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의 서재 '월서각(越書閣)'은 내가 사는 곳과 차로 1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다. 나는 이 서재를 사랑한다. 책이 압도할 만큼 많거나 자랑할 만큼 책을 읽은 것도 아니다. 글쓰기는 더욱 그렇다. 누구나 한번 들으면 솔깃할 귀중한 자료들을 소장하는 것도 아니다. 빼놓을 수 없는 학술논문이나 자료들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주변 환경이 한적하고 고즈넉한 것 때문만도 아니다.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2.

몇 년 전, 지인의 도움으로 집안에 두었던 서재를 집밖으로 빼냈다. 지금까지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서재를 세 번 정도 뒤집었다. 그 때마다 책들이 떠나갔고, 또 어느 새 책들이 들어오곤 했다. 집안에 서재가 있는 것과 달리 집밖에 있는 서재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아무 때나 책을 꺼냈다 꽂아두는 즐거움보다 마음먹고 마실 나오듯 해야 하는 약간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물론 서재에 도착하기만 하면 이만한 놀이터가 없다. 오가는 길이 쉽지 않았지만, 기회가 되는 대로 차를 달려 단 한 두 시간이라도 나의 책들과 즐거운 자리를 만끽했다. 나에게는 서재나들이가 즐거운 일 중 하나였다.


3.

그러다가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서재에서 제대로 지내지 못했다. 집안 어르신들이 깊은 병으로 치료를 받는 일들이 이어졌고, 그 사이에 삶을 마감하시기도 했다. 그 사이에 나는 책에 대한 심경의 변화가 생기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서재 안에 머무는 것보다는 밖으로 나서 둘레길, 올레길, 강길, 바닷길, 이 산 저 산을 오르내리는 일을 훨씬 더 많이 선택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서재는 빈 공간으로 남겨진 날이 많아졌다. 물론 서재를 비워두는 일이 많았다고해서 등한히 한 것은 아니다. 나는 서재에 머물더라도 책을 읽는 시간보다 커피 한잔과 밖 풍경 하나 눈에 담아두고 되돌아가는 일을 더 즐겼다. 게다가 지난 겨울 세 번째 사용하던 서재를 재건축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서 임시로 새로운 서재에 책을 옮겨두었다. 임시서재는 필요한 책들만 풀어두었다. 여러 책들이 아직 박스에 그대로 담겨 있다. 책을 넘어서보려는 나의 마음이 더 단순해 진 것 같아 마냥 좋다.


4.

나는 서재를 옮기고, 책들을 정리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나에게 가장 좋은 독서를 생각한다. 책을 보면서, 책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을 잘 배우고 있다. 책없이 책을 읽는 일은 마치 숲을 걷는 일 같다. 어제 걸은 길이 오늘 다르고, 같은 길이었으나 확연히 새롭다. 짐을 조금 가볍게 하고, 아침부터 바람을 따라 땅을 걷고, 가벼운 마음으로 산, 들, 강, 바다를 걷는 기분은 책에서 발견하는 환희 그 이상이다.

그렇게 길은 나에게 도서(道書)다. 숲에서, 나무 사이에서, 산꼭대기에서, 바위 위에서, 골짜기에서, 계곡에서, 비탈길에서, 평평한 땅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길’은 곧 살아있는 책이 된다. 서재 책상에 앉아 읽었던 그 글자가 길 어디선가 되살아난다. 그 어떤 글과 이야기를 담은 그 책을 넘어선 길은 또 새로운 길이 된다. 새로운 재미다. 길을 걸을 때 비로소 나는 나의 서재 ‘월서각’을 제대로 향유하는 것이다.


5

오늘 날이 맑다. 서재에서 책들을 둘러보다가 나도 모르게 한 자리에서 물끄러미 오래 전 출판된 한 잡지를 꺼내 읽었다. 계간지 창작과 비평(창비)의 창간호(1966, 겨울호)다. 재밌게도 첫 글과 마지막 글이 절묘하게 이어진다. 편집의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첫 글은 창비 창간인인 백낙청 선생의 글이고, 마지막 글은 프랑스의 문인 장 폴 사르트르가 <현대>라는 잡지를 창간하면서 수록한 글이다. (*원문에 한자어들은 모두 한글로 옮겨 적는다)


