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법과 관련된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상당한 충격과 함께 철학적 질문을 던져준다. 물론 미디어법 자체도 파장이 작지 않다. “과정은 불법이지만, 결과는 유효하다”는 헌재의 논리는 좌우 혹은 진보 논란을 넘어 ‘절차적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제도적 틀은 과정도 유효해야 한다는 전제였고, 그래서 X파일 사건의 도청 파일도 열어보지 못하도록 한 것 아닌가. 물론 마라도나의 ‘신의 손’ 사건처럼 손으로 넣었더라도 ‘골은 골’이 된 일은 있었지만, 그걸 알았더라면 골로 인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건설 자본주의에서 ‘언론 자본주의’로 전환하게 되는 결정 내용도 큰 파장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의 최종심이 바로 헌법재판소이고, 이 재판소의 운영이 역사적으로 실패라는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던진 진짜 철학적 질문은, “너희들이 어쩔건데?”라는 질문이다. 그렇다. 혁명 혹은 혁명에 버금가는 대중의 저항 없이 헌법재판소 앞에서 더는 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 9차 개정헌법, 즉 1987년 체제의 특징이다. 그리고 그 약점을 우리가 이번에 본 셈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노무현 정권 때 진행된 개헌 논의에서 줄곧 반대 입장을 피력했고, 시민사회 내부의 개헌 논의도 지금까지 반대했다. 경제민주화 조항과 경자유전 조항을 지키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기도 하고, 5년에 한 번씩 대통령이 바뀌는 체제가 그런 대로 잘 맞는다는 개인적인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헌재 결정을 보면서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임기 6년, 그것도 연임인 9명의 헌법재판관이 사실상 헌법 위에 있고, 헌법 해석권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역행한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특히 연임을 기대하면서 정부와 법관 눈치를 보게 된 현 시스템은 구조적 오류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자, 내가 생각해 본 방법은 다음과 같다.
개헌을 하자. 그리고 구조적 오류에 빠진 헌법재판소는 폐지하자. 그러면 궁극의 ‘판단’ 문제가 생길 것인데, 기본적인 판단 업무는 미국이나 일본처럼 대법원으로 보내고, 예를 들면 국민 1%의 서명을 받은 헌법 판단 사건에 관해서는 국민투표로 올리자. 1년에 한 번, 몇 가지 사건을 모아서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가늠할 국민투표를 여는 방식을 사용하면, 헌법재판소 없이도 헌법에 합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해결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1년에 서너번씩 국민투표를 하는 스위스에서 국민투표로 인해서 무슨 대단한 문제가 생겼다는 보고는 없고, 그렇게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가장 먼저 국민소득 4만달러를 넘어선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물론 국민이 매번 투표를 한다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기는 하지만, ‘국민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제도를 운영하는 것이 다음 단계 우리의 진화 목표일 수 있다. 이제 9차 개정헌법의 오류를 더는 외면할 수 없다. 이건 좌우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시스템 오류에 대한 ‘디버깅’ 과정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1031805325&code=99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