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역을 지나자 예상대로 맑은 하늘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다비드 르 브르동의 <<느리게 걷는 즐거움>>(글항아리, 2014/2020)이다. 아무데나 펼쳐 읽는다. 앉아있어도 걷는 기분이다.햇살도 촣다.

아침 로스팅 첫 원두는 Colombia D.caf이다. 다크하지만 순수한 원두다. 불꽃 속에서 변화하는 콩을 향과 색으로 본다.

익어가는 동안, 타인의 서재를 찾아본다. 유익한 글들이 많다. 오늘 특히 독일 사회주의 신약성서학자 G.타이센의 글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비아,2019)에 대한 포스팅을 잠시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히브리성서(TNK)의 코헬렛(전도서) 한 구절이 소개되었다.전도서 9장7절이다. 히브리본문도 곁들여 한번 다시 읽어본다.

"지금은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을 좋게 보아 주시니, 너는 가서 즐거이 음식을 먹고, 기쁜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셔라."(표준새번역개정)
오늘 하루 기분 좋은 날일듯 하다.

전도서는 참 좋은 책이고 나도 참 좋아한다.
자크 엘룰의 <<존재의 이유>>도 조금씩 같이 읽으면 더욱 좋다.

덧.그 포스팅 글에 이 구절이 잠언7:9로 소개되어있어서 확인도 해 볼 겸 덕분에 한번 더 읽어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골목에서 소리가 난다』(김장성 글/정지혜 그림, 사계절, 2007년 06월 18일)


1.

여유로운 오후, 맑았던 아침날씨가 오후 되니 흐릿해진다. 햇살이 사라지면 신기하게 사방이 조금 무거워진다. ‘사라진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기도 하다. 가볍게 시간을 보내다가 무심코 그림책 한 권을 떠올린다. 출판된 지 10년도 훨씬 넘었다. 흐린 오후는 시원한 커피와 함께 과거를 추억하기 좋은 시간이기도 하다. 책을 펼칠 필요는 없다. 읽어둔 책이라면 그저 떠오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어떤 장면, 문장을 되새겨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마지막 그림을 자주 기억한다.

이 그림책은 골목을 따라 흐르는 소리를 찾아다닌다. 그 소리 뒤로 조금 허전한 눈빛이 뒤따른다. 이 허전함에는 이유가 있다. 골목에 가득 찼던 그 ‘소리’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골목에 대한 작가의 애틋함이 깊다. 물론 그 소리를 개발비용으로 기꺼이 지불한 건 어른들이라는 아쉬움도 크다.

어떤 소리든지 그것은 ‘살아있음’의 증거다. 소리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것들이 내뿜는 생존증명이다. 소리로써 슬픔과 즐거움이 드러난다. 아우성과 탄식, 환희와 기쁨도 극대화된다. 무엇보다 소리에는 ‘눈빛’이 담겨있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는 어떤 눈빛이 함께 있다. 소리와 눈빛이 공존하는 세계, 거기가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이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곳은 골목이다. 


2.

그림책에 담긴 ‘소리’를 떠올리다보니, 간단한 영화 한편도 생각난다. 2009년 개봉 독립영화「워낭소리」다. 구차한 소환일 수도 있으나 이즈음에 한번쯤 봐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 영화는 이 세계를 살아내는데 적절한 방법, 즉 ‘공감(empathy)’이며, ‘공존(co-exist)’을 일깨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소리’와 ‘눈빛’이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도록 돕는다. 그것은 ‘나와 너, 나와 그것, 너와 그것, 나-너-그것’ 사이의 연대다.













이충렬감독, 다큐멘터리(78분), 2009-01-15개봉


2-1 소리, 소리들

영화 ‘워낭소리’는 소리가 중심이다. 소리는 영화 속 인물들이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다. 영화를 보는 이는 자신도 모르게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소리를 따라가면,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한 마리의 소가 있다.


영화 속 소리는 서로 다르다. 그에게서는 그 소리만 난다. 할아버지의 소리와 할머니의 소리는 다르다. 노부부의 소리와 워낭소리도 확연히 구별된다. 할아버지의 소리는 낮고, 자기를 향해 구부러진 소리다. 들릴 듯 말듯하다. 자칫 왜곡되기 쉽다. 소리의 양은 너무 적어서 상대방에게 겨우 전달될 정도다. 그러니 자칫 이기적인 소리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그는 할 소리만 하고, 하지 말아야겠다는 마음먹으면 아예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소리는 종종 끄집어내자마자 바람 속으로 사라진다. 그 때마다 영화 속에서 그의 존재감도 가물가물하다. 이 할아버지 소리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때가 있다. 워낭소리와 소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그 순간이다.


