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새 5월 끝날이다. 오늘따라 초여름날씨다. 바람도 습하다. 5월이 마지못해 길을 비

켜준다. 요즘은 날씨들이 얽히고설켜 방향을 종잡을 수 없다. 나는 계절이 혼란스런 문턱에 ‘서 있다.’ 한 때 법정(法頂)은 시대의 아픔을『서 있는 사람』(1975, 샘터사/2003 재출간)으로 상징화했다. 두 다리로 삶을 버텨야만 하는 사람들을 그려냈다. 앉을 시간이 올 때까지 그들은 끝내 서 있어야 한다. 걸어야 삶이 되는 세계에서 ‘서 있는 사람’들은 숨 쉴 여유마저 없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르는 것처럼 이 시대 5월은 예측불가한 계절이 되어버렸다. 숨 가쁜 걸음을 걷고, 거칠게 다시 내뿜는 삶이 가로막힌 시대라해도 두 발로 힘차게 걷는 세계를 마저 잃을 수는 없다.


2.

내가 머문 서재는 고요하다. 나지막한 산 아래로 집 몇 채가 들어앉았을 뿐이다. 여린 바

람마저 웅성대듯 들린다. 맑은 날이 아니어서 햇살마저 사라진 날이면 ‘몇 시인지?’는 무의미하다. 고요한 공간은 시간마저 감춰버린다. 침묵은 소리 없음이 아니다. 소리를 삼켜 마음에 담아 두고 즐기는 또 다른 사색이다. 오후가 되니 서재엔 더욱 정적이 흐른다. 내려 둔 커피가 조금 식었다. 괜한 마음에 한 모금 들이킨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새 근처 푸른 하늘 아래 다소곳하게 자리 잡은 독립서점을 찾았다. 느슨하게 둘러 꽂힌 책들이 오히려 여유로워서 좋다. 낮은 한옥 지붕에 아담한 크기의 집 세 채가 ㄷ자로 이어져있다. 기여하는 비용을 지불하고, 서가 사이를 느긋하게 산책한다. 내 책이 아니라 다른 이가 그렇게 꽂아둔 이유를 생각하며 책을 꺼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책의 배열은 그의 관심사다. 오늘 나의 픽북은 여러 권이다. 그 중 첫 번째 책. 바바라 스톡, 『반고흐와 나』, (미메시스, 2019)다. 두 번째 책. 다비드 르 브르동,『느리게 걷는 즐거움』,(북라이프, 2014/2020).



3.

만화가 스톡의 책은 흥미롭다. 그래픽을 따라 반 고흐와 자신의 삶을 교차시킨다. 알선 책 『반고흐』에 대한 뒷이야기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만화(그래픽)라는 점이 오히려 가독성을 쪼금 방해하기도 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제와 전개는 역동적이다. 한편 브르동의 글은 오래 전『걷기예찬』(김화영 역, 현대문학, 2002)으로 처음 접했다. 그 때는 지금처럼 길을 걷는 즐거움을 제대로 누리기 힘든 삶이었으니 그 때 그 길은 추상에 불과했다. 그 후 내 삶은 그 때와는 사뭇 다르다. 서점에서 다시 그의 글을 만나 가볍게 펼쳐 읽으니 기억이 살아나는 느낌이다. 그대로 주저앉아 한참 다시 읽었다. 레몬차가 다 식어버렸다. 길을 걷는 즐거움을 진부할 정도로 극찬하는 브르동의 견해에 나는 적극 동의한다.


4.

