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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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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초원의 작가 클레어 키건

어느 이방인에게든 아일랜드는 척박한 땅을 버텨낸 한 그루 나무같이 보일 것이다. 줄기와 잎은 꽃을 피우지도 못한 채 생멸하기를 거듭했고, 그 틈에 뿌리는 소리 없이 썩어버릴 지경이었다.

클레어 키건(Claire Keegan, 1968~)은 아일랜드 출신이다. 그녀는 자신의 조국, 아일랜드 공화국의 역사를 미시적 시선으로 관찰한 작가다. 그의 문학은 개인의 삶과 사회의 뿌리로 향한다. 사회의 폐해를 개인의 불안한 눈으로 관찰하면서 조금씩 들춰내면서 두려운 심정으로 저항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그 저항이 촉발한 어떤 불가피한 슬픔을 문학으로 애도하려는 의도가 뚜렷하다. 그 내용은 대체로 사회 안에서 타인으로부터 변방으로 내몰린 어떤 사람들을 주목하며 그들이 이 세계 속에 조화로운 인간으로 당당하게 재정위 되기를 희구한다. 따라서 그의 소설에서는 비틀거리면서도 정의의 길로 걸어가도록격려하는 희망의 소리가, 낮지만 옹골차게 들려온다.

그는 과작의 작가다. 하지만 기법과 형식은 다분히 치밀하게 문학적(紋學的)이다. 선명한 단어와 간결한 문장, 생생한 묘사, 함축적 은유를 통해 내면과 실제 현상의 조화가 두드러진다. 시적 소설의 면모가 뚜렷하다. 김도영이 한 편의 시를 읽는 것 같다.”(유레카, 484, 2024.3)라고 평가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서술구조는 전반적으로 절정, 파국, 전환적 사건이 두드러지지 않으면서도 이야기가 고요한 강처럼 흘러간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아주 사소하지 않은 중의적 힘

최근작(2021)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하. 이처럼)은 그의 문학적 특징이 도드라진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에서 저자는 개인의 내면 성숙여정에 천착하는 것 같다. 표면적으로는 막달레나 세탁소같은 역사적 사건이 주요 소재처럼 보이지만 그보다는 이 폐해를 바라보는 등장인물의 내면 성장에 주목한다. 마을 사람들과 주인공의 내적 태도와 삶의 방식의 그의 주된 관심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이 폐해를 알면서도 방관하고 묵인하는 자세를 고발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방관묵인은 대체로 선택적 정의에 잇대어 있다. 겉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다. 어느 사회나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그 점에서 사소하고, 미시적이며, 평범한 태도다. 하지만 이처럼의 압권은 이런 사소한 것들이 역설적으로 굳어진 삶을 균열 낼 수 있으면서 동시에 삶을 복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런 관찰은 저자가 구사하는 주된 소설적 전략에서 효과적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장르와 두 개의 도입구, 제목의 중의적(double entendre) 기법이다


먼저 장르 면에서 이 소설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주인공의 일기 형식을 연상시킨다. 일종의 관찰일기인 것이다. 본래 일기란 개인과 사회의 사건을 그저 아무 일 없이 잘 사는 개인의 삶으로 표현하는 데 최적화된 장르이다. 개인적이며, 회고의 성격이 짙다. 작가의 시선은 주인공을 뒤따라 관찰할 뿐 과도하게 간섭하거나길게 평가하지않는다. 이처럼 주인공을 뒤따르는 관찰 태도는 역설적으로 주인공의 내면에서 보이지 않게 위협하는 무력(武力)이 주인공을 얼마나 무력(無力)하게 하는지 전면에 드러낸다


다음으로이처럼에서 도입구는 두 곳이다. 하나는 책의 서문에, 다른 하나는 소설의 첫 단락에 있다. 하나는 서문에 인용된 글이다. 아일랜드 공화국의 선언문 일부다. “공화국은……. 모든 아동을 똑같이 소중히 여기겠다는 결의를 천명한다.” 이 인용문에는 이 소설의 대립 주제가 암시되어있다. 다른 하나는 소설의 첫 단락이다.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복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barrow) 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11).

 

얼핏 보아도 작가는 이 도입구에서 동사들을 연속시킨다. 이런 기법은 생생하고 역동적으로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다.


끝으로, 제목에 사용된 중의적 기법이다이 소설의 제목에 쓰인 핵심 용어인 사소한 것들(small things)’은 그 기능에서 중의적이다. 다른 의미로는 야누스(Janus)에 가깝다, 한편으로, 이 말은 사회적 비법이 횡행한 원인으로 작동한다. 사소한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묵인해버리는 절망적 삶의 태도를 은유한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비법 행위를 깨뜨릴 희망의 힘으로 기능한다. 특히 이 긍정의 의미로서 그 힘은 과거 환대가 대표적이다. 저자는 과거 누군가로부터 환대받은 사소한 기억이 오늘날 거대한 사회적으로 암묵 된 범법에 저항할 수 있다고 긍정한다. 이 환대는 친절함이면서도 타인을 위한 정의로운 투쟁을 함의한다. 저자는 주인공의 환대 기억을 이렇게 쓴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는지를 생각했다. 그것이 한 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120)


이 글 속에 주인공의 과거 사소한기억은 곧 현재 저항의 토대라는 저자의 논지가 선명하다. 이처럼 키건의 소설은 얼핏 사소해 보인다.’ 그러나 고요한 서술로 그 사소한 것들의 힘을 극대화한다. 저자는 이렇게 호소한다. ‘과거 역사가 현재를 견인한다. 환대는 우리 사회가 인간다움을 유지하면서 전진할 수 있는 대동력이다’.

 

과거가 현재를 견인하다는 사소하면서 거대한 문학의 진실-인간다움

이 소설에서 작가가 의도한 사소한 것들의 의미를 추론하자면 이렇다. 사소한 것은 사소하지 않다. 사소한 것은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내면에 굳어진다. 무시되어 사장되기도 하고 살아있어 떠오르기도 한다. 사소한 것은 인간의 내면을 균열하거나 건강하게 하는 야뉴스(Janus) 같은 바이러스다. 사소한 것들은 균열을 일으킨다. 그 균열과정은 자기 내면으로 재유입된다. 이 균열은 불가피하게 점차 사회의 방관과 묵인과 충돌한다.