할머니의 소리는 어떤가. 할머니의 소리는 높고, 꽹과리 치듯 요란하다. 말에 담긴 단어 수는 할아버지의 것에 비할 데 없이 많다. 음색은 얼음장 갈라지듯 얇다. ‘쩡’하고 날카롭게 갈라져 그 파편이 사방에 꽂힌다. 할머니의 소리는 먼저 상대방을 겨냥한다. 그리고 이내 자신을 향한다. 자기 삶에 대한 이유 없는 한탄이 끼어든다. 까닭 없이 상대에 대한 한이 서려있다. 동음반복일 때가 많다. 그 이유인지 몰라도 그 말들은 상대방에게 가닿지 못한다. 할머니 주위를 빙빙 돌고만 있다. 소리는 할머니를 벗어나지 못하고, 할머니는 소리를 놓아주지 못한다. 할머니에게서 떠났다 싶은 말도 무슨 메아리처럼 이내 다시 돌아온다.


소의 소리는 또 다르다. 소는 자기 소리는 물론이고 또 다른 소리를 가지고 있다. 태생과는 무관한 인위적인 소리다. 워낭소리다. 아이러니지만, 소는 자기 울음소리로는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못한다. 그저 ‘워낭소리’만이 존재감의 근거다. 이렇듯 소의 존재감은 인위적이다. 피동적이다. 그 소리에 반응하는 자가 있을 때만 비로소 존재의의를 갖는다. 영화에서 소의 워낭에 반응하는 이는 유일하다. 할아버지다. 할아버지 손길이 아니면 잠시도 자신을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음식은 물론이고, 자기 거처에 안전하게 되돌아올 수도 없다. 설령 할아버지 도움 없이 집으로 돌아온다 해도(할아버지가 만취되었을 때 소가 집을 찾아왔다는 이야기)안정된 쉼을 취할 수는 없다. 소는 자기 존재를 스스로 드러낼 수 없다.


2-2 관계, 관계들


이 소리들은 서로 연관되어있다. 세 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 할아버지와 할머니, 둘째, 할아버지와 소, 마지막으로 할머니와 소의 관계다.


첫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마치 기름과 물과 같다. 두 소리는 한 집에서 울리지만 거의 일방적으로 그친다. 대체로 할머니는 소리를 내고, 할아버지는 반응하지 않는다. 아예 흘려버린다.(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 할아버지는 그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 아니다. 듣지 않은 척 할 뿐이다. 할아버지는 다른 소리를 더 잘 듣고 싶기 때문이다. 두 소리를 모두 듣기보다 자신이 더 기울여야 할 그 소리를 선택한 것뿐이다.


둘째, 할아버지와 소는 할아버지가 적극이다. 할아버지는 소의 ‘모든 소리’에 응답한다. 소도 그러할까? 짐작컨대 그러할 것이다. 소는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다. 특이한 것이 있다. 할아버지는 어떤 경우에도 소에게 자기 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그는 다만 소를 위해 불편한 자기무릎을 꿇은 채 꼴을 벤다. 소의 먹을거리를 위해서라면 농약도 치지 않고 직접 잡초를 제거한다. 그는 말을 하기보다 그 말을 자기 행동으로 드러낸다. 그는 소를 위해 모든 행동을 한다. 그는 사람들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침묵으로 일관한다. 마치 수행자답다. 그의 침묵 속에 소는 그의 소리를 듣는다.


끝으로, 할머니와 소는 무관심이다. 할머니에게 소의 소리는 없는 소리다. 무의미하다. 만약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자기 존재, 자기 삶을 더욱 핍절하게 만들어버린 원인일 뿐이다. 그녀에게 소의 소리는 마른하늘에 벼락 치는 것만큼이나 섬뜩한 소음일 뿐이다. 소리가 커질수록 할머니의 고통도 깊어진다.


소의 자리에서 보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대척점이다. 소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이에서 보이지 않게 소리를 전달하는 매개자다. 그렇게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잇대어 있고,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닿아있다. 워낭소리가 들릴 때마다. 이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어느새 드러나지 않았던 눈빛이 보인다.


3.눈빛

눈빛은 존재들이 보내는 메시지다. 영화 속 세 존재는 눈빛을 보여준다. 그 눈빛은 두 종류이다. 애틋함과 애처로움이다. 애틋함은 사랑하는 감정이고, 애처로움은 질투하는 감정이다. 애틋함은 소와 할아버지가, 애처로움은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소에게 보내는 눈빛이다. 

눈빛은 관계를 말한다. 이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져’ 있음을 의미한다. 상호 의미

있음이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 유대종교철학자)의 견해를 따른다면 애틋함은 ‘나와 너’의 관계에서 일어나고, 애처로움은 ‘나-그것’의 관계를 암시한다과 할 수 있다. 소와 할아버지는 서로 교감한다. 서로는 서로에게 의미 있다. 소와 할머니의 관계는 그렇지 못하다. 할머니는 소를 하나의 사물로 대한다. 그것은 가축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소와 할아버지를 동시에 바라보는 할머니는 그 두 존재가 자신에게 애처로울 뿐이다.