석양이 멋진 서점에서 우연히 선택한 책 두 권이 묘하게 어울린다. 시대를 넘어 두 예술가들이 고뇌하는 삶과 자기 앞에 놓여진 길을 걷는 사색이 그렇다. 해가 저물어버렸다. 서점엔 주인장 외에 아무도 없다. 늘 생각하지만, 이 외진 서점까지 이 시간에 찾아오기란 쉽지 않다. 서점을 나왔다. 다시 나의 서재로 돌아왔다. 브르동의 책을 다시 펼친다. 언젠가 방영되었던 길을 걷는 삶을 소개하는 다큐와 자연스럽게 겹친다. 책과 다큐는 사실 같은 말을 해준 셈이다. 길을 걷는 일은 배움이자, 사색이며, 삶을 성찰하는 일이라는 것. 과장이라해도 동감한다. ‘길’을 걷는 삶에 서술한 그 다큐는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또 다른 우주, 길>. 처음에는 낯설었다. 이제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렇다. 길은 마치 우주 같다. 길은 길에 이어지고, 길은 길로 확장된다. 끝없다. ‘길을 걷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끝없는 우주를 유영하는 여행일지도 모를 일이다. 과언은 아니다. 은 무한하다. 모든 길은 뒤섞여 이어진다. ‘길의 끝’은 순례자가 멈추는 그 자리다. 길은 그가 멈추는 곳에서 끝나고, 그가 계속 걸을 때 다시 열린다. 사람이 길을 걷는 것이 아니다. 길이 걷는 이에게 열어주는 것이다. (*나는 그 다큐제목을 이렇게 읽기도 한다. ‘길도 우주(宇宙)이다’. 사실 이 제목의 역명제는 성립하지 않는다. ‘우주는 길이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듯이 ‘길’은 도구나 수단을 상징하지 않는다. ‘길’은 사유하는 대상 그 자체다. 길은 그 자체로 목적이다.)


5.

'걷는다‘는 ‘길’에 적합한 행동이다. 사이사이 달릴 수도 있고, 기계를 이용할 수도 있을 테지만, ‘걷는다’보다 적확한 상징은 없다. ‘걷는다’는 그 길을 가장 길답게 만드는 숭고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말도, 손짓도, 행복한 표정도 그 순간만큼은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길에서는 ‘걷는다’는 것만 유의미하다. 그 길을 ‘걷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그 길을 길답게 만든다.

길은 걷는 이들로 인해 빛난다. 그들이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은 길의 가치를 높인다. 하여 오르고 내리며, 끝없는 평지를 마냥 걷고, 내리는 비와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며 길을 이어나가는 이들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마침내 그들이 거친 숨을 내뿜고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 모든 이들이 환호한다. 거기가 끝이었기에 완전히 자기 몸을 바닥에 눕히고 성탑 끝에 이어진 하늘을 보는 이들을 나도 응시한다. 그렇게 걷는 이들이 길을 멈출 때 ‘걷기’는 끝난다. 그들이 걸음으로써 길은 생존한다. 걷지 않는 길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6.

‘걷는 이’들은 위대하다. 사실 그렇게 걷지 않아도 될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걷는다. 생각해보면, 그들은 홀로 걷는다. 하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다. 시작은 혼자였으되 어느새 서로서로 도반(道伴)이 된다. 물론, 그렇게 길을 걷다 어느새 그런 사람들끼리 한 곳에 머무르기도 한다. 비록 어제까진 서로 몰랐으나 오늘 이 자리에선 오랜 친구 같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아니 늦은 오후부터 이른 아침까지 그들은 ‘길을 걷는 동지’다. 물론 무례하게 의존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길을 걸음으로써 길 위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이라는 동지의식이 있다. 마침내 그들은 순례라는 이름을 가진 생명공동체가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들은 마침내 알게 된다. 정작 위대한 것은 순례자가 아니라 ‘길’ 자체라는 사실을. 하지만, 어떤 순간에도 마지막이 오면 결국 피곤한 자기 몸을 홀로 지탱해야 한다. 그래서 그 걸음은 외롭다. 사색과 질문 가득한 얼굴로 말을 아낀 채 걷기만 해야 하는 순간도 감내해야 한다. 그래서 길을 걷는 이들을 ‘고독한 순례자’라 부를 수밖에 없다.


7.

