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에서 소리가 난다』(김장성 글/정지혜 그림, 사계절, 2007년 06월 18일)


1.

여유로운 오후, 맑았던 아침날씨가 오후 되니 흐릿해진다. 햇살이 사라지면 신기하게 사방이 조금 무거워진다. ‘사라진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기도 하다. 가볍게 시간을 보내다가 무심코 그림책 한 권을 떠올린다. 출판된 지 10년도 훨씬 넘었다. 흐린 오후는 시원한 커피와 함께 과거를 추억하기 좋은 시간이기도 하다. 책을 펼칠 필요는 없다. 읽어둔 책이라면 그저 떠오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어떤 장면, 문장을 되새겨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마지막 그림을 자주 기억한다.

이 그림책은 골목을 따라 흐르는 소리를 찾아다닌다. 그 소리 뒤로 조금 허전한 눈빛이 뒤따른다. 이 허전함에는 이유가 있다. 골목에 가득 찼던 그 ‘소리’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골목에 대한 작가의 애틋함이 깊다. 물론 그 소리를 개발비용으로 기꺼이 지불한 건 어른들이라는 아쉬움도 크다.

어떤 소리든지 그것은 ‘살아있음’의 증거다. 소리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것들이 내뿜는 생존증명이다. 소리로써 슬픔과 즐거움이 드러난다. 아우성과 탄식, 환희와 기쁨도 극대화된다. 무엇보다 소리에는 ‘눈빛’이 담겨있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는 어떤 눈빛이 함께 있다. 소리와 눈빛이 공존하는 세계, 거기가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이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곳은 골목이다. 


2.

그림책에 담긴 ‘소리’를 떠올리다보니, 간단한 영화 한편도 생각난다. 2009년 개봉 독립영화「워낭소리」다. 구차한 소환일 수도 있으나 이즈음에 한번쯤 봐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 영화는 이 세계를 살아내는데 적절한 방법, 즉 ‘공감(empathy)’이며, ‘공존(co-exist)’을 일깨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소리’와 ‘눈빛’이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도록 돕는다. 그것은 ‘나와 너, 나와 그것, 너와 그것, 나-너-그것’ 사이의 연대다.













이충렬감독, 다큐멘터리(78분), 2009-01-15개봉


2-1 소리, 소리들

영화 ‘워낭소리’는 소리가 중심이다. 소리는 영화 속 인물들이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다. 영화를 보는 이는 자신도 모르게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소리를 따라가면,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한 마리의 소가 있다.


영화 속 소리는 서로 다르다. 그에게서는 그 소리만 난다. 할아버지의 소리와 할머니의 소리는 다르다. 노부부의 소리와 워낭소리도 확연히 구별된다. 할아버지의 소리는 낮고, 자기를 향해 구부러진 소리다. 들릴 듯 말듯하다. 자칫 왜곡되기 쉽다. 소리의 양은 너무 적어서 상대방에게 겨우 전달될 정도다. 그러니 자칫 이기적인 소리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그는 할 소리만 하고, 하지 말아야겠다는 마음먹으면 아예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소리는 종종 끄집어내자마자 바람 속으로 사라진다. 그 때마다 영화 속에서 그의 존재감도 가물가물하다. 이 할아버지 소리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때가 있다. 워낭소리와 소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그 순간이다.


할머니의 소리는 어떤가. 할머니의 소리는 높고, 꽹과리 치듯 요란하다. 말에 담긴 단어 수는 할아버지의 것에 비할 데 없이 많다. 음색은 얼음장 갈라지듯 얇다. ‘쩡’하고 날카롭게 갈라져 그 파편이 사방에 꽂힌다. 할머니의 소리는 먼저 상대방을 겨냥한다. 그리고 이내 자신을 향한다. 자기 삶에 대한 이유 없는 한탄이 끼어든다. 까닭 없이 상대에 대한 한이 서려있다. 동음반복일 때가 많다. 그 이유인지 몰라도 그 말들은 상대방에게 가닿지 못한다. 할머니 주위를 빙빙 돌고만 있다. 소리는 할머니를 벗어나지 못하고, 할머니는 소리를 놓아주지 못한다. 할머니에게서 떠났다 싶은 말도 무슨 메아리처럼 이내 다시 돌아온다.