영화 첫 장면은 계단을 함께 오르는 노부부의 모습이다. 말없이 오르다 먼저 말을 꺼내는 이가 있다. 할머니다. 나는 생각해 본다. 할머니는 홀로 걷는 할아버지를 보면 마음 깊이 애틋함을 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소와 함께 있을 때, 할머니 눈에 할아버지는 그저 애처로운 상대일 뿐이다. 소가 사라지고 나면 할머니의 본래 마음은 ‘애틋함’으로 되돌아온다. 사람들은 두 사람 사이에 다른 어떤 것이 끼어들기를 원치 않을 때가 있다. 눈빛은 그것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드러낸다.


이 영화에서 눈빛은 사람이나 가축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카메라 역시 또 다른 눈빛이다. 카메라는 감독의 눈빛을 대변한다. 감독의 눈빛은 어떠한가? 그는 이 노부부와 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영화를 추억해보니, 감독의 눈빛은 자주 할머니를 응시하고 있었다. 카메라는 ‘워낭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사실은 더 자주, 눈을 들어 ‘할머니’를 주목한다. 카메라는 할머니의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한다. 그리고 그 눈을 직시한다. 할머니는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경우가 많다. 관객을 소리로 안내하는 동안 카메라는 할머니 얼굴을 비춘다. 영화에서 할머니는 자주 카메라에 노출된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할아버지의 눈빛보다도 할머니의 얼굴과 그 눈빛을 더 잘 기억한다. 아마도 카메라의 눈빛이 강렬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카메라가 할머니를 응시한 이유가 궁금하다.


할머니는 소의 존재와 눈빛을 수용하지 않는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할머니는 소의 존재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것은 할아버지를 향한 소와 자신의 동병상련을 암시한다. ‘주인을 잘못 만난 악연?’ 이 지점에서 영화는 단지 의미가 확산된다. 서로 물려있는 관계. 고착되지 않고, 일방적이지 않고, 틀에 박힌 방향이 아닌 말 그대로 상호 그물망이 되는 그런 관계인 것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소는 어떤 한 방향으로 그 관계가 규정되지 않는다. 할아버지와 소가 긴밀한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카메라의 눈빛을 통해 나는 할머니와 소가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실상은 함께 걷고 있다. 그래서 소와 노부부는 카메라의 시선에 의해 한 자리에 함께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4.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관계, 사람과 사물 사이 관계는 눈빛, 시선으로 극화될 때가 많다. 대면해서, 표정을 보며, 눈빛을 감지하면서 관계는 깊어진다. 기계를 통해 들리는 말과 소리를 넘어 말 그 자체, 소리를 들음으로써 우리는 관계의 정도를 가늠한다. 그 소리에 실린 눈빛으로써 관계의 질적 깊이를 확인한다.


아쉽지만, 소리가 사라진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끝이 언제일지도 모른다. 비대면이 자연스럽고, 거리를 유지하는 일은 불문율이다. 얼굴을 볼 수는 있지만, 눈빛을 감지하기는 쉽지 않다. 소리는 들리지만, 눈빛을 가까이 보기는 어려운 시간이다. 그것이 자연스럽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자기도 모르는 ‘바람’이 휘돌아 감는다. 그 바람으로써 이 세계는 생존할 이유를 찾는다. 바람을 타고 들리는 소리, 그 소리에 실려 오는 눈빛이 선명할 때, 우리는 공동체다운 연대감을 공고히 만들어갈 수 있다. 배제를 넘어 포용으로, 홀로 있되 함께 있는 그 따뜻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기독교의 경전 중 한 부분인 신약성경 고린도전서13장은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유명하다. 널리 알려져 상식같이 여겨지는 그 구절 중 한 부분은 이렇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첫편지 제13장 4,11,13절-

이 노래는 읽으면 읽을수록, '사랑' 개념보다 행동을 세밀하게 서술한다. ‘사랑한다’는 동사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은 사랑에 대해 관념(의식)과 행동(실증)사이를 무한 방황하는 나를 한층 곤혹스럽게 만든다. 낯선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직 완전하고 익숙한 끝에 다다르긴 한참 멀었다. '사랑'(*사실, 1세기 헬라어 표현에서 agape나 eros, phileo 등은 의미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은 아직 쉬운 문제는 아니다.


사실, 나는 '사랑'을 하나의 기술(art)이라고 말하는 E.프롬의 견해에 동의한 지 오래다. 그가 사랑을 '기술'로서 정의할 때는 단지 감정(feeling)을 경시하자는 말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술(technic)과 감성의 조화였다. 프롬보다 훨씬 앞선 1세기 사도바울이 말한 바도 그것이다. 그의 노래를 곱씹어 읽어보면, '사랑(agape)'을 '기술'과 '감정'이 구분되지 않는 복합적인 행동이라고 말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로써 그는 사랑이 믿음과 소망을 완성해주는 긴밀한 연결고리라는 점을 경각시킨 것이다.