어느 길이든, 길은 늘 새롭다. 걷는 이들 너머로 길이 길로 이어져있다. 끝을 가늠할 수 없다. 자기 배낭을 메고 자기가 정한 길을 자기 발로 ‘걷고 있다’해도 누구도 길 앞과 뒤를 끝까지 볼 수 없다. 그저 한 발 앞이 전부다. 걸어온 길을 추억할 수 있다해서 나아갈 길을 완전히 연상할 수 없다. 지난 번 걸었던 길이라해서 오늘 그 길을 모두 헤아릴 수 없다. 생각해보면 길을 걷는 이들은 길이 자기 앞에 놓여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여 그들은 ‘사람이 길을 걷는다’가 ‘길이 사람을 걷게 한다’로 바뀔 때 자연스럽다는 것을 인정한다. 길이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솔직히, ‘길을 걷는다’는 말이 습관처럼 굳어있다. ‘내가 길을 걷는다’고 말하기가 쉽다. 길은 어떤 ‘대상’일 수 있으나 길이 ‘주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기도 하다. 생각해보라. ‘길이 나를 걷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발을 땅에 내딛어 놓여진 길을 오랫동안 걷는 이들은 안다. 최후 순간에 이르러 자신도 모르게 결국 고백한다. ‘길이 나를 걷게 했다’고. 진정한 순례자들은 안다. 그 ‘길’이 자신을 초청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결코 길에 들어설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여 길을 걷는 이들은 자신이 그 초대에 순응한 자라는 것을 인정한다. ‘길이 거기에서 나를 불러주었다. 나는 그 초청에 응한 한 사람이다.’ 하여 비로소 나는 ‘걸을 수 있는 자’가 된 것이다.


<제주 사려니길, 5월로 들어서기 직전 어느 날 걷다>


8.

다시 말하지만, 은 무한하다. 본래 길은 끝이 없다. 인간이 삶이 끝나도 길은 어디서든 끝나지 않는다. 뫼비우스처럼 길은 처음과 끝이 이어지고, 끝이 처음에 잇대어 있다. 그것은 영원으로만 설명된다. 길 끝은 순례자가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그가 멈추면 길은 끝나는 것이고, 그가 가면 길은 계속 열려있다. 길은 걷는 이에게 끝없이 자신을 열어준다. 하여 ‘길이 우주다’라는 명제는 생의 근원을 사색하게 한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길을 걷는’ 것은 ‘철학하는 행위.’다. 근원을 배우고자 온 몸으로 기투하고, 희구하는 행위이다. 만약 그가 이 근원을 ‘신’에게서 찾아내려고 한다면 ‘걷는다’는 ‘신학하는 행위’다. 하여 ‘길의 초대에 응대한 이들에게’ 질문은 필연적이다: ‘길, 너는 무엇인가?’ 화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걷는다’는 그 길이 무엇인지를 체감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 걷는가?’를 물을 필요는 없다.


9.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길을 걷는 시대를 살고 있다. 길을 걷는 일은 자신만을 위한 삶은 아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언어 중에 <할라크 hālakh>라는 동사가 있다. ‘걷다’는 말로 알려져 있다. 이 언어의 여느 단어들이 그러하듯 이 말도 그 의미범주(semantic range)가 생각보다 넓다. ‘할라크’는 ‘공적생활을 만들어내다(public life)’는 의미에 닿는다. 홀로 길을 걷고, 함께 걸음으로써 마침내 그 걸음은 누구나 마음에 새겨둘만한 공동의 삶을 잉태한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길을 걷는 이들은 대단하다. 길 자체는 더욱 위대하다. 하여 길은 길을 걷는 이들에게 선물을 건네준다. ‘겸손’이다.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자부심 위에 길이 자신을 걷게 해 준 것에 대해 기꺼이 ‘무릎 꿇는다.’ 어느 길이든 그 의미를 감추지 못한다. 길을 걷는 이들은 ‘겸손하고’, 자기 너머 위대한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당연히 무릎 꿇을 수 있다.


10.

길을 걸은 이들은 마침내 기억한다. ‘길이 말해 준 것’과 ‘길이 스스로 보여준 세계를.’ 문득 어느 날 한 청년이 이렇게 말한 것이 떠오른다. ‘길은 나다’(신약성경 요14:6). 나는 어느 날 그 말에 이렇게 답했었다. ‘나는 오늘도 그 길을 따라 걷습니다.’


길을 걷듯이 글도 읽는다. 책읽기의 끝은 길로 나서는 순례이다.


길을 걸은 이들은 늘 자신에게 묻는다: 나를 걷게 한 그 길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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