 

한편, 이 소설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명확하다. 개인이 묵인하고, 지나쳐버린 사소한 것들이 사회의 뿌리를 썩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눈 덮인 듯 평화로운 세계를 도량발호(跳梁跋扈)’하듯 휘젓고, 데퉁궂게 하여 삶의 근원을 소리 없이 흔드는 것은 작은 여우’(히브리 성경 아가서 2:15) 같은 사소한 것들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그 큰 위협을 깨는 것도 사소한 것들이라는 역설이다.


이처럼 이 소설에서 사소한 것은 숨어있는 선과 악의 추동력이다. 평범한 사람을 선과 악의 갈림길에 서게 한다. 선택의 무게를 지게 한다. 그러나 확신해야 한다. 사소한 것이 일으키는 이 격랑은 끝내 희망으로 끝난다. 사소한 것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그것은 고요한 투쟁력으로 강화된다. 돌이켜보면, 인간의 삶에서 사소한 환대로부터 추동된 기억의 힘은 사회의 어떤 위악보다 강할 수 있다. 이 사소한 것으로 인해 그 감춰져 있는 견고한 인습, 굳어진 악이 깨지고 선이 창화할 수 있다. 그 균열한 선 사이로 악이 창궐하기도 하고 악 사이로 선이 창발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 선의 끝에 인간다움이 있다. 이 소설은 국가와 사회에서 인간다움(humanitas)’을 재차 일깨운다.

 

인간다움사소한 것들’이 발원하는 고요한 투쟁력의 실체다. 그 분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다. ‘인간다움에 관해 김기현은 공감, 이성, 자유라는 조건을 제시한다(인간다움:인간다운 삶을 지탱하는 3가지 기준, 21세기북스, 2023). 그런 조건 하에서 유지되는 인간다움으로 이 세계는 선()으로 견고해지고 따뜻해진다. 인간다움이 주는 평화는 개인의 내면적 안위만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의 외피적 정의로움이 잇대어 있다.

 

신학적 견지에서도 인간다움은 한편으로 인간에게 내재된 신의 형상(Imago Dei)을 인정하고 그것을 함께 구현하려는 영성과 관련된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다움은 신이 허락한 공의와 정의, 헤세드(hesed, 환대와 친절)라는 삶의 질서를 함께 실현한다. 사회적-인간적 샬롬(Social- human Shalom)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행위로 견인된다(샬롬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모든 영역의 조화로운 질서를 함의한다.). 물론 이러한 인간다움이 한 개인의 삶에 스며든다 해도 삶은 여전히 요동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순항한다.

 

이처럼 사소한문학이 우리 사회에 말하는 것

우선, 이 소설은 오늘날 개인의 관점에서 국가 또는 사회가 무엇인가를 구체화하게 돕는다. 이 책은 국가나 사회가 가진 폭력성을 고발한 톨스토이의 길과 나란히 걷는 것 같다. 톨스토이는 국가는 폭력이다.-평화와 비폭력에 관한 성찰[레프 N. 톨스토이, 조윤정 역(서울:달팽이, 2008)]에서 국가가 폭력이라는 강제권력을 남용하고 있다고 고발한다. 톨스토이의 관심은 국가의 강제권력에 대한 국민의 대안적 태도이다. 그의 답은 저항이다. 그런데 그 저항은 폭력을 제압하는 또 다른 폭력의 재순환이 아니다. ‘그 폭력의 끊어냄을 위한 비폭력이다. 그가 제안한 유일한 저항은 평화 행동이다. 톨스토이는 '불가항력적인 국가의 존재를 인식한다. 그러면서 그 국가의 삶에 방관하거나 묵인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스스로 자유하라고 호소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국가는 견제의 대상이다. 맹목적 추종은 금물이다. 국가의 폭력을 방관, 묵인하는 행위는 올바른 종교적 삶과도 거리가 있다. 최악의 국가는 국민 본연의 인간적 양심에 마음 기울이지 않고 스스로 악이나 비합리적 종교를 조종하는 체제이다. 그 국가를 내버려 두며 그것에 조종당하는 경우가 최악의 정치이며, 국민이다.

2024123평화로움의 정원에 느닷없이 폭탄이 떨어진 한국 사회를 생각한다. 이후 국가의 악이 최고조에 이른 치졸한 통치자의 시대를 힘겹게 지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이 소설을 통해 몇 가지 다짐도 새롭게 해본다. 첫째, 사회의 정의가 유지되는 주체를 반성한다. 민주 국가의 주체는 환대하는 인간이다. 법 너머를 조망하며 인간을 겸손하게 존중하는 땅의 권력만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나의 사소한 것들을 성찰한다. ‘작은 것들을 위한 노래가 계속 불려야 하는 이유다. 끝으로 세계의 인간다움은 결국 사소한 것들로부터 시작된다는 부드러운 저항, 작은 기억, 그 고요한 투쟁력을 계속 충전해야겠다. 개인과 사회가 기억하는 사소한 환대가 정의의 힘으로 발원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겠다. 과거 사소한 환대라도 우리 사회가 인간다움을 유지하면서 전진할 수 있는 대동력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늘 일깨워야겠다.


그렇게 새해에는 더욱 이 세계의 무질서한 범법을 방관하지 않기로 하자. 나의 삶의 사소한 환대 기억을 민감하게 되살려내자. 이 험한 세계에서 기꺼이 서로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어보자. 나의 사소한 것들로 흔들린다 해도 나를 조련하여 정의의 길로 걸어가 보자. 그리하여 누구나 국가와 사회, 자기 삶에서 견고한 질서, 인간다움, 평화로움을 함께 누려보자. 무엇보다 개인과 사회가 기억하는 사소한 환대가 정의의 힘으로 발원할 수 있다는 희망을 놓치지 말아야겠다. 환대는 아무리 사소한 것들이라도 결국 사회적 평화로움, 정의로움을 되찾는 기억 저항으로 크게 작동할 수 있다는 격려를 붙잡자. 소설가 한강의 선언은 옳다. “과거 역사가 현재를 견인한다.” 키건도 같은 심정으로 호소한다. 아울러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삶의 뿌리가 다시 견실해지길 기대한다. 계절이 되돌아올 때마다 마른 잎 살아나듯 되살아나 개인의 안녕과 사회-인간적 샬롬, 인간다움이 유지되길 소망한다.


