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기독교의 경전 중 한 부분인 신약성경 고린도전서13장은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유명하다. 널리 알려져 상식같이 여겨지는 그 구절 중 한 부분은 이렇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첫편지 제13장 4,11,13절-

이 노래는 읽으면 읽을수록, '사랑' 개념보다 행동을 세밀하게 서술한다. ‘사랑한다’는 동사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은 사랑에 대해 관념(의식)과 행동(실증)사이를 무한 방황하는 나를 한층 곤혹스럽게 만든다. 낯선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직 완전하고 익숙한 끝에 다다르긴 한참 멀었다. '사랑'(*사실, 1세기 헬라어 표현에서 agape나 eros, phileo 등은 의미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은 아직 쉬운 문제는 아니다.


사실, 나는 '사랑'을 하나의 기술(art)이라고 말하는 E.프롬의 견해에 동의한 지 오래다. 그가 사랑을 '기술'로서 정의할 때는 단지 감정(feeling)을 경시하자는 말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술(technic)과 감성의 조화였다. 프롬보다 훨씬 앞선 1세기 사도바울이 말한 바도 그것이다. 그의 노래를 곱씹어 읽어보면, '사랑(agape)'을 '기술'과 '감정'이 구분되지 않는 복합적인 행동이라고 말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로써 그는 사랑이 믿음과 소망을 완성해주는 긴밀한 연결고리라는 점을 경각시킨 것이다.


2.나는 여러 일들이 기술과 감성의 조화로 완성된다는 것을 배운다. 내가 일주일에 하루 담당하는 로스팅도 그렇다. 내가 다루는 로스터기는 은근히 신경써야 할 상황이 많다. 그러고보니 이 일은 조금 기술이 필요하면서도 어떤 순간에는 지극히 감성이 필요하다. 이것은 사실, 지난 몇 년간 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아주 조금씩 인지한 일이다. 물론, 로스팅은 기술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숙련되고 그 시간에 비례하여 좀 더 수월한 작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론 시간이 지날수록 이 로스팅은 '감성'영역으로 진입한다. 단순히 시간과 열과 공기를 한 웅큼 커피빈과 절묘하게 만나게 하고, 적절한 시간에 배출해내야 하는 기계적 기술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내 몸이 기계를 집중하면서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그 시간은 고작 15분내외다. 기술도 필요없을 것 같다. 그저 커피콩이 익기를 잘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온도를 조절하고, 기압도 확인하며, 콩이 드럼 안에서 변화해가는 과정을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 조금 늦지 않도록, 너무 빠르지 않도록, 겉은 잘 익은 듯하지만, 보이지 않는 속은 풋내가 아직 남아있는지를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이 과정은 일련에 로스팅되는 콩과 내가 대화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기술이 압도해야 하지만, 콩을 대하는 나의 감성적인 마음이 오히려 적절한 로스팅을 좌우하는 열쇠가 된다.


3.

내가 사는 이 땅은 갈수록 기술이 감성을 압도한다. 비정서가 주도하는 세계다. 어떤 사람들은 기술, 아니 이성으로 감성을 제거하는데 익숙하다. 기술을 옹호하고, 감성을 배척한다. 기술에 함몰되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자신도 모르게 감성 제거 기술자들이 될 여지는 크다. 세계는 생존 기술이 발달할수록 생명에 대한 감성도 진보해야 하지 않겠는가. 기쁨과 즐거움에 잇대어 있는 슬픔과 아픔을 간파하고 공유하는 깊은 감성이 이 세계를 세계답게 만들어낸다는 생각은 허튼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감지한다. 그것은 능숙해져야 할 기술이 아니며, 단지 개인적 감성에 국한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더욱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공동체적 기술이면서 세계의 감성이기에 나를 넘어서고, 가족을 벗어나고, 사회, 국가를 넘어서 결국 그가 누구든지 '한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단지 사랑하기 때문에 충고한다는 말은 늘 조심스럽다. 사랑의 기술'만 편만해져가는 이 세계에서 인간의 존재 이유가 ‘타인을 위한 삶’에 기초한다고 '나는 믿는다(Credo!)' 내가 나를 사랑하듯이 타인도 사랑하고 공감하는 것이 ‘사랑의 기술(Art)’이다. 기술과 더불어 감성이 조화로운 삶이라는 것을 내가 잊어버리지 않으면 좋겠다. 앞으로 미래는 개인과 개인이 단지 거래적 관계가 아니라 적절한 거리를 두면서도 서로 존중하고 깊이 이해하려는 공동체성으로서만 유지될 것이다. ‘내’가 소중하듯, ‘너’도 중요하다. 그 ‘너’가 누구이든 말이다.


4.내친김에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이야기에 하나 덧붙여보자. 바울이 사랑을 기술(이성)'과 '감성'의 조화로 말했을 때,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부를 추구하고 향락에 길들여진 고린도지역 신앙인들이었다. 오죽하면 ‘고린도화하다(to Corinthianize)’는 동사가 생겼을까 말이다. 그런 이들에게 바울은 이성과 감정이 조화된 ‘사랑하다’를 제시한다. 하여 ‘사랑하다’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기술(art) ’이 되길 바랬다. 바울에 따르면, '사랑'은 기술만은 아니다. 또한 개인 감성에만 머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공동체를 위한 기술이며 감성이다. 고린도 사회에 건강하게 확립하고 유익을 주는 삶이다. 공동체에서 사랑은 타인과 더불어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언제나 모든 것에 상대를 향한/위한 삶을 지치지 않고, 견디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또한 그 사랑은 지금부터 삶의 끝이 올 때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져 마침내 부분적인 것들을 완전하게 바라보도록 유일하게 남아있는 힘이다. 바울이 노래한 사랑은 보이지 않는 차별, ‘그렇지 않은 듯’ 서로를 분파로 갈라버린 고린도 사회 속 교회공동체를 향한 경고이기도 하다. 그런 사랑이 아무렇지도 않게 남을 차별하는(혐오하는) 나를 지속적으로 경계하는 힘이다. 선량한 자신이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타인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은총이고, 위로부터 오는 공동체 생존의 ‘방식, 길’(ὁδός’,호도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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