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릇 더 먹을래?
정말 그래서는 안되는 곳이었는데 나는 육개장에 밥을 말아 훌훌 마시고 있었다.
미안하다, 맛있네. 좀 더 줄래? 

죽마고우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갓집 나와 그녀가 나눈 대화다.
퉁퉁 부은 눈은 나의 어처구니없는 식욕에 살짝 웃으려 한다.
그래서 나는 상갓집에서 육개장 두 그릇을 얼큰하게 잘 먹고 나왔다.  

   
 

"말하자면," 그는 담배를 피우며 말을 계속했다. "체호프는 죽었지만 웨이터의 고민은 어떻게 바닥에 있는 뚜껑을 줍느냐 하는 거지."  

...중략...

"다시 말해, 인생에는 중요한 일과 사소한 일이 함께 섞여 있어. 허나 우린 항상 사소한 일만 하고 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사소한 일들 중에 뭐가 중요한 일인지 깨닫지 못하는 거야."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빅토리아의 발레>에서 특별 사면으로 석방된 소위 대도인 베르가라와 말을 훔친 죄로 복역했던 젊은 청년 앙헬이 피노체트 정권하에서 부정축재를 한 칸테로스의 금고를 터는 장면에서 나눈 대화다. 그들은 뜬금없이 레이먼드 카버가 체호프의 임종을 다룬 최후의 단편 <심부름>을 얘기한다. 도둑들은 체호프를 '위대한 체호프'라고 정정하여 부르기로 한다.

 

독일의 휴양지 호텔에서 체호프가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와중에 담당의는 샴페인 세 잔을 한 웨이터에게 주문한다. 새벽에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채 가수면 상태에서 불려온 그는 상황파악을 못한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체호프는 한 잔을 다 마신다. 정말 오랫만이라며. 그리고 숨을 거둔다. 그의 희곡으로 연기를 하기도 했던 아내 올가는 이윽고 의사를 떠나 보내고 의외의 방문객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그 젊은 웨이터였다. 입성이 몰라보게 달라진 그 웨이터는 마치 그 전의 자신의 흐트러진 모습을 사과라도 하듯 노란 장미 세 송이를 꽂은 화병을 들고 온다. 그리고 저절로 뽑혀 바닥으로 굴러간 샴페인의 코르크 마개를 줍지 못해 괴로워한다. 그는 코르크 마개를 줍고 싶었고 주워야만 했다. 바로 그게 그의 일이었으니까. 장의사를 불러달라는 올가의 부탁에 그는 성심성의껏 마치 장의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듯이 온몸에 심부름의 하중을 실어 걸어간다. 체호프가 죽었다는 사실보다 그 웨이터에게는 투숙객이 웨이터에게 부탁한 심부름에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듯 행동한다. 실제로도 이 단편에서는 체호프의 죽음보다는 웨이터의 직분 수행에 아웃포커스가 된다. 카버는 삶이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 주려는 듯하다. 체호프를 사랑해 마지 않았던 그지만 여기에서 체호프의 임종은 하나의 배경으로 뭉개진다. 사람들은 1년 뒤 죽은 카버가 당시 암투병중이었던 것을 떠올려 이 작품을 죽음에 대한 얘기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삶의 그 자잘한 파편들에 대한 얘기로 읽힌다. 그는 삶에 대해 여전히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체호프처럼.

<빅토리아의 발레>에서 금고털이를 하는 장면에서 주인공들이  카버의 웨이터를 얘기하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무엇이 중요한 일인지 궁극적으로 판단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 아닌 것 같다. 삶이 하는 것이다. 죽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나도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온다. 먹고 싸고 화내고 울고 기뻐한다. 그건 때로 진저리나지만 삶과 생명의 본질일런지도 모른다. 

육개장이 하필 그 슬픈 장소에서 너무 맛있게 먹혔던 변이 이렇게 길어지고 말았다.


