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 정말 넘 설레. 시험 끝나고도 설레고 크리스마스도 설레고 내 생일도 설레고."

거기에 대고 나의 답은.

"너는 좋겠다. 설레는 게 많아서..."

이런 중년이다. 상상도 못했던 모습이다. 나는 이제 설레는 게 없다. 이건 진짜 나이가 들어야 알 수 있는 감정이다. 원래는 설레는 게 정말 많은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남자 친구를 만날 약속을 하면 일주일을 설레었고 단지 크리스마스가 온다는 것만으로 제주도 여행을 간다는 것만으로 한 달을 그 기대로 살기도 했다. 설사 내가 기대했던 대로 오지 않은 결론일지라도 내가 바라는 최상의 상황을 가정하며 기다리고 기대하는 나날들은 이제 시간 속에 묻혀 버렸다. 계속되는 실망, 좌절의 누적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걸까. 아니면 그냥 사람은 저절로 나이가 들면 그 설렘의 능력이 마모되어 버리는 걸까. 어느 쪽이든 가슴이 아프다. 


불빛을 볼 때마다 가슴이 후둑후둑 소나기 오기 직전의 숲처럼 설레곤 했다. 곁에 있어도 한강만큼의 거리가 느껴지는 현금, 헤어져 있어도 예민한 현 같은 게 당겨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녀, 그 소통의 끈은 미세한 바람에도 오묘하게 떨리는 것처럼 긴장돼 있었고, 영빈은 그 소리를 가슴으로 들을 때 살아 있음의 번뇌와 희열을 오싹하게 실감하곤 했다. 


허망감을 모를 때에는 설렘도 없었다. 설렘이 시작되자 차곡차곡 쌓아온 경력의 켜가 쉬어터진 시루떡만큼도 중요하지 않아졌다.

-<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이렇게 설렘이라는 감정을 예리하게 간파한 작가가 박완서 말고 있었을까. "후둑후둑 소나기 오기 직전의 숲처럼" 설레는 마음. 어떤 전조로 젖기 전의 그 울렁이는 기분. 그러나 그것이 이윽고 지나가고 나면 남는 허망감. 그것들이 연륜과 섞여 퇴적되면 어느새 삶의 기대는 절로 누그러지곤 한다. 그러나 그래서 아무것도 기대하고 설렐 것이 없는 그 나날들이 더 좋은 걸까, 나쁜 걸까. 허망감도 실망도 덜해서 덜 흔들려 편안한 건지, 아니면 그것이 결국 생의 에너지일 텐데 그것이 물러난 자리의 무기력과 무력감으로 바싹 말라버리는 걸까. 아직은 뭔가에 부쩍 설레는 사람이 부럽다. 질투날 만큼.

















올 연말 나를 조금이라도 설레게 할 것은 아마 이 두 권의 책에 대한 기다림일 것이다. 드디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민음사에서 완역으로 출간된다. 이 두 권을 다 읽게 된다면 나는 드물다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완독자가 된다.^^ 2012년부터 김희영 선생님 번역의 민음사 출간 순서대로 읽기 시작했으니 거의 십 년에 걸친 대장정이 되어 버렸다. 십 년에 걸쳐 번역되어 출간되었기에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책은 무엇보다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시간이 파괴해 버리고 붕괴해 버리는 것들의 그 찰나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처절한 복기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읽기는 따라서 시간을 통과하는 일이다. 그 안의 인물들과 내 시간은 겹치고 어긋나고 마침내 노화와 죽음으로 만난다. 


이런 결론을 만나려 설렌다. 찰나의 아름다운 것들은 결국 다 스러진다. 허망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기대하고 기다린다. 그것이 마치 영원히 나의 존재와 삶을 바꾸어 줄 것처럼 그렇게 기다리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과거를 본다. 섣부른 조언, 단정은 하지 말아야지. 그건 알 필요가 없이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나이듦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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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10-25 14: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우 감격! 어느새 분홍공주가 자라서 저래 예쁜 말을 하네요. 블랑카 님의 설렘도 막 전해져옵니다. 완독자가 곧 되는군요. 미리 축하합니다 ^^ 저도 내년엔 잃시찾 완독자를 향해 출발해 볼까 해요. 언제 다 읽나 ㅎㅎ

blanca 2022-10-25 16:52   좋아요 1 | URL
말도 마세요. 둘이 싸우는 것 듣더니 남편이 여중생 두 명이 싸우는 수준이래요. 이게 문제가 자꾸 앞의 내용을 잊어버려서 연결이 안 됩니다. 프레이야님은 한꺼번에 다 구비해 놓으시고 한꺼번에 읽으시길 추천합니다.