# 첫 번째 글. 백낙청,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

“문학한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가장 충실히 살아가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인류전체에게 무한히 귀중한 방법이요 자기 개인에게는 그것밖에 없는 방법일지 모르나 다른 조건이면 또 다른 것이 나올 수도 있는 한 가지 방법일 따름이다. 그렇게 볼 때, 남들이 남긴 위대한 작품은 자기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양식이 되고, 자기가 문학하는 동안 영원히 따르고 싶은 길잡이일 수도 있으나 자기가 써야 하는 글, 자기만이 쓸 수 있는 글을 대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기가 뽑아 든 제비가 <세익스피어>인지 <헤밍웨이>인지 아니면 어떤 무명인사인지, 그것은 그렇듯 큰 문제가 아니다.” (25쪽)



# 두 번째 글, 장 폴 사르트르, Présentation des Temps Modernes (1945) 정명환 역, “현대의 상황과 지성”


“마지막으로 우리의 비평은 우리와 같은 관점에서 쓰여진 정신의학적 연구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제공할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계획은 야심적이다. 우리는 우리의 힘만으로 이 계획의 성공을 기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극소수의 인원으로 출발한다. 만일 일 년 후에 더 많은 동지를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저앉고 말 것이다. 이에 우리는 모든 선의의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우리와 같은 관심에서 우러나오고 또한 문학적 가치를 지닐 수 있는 원고라면 그것이 어디에서 오건 우리는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말해 둔다. <참여문학>은 결코 <참여> 때문에 문학 그 자체를 망각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의 목적은 집단을 위하여 적합한 문학을 마련함으로써 집단에 봉사함과 아울러 문학을 위하여 새로운 피를 넣어줌으로써 문학에 봉사하는데 있다는 것을.”(132쪽)


지난 날 창간사가 문학의 자리를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가장 충실히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고, 그에 앞서 전후 유럽을 각성시키기 위해 단 나의 원고라도 기꺼이 받아들이며, 무엇보다 ‘참여’가 문학성(文學性)을 상실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새삼스럽다.


이제 시간이 흘렀다.「창작과 비평」2020년 여름호(통권 188호)가 출간되었다. 특별한 주제가 눈에 띈다. <우리 문학은 지금 무엇과 싸우는가>. 문학평론가 강경석의 글 ‘혁명의 재배치’가 이 주제에 대한 첫 글이다. 공개된 글을 읽다보니, 과거에 대한 지나친 기시감일지 모르나 지난 56년 창간호에서 토로했던 그 <문학의 자리>가 다시 떠오른다. 그는 황정은의 소설을 다루고 있다. 각설하고, 그의 글 한 단락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요컨대 종래의 혁명이라는 관념을 지양하고 갱신하는 혁명(가령 ‘혁명의 혁명’), 그래서 읽는 이들을 언제나 새로운 출발점과 열린 가능성-고양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선사하는-에 놓아두는 혁명, 적어도 이 작품*이 말하는 촛불혁명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이 작품: 황정은,「아무 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디디의 우산』, 창비, 2019)


어쩌면 이 전염병의 시대에 문학은 문학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문학 속으로 보이지 않게 침투해서 언제 발현될 지 모르는 감염균과 대응함으로써 ‘고양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야기하는 그런 문학말이다.


5.

길과 길을 걷는 일은 나에게 서재와 같은 공간이다. 길에서 만나는 온갖 생물들은 저마다 한권 책이다. 길에는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있고, 죽어가는 것들이 있다. 이 독서가 언제 끝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이유다. 하여 이 '길'이라는 책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도서(道書,길책)'는 내 발로 한걸음 한걸음씩 읽어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도서는 한없이 이어진다. 이 길에서 나는 혁명한다.


또한 나는 이 길에서 행복하다. 요즘 같은 날씨에, 숲길에 들어서면 나는 희망을 가진 작은 새가 된다. 길은 내가 연약하고 낮은 자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제야 나는 제대로 글 쓰고, 글 읽는 이가 된다는 것을 배운다. 나이와 무관하게 조금씩 더 깊이 체험하고 있다.


나는 여전히 나의 서재 월서각을 사랑한다. 이 서재를 출발하여 그 너머 밖으로 나있는 ‘길’로 걸어 들어가는 일도 좋다. 이 일은 계속될 것이다. 돌아보니, 이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이 ‘책 너머 집’, 월서각이라는 공간을 나에게 기꺼이 열어준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이 있는 한 나는 언제나 행복한 노동자다.

