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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 항구들 ㅣ 동방문학총서 1
아민 말루프 지음, 박선주 옮김 / 훗 / 2016년 12월
평점 :
아민 말루프의 열혈 독자가 된 나.
하지만 모든 작품들이 걸작일리는 없으니 이 책은 평작이구나 하면서 책을 읽어나갔다. 앞서 읽었던 3개의 책, 그 중에서도 특히 <타니오스의 바위>의 감동이 격렬했으므로 뭐 이런 작품도 있을 수 있지 했던 거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소설을 읽어가다 보면 수많은 엄청난 사건들이 등장한다. 오스만 제국의 몰락, 튀르키예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제2차 세계대전, 중동 전쟁 등등. 이 중 어느 하나도 끔찍하지 않은 사건이 없고, 이 시대와 사건의 한복판을 통과하는 등장인물들의 삶을 기록한다면 적어도 600여 페이지는 넘는 대작이 되어야 하는데 왜 이 책은 이토록 많은 생략으로 불과 300페이지의 얇은 책이 되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그것도 한 페이지를 가득 채웠다면 200페이지의 책으로 나오는 게 맞을 정도로 책의 여백과 간격이 널널하다)
시대적 배경만 흘려버리는 것도 아니다. 오스만 제국의 사랑 받는 공주였던 할머니의 삶의 단절, 오스만의 왕족인 아버지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의 와중에 아르메니아인 여성과 결혼하고 주인공이 탄생하는 것도 심상치 않은 사건이다. 중동 전쟁이 예비되어 지는 와중에 유대인 여성과 결혼하는 주인공 오시안. 그리고 2차 대전 중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하는 주인공의 행적들. 어느 것 하나 평범한 삶도 평범한 관계도 없는데 이 책 속에서는 그저 흘러간다. 그 모든 과정이 마치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라는 듯,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늘 그렇게 다가오고 물러간다고 얘기하는 듯 어마어마한 사건과 관계들이 그렇게 흘러간다.
심지어 주인공 오시안은 사랑하는 아내와 얼굴도 보지 못한 딸과 30년이나 만나지 못하고 헤어져 살아야 했다. 그들이 떨어져 있던 거리는 불과 150km. 자동차로 간다면 겨우 2시간이면 닿을 거리에서 그들은 만나지 못한다. 이렇게 얘기하면 중동전쟁 때문인가 싶지만 그 사이에는 또한 다른 가족사가 얽혀있고, 주인공 오시안의 개인적 가족사적 불행이 얽혀있다.
이들의 헤어짐은 수긍이 가지만 그 헤어짐이 30년이었다는 것은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 다른 소설이었다면 나는 '아 이 소설은 개연성이 너무 떨어져. 뭐 이래'라며 불 평불만을 늘어놓고 책을 던졌을 거 같다. 그러나 역시 아민 말루프는 다르다. 이야기 하지 않아도 그냥 이해가 되어 버린다.
이 소설은 끊임없는 생략과 흘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음 어쩌면 역사의 행간과 여백을 그 생략으로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역사를 공부한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에 기록되지 못하는 삶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그 역사적 사실로 그 사이에 있을 무수한 여백과 행간을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개인의 행동의 많은 의미들이 바로 그 여백과 행간에 있다. 작가가 하나 하나 친절하게 짚어주는 데 익숙했기 때문에 이 책을 허술하다 여겼던 거 같다. 하지만 진실은 그 여백에 있음을 더 없이 작가는 끊임없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야기는 마지막 한 장면을 준비한다. 너무나 고요한 폭주, 여태까지의 모든 생략과 여백이 마지막 장면에서 꽉 차 오른다. 그 둘의 일생에도 못 다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나 작가가 보여주는 단 한번의 포옹으로 그 모든 것이 이해되어 버린다. 한 사람의 일생이 또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말로는 절대 다할 수 없음을, 그렇기에 결국 한 번의 포옹으로 그 모든 말을 묻는다.
결국 사랑이었다. 그들이 생애를 지탱해 왔고, 앞으로 또한 나아가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면 뭐겠는가?
영화의 엔딩 장면처럼 그려지는 올해 가장 아름다운 마지막 장면. 그 마지막 포옹에 나는 살짝 눈물이 났다. (왜 그런지는 스포일러가 될거라서 생략이지만 가을이 시작되는 이 때 누구든 이 소설을 보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