소의 소리는 또 다르다. 소는 자기 소리는 물론이고 또 다른 소리를 가지고 있다. 태생과는 무관한 인위적인 소리다. 워낭소리다. 아이러니지만, 소는 자기 울음소리로는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못한다. 그저 ‘워낭소리’만이 존재감의 근거다. 이렇듯 소의 존재감은 인위적이다. 피동적이다. 그 소리에 반응하는 자가 있을 때만 비로소 존재의의를 갖는다. 영화에서 소의 워낭에 반응하는 이는 유일하다. 할아버지다. 할아버지 손길이 아니면 잠시도 자신을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음식은 물론이고, 자기 거처에 안전하게 되돌아올 수도 없다. 설령 할아버지 도움 없이 집으로 돌아온다 해도(할아버지가 만취되었을 때 소가 집을 찾아왔다는 이야기)안정된 쉼을 취할 수는 없다. 소는 자기 존재를 스스로 드러낼 수 없다.


2-2 관계, 관계들


이 소리들은 서로 연관되어있다. 세 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 할아버지와 할머니, 둘째, 할아버지와 소, 마지막으로 할머니와 소의 관계다.


첫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마치 기름과 물과 같다. 두 소리는 한 집에서 울리지만 거의 일방적으로 그친다. 대체로 할머니는 소리를 내고, 할아버지는 반응하지 않는다. 아예 흘려버린다.(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 할아버지는 그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 아니다. 듣지 않은 척 할 뿐이다. 할아버지는 다른 소리를 더 잘 듣고 싶기 때문이다. 두 소리를 모두 듣기보다 자신이 더 기울여야 할 그 소리를 선택한 것뿐이다.


둘째, 할아버지와 소는 할아버지가 적극이다. 할아버지는 소의 ‘모든 소리’에 응답한다. 소도 그러할까? 짐작컨대 그러할 것이다. 소는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다. 특이한 것이 있다. 할아버지는 어떤 경우에도 소에게 자기 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그는 다만 소를 위해 불편한 자기무릎을 꿇은 채 꼴을 벤다. 소의 먹을거리를 위해서라면 농약도 치지 않고 직접 잡초를 제거한다. 그는 말을 하기보다 그 말을 자기 행동으로 드러낸다. 그는 소를 위해 모든 행동을 한다. 그는 사람들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침묵으로 일관한다. 마치 수행자답다. 그의 침묵 속에 소는 그의 소리를 듣는다.


끝으로, 할머니와 소는 무관심이다. 할머니에게 소의 소리는 없는 소리다. 무의미하다. 만약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자기 존재, 자기 삶을 더욱 핍절하게 만들어버린 원인일 뿐이다. 그녀에게 소의 소리는 마른하늘에 벼락 치는 것만큼이나 섬뜩한 소음일 뿐이다. 소리가 커질수록 할머니의 고통도 깊어진다.


소의 자리에서 보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대척점이다. 소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이에서 보이지 않게 소리를 전달하는 매개자다. 그렇게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잇대어 있고,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닿아있다. 워낭소리가 들릴 때마다. 이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어느새 드러나지 않았던 눈빛이 보인다.


3.눈빛

눈빛은 존재들이 보내는 메시지다. 영화 속 세 존재는 눈빛을 보여준다. 그 눈빛은 두 종류이다. 애틋함과 애처로움이다. 애틋함은 사랑하는 감정이고, 애처로움은 질투하는 감정이다. 애틋함은 소와 할아버지가, 애처로움은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소에게 보내는 눈빛이다. 