서재, 그 서재를 넘어 길로 나서는 일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나를 갱신시키는 나의 놀이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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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푸른역사, 2019/2020)


1.

어느 덧 넉 달이 지났다. 순식간이다. 무의미한 날이 있을까마는 요즘은 특히 그렇다. 뭘 바꾸기에는 짧다하겠지만 그래도 충분히 적당한 기간이었다. 삶의 방식 중 하나를 돌이켰다.


2019년 12월31일. 새해를 맞이하는 시간. 나는 올해 슬로건을 정했다. ‘오클라(ôkhlâ, 음식 그 너머)’. 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오클라(남성명사 '오켈'의 여성형)’. 고대 히브리어에서 음식을 포괄하는 단어. 이 여성형은 단지 음식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와 관련되어 있는 삶의 공유, 음식을 토대로 파생해서 펼쳐지는 삶의 질서를 포괄한다. 음식은 끼니를 메우는 일을 넘어 공적(公的)의의를 담고 있다.”


‘음식’과 관련한 공적 삶을 올해 내 삶의 주제로 삼았다. 바로 그 상황이 나에게 오기 전까지는 그저 평범한 뜻이었다.


2.

올해 1월7일. 정기건강검진을 받았다. 2년 전, 악성빈혈로 총체적인 검사를 받고, 치료받았던 적이 있었다. 다행히 1년 만에 치료를 잘 마쳤다. 몸이 회복된 것이다. 앞으로 정기건강검진을 통해 잘 관리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로부터 다시 1년이 지났다.


이른 아침, 미리 준비된 건강검진 문진표를 제출하고 몇 가지 검사를 받았다. 원래 오늘 내가 중점을 두는 검사는 위내시경이었다. 사전 혈압검사가 필요했다. 긴장할 필요 없이 가볍게 시작된 검사는 예상치 못하게 서너 번을 반복했다. 간호사 선생님이 고개를 연신 갸우뚱했다. 조금 간격을 두고 다른 검사를 먼저 하고 다시 혈압검사를 시도했다. 결국 위내시경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취소했다. 수축기 혈압은 물론이고 이완기 혈압도 경계를 가볍게 지나쳤다. 겨우겨우 기록표에는 조금 안정된(?) 상태를 기록했다. 여전히 위험영역이다. 혈당검사도 안 좋았다. 공복혈당을 포함해서 콜레스테롤, 중성지방도 악성이다. 그동안 걷는 운동을 자주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운동부족이 원인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런 악성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건? 바로 ‘먹는 것’이었다. 이 날 검사는 나에게 ‘무엇을, 어떻게 먹는지?’를 숫자로 직접 묻고 있었다. 의료진은 그 숫자를 해석하여 말로 전달해주었다. 심각하진 않지만, ‘위험하다’는 것이다. 원한다면 바로 약을 먹거나 엄중한 치료를 해도 좋다는 의견이었다. 나는 평소 생각대로 ‘당분간 약을 먹지 않으려고 한다’는 의견을 전했다. 혈압으로 위내시경검사가 취소되는 특이한 경우라는 걱정스런 말씀을 뒤로하고를 뒤로하고 집으로 되돌아왔다. 의료 일에 관여하는 한 분이 이 소식을 듣고 이렇게 격려 겸 걱정 문자를 보내주셨다.


“검진의 의의는 질병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을 위한 미래 계획에 지침을 드리는 것이랍니다.”(J로부터)


병원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던 나였지만, ‘건강을 위한 미래 계획’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솔직히, 한 번도 고려하지 않은 지침이었다. 그래도 이제 행동해야했다. 운동은 아니었으니 남은 것은 하나다. ‘먹는 것’이다. ‘오클라’는 결국 의도하진 않았다해도 나를 향한 삶의 지침이었다. 다만 ‘음식’만은 아니었다는 것도 알았다. ‘오클라는 음식 그 너머’ 세계를 보게 만들어준다. 무엇보다 내가 그동안 ‘먹어왔던 것’, ‘먹는 방식’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가져야만했다. 그렇게 나는 약이 아니라 내 ‘생활방식 변화’를 선택했다.


3.

나는 ‘음식’에 대해 철저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렇게 ‘오클라’는 음식과 관련하여 내 몸 안팎에 걸친 삶의 방식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의학 검진에 따른 불가피한 조처였다. 고혈압과 당뇨에 대한 당연한 처방이다. 나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총체로서 몸’을 질적으로 변화해야 하는 내 삶의 과제다.