댓글(19)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0-09-16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은, 육개장 두그릇 먹은것에 대해서 이토록 아름다운 글을 쓰시는군요! 저처럼 아침먹고 몽쉘통통 먹고 우유를 마시고 삼계죽에 치즈를 넣어 먹은 후에 캬라멜 마끼아또를 마신다면, 그때는 대체 어떤 글을 쓰실까요? 제가 먹은 것 모두를 그대로 드리고 싶네요.

blanca 2010-09-16 15:27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ㅋㅋㅋ 삼계죽에 치즈 넣으면 안느끼하나요? 저 카라멜 마끼아또가 위에 한 삼천 잔은 있을 겁니다. 라떼로 선회했어요. 댓글이 너무 귀엽고 이뻐용. 남자친구가 생기면 그 남자는 다락방님 애교에 쓰러질듯 ㅋㅋ

비로그인 2010-09-16 23:25   좋아요 0 | URL
blanca님. blanca님은 저런 자리의 객이 아닌 적이 있으셨을까요? 그냥 궁금해집니다. 제가 분위기 파악 못하고 함부로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만일 저라면 어떤 객이 저렇게 육개장을 두 그릇 가볍게 먹어 주고, 이런 글을 쓴 것을 봤다면 마음이 더 편해지고 힘도 났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음. (분위기 파악 쪼금만 더 못하면요.) 그리고,

(다락님..꼭 섞이기 전의 모습 그대로 드려야 할 것 같아요..만약 그러지 않으면 blanca님 피자 만드신거라고..생각함 안되자나요.^^)

blanca 2010-09-17 19:52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제 친구도 그렇게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네요. 지금은 그 친구 아주 행복한 일을 앞두고 있답니다. 하늘에 계신 친구 아버님도 더없이 행복해하실 것 같아요. 피자요?ㅋㅋㅋ

하이드 2010-09-16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어제 밤을 새고, 배고파서 아침(?) 밥을 먹으려다 귀찮아져 라면을 끓여야지 생각하고 자고 낮에 깨니 더 배가 고파졌어요. 라면을 끓여서 먹고 나니 양이 너무 적은듯하여 국물에 밥을 말았고 ... 많이 ... 라면을 반 개 더 끓여 라면 국물에 만 밥 위에 얹을 때 즈음에는 막 먹은 라면 하나가 드디어 배가 불러져버리고 말았지요.

그래서 두그릇을 해서 한그릇을 버렸다는 일상의 사소한 슬픈 이야기.. 에요. 음..

blanca 2010-09-16 22:30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도 라면 좋아하시는군요. 저는 사발면이 간식입니다. ㅋㅋㅋ 하이드님 요새는 그 맛난 스파게티 안 만드세요? 그 때 따라 만들어서 잘 먹었었는데 간단하게 맛있게 만들어 먹는 요리 레시피가 참 요긴했어요.

마녀고양이 2010-09-16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생명력이 워낙 강한 존재니까 말이죠.
그리고 왜 사는지 조금이나마 깨닫고 죽어야지, 그냥 홀랑 죽으면 고생하고 억울해서 승질나여~ ^^

육계장 맛났어여? 나두 먹고 싶다. 단, 친구 아버님 장례식장에서는 말구.

blanca 2010-09-16 22:31   좋아요 0 | URL
저도 억울해서 좀더 많이 알고 죽으려고 하는데 갈수록 미궁입니다. 육개장은 정말 맛있더라구요. 당시 이천에서 서울까지 올라오고 일도 좀 보느라 허기가 져서 너무 많이 들어가더라구요. 친구도 피식 웃어버리더라구요 ㅋㅋ

비로그인 2010-09-16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지고 있는 책에 따르면 체호프는 독일 바덴바일러의 한 호텔에서 말씀하신 대로 의사가 주문한 샴페인을 마시고 독일어로 "나 죽는다(Ich sterbe)"라고 말하고 나서 "샴페인은 정말 오랜만이군"이란 말을 덧붙이고는 곧바로 사망했다고 나와 있군요.

죽음을 사소하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고인이 마지막으로 대접한 육계장(샴페인보다 낫네요)을 맛있게 먹어준 일 또한 사소하다고 할 수는 없지 싶은데요. 허기를 통해 고인이 마지막 가는 길에 함께하셨으니까요...

blanca 2010-09-16 22:31   좋아요 0 | URL
예..참 이상한 게 그런 저의 행위가 친구한테 약간의 위로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 후와님, 어떤 책인가요? 마리아 슈나이더의 책인가요? 궁금해집니다. 죽는 순간 모국어가 아닌 독일어를 얘기했다는 것도 참 인상적이네요.

비로그인 2010-09-17 13:18   좋아요 0 | URL
어, 그냥 체호프 단편집에 실린 연보에서 본 건데요...
뒤의 말은 러시아어로 했다는 설명도 있고요...
저도 독일어로 했다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나 죽는다"라고 말하고 죽는다는 게...

