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예수가 미소를 지으며 작업실 문으로 손을 뻗었다.

"대부분의 길은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아요. 당신을 찾기 위해서라면 어느 길이라도 가겠다는 뜻이죠."

-윌리엄 폴 영, <오두막,The Sheck >, 세계사, 2007/2009, 310쪽.


1

날씨는 맑다. 어느새 봄이 지나고 여름이 턱밑까지 올라왔다. 마른 장마가 무색하다. 서재로 들어오는 도로는 한참 동안 막혔다. 차선 두 개를 가로막고 공사가 한창이라는 것을 체증이 끝나는 지점에 와서야 알았다. 그나마 다행이다. 오랜 만에 들른 서재는 적막으로 가득하다.

2.

짐을 정리하고, 바닥을 닦고, 간단히 그릇을 씻어둔다. 비워둔 서재에 대한 나의 의례다. 잠시 앉아있다보니 어느 새 점심이다. 따로 준비할 것은 없다. 미리 가져 온 호밀 식빵(요즘 이런 이름 붙은 빵들이 많다)과 방금 내린 커피를 곁들였다. 습관처럼 노래를 흐르게 한다. 특별하지 않으면 김광석이 부른 노래 한 두 곡은 꼭 흐른다. 같은 가사, 곡조라도 그가 부르는 노래는 그답다. 당차다. 비장함, 슬픔마저도 옹골차다. '나의 노래'를 새겨듣는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이'는 비굴한 자기비하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노래'를 스스로 만들어 부르는 이만이 할 수 있는 선언이다. 화석같은 노래들인데도 들을 때마다 최초의 감성이 발화한다. 노래는 어디로 나를 데려갈지 모른다. 단정짓거나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 노래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다.


3.

노래가 거의 끝날 즈음에, 커피를 따뜻하게 한 번, 시원하게 한 번 번갈아 마신다. 김현

경의 사회인문학.『사람, 장소, 환대』(문학과 지성사, 2015/2020)를 마저 읽는다. 이번 달 독서나눔에서 다룰 책이다. 이야기 사이사이에 신앙고백같이 새겨둔 문장을 하나씩 꺼내 다시 읽는다. 제목으로 설정된 세 단어는 주제로 가는 징검다리들이라 할만하다. 사람은 인간과 다르고, 장소는 공간과 별개이며, 환대는 대접과 별다른 태도다. 환대없는 인간에게 이 세계는 그저 공간에 불과하다. 몸하나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이들을 받아주는 이 없다면, 이 세계는 암흑이다. ‘절대적 환대’라는 이상이 현실에 가까울수록 이 세계는 비로소 사람과 사람이 만나 어우러지는 ‘대동’이 될 것이다. 책을 덮었다. 여름의 문턱인지라 아지 해가 한참 남았다. 서재 밖으로 이어진 논길, 그 건너편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다. 잠시 몸을 일으켜 논둑길을 걷는다.


4.

논둑길을 걸으니 햇살이 평소와 달리 뭉특하다. 어느 새 논 가득 벼가 자라고 있다. 그 사이를 걸으니 마치 ‘숲’을 걷는 듯하다. 얼마 전 잠시 다녀온 어느 숲이 쉽게 떠오른다. 그 날 비가 내렸다. 비가 쏟아지고 난 다음 날, 숲은 온갖 향기로 가득하다. 빗물이 남아있는 숲 속길은 맑고 파란 하늘 아래서 목적없이 열린 세계다. 숲은 소리로 채워지고 바람도 살아난다 나뭇잎들은 바람이 부는 대로 소리를 바꿔가며 종알거린다.


5.

그 날 오름 몇 곳을 올랐다. 처음에는 가볍게 오를 생각이었다. 생각과 달리 비가 잔뜩 내리던 그 날, 고내봉에서 한참을 걸었다. 가벼운 길이었으나 무슨 이유인지 걸을수록 이러저리 얽히고 섥혔다. 높고 짙은 소나무 사이에 녹두빛 여린 잎들이 엉겨엉겨 살아가는 모습이 새롭다. 정상에서 멀리 내다보는 풍광은 막힘없이 시원하다. 비가 내렸지만, 바다와 산이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온다. 정상 표지석은 더 이상 올라갈 길이 없다는 안내자이다. 머물다가 다시 내려갈 길을 선택해야 한다. 나는 다시 돌아내려오기로 했다. 다행히 그 숲 끝까지 돌고돌아서 마침내 출발지점에 돌아왔다. 길은 어디나 이어져있었다. 산 아래 내려선 뒤에도 비는 여전하다. 그 빗 속에 저 숲은 살아있다. 숲을 사라지게 할 만한 온갖 불확정성이 난무하다해도 꿋꿋이 '숲답다.'