지난 140일 동안, 나는 두 가지를 유의했다. 먼저 그동안 진행해 온 운동을 계속했다. 일단 특정한 날 집중했던 과도한 운동을 지양했다. 모든 날에 적절하게 몸을 쓰며 가벼운 운동을 하며 집중된 운동과 병행했다. 걷는 일과 등산을 계속했고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자전거를 탄다. 다음으로 ‘먹는 것’이었다. 하루 세 끼, 모든 식사를 직접 만들어 먹었다. 처음 세 달은 거의 채소와 잡곡밥을 꼬박꼬박 챙겼다. 물론 가족들에게 불편하지 않도록 내 손으로 직접 했다. 동시에 먹지 않을 것을 잘 지켰다. 라면, 쿠키, 탄산, 흰밥, 떡과 빵, 매식 등. 간식도 철저히 줄였다. 수고한 결실인지, 혈압은 제자리를 잘 지키고 있다. 혈압계, 혈당계를 직접 사서 손에 들려주며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봐주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혈당은 일부러 확인하지 않고 있다. 그 선물은 단지 기계를 넘어 내 삶을 경각시키는 은총이었다. 체중은 자연스럽게 15kg가 감량됐다. 외모는 핼쓱해 보여 가족들은 걱정하기도 하지만, 몸은 경쾌해졌다. 그렇게 숫자는 힘이 있다. 나를 경각시킨 것은 숫자였고, 나를 안심하게 하는 것도 숫자이다. 나는 이제 음식을 그리 걱정할 상태는 아니지만, 다시 예전 음식 먹는 법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는 않는다. 각해 보면 ‘오클라(음식, 그 너머)’는 ‘끼니, 허기’를 채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굳이 장엄한 각오로 말할 것은 아니다. 그보다 나는 이 시간을 보내며, 음식의 속, 인간에 비한다면 그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는 즐거움을 알아버렸다. 음식에 대한 나의 특별한 행동은 혼자 조용히 잘 지켜나가면 될 일이다. 그 음식 너머 세계는 상상 이상이다. 음식 하나하나에는 기억해 둘만한 삶의 이야기가 있다. 자기 삶이 각인된 것이다. 그것은 적어도 삶에 새겨진 ‘관계’의 흔적이기도 하다. 가볍게 말하듯이 음식은 무엇을 먹었는지 보다 ‘누구와’ 어떤 이야기로 그 음식을 나눴는지를 필연적으로 기억하게 한다. 그것은 생각보다 무거운 은총이다.


4.

나는 이 일이 발병한 후 가족들에게 말했다. ‘이 일은 내가 해결해 보겠다’고. 당찬 결심이었다.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지만, 그게 나에게 필요한 일이었다. 우선 지난 시간, 나는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예상외로 다행스러운 일도 있었다. 고혈압과 당뇨와 관련되어 먹는 문제에 고통 받는 이들을 조금 엿볼 수 있었다. 사실, 내 생애에 그것은 그들의 문제였다. 이젠 그들이 겪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그들 중 한 사람이다. 무엇보다 내 삶에서 일단 먹을 메뉴가 없었다. 나로서는 한 번도 고민하지 않았던 문제다. 다 잘 먹고, 가리지 않았으며, 누구와도 어떤 메뉴로도 식사를 즐겼다. 하지만 지금, 나는 한 끼를 채우기 위해서는 ‘검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내가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당연히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자주 해 본 적이 없다. 설령 할 수 있다해도 과연 제대로 되었는지 검증할 수도 없다. 건강식이라 할 수도 없다. 문득 이런 질병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이 누가 만들어주지 않으면 식사할 수 없다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이런 삶의 방식이라면 혼자 사는 이들에게 이 질병은 치유불가다. 질병은 다시 질병을 낳는다. 고치려는 의지가 있다해도 고칠 수 있는 환경이 안 된다. 내가 그들을 조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그들이 한 끼 음식을 누군가로부터 잘 대접받기를 고대한다.



5.

가끔 음식처럼 김서령의 글을 꺼내 읽는다. 아무 이야기나 펼쳐서 가볍게 훑는다. 눈으로 읽지만 마음에 그려진다. 불현듯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오른다. ‘음식, 그 너머’로 자연스럽게 여행을 떠난다. 기억에 남겨진 음식은 사람과 잇대어 있다. 맛과 함께 친밀한 이야기가 살아난다. 이 책 속에서 그의 글은 늘 맛이 좋다. 한 글자, 한 문장, 한 문단 속엔 내 앞에 차려졌던 그 음식들도 담겨있다. 자연스럽게 그 음식들에서 내 삶에 스며들었던 거룩한 사랑이 다시 나를 다독인다. 


