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값을 아끼는 방법 중 하나는 한국에 아직 발간되지 않은 원서를 아마존에서 주문해서 읽는 것이다. 일단 도착까지 오래 걸리고 읽는 속도도 느려질 수밖에 없다. 영어 공부까지 덤으로 하겠다고 결심한다면 모르는 단어를 모조리 찾겠다,는 일념으로 덤벼야 한다. 번역본이 없으니 모르는 문장은 구글링까지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에너지가 소진되다 보니 차마 다른 책을 주문할 엄두가 안 난다. 책값은 굳고 영어 실력은 는다.
소설읽기의 재미를 잃은 사람이라면 <올리브 키터리지>를 권한다. 소설은 난해하거나 지루하면 아무리 이야기가 훌륭해도 소설 특유의 힘과 매력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면에서 이 책은 훌륭하다. 일단 재미있다. 공감할 수 있다. 외국 작가의 작품임에도 동떨어졌다거나 문화적으로 거리감을 느낄 새가 없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인간 보편의 정서를 묘사하는데 이골이 난 작가다. 누구나에게 벌어질 수 있는 일, 들 수 있는 생각, 오만, 편견, 질투, 비교, 욕망을 그녀 만큼 직관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작가는 이 시대에 별로 많지 않은 것같다. 이를테면 올리브의 남편 헨리를 스쳐 지나가는 불륜의 감정도 그녀의 펜끝에서는 도저히 비난하거나 경멸할 수 없고 오히려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에서 더 나아가 아픈 공감의 감정으로까지 확장된다.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그 모든 놓친 것들을 그녀는 예리하게 포착한다. 그녀의 주인공들은 독자를 단숨에 아군으로 만들어버린다.
사실 [Olive, Again]이라는 제목은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전편의 문을 열었던 헨리가 죽고 홀로 된 올리브는 노년에 재혼한다. 거기에서 또 거의 한 세기가 지나는 동안 그려지는 연작 소설은 전편처럼 올리브를 중심으로 메인 주의 크로스비라는 작은 해안가의 마을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로 엮어진다. 올리브 키터리지는 여전히 괄괄하고 화통하고 유머러스하고 따뜻하다. 그녀를 스쳐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각자의 삶의 난제와 고민과 절망과 그것을 딛고 살아나가는 그 생의 힘에 대한 눈부신 경의가 있다. 이야기는 전편보다 더욱 깊어지고 조금 더 어두워지고 확장된다. 죽음과 상실과 노년에 대한 두려움이 그것이다. 모두 두려워하지만 차마 터놓고 얘기하지 못했던 것들이 이 매력적인 노부인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가 차마 얘기하지 못했던 것들과도 겹친다. 노인요양시설에 가는 것에 대한 공포, 나이듦이 가져오는 자립의 한계, 빈부격차에 따른 소통의 단절, 불륜이 결혼생활에 가져오는 상흔 등 각각의 단편은 근사하게 집약된 삶의 고충의 형상화다. 그럼에도 여전히 삶과 사람들에 가지는 식지 않는 애정의 열정은 올리브 키터리지 특유의 생동감 있는 에너지를 분출한다.
다 읽기도 전에 작가의 맺음말에 이 책을 완성하는 데 기여한 어린 시절 친구들에 대한 고마움에 대한 표현에 괜시리 가슴이 먹먹해졌다. 환갑이 훌쩍 넘어도 내 곁에 남아 이런 감사를 받을 친구가 있다면 그 사람 인생은 얼마나 값진 것이 될까. 나는 그럴 수 있을까 생각하니 잠시 쓸쓸해지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시절 친구는 없는 것 같다. 항상 곁에 있었던 친구는 지금 지구의 반대편 끝에 있다. 여러 모로 올리브 키터리지와 그녀를 만들어 낸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부러워지는 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