[이 글 원본은 <교수신문 25.1.31자 인터넷판에 원본이 함께 실려 있습니다.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30324>

 


한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각자에게 나날과 기회가 주어지고 지나가면 돌이킬 수가 없는 거라고. 게다가 여기에서 이렇게 지나간 날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게 비록 기분이 심란해지기는 해도 다행이 아닌가 싶었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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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의 지배 - 디지털화와 민주주의의 위기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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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데믹과 인포크라시의 시대

전염병의 시대다. 코로나19에 이어진 앤데믹(endemic)이다. 동시에 인포데믹(Infodemic)의 세계다. 앤데믹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라면 인포데믹은 데이타 바이러스에 감염된 시대이다. 모두 피조물과 생활세계를 위협한다. 하나는 삶의 바깥으로부터 스며든 바이러스로, 다른 하나는 삶의 안으로부터 스스로 불러들인 총합적(holistic) 위협이다. 앤데믹은 보이는 유해 질병이다. 인포데믹은 보이지 않게 잠복되었다. 무해한 질병처럼 여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질병이 모두 삶을 무차별적, 총체적으로 공격한다.

그러나 이 치명적 전염병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완전히 대조적이다. 앤데믹은 누구에게나 혐오, 배척, 폐기의 대상이었다. 거리 두기와 비대면은 일상이었다. 하지만 인포데믹은 남녀노소에게 친밀과 무경계와 소유욕의 상대로 여전히 삶을 압도한다. 거리를 둔 친밀감과 왜곡된 이미지라도 드러나지 않는 가상현실과 기계와 무한대면이 자연스럽다.

 

데이터 지배 사회 진단서이자 인간보고서

정보의 지배 Infokratie, 디지털화와 민주주의의 위기는 재독한인철학자 한병철의 글을 전병호가 번역하여 지난 2023년에 출판되었다(원서는 2021년 독일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스마트폰으로 상징되는 데이타(정보)지배 사회를 사회철학적으로 조준하여 해체한다. 저자는 스마트폰이 시대의 제왕이 되어버린 현실을 철학적으로 사유한다. 스마트폰은 인간 사회를 통치하는 바이러스의 근원지다. 설상가상으로 합리성에 근거한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보이지 않는 무기다. 저자는 이런 스마트폰의 위협 시대를 인포크라시(Infokratie)’로 규정한다. 무엇보다 이 세계는 데이터 바이러스에 감염된 합리성 부재의 시대이다. 알지 못하는 순간에 자유를 소실한 정보 감옥의 시대이다. 그의 주장을 갈무리하면, 인포크라시는 정보체제에 의해 생활세계의 디지털화가 정치 분야에 영향을 미쳐 형성된 민주주의다(27).

원서의 제목인 ‘Infokratie(인포크라시)’는 저자의 신조어다. 저자는 우리 생활세계에 창궐하며 숨어있던 바이러스가 지배하는 비가시적 세계의 왜곡된 정치체제를 가상한다. 그리고 이 은닉된 바이러스가 창출해낸 세계가 어떤 양상인지를 진단한다. 민주주의를 숙주 삼아 숨어있던 바이러스의 정체를 찾아낸 것이다. 번역본의 제목인 정보의 지배는 원서의 지향점을 잘 드러내는 것 같다. 그것은 과도하게 스며있는 디지털 문명, 그 정보의 지배 아래서 민주주의가 위기를 겪는다는 의미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에서 암시하듯 이 책은 인포크라시의 구체적 현상과 그것에 의한 민주주의 정치사회의 위기, 나아가 사회적 정의와 거짓이 판단 불가한 시대 상황에 던져진인간을 주목한다.

이 책의 성과는 스마트족이라는 신인류의 정체성을 일깨운 것이다. 이 인간류는 우리가 이미 인지하고 있는, 소속되고 싶은 종족이다. 이유는 명확하다. 발전된 문명에 자발적으로 순응하며 그 혜택을 누리고 싶기 때문이다. 폐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비판을 애써 수용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진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드러났다. 그 데이터 바이러스는 결국 삶의 활력 비타민이 아니었다. 치명적 전염병의 병원균으로 잠복해있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방심하고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진실과 거짓을 분간할 정치적 능력을 소실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저자는 이 점을 적확하게 진단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정치사회 질병 진단서이다. 또한 이 질병사회 에서 삶의 자리가 악화된 채로 적응해가는 변종인간에 대한 관찰 보고서다.

 

책의 논지와 독서방법

저자가 출간한 책들은 대체로 분량이 길지 않다. 그럼에도 주제와 내용은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지난 2012년 한국에서 번역되어 소개된 피로사회(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2014투명사회(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2021리추얼의 종말-삶의 정처 없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전대호 역, 김영사), 가장 최근 2024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모두가 똑같고 모두가 고립된 세상에서등이다. 대체로 짧은 분량에 거시적인 담론을 효과적으로 담아낸다.


이 책의 서술 특징은 문학적 기법을 적절하게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는 정제된 개념 정리를 지속적으로 시도한다. 글이 진행되는 과정에 앞의 내용을 함축하는 정리 문단을 수사학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대표적인 기법은 개념의 대조, 대상의 상호 대구, 은유, 언어의 응축, 전환접속사의 생략(한편, 그런데, 이런 점에서 등등), 주제어의 반복(이것은 그의 책들이 그의 기본적인 철학에 기반해서 서술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책과 책 사이에서도 동일 주장이 빈번하다) 등이다. 특히 단순한 서술이 이 책의 문학적 기법의 장점이다. 이로 인해 거시적 담론이라도 단순 담백하게 전개된다.