2.나는 여러 일들이 기술과 감성의 조화로 완성된다는 것을 배운다. 내가 일주일에 하루 담당하는 로스팅도 그렇다. 내가 다루는 로스터기는 은근히 신경써야 할 상황이 많다. 그러고보니 이 일은 조금 기술이 필요하면서도 어떤 순간에는 지극히 감성이 필요하다. 이것은 사실, 지난 몇 년간 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아주 조금씩 인지한 일이다. 물론, 로스팅은 기술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숙련되고 그 시간에 비례하여 좀 더 수월한 작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론 시간이 지날수록 이 로스팅은 '감성'영역으로 진입한다. 단순히 시간과 열과 공기를 한 웅큼 커피빈과 절묘하게 만나게 하고, 적절한 시간에 배출해내야 하는 기계적 기술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내 몸이 기계를 집중하면서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그 시간은 고작 15분내외다. 기술도 필요없을 것 같다. 그저 커피콩이 익기를 잘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온도를 조절하고, 기압도 확인하며, 콩이 드럼 안에서 변화해가는 과정을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 조금 늦지 않도록, 너무 빠르지 않도록, 겉은 잘 익은 듯하지만, 보이지 않는 속은 풋내가 아직 남아있는지를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이 과정은 일련에 로스팅되는 콩과 내가 대화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기술이 압도해야 하지만, 콩을 대하는 나의 감성적인 마음이 오히려 적절한 로스팅을 좌우하는 열쇠가 된다.


3.

내가 사는 이 땅은 갈수록 기술이 감성을 압도한다. 비정서가 주도하는 세계다. 어떤 사람들은 기술, 아니 이성으로 감성을 제거하는데 익숙하다. 기술을 옹호하고, 감성을 배척한다. 기술에 함몰되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자신도 모르게 감성 제거 기술자들이 될 여지는 크다. 세계는 생존 기술이 발달할수록 생명에 대한 감성도 진보해야 하지 않겠는가. 기쁨과 즐거움에 잇대어 있는 슬픔과 아픔을 간파하고 공유하는 깊은 감성이 이 세계를 세계답게 만들어낸다는 생각은 허튼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감지한다. 그것은 능숙해져야 할 기술이 아니며, 단지 개인적 감성에 국한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더욱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공동체적 기술이면서 세계의 감성이기에 나를 넘어서고, 가족을 벗어나고, 사회, 국가를 넘어서 결국 그가 누구든지 '한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단지 사랑하기 때문에 충고한다는 말은 늘 조심스럽다. 사랑의 기술'만 편만해져가는 이 세계에서 인간의 존재 이유가 ‘타인을 위한 삶’에 기초한다고 '나는 믿는다(Credo!)' 내가 나를 사랑하듯이 타인도 사랑하고 공감하는 것이 ‘사랑의 기술(Art)’이다. 기술과 더불어 감성이 조화로운 삶이라는 것을 내가 잊어버리지 않으면 좋겠다. 앞으로 미래는 개인과 개인이 단지 거래적 관계가 아니라 적절한 거리를 두면서도 서로 존중하고 깊이 이해하려는 공동체성으로서만 유지될 것이다. ‘내’가 소중하듯, ‘너’도 중요하다. 그 ‘너’가 누구이든 말이다.


4.내친김에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이야기에 하나 덧붙여보자. 바울이 사랑을 기술(이성)'과 '감성'의 조화로 말했을 때,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부를 추구하고 향락에 길들여진 고린도지역 신앙인들이었다. 오죽하면 ‘고린도화하다(to Corinthianize)’는 동사가 생겼을까 말이다. 그런 이들에게 바울은 이성과 감정이 조화된 ‘사랑하다’를 제시한다. 하여 ‘사랑하다’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기술(art) ’이 되길 바랬다. 바울에 따르면, '사랑'은 기술만은 아니다. 또한 개인 감성에만 머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공동체를 위한 기술이며 감성이다. 고린도 사회에 건강하게 확립하고 유익을 주는 삶이다. 공동체에서 사랑은 타인과 더불어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언제나 모든 것에 상대를 향한/위한 삶을 지치지 않고, 견디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또한 그 사랑은 지금부터 삶의 끝이 올 때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져 마침내 부분적인 것들을 완전하게 바라보도록 유일하게 남아있는 힘이다. 바울이 노래한 사랑은 보이지 않는 차별, ‘그렇지 않은 듯’ 서로를 분파로 갈라버린 고린도 사회 속 교회공동체를 향한 경고이기도 하다. 그런 사랑이 아무렇지도 않게 남을 차별하는(혐오하는) 나를 지속적으로 경계하는 힘이다. 선량한 자신이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타인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은총이고, 위로부터 오는 공동체 생존의 ‘방식, 길’(ὁδός’,호도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어느새 5월 끝날이다. 오늘따라 초여름날씨다. 바람도 습하다. 5월이 마지못해 길을 비

켜준다. 요즘은 날씨들이 얽히고설켜 방향을 종잡을 수 없다. 나는 계절이 혼란스런 문턱에 ‘서 있다.’ 한 때 법정(法頂)은 시대의 아픔을『서 있는 사람』(1975, 샘터사/2003 재출간)으로 상징화했다. 두 다리로 삶을 버텨야만 하는 사람들을 그려냈다. 앉을 시간이 올 때까지 그들은 끝내 서 있어야 한다. 걸어야 삶이 되는 세계에서 ‘서 있는 사람’들은 숨 쉴 여유마저 없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르는 것처럼 이 시대 5월은 예측불가한 계절이 되어버렸다. 숨 가쁜 걸음을 걷고, 거칠게 다시 내뿜는 삶이 가로막힌 시대라해도 두 발로 힘차게 걷는 세계를 마저 잃을 수는 없다.