“외로움에 사무쳐봐야 안다, 배추적 깊은 맛을.”(9쪽)



가난하고 순박했던 시절 사람들은 돌멩이나 바람결처럼 단순하고 어질었다고 말하면 거짓이겠지만 때로 그 시절의 덤덤하고 구수한 사람들이 몹시 그리울 때가 있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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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상자1 상상

















상상

그 보이지 않는 것을 온 몸으로 끄집어 내 보여준다. 

이야기 

상상을 손에 잡히듯 보여준다. 


상상을 실현하는 이야기, 내러티매진(내러티브+이매진) 


세계를 이해하고, 열정과 연습으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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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키 문구점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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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 인용된 글들은 모두 소설 속에서 발췌했다. 인용페이지는 따로 적지 않는다. 

*요즘 글쓰기에 대한 관심과 책들이 어느 해보다 눈에 띈다. 여러 책들을 보고 있지만, 나는 이 소설도 그런 주제에 꽤나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써두었던 리뷰를 꺼낸다.  


1.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다시 자연스럽게 첫 장으로 되돌아갔다.


마디마디 조각 같은 편지글이 담겼다.

조각들은 한데 어우러져 형형색색 한 조각보가 되었다.


이렇게 저자는 독자에게 한 통의 손편지를 보낸다.

그것은 글을 통한 자기치유과정을 담은 고백문이기도 했다.

한 여름부터 시작하여 봄까지 이어진 긴 손편지를 소설로 받았다.


즐거운 일이다.


2.

오가와 이토는 데뷔 10년 후인 2008년 첫 소설을 출판했다. 작사가 경험이 있다. 즐겨 다루는 소재는 음식이었다. 아니 ‘요리’라고 해야겠다.『달팽이 식당』(食堂かたつむり, 2008)을 시작으로『따뜻함을 드세요』(あつあつを召し上がれ, 2012),와 같은 소설들이 이어졌다. 그 소설과 소설이 출판되는 사이에 음식과 요리를 소재로 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토대로 사람들과 소통해왔다. 음식전문소설가라고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다른 몇 권의 책들도 마찬가지지만, 사실 겉으로 드러난 소재나 주제는 평이해 보인다. 하지만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요리방식이다. 저자는 손편지 ‘대필(代筆)’이라는 소재를 맛깔스럽게 요리한다. 책을 읽다보면 마치 내가 언젠가 경험했을 것 같은 에피소드들이 등장한다. 게다가 손편지라는 아날로그 기표를 절묘하게 활용하고 있으니 읽는 재미가 좋다. 다양한 문맥과 재치있는 표현으로 글 곳곳에 잘 배치되어 있다. 그의 전작들과 견줘보면 단지 요리가 편지로 옮겨왔을 뿐이다. 하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색다른 소재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것은 재료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저자가 가진 탁월한 글쓰기전략이 적중한 것이라 해야겠다. 저자는 이런 전략에 능숙하다. 따라서 이 소설은 주제를 탐색하기보다 작가가 보여주는 요리방법을 눈여겨봐야 할 것 같다.


3.

『츠바키 문구점』(ツバキ文具店, 예담, 2017)(NHK동명 드라마이기도하다)은 단지 동네 문구점 에피소드는 아니다. 손편지이야기이면서 사람들 사이를 흐르는 따뜻한 감성스토리다. 사실, 오랜 전에 손편지는 기계편지로 옮겨졌다. 이걸 감안하면 편지쓰기는 과거이며 추억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츠바키문구점엔 지금도 대필손편지가 있다.’는 소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소환한다. 


대필이라는 소재도 재밌지만, 번역된 문체도 단순하고 경쾌하다. 이 책 몇 장을 넘기다보면 문득 중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에 유치하다싶은 러브레터를 잘 써주는 친구가 떠오를 수 있다. 내 기억으로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 편지는 더 세련되고 묘사가 세밀했던 것 같다. 대필가들은 으쓱하고, 의뢰인은 크크 거린다. 물론 회신과 결과는 예측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그 대필은 종종 손이 무뎌 머뭇하는 친구들을 환하게 웃음 짓게 했던 즐거운 추억이다.