책은 모두 다섯 장으로 구성되었다. 이 장들은 마치 한 주제를 다섯 개의 소단락으로 나눠 전개하는 방식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저자의 주장은 일관된다. 저자의 핵심논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정보지배 시대가 무의식적으로 인간을 내적, 외적으로 위협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인간답게 자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 단어는 인식자유. 저자의 주장은 인간은 상황에 대한 비판적 생각하기로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 인식이 인간을 자유하게 하는 힘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책을 출간하고 난 뒤, 출판사 김영사와 나눈 인터뷰(2023. 3. 9)에 그의 핵심 주장을 읽을 수 있다(출처: https://m.blog.naver.com/gybook/ 223038295401? isInf=true). 정리하면, 냉철한 철학적 인식이 인간을 무의식적 바이러스로부터 해방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을 효율적으로 이해하려면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어가는 것이 가장 유익하다. 만약 그가 말하는 인포크라시의 개념과 그의 정치사회 철학을 맛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2장 인포크라시와 제5장 진실의 위기를 읽는 것도 충분히 도움이 된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핵심 주제를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진실의 투명성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투명성은 치열한 담론 끝에 도달해야 하는 윤리다. 투명한 세계는 거친 토론과 이야기의 축적으로 함께 도달하는 공통 세계다. 둘째, 인포크라시 시대의 인간 이해다. 이 세게에서 타자 있음으로 자신의 세계를 온전히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타자의 배제와 경청하지 않음은 결국 인간의 존재감을 상실하는 치명적 바이러스다. 스마트종족의 출현은 타자 있음을 배척한 세계를 구성한다. 이는 함께존재해야 하는 태초의 인간 이해와 대립한다. 유한한 인간, 필연적으로 죽음에 직면할 인간의 본질을 스스로 파괴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병철의 주장은 명확하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정치체제라는 것이다. 동시에 이 시대에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특히, 신을 따르는 인간)은 고착된 진리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권면한다. 진실을 분별하고 타인과 함께 그 진실을 철학하며 실행하는 용기를 유지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인포크라시 시대, 진리에 의한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한병철의 이전 글들은 정보의 지배와 대체로 비슷한 주제가 순환한다. 피로사회, 투명사회, 권력이란 무엇인가(김남시 역, 문학과 지성사, 2011)등에서 다뤄진 그의 주장과도 연동한다. 이 책들에서 저자는 인간성에 대한 우리 시대의 관점을 재조명한다. 그것은 성과중심과 정보지배의 시대가 인간성을 먼지처럼 여겼다는 것에 대한 고발이다. 특히 진실추구 용기를 소멸시킨다. 이 용기는 인간성의 가장 핵심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는 이 용기를 짓누르는 힘에 스스로 투항했다. 이로써 인간은 참과 거짓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며 진리를 향해 전진하는 태초의 본모습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 작은 책은 인포크라시 시대에 태초의 인간성 회복과 유지를 위한 분투를 권고한다. 아쉽지만, 구체적 실천 대안을 제시하진 않는다. 다만 민주주의라는 정치제제에서만이라도 그 용기가 발현되길 희구한다. 인간의 생활세계 안에서 형성된 정교한 교리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한 신념을 담론으로 내어 놓고 비판해 보자고 제안한다. 수없이 쏟아내는 말과 글들이 우리 시대 인간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이끌어가는 맥락에 잘 놓여지도록 말이다.


우리 시대에 모든 옳은 은 끝까지 옳아야 한다. 그 말이 빛을 발하는 것은 그 말이 놓인 세계 속에서 그 역사적 맥락이 옳다고 인식될 때이다. 예를 들어 자유공정을 주창하며 비틀거리는 정치가와 종교지도자들은 스스로 자신의 자유와 공정을 되묻고 그 선악을 판단받아야 한다. 언론가와 문학가도 마찬가지다. 인포크라시에 가짜 뉴스로 점철된 정보지배로부터 군중을 안전하게 보호할 책임을 각성해야 한다. 이것이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이유다.


결론적으로 한병철의 주장은 인포데믹 시대에 말과 글의 지도자들의 삶의 방식을, 글을 퇴고하듯, 반추하게 한다. 진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이들을 위한 타자있음의 열린 세계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마음을 다해 의 시대를 반성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정보의 지배에 갇혀 스스로 감시를 받는 것도 모른 체 자신은 자유로운 듯 군중을 호도하지 않았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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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시간 - 여인숙 달방 367일
이강산 지음 / 눈빛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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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진예술가 이강산(1959~)다큐 일기. 다큐멘터리 일기에 사진과 실제 경험을 담았다. 저자는 지난 202079()부터 2021710()까지 대전역 근처 대덕여인숙에 머물러 달방 생활을 했다. 이 기간, ‘여인숙을 주제로 인간의 생존 공간 탐구를 시도했다. 따뜻한 르포(르포르타주).


이 책의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다큐. 여인숙 사람들의 삶을 직관찰하고 경험한 것들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일기. 개인의 기록이면서 공적 담론까지 이어지는 사회적 일기다. 특히 사진은 개인 경험을 사회 이슈와 직접 연관 짓는 경첩 기제(hinge mechanism)로 작동한다


"한 평짜리 에서 폭염과 한파와 빈곤 함정에 파묻힌 채 없는 듯, 죽은 듯 살아가는 달방 사람들, 시한폭탄 같은 소요와 폭력적 갈등을 제거하고 마지막 불씨처럼 꺼져가는 인간의 말과 체온 회복이 절실했다. 사진을 인화해서 나눠주면 부지불식 간에 의식의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252)

 

책은 모두 다섯 장으로 구성되었다. 여인숙 사람들과 함께 살았던 367, 여름부터 다음 해 여름까지 다섯 계절 동안 경험한 에피소드가 담겨있다. 이방인이면서도 그들과 함께 산 이유는 명확하다. 그 터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손닿을 자리에서 함께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공존과 공재(共在)가 목적이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여인숙 밖의 세상으로 두고 볼 때,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2년 남짓한 시간에 철거 직전의 여인숙 두 곳에서 열대여섯 사람의 삶과 죽음이 교차했으니, 2년이란 실로 장대한 인간의 시간 아닐 수 없다...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 역설적 인간의 시간은 다름 아니라 인간의 공간이기도 하다. 기껏해야 한 평 남짓한 시공간에서 800여 일을 살아낸 이 기록을 나는 오늘 조심스럽게 여인숙 밖 세상으로 전한다. 당연하게 이 모든 것은 진실이다." (인간의 시간, 313-314).