2.

내가 머문 서재는 고요하다. 나지막한 산 아래로 집 몇 채가 들어앉았을 뿐이다. 여린 바

람마저 웅성대듯 들린다. 맑은 날이 아니어서 햇살마저 사라진 날이면 ‘몇 시인지?’는 무의미하다. 고요한 공간은 시간마저 감춰버린다. 침묵은 소리 없음이 아니다. 소리를 삼켜 마음에 담아 두고 즐기는 또 다른 사색이다. 오후가 되니 서재엔 더욱 정적이 흐른다. 내려 둔 커피가 조금 식었다. 괜한 마음에 한 모금 들이킨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새 근처 푸른 하늘 아래 다소곳하게 자리 잡은 독립서점을 찾았다. 느슨하게 둘러 꽂힌 책들이 오히려 여유로워서 좋다. 낮은 한옥 지붕에 아담한 크기의 집 세 채가 ㄷ자로 이어져있다. 기여하는 비용을 지불하고, 서가 사이를 느긋하게 산책한다. 내 책이 아니라 다른 이가 그렇게 꽂아둔 이유를 생각하며 책을 꺼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책의 배열은 그의 관심사다. 오늘 나의 픽북은 여러 권이다. 그 중 첫 번째 책. 바바라 스톡, 『반고흐와 나』, (미메시스, 2019)다. 두 번째 책. 다비드 르 브르동,『느리게 걷는 즐거움』,(북라이프, 2014/2020).



3.

만화가 스톡의 책은 흥미롭다. 그래픽을 따라 반 고흐와 자신의 삶을 교차시킨다. 알선 책 『반고흐』에 대한 뒷이야기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만화(그래픽)라는 점이 오히려 가독성을 쪼금 방해하기도 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제와 전개는 역동적이다. 한편 브르동의 글은 오래 전『걷기예찬』(김화영 역, 현대문학, 2002)으로 처음 접했다. 그 때는 지금처럼 길을 걷는 즐거움을 제대로 누리기 힘든 삶이었으니 그 때 그 길은 추상에 불과했다. 그 후 내 삶은 그 때와는 사뭇 다르다. 서점에서 다시 그의 글을 만나 가볍게 펼쳐 읽으니 기억이 살아나는 느낌이다. 그대로 주저앉아 한참 다시 읽었다. 레몬차가 다 식어버렸다. 길을 걷는 즐거움을 진부할 정도로 극찬하는 브르동의 견해에 나는 적극 동의한다.


4.

석양이 멋진 서점에서 우연히 선택한 책 두 권이 묘하게 어울린다. 시대를 넘어 두 예술가들이 고뇌하는 삶과 자기 앞에 놓여진 길을 걷는 사색이 그렇다. 해가 저물어버렸다. 서점엔 주인장 외에 아무도 없다. 늘 생각하지만, 이 외진 서점까지 이 시간에 찾아오기란 쉽지 않다. 서점을 나왔다. 다시 나의 서재로 돌아왔다. 브르동의 책을 다시 펼친다. 언젠가 방영되었던 길을 걷는 삶을 소개하는 다큐와 자연스럽게 겹친다. 책과 다큐는 사실 같은 말을 해준 셈이다. 길을 걷는 일은 배움이자, 사색이며, 삶을 성찰하는 일이라는 것. 과장이라해도 동감한다. ‘길’을 걷는 삶에 서술한 그 다큐는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또 다른 우주, 길>. 처음에는 낯설었다. 이제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렇다. 길은 마치 우주 같다. 길은 길에 이어지고, 길은 길로 확장된다. 끝없다. ‘길을 걷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끝없는 우주를 유영하는 여행일지도 모를 일이다. 과언은 아니다. 은 무한하다. 모든 길은 뒤섞여 이어진다. ‘길의 끝’은 순례자가 멈추는 그 자리다. 길은 그가 멈추는 곳에서 끝나고, 그가 계속 걸을 때 다시 열린다. 사람이 길을 걷는 것이 아니다. 길이 걷는 이에게 열어주는 것이다. (*나는 그 다큐제목을 이렇게 읽기도 한다. ‘길도 우주(宇宙)이다’. 사실 이 제목의 역명제는 성립하지 않는다. ‘우주는 길이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듯이 ‘길’은 도구나 수단을 상징하지 않는다. ‘길’은 사유하는 대상 그 자체다. 길은 그 자체로 목적이다.)


5.

