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쪽에 달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솔직히 잘 읽히는 책은 아니다. 다이나믹한 서사도 없고 오직 화자인 마르셀의 기억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 시간, 주변 인물, 장소를 종횡무진 누비는 이야기는 그 방대한 스케일과 심오한 깊이를 제대로 따라가기도 쉽지 않다. 한 마디로 일단 시작했더라도 순간순간 포기하고 싶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책이다. 후일담이 궁금해서 독서를 이어가게된다기보다는 프루스트의 그 장황하지만 투명하고 유려한 문장들이 그리워서 돌아가게 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셀은 한 마디로 논쟁적인 화자이자 주인공이다. 특히 9권에서 발베크에서 만나 반한 소녀 알베르틴을 파리의 집으로 데려와 '갇힌 여인'으로 만들어버린 이야기가는 언뜻 가학적으로 비치기까지 한다. 하지만 표면상 드러난 이런 극단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에서 한 소녀를 향한 집요한 열정, 의심, 질투, 양가 감정에 대한 묘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때 자신이 반했던 상대에게 가졌던 차마 드러낼 수 없었던 어두운 감정의 기류들을 기민하게 포착한 절창이다. 이 팔자 좋은 부잣집 청년의 유유자적한 생활 속에서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내는 대목이 이것이다. 


특히 알베르트와 거리에서 들려오는 각종 상인들의 소리를 통해 연상해내는 각종 감각을 둘러싼 연상 작용은 하나의 거대한 유희이자 화려한 축제의 현장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실제 그 장소에서 그 소리들을 들으며 이 연인들의 흘러넘치는 관능을 지켜보는 경험을 준다.


청각이라는 감미로운 감각이 우리에게 이 모든 거리의 동반자들을 데려다 주면서 온갖 선을 다시 긋고, 또, 지나가는 행인들의 빛깔을 보여 주면서 다양한 모양을 그린다. 이제 여성적인 매력을 맛볼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차단하며 내려졌던 빵 가게와 유제품 가게의 철제 셔터가, 지금 출항 준비를 하며 투명한 바다를 건너면서 여자 종업원의 꿈 위를 달려갈 배의 도르래처럼 가볍게 들어 올려졌다. 사람들이 들어 올리는 이 철제 셔터는, 아마도 내가 다른 거리에 살았다면 유일하게 기쁨을 주는 소리였을 것이다. 내가 사는 거리에는 수많은 다른 소리들이 나를 기쁘게 했고, 나는 그중 어느 하나도 늦잠 때문에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 p.187>


이 방대한 작품이 완벽한 내적 일관성를 보이는 건 아니다. 때로 앞에 제시했던 정보와 뒤의 그것은 모순을 보이기도 하고 사소한 실수와 오류들은 그것을 연구한 학자들에 의해서도 종종 드러났다. 특히 화자인 마르셀은 그 자신이 이 이야기 속에 들어가 있으면서 등장인물들의 내면과 삶을 수시로 드나드는 다소 논쟁적인 시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것 또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묘미다. 작가 베르고트의 사망도 그러하다. 마르셀은 그의 삶을 총체적으로 분석하고 심판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과도 무관한 이야기가 아니기에 귀를 기울여볼 만하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마치 이전의 삶에서 맺은 의무의 무거운 짐을 가지고 이 삶에 들어온 것처럼, 우리 삶의 모든 일이 진행된다는 사실 뿐이다. <중략> 현세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이 모든 의무는, 선의와 신중함과 희생에 근거하는 다른 세계, 현세와는 완연히 다른 세계에 속한 듯 보이며, 우리는 그 다른 세계에서 나와 어쩌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기 전에, 우리 몸속에 미지의 법칙을 새긴 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우리 몸속에 그 가르침을 지니고 있어 복종하는 그런 법칙의 지배 아래 다시 살기 전에, 잠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 p.310>


여기에는 프루스트의 중요한 내세관이 투영되어 있다. 심지어 우리의 '업' 사상과도 겹친다. 과거의 업을 가지고 현생을 살고 결국 그것에 대한 보상은 다른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기독교적인 세계관과의 접목이 인상적이다. 


'갇힌 여인' 알베르틴은 거짓말과 위장을 하나씩 마르셀에게 들키며 이제 그의 삶에서 사라질 준비를 한다. 이제 어떻게 그녀의 퇴장이 이루어지는지를 목격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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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0-11-26 0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말만 해놓고 ‘스완의 사랑’까지 겨우 읽었어요. 펭귄으로 시작해서 민음사 번역으로 바꿨는데 블랑카님은 어느것으로 읽으시나요?

blanca 2020-11-26 08:44   좋아요 1 | URL
민음사요! 나오는 순서대로 천천히 읽으니 완독이 가능할 것 같아서요. 판형도 좋고 여러모로 추천합니다.

