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가 사는 이 땅은 갈수록 기술이 감성을 압도한다. 비정서가 주도하는 세계다. 어떤 사람들은 기술, 아니 이성으로 감성을 제거하는데 익숙하다. 기술을 옹호하고, 감성을 배척한다. 기술에 함몰되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자신도 모르게 감성 제거 기술자들이 될 여지는 크다. 세계는 생존 기술이 발달할수록 생명에 대한 감성도 진보해야 하지 않겠는가. 기쁨과 즐거움에 잇대어 있는 슬픔과 아픔을 간파하고 공유하는 깊은 감성이 이 세계를 세계답게 만들어낸다는 생각은 허튼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감지한다. 그것은 능숙해져야 할 기술이 아니며, 단지 개인적 감성에 국한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더욱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공동체적 기술이면서 세계의 감성이기에 나를 넘어서고, 가족을 벗어나고, 사회, 국가를 넘어서 결국 그가 누구든지 '한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단지 사랑하기 때문에 충고한다는 말은 늘 조심스럽다. 사랑의 기술'만 편만해져가는 이 세계에서 인간의 존재 이유가 ‘타인을 위한 삶’에 기초한다고 '나는 믿는다(Credo!)' 내가 나를 사랑하듯이 타인도 사랑하고 공감하는 것이 ‘사랑의 기술(Art)’이다. 기술과 더불어 감성이 조화로운 삶이라는 것을 내가 잊어버리지 않으면 좋겠다. 앞으로 미래는 개인과 개인이 단지 거래적 관계가 아니라 적절한 거리를 두면서도 서로 존중하고 깊이 이해하려는 공동체성으로서만 유지될 것이다. ‘내’가 소중하듯, ‘너’도 중요하다. 그 ‘너’가 누구이든 말이다.
4.내친김에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이야기에 하나 덧붙여보자. 바울이 사랑을 기술(이성)'과 '감성'의 조화로 말했을 때,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부를 추구하고 향락에 길들여진 고린도지역 신앙인들이었다. 오죽하면 ‘고린도화하다(to Corinthianize)’는 동사가 생겼을까 말이다. 그런 이들에게 바울은 이성과 감정이 조화된 ‘사랑하다’를 제시한다. 하여 ‘사랑하다’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기술(art) ’이 되길 바랬다. 바울에 따르면, '사랑'은 기술만은 아니다. 또한 개인 감성에만 머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공동체를 위한 기술이며 감성이다. 고린도 사회에 건강하게 확립하고 유익을 주는 삶이다. 공동체에서 사랑은 타인과 더불어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언제나 모든 것에 상대를 향한/위한 삶을 지치지 않고, 견디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또한 그 사랑은 지금부터 삶의 끝이 올 때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져 마침내 부분적인 것들을 완전하게 바라보도록 유일하게 남아있는 힘이다. 바울이 노래한 사랑은 보이지 않는 차별, ‘그렇지 않은 듯’ 서로를 분파로 갈라버린 고린도 사회 속 교회공동체를 향한 경고이기도 하다. 그런 사랑이 아무렇지도 않게 남을 차별하는(혐오하는) 나를 지속적으로 경계하는 힘이다. 선량한 자신이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타인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은총이고, 위로부터 오는 공동체 생존의 ‘방식, 길’(ὁδός’,호도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