 

이 말 속에 인간의 시간에 대한 정의가 있다. 그 시간은 죽음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인숙에서 체화하는 모든 삶, 크로노스(kronosis). 따라서 인간의 시간은 다층적 의미다. 한편으로 여인숙에 머무는 인간이 짐승처럼 다뤄지는 시간이다. 저자는 이것을 우회적으로 고발한다. ‘짐승의 시간속에 방치된 인간 권리를 항변한다. 다른 한편, 인권의 시간이다. ‘여인숙이라는 사회적 퇴물, 혐오의 공간으로 인식된 삶의 터전에서도 상호 간에 환대하며 인간의 당연한 사랑을 나누는 사람다움의 시간, 카이로스(kairosis)를 함의한다. 이 의미를 통해 저자는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최저 권리마저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탈취당한 땅의 사람들을 변호해야 할 당위성을 설파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의 저술 목적은 명확하다. 저자는 이 보고서 같은 일기문학으로 여인숙 밖의 사람들을 환대와 공존의 장인 여인숙 안으로 초대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인숙의 사람들에게도 인간의 시간이 살아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사람들이 죽음의 공간으로 치부해도 여전히 생()의 시간은 흐르기 때문이다. 죽음 계곡 같은 공간에 흐르는 짐승의 시간을 인간의 시간으로 쟁취하여 재생하려는 것이다. 또한 여인숙 사람들의 삶은 사람다운이야기며, 그들의 관계는 샬롬(평화)이라는 것을 웅변한다. 고대 사람들의 상상 속 죽음 공간인 스올(Sheol, 하데스) 같은 여인숙에도 매일 생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은 것이었다. 스올은 죽음의 빛이 밀려드는 생의 종점이다. 고대 지혜자 코헬렛(Qoheleth)이 말한 대로 더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으며,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는”(전도서 9:10)곳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죽음 계곡 같은 여인숙에서 오히려 생()의 희망을 보았다. 삶의 생기가 흐르는 낙원의 흔적을 찾아냈다. 여인숙에서 사는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코이노니아(koinonia, 관계)를 빛과 어둠으로 극명하게 조명했다. 폐광 같은 여인숙에 여전히 살아있는 인간의 권리와 끊어낼 수 없는 관계의 끈적함을 자기 몸으로 입증해냈다. 몸 하나 눕히면 꽉 차버릴 0.8평 공간에 자기를 밀어 넣는 방법을 선택하고서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여름으로부터 숨마저 얼어버려 굳어버릴 것 같은 겨울, 다시 여름으로 되돌아오는 시간동안 사람들의 삶에 뿌리를 내린 생기를 함께 경험했다. 이처럼 이강산의 책은 인간 사이에 견고하게 자리잡아야 할 안전한 지대에 대한 분투를 담고 있다.

 

책을 읽으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왜 우리는 타인의 삶을 지키려 하는가?" 이강산의 책은 답한다. 죽음 같은 땅의 삶 너머에 자리한 생의 여백을 탐색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이 책의 의의는 이것이다. 즉 문학이라는 비폭력의 힘을 통해 이 세계가 안전한 지대, 생의 여백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것을 상상하도록 자극한다는 점이다. 이는 마사 누스바움(Martha, C, Nussbaum, 1947~ 미국 법철학자)이 주장하는 시()적 정의와 이 책이 같은 맥락에 놓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스바움은 이렇게 말한다


"문학은 인간의 삶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러나 시민의 삶에 문학이 기여하는 가장 큰 공헌은, 종종 둔감하고 무딘 상상력을 가진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이나 사고나 감성 속에서나마,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애써 인정하도록 만드는 그 능력에 있다." <“민주적 시민과 서사적 상상력,”(황은덕 역)오늘의 문예비평(2010. 11), 45.>

 

이 말은 정치와 법으로만 통치되는 이 세계에서 '공감의 철학'이 곧 문학의 정치적 실현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처럼 그의 글은 땅바닥에서도 하늘을 바라보며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삶의 진실이 담겨있다는 것을 자기 몸으로 확인한 탐사보도문이다. 그가 육화한 증거는 우리 삶 어딘가에 드러나지 않은 채 감춰져 있는 생존 여백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미생(微生)에 대한 사회적 공공선으로서 땅의 사람들과 공존해야 하는 정의에 대한 사회적 해석학이며, ()철학적 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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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정치 - 자유와 연대를 위한 신학적 제언
이용주 지음 / 동연출판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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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창조자의 대리인으로서 인간은 선과 악의 능력(가능성)이라는 자유로 

이 땅에서 자유와 연대라는 사랑의 정치적 행위, 교회적 삶을 실현해야 한다.”

 

1.

본서는 저자인 이용주 교수(숭실대학교 인문대학 기독교학과 조직신학)가 지난 2009년부터 2021년에 걸쳐 발표한 논문들을 취합하여 엮은 모음집이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자신의 신학 함의 궁극적 주제에 대해 신학의 알파와 오메가는 자유이다.”(5)라는 명제로 명시한다. 이 명제는 독일관념철학자인 셀링 철학에서 차용하여 재서술한 문장이다. 저자는 이 책을 구성하는 각 논문에서 자유, 때로는 명시적으로, 때로는 함의적으로 서술한다. 이를 통해 자유의 철학적 관념과 신학적 관념을 동시에 효과적으로 입증한다. 각기 다른 주제들을 다루는 듯 보인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는 하나의 논지로 잘 엮여 빛나는 보석처럼 일관되게 구성되었다.

 

2.

이 책의 핵심 논지는 다음 몇 개의 연속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신학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총의 삼위일체적 활동을 합리적으로 진술하여야 한다. 이런 삼위일체적 신학에 근거해 교회는 이 세상에서 인간이 자유로운 삶을 실현하도록 돕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그 과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자유에 근거하여 사람들과 이 세계가 상호간 자유로운 친교의 공동체로서 활동하는 것이다. 그 활동은 자유의 종착점으로서 사랑과 연대의 현실화이다. 사랑과 연대는 사회민주주의라는 정치적 공동 삶의 형태로 가시화된다.