단발머리 2020-11-26 08: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진짜 그러고 보니 책을 링크하지 않으셨네요? ㅎㅎ 전 민음사 6권까지 구입만 해놓고 시작도 못 했어요. 그래도 간간히 블랑카님의 <잃어버린...> 리뷰 올라오면 찬찬히 읽으면서 이젠 시작해야지~~ 그런 결심을 하게됩니다^^

blanca 2020-11-26 08:45   좋아요 1 | URL
어머 ㅋㅋ 단발머리님 고마워요. 링크할게요. 언제곤 시작하시면 되죠. 저는 민음사 출간 순서대로 읽는 중이라 포기하지 않게 되네요.

수이 2020-11-26 08: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무조건 존경스러워요 블랑카님, 저는 2권까지만 읽었어요 민음사판으론, 옛 판본으로 6권까지 읽고 포기한 기억 나요. 다시 읽고싶다는 마음이 불끈! 내년에는 저도 시작해봐야겠어요.

blanca 2020-11-26 14:00   좋아요 0 | URL
언젠가는 왠지 읽어야 할 것 같아 민음사에서 새로운 판본으로 번역하는 순서대로 읽어서 오히려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정말 천천히 나오더라고요. ^^;;

moonnight 2020-11-26 09: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존경합니다@_@;;; 민음사판으로(예뻐서) 2권까지 사놓았다가(읽지는 않음-_-) 펭귄에서 수건 준다기에 바꿔서 3,4권 샀어요. 읽지도 않으면서 <그림과 함께 읽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소중히 간직 중=_=;;; blanca님 다시 한 번 존경합니당♡♡♡♡♡♡

수이 2020-11-26 09:17   좋아요 0 | URL
그림과 함께 읽는~ 저도 읽었어요 문나잇님!!!!! 반가워서 ^^

단발머리 2020-11-26 09:54   좋아요 0 | URL
<그림과 함께 읽는...>이란 책이 있군요!!! 너무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문나잇님! 히힛!

moonnight 2020-11-26 10:02   좋아요 0 | URL
앗^^;; 단발머리님^^ 비의도적인-_- 정보에 감사하다 해 주시니 망극^^;;;;;;;

수연님^^ 존경합니다@_@;;; 제게는 사놓고 안 읽은 책인데 역시 수연님♡♡♡♡♡

수이 2020-11-26 10:32   좋아요 0 | URL
간직중 ㅋㅋㅋㅋ 읽으신줄! 우리 내년에는 읽어요! 도전하자!!!

blanca 2020-11-26 14:02   좋아요 0 | URL
존경은 완독을 해야 ^^;; 그리고 제가 워낙 기억력이 안 좋아서 읽은 책도 새롭다는 게 문제죠. 제대로 공부하며 읽으시는 분들 블로그에 가 보니 내용이 완전 생소하더라고요. ㅋㅋ 다 읽었는데도 말이에요. 그냥 졸다 읽다 눕다 하며 줄 긋고. 이게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인 것도 같아요. 남는 게 없다는...

다락방 2020-11-26 1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댓글 읽다가 빵터졌어요. 여기에 읽지도 사지도 않은 인간은 저뿐인가 하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blanca 2020-11-26 14:04   좋아요 0 | URL
이 읽기도 힘든 걸 다 써낸 프루스트에게 놀랄 따름입니다. ^^;; 그런데 소설이 아니라 거의 자전적인 내용인 것 같아요. 자신의 일대기를 치밀하게 세세하게 다 펼쳐놓은...강력추천한다고는 차마 말 못하겠습니다.

다락방 2020-11-26 14:06   좋아요 0 | URL
저 예전에 업무차 은행을 갔는데 저 담당하던 직원분과 대화하다가 전공 얘기 나왔거든요. 그 직원분이 자기는 불문과 전공이라고 하시면서 ‘그런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완독했냐고 물어보진 마세요. 안했어요‘ 하시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불문과라고 하면 다들 그거 읽었냐고 물어본대요. 갑자기 그 생각 났어요. 하하하하하.

scott 2020-11-26 21: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잃시찾‘ 9권까지 달린 블랑카님 대단!
저는 1-3권까지 읽다가 또다시 마들렌 먹는 1권으로 ㅎㅎ 반복 주행~ㅎ
장황하지만 유려한 문장,색과 소리가 풍경처럼 울리게 만드는 묘사는 한국어로 번역되었는데도 그의미가 전해진다는게 정말 대단한것 같아요.

직업없이 유유자적한 마르셀, 코로나 창궐시대에 살았다면 집콕생활을 즐겼을것 같아요.^ㅎ^

blanca 2020-11-27 09:11   좋아요 1 | URL
이 추세대로라면 감히 완독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내년은 지나야 다음 권이 나올 테니까요. ㅋㅋ 오히려 이렇게 천천히 완간하는 출판사 덕에 포기하지 않게 되는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0-11-27 1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언제 완간이 되나 싶었는데

달팽이 걸음으로 슬슬 나오는가 보네요 :>

blanca 2020-11-28 12:51   좋아요 0 | URL
앞 내용 다 잊어버릴 때쯤 나옵니다. 그래서 완독을 할 수 있을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