4.

소설은 모두 6개의 꼭지로 구성되었다. 처음부터 네 번째 꼭지는 계절을 따라간다. 여름부터 봄이다. 이 소설은 사실 계절이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를 그리 개의치 않는다. 습관적으로 봄을 말할 뿐, 삶은 여름으로부터, 가을로부터, 겨울로 부터도 시작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대필 편지를 쓰는 네 계절이 바뀌는 동안 사람도 성장한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되고, ‘나’는 ‘너’를 용납한다. 성장과 치유 그리고 성숙한 사람이 거기 있다. 이 모든 과정은 일본정신이라 자부하는 ‘화(和)’를 전제하는 것 같다. ‘글쓰기’는 그 토대다.


이 소설은 일단 구성이 탄탄하다. 동시에 장면장면을 독자들에게 컬러북같은 밑그림으로 제공한다는 특징도 보인다. 독자라면 누구든지 이 빈 그림틀에 자기 색연필로 마음껏 칠할 수도 있다.(다섯 번째 꼭지는 번역자 후기이다.) 또한 이 소설은 지명과 공간들을 실명으로 쓰고 있다. 번역자가 도쿄에서 열차로 55분 거리에 있는 가마쿠라로 곧바로 날아간 것도 무리는 아니다. 소설은 가상이지만, 배경은 실제였기 때문이다. 번역자가 남긴 소감을 보면 이 소설은 마치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같다. ‘그것을 보기 위해 그 곳에 가면 그것이 있다’ 마지막 여섯 번째 꼭지는 소설에 등장하는 편지들을 실제 그대로 실어두었다. 쓰인 그대로 제본해 둔 것이다. 실물편지를 보면 내용을 보기도 전에 그 주고받는 사람들이 겪었을 다양한 삶과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을 정도다. 실물편지는 그 자체로 소설을 현실로 되살려준다. 꼭 훑어봐야 한다.


5.

이 소설의 특징 한 가지를 더 언급하고 싶다. 손편지에 대한 작가 자신의 관점을 드러내는 대목들이다. 아니 좀 더 명확히 말하면, ‘손편지 대필’이라는 지난 문화를 오늘 다시 대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그것을 별도로 다루지는 않는다. 다만 계절과 계절 사이, 에피소드와 에피소드 사이사이에 드러나지 않는 표기로 방점을 찍어 배열해두었을 뿐이다. 몇 개 예를 들면 이런 표현들이다.


“편지는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함과 동시에 상대가 그것을 받아 들었을 때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글씨는 그 사람과 함께 나이를 먹으며 늙어간다…….글씨도 나이와 함께 변화한다.”

(이 문장은 결국 이 소설이 드러내지 않으면서 지향하는 내적 주제라 할만하다.)


“글은 몸으로 써야한다.”


“글은 남는 것이다. 상대가 그 편지를 읽고 나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이 글보다 말을 선호하는 이유일 것이다.)


“나도 지금까지 글씨는 그 사람 자체라고 믿었다. 촌스러운 사람은 촌스러운 글씨를 쓰고, 섬세한 사람은 섬세한 글씨를 쓴다, 얼핏 꼼꼼하게 보여도 대담한 글씨를 쓰는 사람은 성격에도 그것이 나타난다…….그런 식으로 글씨에는 그것을 쓰는 사람의 인품이 그대로 배어나온다고 믿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글씨’는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투영한다. 그러니 문체가 그 사람이다.)


“당신은 늘 말했죠.

글씨란 인생 그 자체라고.

나는 아직 이런 글씨밖에 쓰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림없는 내 글씨입니다.

드디어 썼네요.” (완전한 글체는 없다. 온전해지려는 글체가 있을 뿐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찾아 본 이 구절들 말고도 독자는 자기 방식으로 의미 있는 표현들을 더 찾을 수 있다. 글쓰기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이야기들이 소설 곳곳에 봄날 땅을 뚫고 올라올 씨앗처럼 심겨져있다. 조금만 눈여겨보면 금방 싹을 틔울 것이다.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들어가보면 저자는 ‘글’이 무엇이며, ‘글씨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인철학을 담아두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느 편지에서나 주인공은 의뢰자의 마음을 읽고 그것을 편지에 담으려고 노력한다. 대필자는 의뢰자가 쓰고 싶은 바로 그 글을 써준다. 그걸 위해 대필가가 노력하는 장면은 경건한 예식 같기도 하다. 소설 속에서 그 장면들은 아름답다. 억지스런 문장이 아니다. ‘환대와 배려’를 눈에 보이도록 실재화해준다.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생각은 우주적으로 행동은 지역적으로’라는 경구에 부합할 수 있다. 화해와 평화라는 거대한 주제를 생각하면서 편지라는 지극히 평범한 옷을 입혀서 말하고 있다. 대필가를 둘러 싼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소소한 삶들도 그런 특징에 기여한다. 소설 속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다.