'걷는다‘는 ‘길’에 적합한 행동이다. 사이사이 달릴 수도 있고, 기계를 이용할 수도 있을 테지만, ‘걷는다’보다 적확한 상징은 없다. ‘걷는다’는 그 길을 가장 길답게 만드는 숭고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말도, 손짓도, 행복한 표정도 그 순간만큼은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길에서는 ‘걷는다’는 것만 유의미하다. 그 길을 ‘걷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그 길을 길답게 만든다.

길은 걷는 이들로 인해 빛난다. 그들이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은 길의 가치를 높인다. 하여 오르고 내리며, 끝없는 평지를 마냥 걷고, 내리는 비와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며 길을 이어나가는 이들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마침내 그들이 거친 숨을 내뿜고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 모든 이들이 환호한다. 거기가 끝이었기에 완전히 자기 몸을 바닥에 눕히고 성탑 끝에 이어진 하늘을 보는 이들을 나도 응시한다. 그렇게 걷는 이들이 길을 멈출 때 ‘걷기’는 끝난다. 그들이 걸음으로써 길은 생존한다. 걷지 않는 길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6.

‘걷는 이’들은 위대하다. 사실 그렇게 걷지 않아도 될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걷는다. 생각해보면, 그들은 홀로 걷는다. 하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다. 시작은 혼자였으되 어느새 서로서로 도반(道伴)이 된다. 물론, 그렇게 길을 걷다 어느새 그런 사람들끼리 한 곳에 머무르기도 한다. 비록 어제까진 서로 몰랐으나 오늘 이 자리에선 오랜 친구 같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아니 늦은 오후부터 이른 아침까지 그들은 ‘길을 걷는 동지’다. 물론 무례하게 의존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길을 걸음으로써 길 위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이라는 동지의식이 있다. 마침내 그들은 순례라는 이름을 가진 생명공동체가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들은 마침내 알게 된다. 정작 위대한 것은 순례자가 아니라 ‘길’ 자체라는 사실을. 하지만, 어떤 순간에도 마지막이 오면 결국 피곤한 자기 몸을 홀로 지탱해야 한다. 그래서 그 걸음은 외롭다. 사색과 질문 가득한 얼굴로 말을 아낀 채 걷기만 해야 하는 순간도 감내해야 한다. 그래서 길을 걷는 이들을 ‘고독한 순례자’라 부를 수밖에 없다.


7.

어느 길이든, 길은 늘 새롭다. 걷는 이들 너머로 길이 길로 이어져있다. 끝을 가늠할 수 없다. 자기 배낭을 메고 자기가 정한 길을 자기 발로 ‘걷고 있다’해도 누구도 길 앞과 뒤를 끝까지 볼 수 없다. 그저 한 발 앞이 전부다. 걸어온 길을 추억할 수 있다해서 나아갈 길을 완전히 연상할 수 없다. 지난 번 걸었던 길이라해서 오늘 그 길을 모두 헤아릴 수 없다. 생각해보면 길을 걷는 이들은 길이 자기 앞에 놓여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여 그들은 ‘사람이 길을 걷는다’가 ‘길이 사람을 걷게 한다’로 바뀔 때 자연스럽다는 것을 인정한다. 길이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솔직히, ‘길을 걷는다’는 말이 습관처럼 굳어있다. ‘내가 길을 걷는다’고 말하기가 쉽다. 길은 어떤 ‘대상’일 수 있으나 길이 ‘주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기도 하다. 생각해보라. ‘길이 나를 걷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발을 땅에 내딛어 놓여진 길을 오랫동안 걷는 이들은 안다. 최후 순간에 이르러 자신도 모르게 결국 고백한다. ‘길이 나를 걷게 했다’고. 진정한 순례자들은 안다. 그 ‘길’이 자신을 초청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결코 길에 들어설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여 길을 걷는 이들은 자신이 그 초대에 순응한 자라는 것을 인정한다. ‘길이 거기에서 나를 불러주었다. 나는 그 초청에 응한 한 사람이다.’ 하여 비로소 나는 ‘걸을 수 있는 자’가 된 것이다.


<제주 사려니길, 5월로 들어서기 직전 어느 날 걷다>


8.

다시 말하지만, 은 무한하다. 본래 길은 끝이 없다. 인간이 삶이 끝나도 길은 어디서든 끝나지 않는다. 뫼비우스처럼 길은 처음과 끝이 이어지고, 끝이 처음에 잇대어 있다. 그것은 영원으로만 설명된다. 길 끝은 순례자가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그가 멈추면 길은 끝나는 것이고, 그가 가면 길은 계속 열려있다. 길은 걷는 이에게 끝없이 자신을 열어준다. 하여 ‘길이 우주다’라는 명제는 생의 근원을 사색하게 한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길을 걷는’ 것은 ‘철학하는 행위.’다. 근원을 배우고자 온 몸으로 기투하고, 희구하는 행위이다. 만약 그가 이 근원을 ‘신’에게서 찾아내려고 한다면 ‘걷는다’는 ‘신학하는 행위’다. 하여 ‘길의 초대에 응대한 이들에게’ 질문은 필연적이다: ‘길, 너는 무엇인가?’ 화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걷는다’는 그 길이 무엇인지를 체감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 걷는가?’를 물을 필요는 없다.