기억의집 2010-09-16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영어로 카버의 그 심부름인가 하는 소설 읽으신 거에요? 와우, 놀라워요. 11월인가 도착한다는 소설은 벌써 도착했네요. 전 요즘 하루키한테 삘 받아서 영어 많이 읽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 작심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지만.

전 육개장을 초상집에서밖에 안 먹어요. 외식을 할 때도 육개장만은 안 먹거든요. 이게 트라우마 같아요. 전 아빠 장례식이후 육개장이 그렇게 먹기 싫더라구요. 젊은 시절에는 그 알큰한 맛에 반해 어딜가도 육개장만 시켜 먹었거든요. 제목이 육개장이길래 제일 먼저 장례식이 생각났어요. 혹시나 했는데~~~

blanca 2010-09-16 22:34   좋아요 0 | URL
중고로 상 주문했는데 일반우편으로 우편함에 꽂혀 있더라구요. 단편라서 짧았어요^^;; 책 상태 참 맘에 안들더라구요. 형광펜으로 쭈욱쭉. 하루키 얘기에 사실 저도 필 받았어요. 이중언어 ㅋㅋㅋ 찌찌뿡이에요^^

아, 그러셨군요. 제 글이 기억의집님의 아픈 기억을 건드린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저는 육개장을 어렸을 때부터 참 좋아했어요. 신혼 때 한 번 시도해 보고 실패한 기억 이후로는 제가 만들 엄두가 사실 잘 안 나더라구요.

기억의집 2010-09-17 10:55   좋아요 0 | URL
저는 육개장 좋아해서 몇 번 만들어먹었던 것 같아요. 신혼시절에...기억이 가물가물~~

아, 중고로 구입하셨군요. 책값보다 핸들링비하고배송비가 더 들었죠. 저는 그림책 중고로 몇 번 구입했는데 번번히 배송비(뿔 핸들링비)때문에 열 받은 적 많아요. 얘네는 한군데서 구입해도 책 한권당 배송비와 핸들링비를 다 받더라구요. 무게때문인 것은 이해하는데..핸들링비는 좀 빼 주었으면 좋겠더라구요. 책 상태는 좋았나요? 저는 책도 그지같은 책이 와 가지고...버벅거리는 영어로 상태 굿이라더니 이게 뭐냐? 실망이다, 라고 판매자 등급에 썼더니 미안하다고 다시 보내라는데.... #$%^#$%^ 장난하니? 싶더라구요.

blanca 2010-09-17 20:04   좋아요 0 | URL
상태 완전 구렸어요. 중고는 다시는 안 살라구요. 알라딘에 외서도 많이 들어와 있더라구요. 한 번 주문해 보자,는 경험 차원에서 만족하기로 했어요^^

감은빛 2010-09-17 0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말씀 하신 것처럼 글을 참 기발하게 잘 쓰셨어요!
근데 보통 그런 자리에서는 잘 먹는 사람보면 더 좋아하지 않나요?
잘 먹고, 잘 놀고 왁자지껄 사람들이 떠들어주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던데....

몇 달 전 고모 돌아가셨을 때, 아주 오랫만에 사촌들과 육촌들이 모여서
한껏 수다를 떨고 술을 마셨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blanca 2010-09-17 19:48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지인들이 같이 밤새어주고 왁자지껄 떠드는 것에 대한 의미를 이제야 좀 알 것도 같아요. 그건 무례의 범주가 아니라 죽음의 절망에서 생의 희망으로 유족들을 이끌어 내 주려는 민족적 저의도 숨어 있다고 마음대로 해석해 버립니다.^^

프레이야 2010-09-17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아가신 분의 명복을 빕니다._()_
상가의 국은 이상하게도 맛있어요. 영정이 지켜보시는 아래 그 먹을거리들이 유난히
입에 붙는 건 왜일까요? 사소한 일들을 오늘아침부터 하면서 아무 소득 없어 보이지만
그중에 중요한 일의 아주 초기 조짐이 숨어있었을까요? 오늘하루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요.

blanca 2010-09-17 19:50   좋아요 0 | URL
아, 꽤 된 일이에요. 그 친구는 지금 아이 출산을 앞두고 슬픔도 추스렀어요. 저는 솔직히 결혼식 밥보다 상갓집 밥들이 더 맛있습니다.--;; 되도록 장례식을 꼭 참석하려고 하구요. 프레이야님! 마지막 두 줄 넘 의미심장해요. 무언가 아주 좋은 일이 프레이야님한테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