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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의 루시 - 루시 바턴 시리즈 ㅣ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8월
평점 :
전작인 <오! 윌리엄>에서 루시는 윌리엄을 최초로 가져본 집으로 표현한다.
루시에게 윌리엄은 물리적인 집을 주었을 뿐 아니라 심리적인 집이었다.
한 번도 돌아갈 집을 가져보지 못한 루시에게 윌리엄은 처음으로 쉴 곳으로서의 또는 내 공간으로서의 집을 준 것이다.
그래서 최초의 각인은 무섭다.
이 책에서 윌리엄이 자신을 표현하는대로 윌리엄은 그야말로 개자식이다.
그럼에도 루시가 그에게 돌아가는 것은 저 최초의 각인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루시의 자식들의 걱정대로 루시가 윌리엄에게 돌아가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그럼에도 사람의 마음은 논리로 움직이지 않는다. 루시가 윌리엄에게 돌아간 것을 보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독자가 결국에는 루시의 선택을 그럴 수 있지라며 수긍하는 것도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에 윌리엄이 세 번 째 이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루시를 살리기 위해 메인 주 바닷가로 데려갔을까?
그건 당연히 아닐테고 루시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을까?
아니겠지.
그는 팬데믹에서 루시를 살리기 위해서라고 표현했지만 만약 그가 이혼하지 않았더라면 그저 충고 정도로 끝났을거고, 그는 세번 째 부인인 에스텔과 딸인 브리짓과 함께 메인주 바닷가로 갔을테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은 바닷가의 루시가 아니라 바닷가의 브리짓이 되었을 수도 있고 그냥 윌리엄은 계속 개자식이었을 테다.
이 책은 또한 내게는 참으로 정신없이 지나왔던 팬데믹을 되돌아보게 한다.
무서웠고, 불안했고, 그럼에도 나는 사실 그걸 제대로 느끼기에는 너무 바빴다.
처음 맞는 그 상황때문에 벌어진 일들을 수습하기 위해서 대책을 마련해야 했고, 새로운 기술을 익혀야 했고, 적응해야 했다.
능력 부족으로 모자라는 것들을 채울 수 없어 절망해야 했다.
이제 루시의 생각들과 일상들을 읽으면서 아 그렇게 내 마음속의 불안들이 이런 모양이었구나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왜 사람들이 다 다른지 누가 그 이유를 알겠는가? 우리는 어떤 본성을 타고나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를 이러저리 휘두른다. - 56쪽
나의 의지가 아무것도 아니었던 시절. 내 일상을 내가 계획한대로 만들어갈 수 없었던, 그러나 그럼에도 세상에 휘둘리고 싶지만은 않았던 우리 모두의 시절일기로 이 책은 읽히기도 했다.
가족과 이웃과 그리고 모르는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 더 예민하게 촉각을 세우고 걱정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우리는 그렇게 팬데믹을 지나왔다.
뉴욕에서 엘리베이터가 없는 6층 건물에 살면서, 가끔 보도에 접이식 의자를 갖고 나와 앉아 있던 가난한 노파가 이제 식료품은 어떻게 구할까를 걱정하며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운이 좋은 것에 감사하지만 그 운좋음이 나의 능력이 아님을 아는 그 마음이 우리를 오늘 여기에 남아있게 하는게 아니겠는가?
글의 마지막쯤에서 루시는 그녀의 아이들을 임신했던 시절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예전에 내가 크리시를 가졌을 때 내 커진 배를 내려다보며 그 위에 손을 얹고 이렇게 생각한 것을 떠올렸다. 네가 누구든 너는 내 소유가 아니야. 내 일은 네가 세상에 나오는걸 돕는 것이고, 너는 내 소유가 아니야. -369쪽
살아간다는 건 언제는 누군가를 돕는 일이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일이다.
자식조차도 그러하다.
그 중 누구도 내 뜻대로 휘두르거나 휘둘리거나 할 수 있는 이는 없다.
자식조차도 그러하다.
루시가 사람을 만나는 방법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어떤 시절이든 어떤 상황이든 다른 이의 삶에 관심을 가질 때와 지켜보아야 할 때는 구분하는건 어렵다.
메인주 바닷가 이웃으로 만난 밥에게 아내 몰래 담배 한가치를 피울 시간의 위로를 전할 때는 딱 그만큼의 관심이면 된다.
자기 길을 가는 자식이 걱정돼도 따듯한 포옹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마음도 그러하다.
그런 기다림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바닷가의 루시를 만나면서 드는 생각이다.
사족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은 이 리뷰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윌리엄이 사위의 외도를 알고 그 사위와 통화하다가 사위가 "아버님도 아내에게 똑같이 하지 않으셨나요. 베키가 말해주던데요"라는 말에 대한 답이다.
"그래, 그랬지. 트레이. 내가 왜 그랬는지 알고 싶나? 내가 개자식이었기 때문이야! 그게 내가 그랬던 이유였어. 이 빌어먹을 멍청한 놈." 그는 앉은 채 몸을 뒤로 기댔다가 다시 앞으로 숙였다. "개자식 클럽에 들어온 걸 환영하네. 개자식." 그러자 우리의 사위가 전화를 끊었다.
자신이 개자식임을 아는 윌리엄! 화이팅이다. 개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