눈빛은 관계를 말한다. 이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져’ 있음을 의미한다. 상호 의미

있음이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 유대종교철학자)의 견해를 따른다면 애틋함은 ‘나와 너’의 관계에서 일어나고, 애처로움은 ‘나-그것’의 관계를 암시한다과 할 수 있다. 소와 할아버지는 서로 교감한다. 서로는 서로에게 의미 있다. 소와 할머니의 관계는 그렇지 못하다. 할머니는 소를 하나의 사물로 대한다. 그것은 가축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소와 할아버지를 동시에 바라보는 할머니는 그 두 존재가 자신에게 애처로울 뿐이다.


영화 첫 장면은 계단을 함께 오르는 노부부의 모습이다. 말없이 오르다 먼저 말을 꺼내는 이가 있다. 할머니다. 나는 생각해 본다. 할머니는 홀로 걷는 할아버지를 보면 마음 깊이 애틋함을 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소와 함께 있을 때, 할머니 눈에 할아버지는 그저 애처로운 상대일 뿐이다. 소가 사라지고 나면 할머니의 본래 마음은 ‘애틋함’으로 되돌아온다. 사람들은 두 사람 사이에 다른 어떤 것이 끼어들기를 원치 않을 때가 있다. 눈빛은 그것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드러낸다.


이 영화에서 눈빛은 사람이나 가축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카메라 역시 또 다른 눈빛이다. 카메라는 감독의 눈빛을 대변한다. 감독의 눈빛은 어떠한가? 그는 이 노부부와 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영화를 추억해보니, 감독의 눈빛은 자주 할머니를 응시하고 있었다. 카메라는 ‘워낭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사실은 더 자주, 눈을 들어 ‘할머니’를 주목한다. 카메라는 할머니의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한다. 그리고 그 눈을 직시한다. 할머니는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경우가 많다. 관객을 소리로 안내하는 동안 카메라는 할머니 얼굴을 비춘다. 영화에서 할머니는 자주 카메라에 노출된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할아버지의 눈빛보다도 할머니의 얼굴과 그 눈빛을 더 잘 기억한다. 아마도 카메라의 눈빛이 강렬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카메라가 할머니를 응시한 이유가 궁금하다.


할머니는 소의 존재와 눈빛을 수용하지 않는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할머니는 소의 존재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것은 할아버지를 향한 소와 자신의 동병상련을 암시한다. ‘주인을 잘못 만난 악연?’ 이 지점에서 영화는 단지 의미가 확산된다. 서로 물려있는 관계. 고착되지 않고, 일방적이지 않고, 틀에 박힌 방향이 아닌 말 그대로 상호 그물망이 되는 그런 관계인 것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소는 어떤 한 방향으로 그 관계가 규정되지 않는다. 할아버지와 소가 긴밀한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카메라의 눈빛을 통해 나는 할머니와 소가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실상은 함께 걷고 있다. 그래서 소와 노부부는 카메라의 시선에 의해 한 자리에 함께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4.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관계, 사람과 사물 사이 관계는 눈빛, 시선으로 극화될 때가 많다. 대면해서, 표정을 보며, 눈빛을 감지하면서 관계는 깊어진다. 기계를 통해 들리는 말과 소리를 넘어 말 그 자체, 소리를 들음으로써 우리는 관계의 정도를 가늠한다. 그 소리에 실린 눈빛으로써 관계의 질적 깊이를 확인한다.


아쉽지만, 소리가 사라진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끝이 언제일지도 모른다. 비대면이 자연스럽고, 거리를 유지하는 일은 불문율이다. 얼굴을 볼 수는 있지만, 눈빛을 감지하기는 쉽지 않다. 소리는 들리지만, 눈빛을 가까이 보기는 어려운 시간이다. 그것이 자연스럽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자기도 모르는 ‘바람’이 휘돌아 감는다. 그 바람으로써 이 세계는 생존할 이유를 찾는다. 바람을 타고 들리는 소리, 그 소리에 실려 오는 눈빛이 선명할 때, 우리는 공동체다운 연대감을 공고히 만들어갈 수 있다. 배제를 넘어 포용으로, 홀로 있되 함께 있는 그 따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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