 

3.

이런 논지를 효과적으로 논증하기 위해 저자는 성서에 견실하게 터를 세우고 독일 관념론자인 셀링, 창조주의적 관점을 삼위일체론에 적용하여 신과 인간과 창조 세계를 탐색한 판넨베르그, 사회주의적 사상을 신학과 목회에 접목한 하르낙과 바르트의 주장들을 그들의 글과 책, 다양한 문서들을 자세히 읽으며 조직신학적(또는 역사신학적)으로 치밀하게 다룬다. 이런 읽기를 토대로 구체적인 실천 대안으로서 루터의 신앙과 실천의 관계, 바르트의 신학 사상 초기부터 감지되는 사회적 관심을 재조명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신학적 사고와 대안이 어우러진 결과로서 정치 체제 중 하나인 사회민주주의 정당 활동을 실천 사례로 제시한다.

 

4.

이처럼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철학과 신학의 상호 관계를 깊이 탐색하고 독일이라는 특수한 국가 상황에서 발생한 신학자들의 분투를 적극 반영한다. 이런 저자의 노력에 의해 이 책은 오늘날 한국 교회가 가진 교회론에 대한 기본적인 의식을 전환시킨다. 저자는 그동안 한국교회 신앙이 이 세계의 다양한 현실에 대해 스스로 함몰된 태도로 일관함으로써 부정과 두려움을 초래했다는 사실을 신학적 관점에서 적확하게 짚는다. 이를 토대로 저자는 교회(와 신앙인)가 세계 밖이 아니라 세계 안으로 직접 들어와 인간과 함께 활동하는 하나님의 자유를 생동감있게 체감하도록 추동한다. 그리하여 교회(와 신앙인)는 그 막연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마침내 자유로운 신앙인(인간)으로써 이 세상과 기꺼이 대화하고 섬기는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그런 일련의 교회의 삶에 신학적 도움을 주고 싶다는 동기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서의 자유론은 자유에 근거한 교회론이라 할 수 있다. 실제 그리스도인 개인에게, 또는 목회 현장에서 실현 가능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실천 방안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5.

이 책의 서술 특징과 관련해서 덧붙일 것이 있다. 저자의 글쓰기 전략은 본서를 이해하는 데 적절하다. 사실, 각 논문들은 조직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아니라면 단번이 이해하기 힘든 주제들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염려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저자의 각 논문들은 일정한 서술 형식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일단 각 논문에서 저자는 해당 주제에 대한 자신의 논지를 명확하게 밝힌다. 이어서 그 논지를 입증하기 위한 논거들을 변증법적으로 서술한다. 해당 주제를 요약하고 그에 반대되는 주장, 그리고 그 주장들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제안한다. 마지막으로 해당 주제를 요약, 결론짓고 그 주제가 가진 함의와 한계를 함께 제시한다. 따라서 일반 독자는 저자가 제시하는 다양한 자료들과 문서들을 느슨하게라도 따라가다보면 저자의 논지를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6.

본서는 415개 장으로 구성되었다. 각 장은 저자의 관점이 드러날 수 있는 방식으로’(6) 재수집, 배열했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자신의 관점이란 자유가 신학의 출발점이자 목표라는 것이다. 실제로 독자는 1장부터 15장까지 자유로부터 시작하여 자유로 마감한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책에 따르면, 저자가 천착하는 자유개념의 출발은 프리드리히 빌헤름 요세프 셸링(Friedrich Wilhelm Joseph Schelling, 1775-1854)자유론이다. 마감은 삼위일체적 창조자와 유비되는 신-인간-세계의 연대로서 현실의 사회민주주의다. 무엇보다 독자들은 이 15개의 장을 하나씩 읽어나갈 때마다 그것을 디딤돌로 삼아 현실 교회의 궁극적 지향점이 자유의 실현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적확하게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7.

이런 주제에 효과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독자라면 이 책의 서론격인 “1(1-4) 셀링과 신학을 세밀하게 읽는 것이 유익하다. 다만 1부의 제목이 셀링신학이라는 것을 유의하는 것이 좋다. ‘셀링의 신학이 아니다. 비록 신학으로 출발했던 셀링이지만 그의 태도는 점차로 독일 관념론 철학자로서 신학을 철학의 틀 안에서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의 출발인 자유론역시 철학이라는 큰 틀에서 신학적 개념을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 점이 독자들에게, 특히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셸링이라는 학자는 물론이고, 그 철학적 신학이라는 서술 방식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저자의 조직신학적 탁견과 세밀한 서술 덕분에 이런 낯섦은 단숨에 불식된다.

 

8.

실제로 셸링은 신학 영역에는 잘 언급되지 않았다. 국내 철학 분야에서야 어느 정도 그 입지가 명확한 상황이겠지만, 신학 영역에서는 셀링의 철학은 여전히 탐구불모지이기 때문이다. 셸링을 신학 주제로 다루는 학계의 연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 같다. 아마도 이 책의 저자인 이용주 교수가 누구보다도 기독교 신학에 근거한 셀링의 철학을 치밀하게 논구한 학자일 것이다. 저자는 지속적으로 셸링의 철학으로부터 신학으로 이행되는 주제를 천착해왔다고 할 수 있다.(이 책에 앞서 저자는 셸링과 관련하여 셸링 철학의 역사적 발전에 대한 신학적, 체계적 해석에 관하는 논문을 독일 튀빙겐 대학에 제출한 바 있다. 이후 국내에서는 셸링과 관련된 다음 책을 번역했다. Hans Michael Baumgartner/Harald Korten, 이용주 역, 셸링Schelling-절대자와 자유를 향한 철학(서울:동연, 2013). 원제 Friedrich Wilhelm Joseph Schelling(München: Beck, 1996)

 

9.

