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 냈다.

생각해보니 내 인생에서 사표를 쓴 것이 이게 세 번째. 첫번째는 보습학원 영어강사를 했을 때였다. 그만 둔다고 할 때 원장은 버럭버럭 화를 냈으며, 내 마지막 수업이 있던 날 종적을 감추었다. 마지막 달 월급 봉투는 그래서 받지 못했다. 그 이후 한 동안 논술 채점에 투신했었다.  두번째는 소규모 잡지사에서 일할 때였다. 한 달 반을 일했는데 월급 봉투를 받아보니 약수가 계약과 틀린 게 아닌가! 사장에게 따지러 갔더니 딴 소리를 했다. 꼭 돈 때문이 아니라 지키지 못할 말을 하는 사람과는 일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다음 날 퇴근 후 (=한밤중) 동료 하나와 술을 코 삐뚤어지게 마시고 회사와는 빠이빠이했다. 그러니까 무단결근으로 사표를 대신한 셈이다.  요번엔 그 정도로 드라마틱하진 않구, 일월에 학교를 가게 됐기 때문에 (직업교육) 그냥 그만 둔다구 보스한테 말했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빚을 냈다. -- .--;; 

이건 다 순전히 <고양이를 부탁해> 때문이다. 뒤늦게 본 이 영화에서 난 다섯 명의 여자애들 중에 할머니 할아버지와 사는 지독하게 가난한 집 아이 (이름이 뭐였더라?) ---지붕이 무너져서 조부모를 잃고 엉뚱하게 소년원에 가게 되는 그 아이--- 에게 엄청 공감했다. (왜냐고는 묻지 마시라.) 그러나 가슴이 찢어졌던 건 이요원이 존경하는 회사 상관에게서 "저부가가치 인간"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였다.

상관:     다른 여직원들은 다 저녁에 야간 대학 다니는데 **씨는 대학 안 가나?
이요원: 전 일하면서 더 많이 배운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상관님은 제가 하는 일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이 들게 해주시기 때문에 좋아요. 
            
(이렇게 또랑또랑한!!!)
상관:     그래? 그래도 평생 저부가가치 인간으로 살 수는 없잖아?
            (쿠궁!!!)

저부가가치 인간. 그게 나였다. 지구를 반바퀴 돌아와서 발견한 나의 존재 가치는 "저부가가치 인간."

대학 때 <무기질 인간>이라는 소설에 열광하던 친구들이 있었다. 난 개인적으로 그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첫째는 소설에서 큰 인상을 못 받았었기 때문이고, (작가는 김원일이던가 그 동생이던가, 아니면 김원일이 형이던가? 검색하니까 안 나온다. 왜 안 나오지?) 두번째는 그 말이 란닝구에 반바지 입은 깡마른 체구의 삽십대 남자를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지붕이 무너지기 전에 탈출할 수 있을까? 중부가가치 인간이라도 되는 길은 쉽지 않구나.
그만두기 전까지 두 주 더 일한다. 한 번 더 이주급 봉투 받을 일이 남았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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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2005-11-30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같은 분을 저부가가치 인간으로 남겨두는 이 사회가 저부가가치 사회인 거여요!
뭘 하든 행복하시길^^

날개 2005-11-30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든지 잘 하실거라 믿어요..!^^

히나 2005-11-30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저부가 가치 일 밖에 할 수 없는 저 같은 사람은 적자생존 사회가 너무 무서워요. 미래 세계에는 고부가 가치 인간만이 살아남아 로보트가 우리가 해오던 저부가 가치 일을 도맡아 하게 되겠죠. 그러면 우리 저부가 가치 인간은 어떻게 하죠?

영화 '카타카'의 세계처럼 임신과정에서부터 미리 원하는 타입의 '고효율 인간'을 만들어 '저효율'의 싹을 잘라내면 해결될까요? 그래도 인간이란 게 실수가 있어 에단 호크라는 저부가 가치 인간이 태어났는데.. 그의 삶이, 그의 꿈이 저부가 가치였던 건 아니잖아요..

전 검둥개님이 저부가 가치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부가 가치 인간이 경멸받아 마땅한 단어라고 생각하지도 않구요. 저 또한 남들이 보기엔 저부가 가치 인간에 가까운데 높은 생산성을 내지 못한다고 해서 내 존재 가치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사실이 슬플 뿐이죠..

괜히 저 혼자 씩씩거린 것 같아 죄송해요. 검둥개님, 사표 낸 거 축하드리구요 다시 공부하신다니 너무 부러워요..

paviana 2005-11-30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저부가가치 사회가 물건너있는 곳이라는게 다행이라고 해야되나요?
어쨌든 나쁜 사회에요.정말로..
전 좀전에 뉴욕사는 친구에게서 놀러오라는 저나를 받았어요.뉴욕을 12월 30일에 와서 1월 3일까지 자기랑 놀자는..내가 이나이에 뉴욕으로 극기훈련갈일 있냐 했고 나 비자도 없고 여권도 기간만료됬어 라고 했더니 그런건 여행사에 맡기면 다 돼..일단 일은 저지르고 보는거야.설마 회사에서 짤리기야 하겠어.내가 그때나 좀 한가하니까 플랜짜서 낼 통화하자 라고 하더군요..얼마전에 굉장히 우울해서 친구에게 투정메일을 보냈더니 그런식으로 저나를 주더군요..과연 제가 뉴욕에 갈 수 있을까요? 만약 가면 보스턴도 놀러갈텐데..ㅎㅎ 버뜻 전 갈수가 없어요.ㅠㅠ 정말 간다고 하면 책상 빼라고 할거거든요..ㅠㅠ 어쨌든 그렇게 위로해주는 친구가 있어서 맘이 한결 좋았답니다.
그 회사 아니더라도 더 좋은 곳이 나올거에요..그 저부가가치 사회같으니라고 흥 !!
기운내세요.!!

