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다짜고짜 <명상요가회>라는 동아리에 가입했다. 학생회관에 가보니 꼭 지하 하숙방 같은 분위기의 방에 도인이 반 넘어 된 것 같은 늙은이들이 모여 앉아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여하간 인문대 자연대 공대 사회대 미대 음대 의대 약대 교대 등등등 전 단대를 통털어 그 해 신입생 중에 그 동아리에 가입하겠다고 찾아온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기에, 선배들은 나를 어여삐 맞아주었다. 그런 인기를 누려보기란 난생 처음이었다. <바가바드 기타>를 읽었다고 자기소개를 했더니 모두들 기절하도록 깊은 인상을 받은 모양이었다. 물론 읽고나서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는 이야기는 그래서 짤라먹고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첫 수련이 있었는데 그 수련은 학교 뒷산에 세워진 왠 가건물에서 시작되었다. 아직 초봄이라 대여섯시가 되자 금새 주위가 어둑어둑해졌다. 알게 된지 기껏해야 겨우 며칠 된 사람들과 모르는 곳을 가노라니 무섬증이 확 돋았다. 물론 겉으로는 멀쩡한 척 했지만. 그 가건물은 시멘트에 회색 싸구려 벽돌 (구멍이 두 개씩 뚤린) 으로 지어져 있었는데, 동아리 선배 몇이 갓 제대하고 복학하여 제대로 된 수련장을 세운다고 군대에서 배운 기술로 그야말로 맨손으로 지어올린 것이라고 했다. 학교 본부로서는 실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한 달만에 뒷산 공터에 (학교 소유인) 엉뚱한 가건물이 확 솟았으니.
그 때만 해도 요즘처럼 "요가=웰빙=미용 겸 다요트 겸 운동", 이런 공식이 없었다. 요가 매트 같은 건 따로 존재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화투치는 담요면 대충 장땡이었다, 그러니 동아리방 분위기는 거의 여관방 분위기...) 요가 같은 소리만 하면 도, 철학관, 뭐 이런 연상과 함께 바로 이단으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싫증을 잘 내는 개뿔같은 성격 탓에 나는 그 동아리에 몇 달 머물지 않았다. 그 날 첫 수련을 마치고 컴컴한 산을 내려오는데 선배들이 여기가 후문이라며 후문으로 집에 간다고들 다들 몰려갔다. 그 때까지 학교에 후문이 따로 있는 줄도 몰랐을 뿐더러 후문에서 정문 쪽으로는 어떻게 가는 지에 대해서도 전혀 감이 없었던 터라 울며 겨자먹기로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푹 쉬면서 덩달아 버스에 올라탔다. 다행히 그 버스의 종착지는 나를 집으로 데려다주는 고마운 전철역이었다.
그 이후로는 학교에 갈 때마다 후문을 이용했다. 고등학교 동창 중에는 정문을 통과할 때마다 뿌듯한 마음에 통학에 더 불편한데도 굳이 정문을 고집한다는 이도 있었지만, (별 희한한, 매일 입시날 기분 내고 싶은 건가) 나는 후문을 발견한 이후로는 죽으나 사나 후문파였다. 정문이 있는 판판 대로는 파리 개선문 못지 않게 훤하건만 버스를 타고 정문을 통과해 갈 때면 언제나 나는 뭔가에 소외되는 느낌이었다. (데모한답시고 깃발 숨겨들고 여의도로 명동으로 가던 떼지어 버스 타고 가던 때는 빼고) 후문으로부터 난 정겨운 좁은 길가엔 봄이면 새 싹이 돋고 여름이면 잎이 무성했으며 가을엔 은행이 노오란 노래를 불렀다.
그 후문가 아래에서 한 번은 과 선배 갑과 대판 싸움을 벌였다. 마침 그 동네로 거처를 옮기던 모 선배의 이사를 돕는다고 단체로 사람들이 모였는데 이사 끝나고 그 선배가 한 판 쏜다니까 갑이 글쎄 보신탕집으로 장소를 정하는 게 아닌가. 난 개고기를 먹지 않을 뿐 아니라, 이건 민주주의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부르짖었으나 갑은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나는 부르르 집으로 왔는데 (가는 길에 떡볶이와 튀김만두를 싸들고) 나중에 어케 화해를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아마 화해는 하지 않고 대충 술 먹다가 잊었겠지.
인간을 정문형과 후문형으로 나눈다면, 난 후문형이다.
생각해보면 (이건 맥락에 없는 엉뚱한 이야기지만) 개고기를 먹자고 고집한 그 선배도 정문형은 아니었던 듯 한데 왜 그 때는 그렇게 치구박구 싸웠었는지.
그 선배는 아마 정문형도 아니고, 후문형도 아니고, 개구멍형이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