무엇보다 지난 15년간 저자가 셀링과 관련되어 국내에서 발표한 소논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특히 선과 악의 문제를 창조신학적 관점에서 서술함으로써, 악을 이해하는 교회의 기존 관점을 각성했다는 것은 적지 않은 학문적 기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을 반영하듯 본 서에서 저자가 1부에 배열한 논문들은 셸링의 철학에서 주장하는 자유론의 개념을 신학적으로 적용한 심도있는 연구결과들이다. 독자들은 악의 문제를 신의 관점과 연계하여 서술한 내용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4장 악의 문제와 신-셸링의 자유론을 중심으로”).

 

 

10.

이제 본서의 구성을 잠시 살펴보려 한다. 큰 틀에서 본서는 셸링의 자유론의 개념을 창조신학과 연계하여 ()’을 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11). 이어 논의를 심화 확대시켜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지향해야 할 삶의 문제를 정치와 연계한 삼위일체 신론을 다루면서 그 정치 영역의 한 대안으로 사회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415). 즉 본서는 전반적으로 창조신학적 관점에서 시작된 신() 이해가 사회민주주의라는 구체적인 정치 체제를 예로 들어 가시화되는 것으로 집약된다. 이 처음과 마무리 주장 사이를 연결하는 주제가 있다. 바로 창조신학적 관점에서 이해한 인간에 대한 논의다.(2부 창조와 인간 특히 6, 7, 8). 주목할 것은 이 단락에서 저자는 고전적인 인간 이해로서 창조신학적 관점 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관점에서 오늘날 새롭게 제시되는 트랜스/포스트 휴머니즘에 근거한 인간 이해를 아울러 비판적으로 성찰한다는 점이다.

 

11.

저자는 이런 구성틀을 책 제목에 이미 밝혀 두었다. ·인간·정치-자유와 연대를 위한 신학적 제언. 독자들이 예상할 수 있듯이, 이 제목 속에는 신, 인간, 정치라는 세 요소가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제목은 인간과 이 세계 안에서 실현되어야 할 궁극적인 신앙삶인 자유연대의 실체가 정치라는 항목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예시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런 논의와 다소 이질적인 주제도 있다. “3부 자유주의 신학이다. 저자가 이미 밝힌 대로 이 단락은 한국 교회 상황에서는 쉽게 동의하지 않을 주제다.

 

12.

그러나 오히려 이 책의 특장(特長)은 바로 이 '3부 자유주의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자유주의 신학은 오히려 자유의 확장이라는 근대적인 사회 변화를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복음의 정신에 기초하여 추동하고자’(8)했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재조명한다면, 저자의 확언대로 하나님의 자유에 기초해서 인간의 자유를 근거 짓는 것이 신학의 결정적인 과제라는 사실에 새롭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은 한국 교회가 무비판적으로 유지해온 자유주의신학에 대한 오해를 극복하면서 동시에 자유주의신학에 대한 긍정적 관점을 제고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이처럼 자유주의 신학을 천착한 3부의 세 개의 논문은 자유에 대한 철학적 신학적 담론(1-2)이 실제 사회민주주의 정치체제라는 인간의 삶의 자리(4)로 이행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특히 독자들은 ‘3부의 11장 바르트 신학에 대한 자유주의신학적 해석-렌토르프를 중심으로를 탐독한다면 이런 저자의 관점을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서는 제목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그 내용 흐름을 다음과 같은 구성틀로 이해할 수 있다.

1부 자유의 근거로서 신()

2부의 삼위일체 신의 대리자로서 인간(人間)

3, 4부 자유론과 자유주의 신학의 결실로서 사회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政治體制)

 

13.

본서는 서로 다른 시기에 쓰인 글이면서도 일관된 조직신학적 주제를 천착한다. 다시 말해 선과 악의 능력으로서 자유를 가진 인간은 삼위일체 창조의 신의 대리자로 이 세계에서 사랑과 연대를 토대로 자신과 타인의 삶을 자유하게 하는 교회의 삶을 실현해야 한다는 주제를 심도있게 논의한다. 이 책은 철학적 관점에 근거하여 신학적 주제를 논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신학적 관점이 철학적 주제를 상기시킨다. 학문적 주제의 통섭을 잘 보여준다. 또한 본서는 조직신학적 관점과 성서신학적 주제가 연동되고, 성서신학적 관점이 조직신학적 주제와 호응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따라서 조직 신학과 성서 신학이 교회를 위한 신학으로 조화롭게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14.

다만, 본서가 다룬 주제들이 대체로 독일을 중심으로 수집된 자료라는 점은 다양한 관점의 자유론을 모색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그러나 이런 점에서 좀 더 다양한 자료들에 의해 이 논의가 확장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즉 자유론에 근거한 ‘사회민주주의’와 같은 정치사회적 체제는 물론이고 , 전도서 같은 히브리 성경에서 주목하는 선과 악의 문제 등과 신학적 관련성을 심도있게 모색하는 토대를 더욱 견고하게 할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 교회 상황에서 바르트 신학을 주목하며 추앙하는 목회자들이라면 오랫동안 경시되어온 바르트의 자유주의 신학을 재점검하고 그 목회적 장점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문득, 책의 표제에 , 인간, 정 치라고 정 치가 띄어쓰기 된 것에 어떤 의도가 있는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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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스러운 게 아니라 어색한 거야 - 여전히 삶이 어색한 마흔 살의 여물지 않은 이야기
소재웅 지음 / 훈훈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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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은 에세이 모음집이다. 여든 아홉 편과 하나 덧붙여진 글 등 모두 90편의 글로 구성되었다이 책을 천천히 다 읽고 난 뒤, 나는 아흔 한 번째 글이 남았다는 것을 알았다. 지난 2015년 작약을 무척 좋아하셨던 나의 어머니가 하늘로 돌아간 날이 생각난 것이다. 그 하루 전, 나는 청산도 둘레길을 천천히 걸었었고, 어머니는 귀천 직전 아들이 돌아올 시간을 기다렸었던 것 같다. 생애 마지막 몇 년은 삶이 아예 단순해졌다. 하루 종일 병상에 누워 하늘과 창밖 꽃을 보고, 아들이 한두 번 씩 찾아와 가볍게 식사를 차리고 먹여주며, 그 옆에서 투박한 대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삶의 즐거움이셨던 것이다. 솔직히 그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문득 나의 엄마의 김치찌개가 살아난다. 쑥스러운 게 아니라 어색한 거야(훈훈, 2022)는 나에게 그 미안하고 고마운 추억을 선물로 남겨주었다.