하이드 2022-10-25 15: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매일 날씨가 너무 좋아서 설레요. 2023년 다이어리 쓸 생각에 설레고요. 고양이들 보면 설레고요. 이 감정이 설레임인가 싶긴한데, 하루에도 몇 번씩 작은 거품이 보글보글거려요. 거품이 크게 팡팡 터지는건 도서관 다녀올 때!

blanca 2022-10-25 16:53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 지금 이 순간 제일 부럽습니다. 그게 사는 거죠. 저는 요새 음, 설레는 게 1도 없어요. 먹고 싶은 거 앞에 놓고 설레었는데 이제 살 빼기로 하니 그 낙도 없어져버렸어요. 다이어리는 음, 저도 지금 아주 신중히 고르고 있답니다. 구입하셨나요?

하이드 2022-10-25 17:37   좋아요 0 | URL
네, 9월 1일에 ㅎㅎ 올해도 호보니치 다이어리 씁니다.

blanca 2022-10-25 17:38   좋아요 0 | URL
저 안 그래도 호보니치 보고 있는데요. A6 너무 작지 않나요? 안 써봐서 계속 망설이는 중이에요.

하이드 2022-10-25 20:11   좋아요 1 | URL
저 A5, A6 둘 다 써요. 오리지널은 독서노트로 커즌은 모닝페이지와 회고로요. 글쓰기에는 커즌이 낫습니다.

blanca 2022-10-25 21:27   좋아요 0 | URL
아, 그렇게 이원화하셨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scott 2022-10-25 15: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불-영 에서 출간된 *주년 기념 판본별로 읽었는데 드디어 마지막 한국어판으로 되찾은 시간으로 마무리 할 수 있게 되었네요
연수옹도 잃시찾 완독 못하셨는데
블랑카님 대단 👍

blanca 2022-10-25 16:54   좋아요 0 | URL
헉, 그렇다면 영어로 읽으셨다는 이야기? 이미 완독하신 분 앞에서 저야 뭐 ^^;;; 이렇게 두 권 놔두고 설레발 치다 정작 마지막에 무너지는 것 아닌가 싶네요. 그런데 마지막 대목 돌아다니는 것 보니 감동의 도가니라 꼭 완독하리라 다짐해봅니다. 김연수 라디오 들으셨나요? 정말 너무 좋았어요.

새파랑 2022-10-25 1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드디어 출판되는군요 ^^ 전 이제 밀린것만 읽으면 되겠군요 ~!!

blanca 2022-10-25 21:24   좋아요 1 | URL
아, 십 년에 걸친 대장정이라니 감격스럽네요.

stella.K 2022-10-25 1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왜요, 잘 생각해 보시면 크진 않아도 소소하게 브랑카님을 설레게 하는 게
있을 겁니다. 벌써 찾으셨네요.
그러고 보니 막상 저도 말하라고 하면 좀 당황스럽긴 하네요.ㅎ
저는 요즘 코로나 땜에 만나지 못한 사람을 살살 만나고 있는데 이게 넘 좋더라구요.
11월 초에 친구 모임에 20년 넘게 못 만났던 친구가 합류하기로 했는데
벌써부터 설레더군요. 주문한 책이 도착하면 그것도 설레잖아요.
정말 분홍공주가 벌써 중학생이 됐나요? 세월 정말 빠르네요.
잃찾사 완독을 앞두고 있다니 대단하네요.
책 보면 사고 싶은 생각이 들긴하는데 잘 읽을지 모르겠고 쌓아놓은 책이 많아
매번 비껴가네요.ㅠ

blanca 2022-10-25 21:26   좋아요 1 | URL
아, 스텔라님, 제가 좀 침체기(항상 침체기긴 했지만 ㅋㅋ)인지 요새 좀 그렇네요. 아, 사람들 만나시는 군요. 20년 만에 만나는 친구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올해도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도 믿기지 않아요. 남은 두 달 행복하게 잘 보내 보아요. 저도 설렘을 좀 장착할 수 있기를요.

라로 2022-10-26 04: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박완서 선생의 글을 정말!!! 그나저나 우리 분홍공주 그런 말 하는 거 보니까 이쁘게 잘 자라는 거 같아요. 우리 초록왕자(ㅋㅋㅋ 해든이;;;)랑 언제 만나야 하는뎅. ㅎㅎㅎㅎㅎ

blanca 2022-10-26 09:22   좋아요 0 | URL
ㅋㅋ 아이들 크는 것 보면 정말 지나가는 시간을 실감해요. 어릴 때 모습이 가끔 사무치게 그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