9.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길을 걷는 시대를 살고 있다. 길을 걷는 일은 자신만을 위한 삶은 아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언어 중에 <할라크 hālakh>라는 동사가 있다. ‘걷다’는 말로 알려져 있다. 이 언어의 여느 단어들이 그러하듯 이 말도 그 의미범주(semantic range)가 생각보다 넓다. ‘할라크’는 ‘공적생활을 만들어내다(public life)’는 의미에 닿는다. 홀로 길을 걷고, 함께 걸음으로써 마침내 그 걸음은 누구나 마음에 새겨둘만한 공동의 삶을 잉태한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길을 걷는 이들은 대단하다. 길 자체는 더욱 위대하다. 하여 길은 길을 걷는 이들에게 선물을 건네준다. ‘겸손’이다.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자부심 위에 길이 자신을 걷게 해 준 것에 대해 기꺼이 ‘무릎 꿇는다.’ 어느 길이든 그 의미를 감추지 못한다. 길을 걷는 이들은 ‘겸손하고’, 자기 너머 위대한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당연히 무릎 꿇을 수 있다.


10.

길을 걸은 이들은 마침내 기억한다. ‘길이 말해 준 것’과 ‘길이 스스로 보여준 세계를.’ 문득 어느 날 한 청년이 이렇게 말한 것이 떠오른다. ‘길은 나다’(신약성경 요14:6). 나는 어느 날 그 말에 이렇게 답했었다. ‘나는 오늘도 그 길을 따라 걷습니다.’


길을 걷듯이 글도 읽는다. 책읽기의 끝은 길로 나서는 순례이다.


길을 걸은 이들은 늘 자신에게 묻는다: 나를 걷게 한 그 길은 누구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올해 들어 식이요법을 해야만 했던 나는 사실, 단식이나 절제, 급한 다이어트는 커녕 하루 세 끼를 꼬박꼬박 잘 먹고 지냈다. 물론 하루 세 번, 상을 차리고 치우고 다시 차리고 치우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게다가 음식재료를 구하고 다듬고 조리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다 갈 정도다. 재밌는 것은 처음에는 치료 목적이어서 어쩔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만든 음식 자체가 맘에 든다.


무엇보다 내가 놀란 것은 따로 있다. 지금까지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음식관련 책들, 특히 고혈압과 당뇨치료를 위한 식이요법 책이나 자료가 엄청 많았다. 뿐만 아니라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음식 종류가 매체를 통해 쏟아진다. 나 역시도 이제는 스쳐지나가던 내용들을 눈여겨 봐두기도 하고, 필요한 것들은 메모도 해 둔다. 뭐라도 놓치지 말고 ‘내 몸’에 적합한 음식을 적절하게 제공해야 하는 책임을 다하려고 한다. 정말, 나에 비하면 다른 이들이 보여주는 일련의 노력들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나는 알았다. 치료든 건강을 위해서든 음식에 지대한 관심을 둔 사람들은 하루하루 그 메뉴 정하기가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괜찮으면 음식 가리지 않고 마음껏 먹고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쉼 없이 든다. 그 뿐만이 아니다. 건강이든, 그저 맛이든 아무리 정성껏 만들어도 음식은 대체로 한 끼 먹고 나면 더 이상 먹고 싶지 않다. 그러니 그렇게 많은 건강 음식 프로그램이 여전히 생존하는 것 같다. 아무라 맛있어도 하루 세 끼, 또는 매일 꾸준히 먹기가 어디 쉬운가. 생존식은 그래서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2.

여러 음식을 만들어 먹는 중에 내가 그나마 손쉽게, 영양도 챙기면서 맛있게 먹었던 음식이 있다. 연두부야채죽이다. 이름만 들어도 싱겁기 짝이 없는 고혈압과 당뇨식을 위한 저염식 메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적절하게 간이 배이고, 무엇보다 연두부가 곁들여져 식감이 좋다. 부담 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적어도 내 입맛에는.


나는 이 음식을 이렇게 준비했다. 우선 말 그대로 죽은 죽이다.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몸에 좋다. 포만감을 너무 기대하지 않는다면 가볍게, 그러나 알차게 먹을 수 있다. 기준은 2인분정도로 하고 이런 재료를 준비하면 된다. 가급적 야채는 풍성하게 넣는다.


재료: 애호박 보통 크기 1/2, 당근 어른 손 크기 1/2, 표고버섯 3개, 송이버섯 1, 알배추 속 어린 부분 원하는 대로. 밥은 주로 잡곡밥이 좋다. 물론 치료가 아니라면 백미밥도 나쁘지 않다. 맛은 백미가 월등하다. 두 공기 정도면 충분하다. 연두부는 작은 것 1개를 준비한다. 그 밖에 들기름, 참기름, 들깨, 소금 약간(최대한 소금을 줄인다. 야채들은 고유한 맛이 있다. 그것들을 조화시키기만 해도 충분히 맛이 든다.