 

2.

작가 소재웅은 글로써 삶과 삶을 훈훈하게 이어주는 노력을 지속해오고 있다. 그가 앞서 자기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은 여러 책들과 다른 이들의 삶을 엮어 출판한 책들, 그리고 곳곳에서 함께 하는 글쓰기 수업들은 그 노력의 결실들이다. 특히 이번에 출간된 이 책은 저자가 갑자기 어머니를 상실한 큰 슬픔을 그대로 받아들인 채, 그것과 함께살아가려는 내적 분투를 글로 남긴 훈훈한 에세이다. 저자는 부재를 부재로 받아들이는 지난한 과정”(10)을 통해 여전히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억지로 벗어나기보다 그것을 보듬고 살아가는 법을 한 편 에세이에 담아 독자들과 나눈다. 그의 글 속에는 사랑하는 존재의 부재를 겪는 이들을 위로하려는 마음이 가득하다. 저자는 그 부재의 슬픔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기억에 근거한 인내라는 것을 일상의 이야기로부터 조곤조곤 들려준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인간미와 온기가 스며있다.

 

3.

슬픔은 수다가 어렵다. 기쁨이야 누가 묻지 않아도 쏟아낼 말이 차오를 수 있다. 하지만 슬픔은 질문을 받을수록 점점 더 수렁에 들어가는 듯한 감정의 늪이다. 그런데 그간의 글쓰기를 보면 저자는 이 슬픔의 위력에 당당하게 대응해왔던 것 같다. 특히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자기가 느닷없는슬픔에 대응한 방식을 잘 보여준다. 예를 들면, “장례식장은 다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곳이지만, 이곳엔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따뜻한 위로가 들끓는다.”(7. 다소 그리운 에세이. ‘결국, 이야기는 남는다.’(28))는 말이 그렇다. 생각해보면, 그가 슬픔을 대하는 방식은 그 슬픔에 과거의 기억, 현재의 일상, 심지어 미래의 소망으로 이야기 옷을 입히는 것이다. 슬픔을 자기 삶의 옆자리로 기꺼이 초대하는 것이다. 슬픔을 오히려 따뜻한 수다의 글로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자기 슬픔 속에서 남모르게 분투하는 이들에게 공감(empathy)하는 것이다. 그 공감은 서로 보이지 않아도 공존(co-exist)한다는 위로다. 그래서 이 책에 소개된 일상의 에세이들은 사소한 경험으로 보인다 해도 슬픔의 일상에서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따뜻하게 제안한다. 슬픔과 함께 사는 훈훈한 삶의 안내서다.

 

4.

사실 슬픔은 물컹하다. 물풍선 같다. 조심하지 않으면 담겨진 물이 곧 터질 듯 위태로운 감정이다. 그래서 그것은 딱 부러진 정답이 없다. 그냥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스스로 소멸해서 새로운 기쁨으로 드러나도록 기다리는 것이 좋다. 이 책에서 이런 저자의 태도를 잘 읽을 수 있다. 저자는 슬픔이 삶의 모든 것에 어느 정도 깃들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안내한다. 저자가 글의 소제목으로 설정한 다소라는 말은 어디에나 어느 정도로 스며있는 그 슬픔의 일상성과 위태로움을 잘 드러낸다. ‘다소(多少)조금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라는 의미이다. 이 특유의 조어법(助語法)은 이 책을 쓰는 동안, 아니 이 후에도 저자가 경험할 슬픔, 사랑하는 이, 사랑하는 것을 상실한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억지로 감추지 않은 흔적이다. “엄마가 남긴 글들은 허투루 쓴 글이 하나도 없다. 그 순간에 한 존재를 향해 깊이 들어가서 간절히 기도하며 살아갔다.”(136)(37. 다소 엄마생각나는 에세이 작은 목소리를 줍다) 그러니 이 책은 슬픔 극복이나 회피가 아니라 나의 슬픔에 공감하는 누군가가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가장 특별한 사실을 평범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5.

이 책은 가볍게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부담 없다. 그래도 나는 이 책을 한 번에 다 읽지 못했다. 아홉 개로 구성된 이야기 단락들을 하루에 하나 씩 읽었다. 읽으면서 각 에세이에서 저자가 남긴 문장들을 천천히 다시 적어두었다. 언젠가 내 삶에서 느닷없는 슬픔이 밀려올 때 그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일깨우는 적절한 문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자기 슬픔을 위로하려는 것을 넘어 누구라도 자신의 슬픔을 오히려 글로 남길 수 있다는 용기를 조용히 자극한다는 점이다. 돌아보면, 자신이 겪은 슬픔을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한 편의 책으로 남겨둔다는 것은 참 소중한 수고다. 이 책이 여러 사람들에게 널리 읽혀지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우리 세상이 느닷없는 슬픔으로 삶이 위태로워진 사람들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슬픔은 혼자 삭혀야 할 분투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로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자신의 소중한 인생 자산이기 때문이다.

우선 나만 생각하자는 생각으로 엄마에 대한 마음을 마음껏 표현했다. 마음껏 표현했다는 건 내가 느끼는 그대로를 표현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 마음을 솔직히 표현하면서도 내 마음을 조각하는 기분으로 다듬어가려고 애썼다.(‘한 존재의 삶은 죽음으로서 완성된다‘.중에서)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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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2-03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글 올려주셨네요. 잘 지내시죠?^^

밥헬퍼 2023-02-09 07:48   좋아요 1 | URL
아이쿠...댓글까지 달아주셨네요. 네 저는 잘 지냈습니다. 사실, 그동안 묵혀두었던 박사 논문을 지난 1년간 다시 정리해서 제출했습니다. 17년만에 마무리했습니다. 늘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stella.K 2023-02-09 09:54   좋아요 1 | URL
어머, 그러셨군요.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이제 자주 뵙는건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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