6.

이 소설에서 가장 유의할 것은 빨리 읽지 않는 것이다. 이 소설은 가볍다. 표지를 보면 도서관에서 며칠 빌려 읽고 반납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 것 같다. 순식간에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책을 두고두고 꺼내서 읽어도 좋다. 느릿하게 읽을수록 좋다. 이런 독법이 이 책을 대하는 태도이다. 마치 자신이 대필가로서 글을 써야 할 사람처럼 말이다. 혹시 그대가 이 마지막 문장을 읽는 즉시 이해한다면 이 책 처음으로 돌아가 한번쯤 천천히 읽는다면 더 유익할 것이다.


이 소설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새들이 밤의 흔적을 쪼아 먹듯이 신난 목소리로 수다를 떨고 있다.”(314쪽)


이 소설은 소설 자체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글쓰기가 인간에 대한 지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진지하게 보여준다. 


저녁 무렵에 가볍게, 그러나 진중하게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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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날, 하늘도 오늘처럼 맑았습니다. 진녹색 산길은 물론이고, 파랑(波浪)마저 부드러운 회랑포 바닷길도 화창했습니다. 청산도 느릿한 길엔 아무도 없었고 여러 길을 나홀로 걸었습니다. 길과 나만 있던 길이었습니다. 길이 어디서 끝날 수 있나를 가볍게 생각하는 즐거움이 컸습니다. 그렇게 그 길을 걷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오래 병상에 계시던 어머니가 서둘러 숨을 멈추고 맑고 푸른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길을 걷는 것과 어머니의 귀천은 이제 나에게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반비, 2017/Wanderlust:the History of Walking, 2000), 화보 중>


오늘도 나는 말을 삼키고, 몸을 열어 ‘나에게 주어진 길’, 숲 길을 걸었습니다. 

리베카 솔닛의 글이 아니더라도 걷는 일은 인간, 무엇보다 자신을 이해하는 가장 진솔한 태도라는 것도 확증하고 있습니다. 


                                            


"보행의 리듬은 생각의 리듬을 낯은다. 풍경 속을 지나가는 일은 생각 속을 지나가는 일의 메아리이면서 자극제이다. 마음의 보행과 두 발의 보행이 묘하게 어우러진다고 할까. 마음은 풍경이고 보행은 마음의 풍경을 지나는 방법이라고 할까"(21쪽)


이런 말도 몸으로 잘 이해하게 되었으니 다행입니다. 


2.

운동삼아 걷는 일로부터 시작했을지 몰라도, 이젠 ‘죽어가는’ 나의 삶의 방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도 원시행동같이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습관처럼 어머니를 추억합니다. 그날 저를 찾아와 따뜻한 위로를 건넸던 분들에게 마음으로 드렸던 인사를 오늘도 다시 읽습니다.


“꽃이 순식간에 지는 건 아니지만 한번 여려진 빛은 오래 걸리지 않아 바래진다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86년간 곱고 정갈하게 피었던 노란 꽃이 천천히 져버렸습니다. 이제 소풍을 마치고 돌아가련다고 여린 눈만 다정하게 껌뻑이다 마침내 입술을 굳게 닫았습니다.


돌아보면 함께 했던 어간 반백년은 짧은 시간입니다. 그렇지만 지난 세월 얽히고섥혀 몸에 남겨진 흔적들은 거침없이 떠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합니다.


잘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해두었지만 몸은 슬픔의 기미를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허나 이 행복한 이별이 가져올 부활의 소망도 슬픔의 두께만큼 견고합니다.


그 틈에 원근 벗들의 위로가 마음에 살갑게 내려앉아 평안을 햇살같이 흩뿌려 주었습니다. 품앗도 못했는데 사랑빚만 늘었습니다.”


오늘, 날이 참 좋습니다. 




어디에서 시작할까? 근육이 긴장한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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