blowup 2005-11-30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와. 축하하는 게 맞죠? 파비아나 님이 보내주신, 이슬 같고 눈물 같은 술 한잔 드시면서 노래 부르고 놀아야죠.
무기질 인간은 김원일 동생 김원우 씨가 쓴 거라고 기억해요. 저 이 아저씨 한번 봤는데, 정말 무기질 인간처럼 생겼어요. 솔직히 정 안 가는 타입의 인간이었어요.
고양이의 저 배우는 옥지영. 저렇게 고독한 마스크를 가졌는데, 어느날 드라마를 보니 쌍꺼풀 수술을 했더라구요. 아쉬워라.

로드무비 2005-11-30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하려던 말을 나무님이 다 하셨네.
옥지영과 김원우.
모처럼 아는척 좀 할랬더니!
검둥개님, 이 사회 정말 골때립니다.
심각하고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여기서 못 살아요.
노동자들 월급 떼먹고 저만 흥청망청거리고 사는 인간들이 부지기수고요.
아아, 혈압 올리지 말아야지.
아무튼 사표 내신 것 축하드리고요.
검둥개님이 원하시는 인생길에 서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마냐 2005-11-30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윽....저때 무진장 이뻤던 옥지영이 눈에 손 댔다고라고요? 나무님..흑흑.

암튼, 검둥개님...축하드려요. 갑자기 저부가가치 인간, 가방끈 짧은 인간인 저의 뒤통수도 함 후려쳐주시는군요. 흐흐. 힘찬 새출발 하세요.

하루(春) 2005-11-30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를 부탁해>는 정말 무서운 영화였어요. 여성감독의 섬세함과 산뜻함이 한껏 묻어나면서도 사회의 무서운 단면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 모습에 슬펐답니다. 괜히 슬퍼지네요.
그래도, 아자아자, go for it!!

검둥개 2005-12-01 0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음 사회를 보는 눈을 바꿔주시는군요. ^^;;;

날개님 믿음의 근거는 쪼께 박약하지만 응원해주셔서 무지하게 고맙습니다. ^ .^

스노드랍님, 로봇공학이 활성화되어서 인간이 할 일을 다 해준다면 인간은 유희하는 동물이라는 본질루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저의 짧은 소견입니다. 대학 때부터 내내 이렇게 주장하고 다녔는데 호응이 적더군요. -- .--;;; 막스보다 쪼끔만 일찍 태어났었으면 혁명적 사상가로 이름을 날렸을텐데... 꺼이꺼이

파비아나님 그 때쯤이면 저두 뉴욕의 시댁에 있을텐데 오시죠!!! *^^* 뉴욕의 코리아타운에 가서 코 삐뚤어지기 한 판 마시죠!!! (사실 수퍼 빼곤 지나가본 적밖에 없지만... ㅎㅎㅎ) 저부가가치 사회 흥흥흥이야요. ^^

줄리 2005-12-01 0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할 용기내신거 잘하셨어요. 저부가가치에서 고부가가치를 창출해서가 아니라도 괜찮아요. 우린 그런구분 무시하자고요. 뭔가 다른걸 새롭게 시작해본다는것 자체만으로 들뜨고 행복한일 하시는거잖아요! 화이팅이예요!!

검둥개 2005-12-01 0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님, 김원우 맞습니다!!! 그 소설두 정이 안 갔어요, 정말. 하지만 생각해보면 무기질 인간의 그 주인공두 자기를 저부가가치 인간이라구 생각했겠죠. 비슷한 종족끼리 절대 뭉치지 못하는 이 고독감!!! 왜 그 옥지영이는 멀쩡한 눈에 칼을 댓답니까 그런데! ^^

켈리님 슬프게도 급여를 두고 저부가가치네 어쩌네 그 상관이 영화에서 그래 말했던 거 같아요. 저두 일은 대충만 하고 논다에 적극 찬성입니다!!! ;)

로드무비님, 아는 척을 할라구 해도 부지런해야 되나봐요 그죠? ^^ 아무튼 나무님이나 로드무비님이나 저보다 백배 박식하십니다! 일자리에서도 이유 없이 맘대로 짤리는 세상인데 밀린 월급까지 떼어먹는 인간들은 잘 때 다리에 쥐났으면 하는 게 제 작은 소망입니다. =3=3=3

마냐님, 새출발, 하니까 어렸을 때 읽은 홀트아동복지회의 고아소년의 수기가 생각나는군요. (엉뚱하게 ^^;;;) 글쎄 그 배우가 왜 그랬대요 진짜루... ;)

하루님, 저두 무척 인상깊게 본 영화입니다.
응원해주셔서 감사해요. ^^

검둥개 2005-12-01 0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리님, 답글 열심히 다는 새에 오셨네요! ^^*
저 인제 퇴근해요 아자아자!!!
줄리님은 벌써 퇴근하셨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