는 비록 다르더라도 문장 안에 전혜린도 있고 오정희도 있는 듯해서 계속 읽게 되는군요^^

blanca 2010-12-28 21:45   좋아요 0 | URL
후와님, 전혜린과 오정희는 제가 참 좋아하는 작가들이라 움찔하네요. 설마요--;; 전혜린, 하면 저는 고등학교 때 빨간표지로 읽었었는데 독서로 깊어진 눈동자,라는 말이 기억에 남아요. 오정희는 <유년의 뜰> 단어 정리를 하기도 했었는데. 다 옛날 얘기가 되어 버렸네요. 댓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양철나무꾼 2010-12-28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홀~
이 책이 이런 책이었군요.^^

여러분들의 리뷰에서 봤는데,
다락방님의 말씀처럼 각자가 다른 것을 보고 읽어낼 수 있구나...하는 걸 깨닫게 됩니다.

저도 그럴 수 있을까요?
들이닥치는 파도를 조금 머뭇거리는 척 하며 맞아줄 수 있을까요?

blanca 2010-12-28 21:47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저도 하도 좋다고 해서 몇 번이나 서점에서 보다가 살까 말까 망설이다 여기에서 주문해 버렸어요. 기대도 하지 않았고 그냥 선전만 요란한 책이 아닌가 했는데 정말 좋더라구요. 양철나무꾼님이라면 가능할 것 같아요. 저는...요즘 제가 뭘 할 수 있나, 무엇을 원하나,에 대한 답이 안 나와 참 답답하답니다. 이 문제가 해결이 안되면 저는 회한의 파도를 맞을 것 같아요.....

like 2010-12-28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지난 주말에 올리브 키터리지 끝냈어요. 좋은 책이지만 좀 더 나이들어서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제서야 빨강머리 앤의 마리라 아주머니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올리브 키터리지 부인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선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 같아요.

blanca 2010-12-28 21:49   좋아요 0 | URL
like님 똑같은 책이라도 감상과 느낌이 다를 수 있지요. 지난 주말에 이 책 읽으셨던 거예요? 저랑 같이요^^;; 그런데 <빨간머리 앤> 얘기하시니 갑자기 막 읽고 싶어져서 어쩌요? 잊고 있었어요...저도 어릴 때는 마릴라가 괴팍하고 냉랭한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최근에서야 얼마나 마음이 따뜻하고 외로운 사람인 줄 알게 되었어요.

깐따삐야 2010-12-29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좋죠? blanca님의 리뷰 덕분에 앞으로 더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게 되실 것 같아요.

blanca 2010-12-29 21:49   좋아요 0 | URL
깐따삐야님! 정말 완소였어요. 소설에 대한 열망이 다시 되돌아올 만큼. 눈물나더라구요. 깐따삐야님 리뷰 덕택이지요.

비로그인 2010-12-29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 그냥..
책에 관해 쓰신 글을 읽는 느낌은 조금씩 읽어 내려가는 순간 얼른 뛰어가서 책이라도 사와야 할 듯한..
blanca님 멋져요~ ^^


blanca 2010-12-29 21:49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이 추운데 눈 맞으며 사 오세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답니다.^^

꿈꾸는섬 2011-01-04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리뷰는 언제나 좋아요.^^
올리브 키터리지, 정말 좋지요.

blanca 2011-01-04 16:08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덕택입니다. 저엉말 좋았어요. 저 이 책 안 읽으려 했는데 님 리뷰 읽고 당장 주문했더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