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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주는 괴물들 - 드라큘라, 앨리스, 슈퍼맨과 그 밖의 문학 친구들
알베르토 망겔 지음, 김지현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6월
평점 :
세상에는 참 운좋은 사람이 있지. 암 그렇고 말고
하필이면 알바를 하고 있는 서점에 보르헤스라는 대문호가 찾아오고, 시력을 잃어가던 대문호가 그에게 책을 읽어주는 알바자리를 제안하다니.... 이건 뭐 전생에 나라를 3번쯤 구하면 얻을 수 있는 행운이 아닐까?
내가 고등학교 때 서점에서 알바를 하고 있는데 그 곳에 박경리 선생이 찾아오고, 나는 박경리 선생에게 4년동안이나 책을 읽어주는 행운을 누렸다면 지금쯤 나도 작가가 되어있지 않을까? ㅎㅎ
책읽기의 즐거움을 알아가는 단계에서 가장 먼저 와닿는건 역시 캐릭터다.
내 책읽기도 다르지 않아 어린 시절 안데르센 동화, 그림동화속의 공주와 왕자들에 빙의하고자 했던 것들이 시작이었던듯하다.
그래서 지금도 영화든 드라마든 책이든 로맨스를 좋아한다.
그 로맨스의 성격이 나이가 듦에 따라 양태를 달리하는 정도일 뿐 어린시절 좋아한 것들은 결국 평생 지고 가는듯하다.
사랑 얘기는 언제나 좋다.
설사 현실에서는 대부분이 고난에 찬 책속의 사랑은 결코 경험하고 싶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 운좋은 작가는 어떤 캐릭터들에 빙의했을까?
작가라 그런지 그 면모들도 심상치 않다.
여러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그래도 관심이 가는건 역시 내가 아는 또는 읽은 책의 캐릭터들이다.(원래 이런 종류의 책의 치명적인 단점은 내가 읽지 않은 책 이야기를 하면 공감도가 확 떨어지는 것인데, 어쩌랴 그저 나의 독서의 얄팍함을 탓할 수밖에....)
작가의 말대로 흘륭한 캐릭터는 이야기를 창조한 작가보다 더 오래 살아남고, 더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하며 우리 곁에 있는다. 그들은 변화할 뿐 죽지도 않는다. 작품 속에서 죽은 캐릭터라면 두고 두고 환생하면서 영원히 죽음을 반복할 뿐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라! 얼마나 많이 다시 살아나고 다시 죽는지......
작가는 이렇게 살아남은 유명한 캐릭터만 얘기하지는 않는다. 뜻밖에도 시작은 보봐리 부인인데, 보봐리 부인 에마가 아니라 존재감조차 희미한 그의 남편얘기에서 책을 시작한다. 존재감 희미한 그가 실제로는 소설의 시작과 끝을 모두 담당하고 있으며, 우리 삶을 좌지우지하는 운명의 힘을 보여주는 존재로서 말이다.
의외의 인물은 또 있다.
바로 햄릿의 어머니 거트루드 왕비.
모든 일의 시작지점에 있지만 아무도 그녀의 생각과 감정에 관심이 없다.
정작 왕이 죽고 왕의 동생과 결혼하고, 그로 인해 방황하는 아들을 봐야 하는 핵심당사자인데 말이다.
작가는 바로 이 거트루드 왕비의 입을 대신해주겠다는 생각으로 그녀의 생각을 추적하는데 아들이 게이가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정말 빵 터진다. 이렇게 사건의 핵심을 정확하게 볼 줄알고 남성 주인공의 우유부단함을 꿰뚫는 그녀지만 사실 햄릿의 크론보르 성의 진짜이자 유일한 유령은 그녀이다.
아무도 그녀의 생각을 궁금해하지 않고 묻지 않음으로 해서 말이다.
하이디의 할아버지에게서 스위스라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심상을 짚어나가는 과정도 흥미롭다.
이렇게 우리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꼭 주인공일 필요는 없다.
가끔 모두가 좋아하는 주인공을 두고 왜 나는 그 옆의 친구가 더 좋은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그림동화속 빨간 모자에 대한 해석은 유쾌하다. 불복종자로서 자유롭게 숲을 뛰어다니고, 그로써 다른 캐릭터들을 모두 살아 움직이게 하는 빨간 모자는 바로 개인의 자유를 상징하는 표상이다.
나는 이런 해석이 사실 너무 좋다.
그림동화속 수많은 캐릭터들이 있지만 가장 많이 이야기되고 되살아나는 캐릭터가 바로 빨간모자인데 왜 그런지 작가의 해석을 보다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다.
아! 빨간모자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억압과 통제에 저항하는 그리하여 승리하는 캐릭터였구나 하면서 나의 무지의 한조각을 깨게 되는 즐거움, 책을 읽으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가 일어나는 대목이다.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 불합리에 대해 당당하게 헛소리라고 외치는 엘리스를 보는 즐거움도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런 면에서는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를 그냥 좋다고만 말하는게 아니라 왜 그것이 그토록 오래 사람들의 마음,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왔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그래서 그 캐릭터들이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나 꿈틀거린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책.
이 운좋은 작가의 운을 좀 나눠가질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의 독서여행에 동참하게 되는 책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책의 3분의 1쯤은 모르는 캐릭터들이어서 그 유쾌한 상상이 중간 중간 끊어지게 된다는 것인데 이야말로 내 책임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