3. 재료를 준비한 후, 이제 직접 만든다. 

(1)먼저 야채들을 최대한 작게 썬다. 식감이 느껴질 정도면 충분하다.

(2)적절한 냄비에 들기름을 두르고, 센 불에서 준비한 야채들을 볶는다.

(3)기름 맛이 배일 정도가 되면, 물 1L 정도를 붓는다. 야채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끓인다.

(처음에 물은 조금 많이 넣어도 좋다.)

(4)당근/호박이 야들야들해지면, 밥을 넣는다. 눋지 않도록 지켜보면서 저어준다.

(5)밥이 끓으면 연두부를 몇 번 나누어 넣고 저어준다.

(6)끓어오르면 불을 줄인 상태에서 계속 저어준다. 밥이 최대한 풀어져야 좋다. 야채도 딱딱한 상태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저으면서 끓인다. 물이 너무 빨리 쫄게 되면 물을 조금 붓는다.

(7)거의 끓었으면 참기름을 넣고 약불에 좀 더 둔다.

(8)다 되었다고 판단되면 그릇에 담고 깨를 조금 넣는다.

처음에는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 단순한 과정이다. 이런 조리법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만들어낸 음식이 최고라는 건 언제나 확인할 수 있다. 달고, 부드러우며, 아삭아삭한 맛이 이 죽이다.


4.

나는 이 음식을 나처럼 저염식을 해야 했던 사람에게 한 그릇 배달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저염식에 관심을 갖고 먹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나눠주기까지 했으니 감개무량하다. 따뜻한 상태로 얼른 가져다주었다. 저녁 한 끼로는 충분할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맛있었다고 연락이 왔다. 곁들여 먹을 반찬으로 미역콜라비양파초무침을 보냈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음식이 자기 생존과 직결되는 때가 찾아올 수 있다. 마음이 무거워지고, 무엇인지 모를 압박이 삶을 짓누른다. 마음껏 먹을 수 있던 것들을 지나쳐야 하고, 스스로 절제해야 한다. 다 별 일없이 잘 할 것 같지만, 막상 접하고 나면 하루, 이틀을 쉽게 넘어갈 수 없는 것 같다. 이런 경우, 음식은 그저 음식이 아니다. 배고프니 먹고, 배부르니 지나치는 정도가 아니다. 과도하지 않게, 적절한 양을 적합한 시간에 먹는 것도 음식에 한 부분이다. 설령 생존을 위한 음식이라해도 누구나 음식과 함께 끝까지 호흡하지 못한다. 음식은 인간을 유혹하고 시험하는 생존도구다. 유혹과 생존이 함께 있기에 위협적이다. 나는 음식을 통해 인간이 살아내야 할 삶의 방식을 배운다. 먹지 말아야 할 것, 먹어야 할 것, 조금 먹어야 할 것, 주로 먹어야 할 것 등을 구분해나가면 삶의 방식은 저절로 바닥부터 재구성될 수 있다.


내가 건네준 음식이 한 아이의 삶에도 작은 기억으로 남겨지면 좋겠다. 누군가 식사로써 자기 생존을 위협하는 삶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고 싶다면 기꺼이 그를 위해 내가 음식을 만들어 줄 수 있도록 연습해 두려한다. 이런 메뉴들로 정식 한 끼 식사를 차려낼 수 있을 어느 날을 기대한다.


5.

나의 지난한 음식 만들기 전투에 크게 기여했던 책이 있다. 수많은 책 중에서 한 끼 한 끼 해 볼 수 있는 용기를 준 책이다. 병원 영양팀이 직접 참여했다.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식품영양과의 당뇨관련 이론부분이다. 읽어도 그게 그것 같아서 쉽지는 않았다. 분량이 좀 많긴 하다. 2부는 다양한 메뉴를 상황별로 제시했다. 다 따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자기 몸을 위해 건강한 식사를 한번 만들어 볼 수 있는 용기를 갖기에는 충분하다. 물론 잘 만들어 먹으면 정말 맛있다. 음식하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잘 먹으면서 자기 몸 관리를 위한 기대치에 충분히 부응할 수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0-05-30 18: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못 뵙는 사이 요섹남이 되셨군요.ㅎ
하루 세끼를 챙겨 먹는다는 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죠.
우리가 세끼를 챙겨 먹은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던데
배꼽 시계는 정확하더군요.
오죽하면 불가에서는 먹는 것을 수행으로 보잖아요.
정말 도 닦지 않으면 못할 게 끼니 챙기는 것 같습니다.
잘 챙겨 드시기 바랍니다.^^

밥헬퍼 2020-05-30 19:3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음식을 챙겨 먹는 것이 정말 생각보다 쉽진 않더군요. 세 끼를 고집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많이 있더군요. 경험해보니 무엇을 먹는가보다 무엇을 먹지않아야 하는지도 중요했습니다. 나름 즐거운 일입니다. 그나저나 이 서재 오래 잘 지키시네요. 좋은 글 잘 보여주시길 늘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