6.

숲을 걷다보면, 사람이 자기 머무는 곳에서 이유없이 환대받는 세계라는 생각이 가끔 든다. 그 날 비가 내렸고 오늘 맑은 햇살이 논 끝에 내린다. 이 세계가 건네는 어떤 환대같다. 


시간은 시나브로 여름으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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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리샤 폴라코 지음, 서애경 옮김 / 미래연아이세움 / 2001년 5월


1.

패트리사 폴라코의 어린 시절. 그녀는 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초등학교 5학년 즈음 그녀는 기적같이 글을 읽습니다.


2.

저자는 언어의 조기교육의 중요성이나

참고 기다리면 말문이 트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다르게 두 가지 사실이 씨앗처럼 들어있습니다.


첫째, 글을 깨우친다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향한 첫걸음입니다.

둘째,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책임이 따릅니다.


3.

주인공 트리샤는 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림을 잘 그립니다. 학교 가기는 늘 두렵습니다. 이 두려움 가득한 어린 아이를 위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꿀처럼 달콤한 글씨들을 보여줍니다. 폴커 선생님 역시 이 아이가 글이 아닌 그림에 탁월한 소질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 아이가 그림을 위해 글을 읽을 수 있도록 천천히 도와줍니다.


4.

아이는 5학년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권면이 무엇을 뜻하는지, 선생님이 보여준 헌신적인 노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5.

이 아이는 자라는 동안 그림과 글을 자기 삶에 가깝게 두었습니다. 결국 어린이 동화를 만드는 직업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막연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글을 읽어 새로운 삶을 경험하고, 그 쓰인 글을 삶으로 살아낼 수 있게 된 날을 결코 잊지 않으려고 자신을 도와준 선생님들을 위한 삶이기도 했습니다.


6.

좋은 선생님은 그를 통해 앞선 세계를 미리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들은 늘 자신은 허물이 크고, 부족하다고 말씀하기를 즐깁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보다 많은 노력과 수고를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7.

자기 세계를 새롭게 열어준 ‘좋은 선생님’을 만나고, 알고, 배우게 된 후생들은 그 앞선 분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자신의 세계에서 그 뜻을 실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분'이 계시는 것은 여러 행복한 일 중에서 소중한 자산입니다. 바라기는 '고맙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말한 뒤, 잠시 후 그의 이야기를 삶의 자리에서 아무 의미 없이 밀어내 버리는‘후생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8년 전, 오늘 ‘구약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명제를 남긴 선생님이 은퇴하셨습니다. 또 며칠 전, ‘대화는 따뜻하고 포근하게’라는 지침을 남겨준 선생님이 강단을 떠났습니다. 그 분들 뒤에서 잠깐 선생이라는 별칭을 갖고 살았던 나도 나의 앞선 선생님들이 남겨 준 이야기를 오늘 다시 마음에 간직해 둡니다. ‘인간을 위한 배려와 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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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굴의 시대 - 침몰하는 대한민국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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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굴의 시대』(박노자, 한겨레출판, 2014.)

- 침몰하는 대한민국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1.

『비굴의 시대』는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학교)가 정의한 21세기 한국사회의 단면이다. 그가 한 일간지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서 2014년 출판했다. 제목이 다소 직설적이다. 부제는 '침몰하는 대한민국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이 제목만 보더라도 그는 ‘비굴의 시대’를 규정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마땅한 대안을 찾아보려는 의지를 내비쳤다.


2.이 책을 다시 꺼내본다. 나는 그가 지난 날 우리 시대의 비굴함을 어떤 유형으로 분석했는지 또 확인할 마음은 없다.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 '비굴'해지는 법을 더욱 터득하기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를 제대로 관통할 수 없다는 ‘불안’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음을 실감해왔다. 솔직히 나는 사회가 비굴하다는 것보다 나 자신이 오히려 비굴함에 더 익숙해져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러니 비굴의 시대는 우리의 문제이기에 앞서 나의 문제다.


3.

그는 본래 왼쪽에 서서 세계를 본다. 물론 그는 우리 시대의 비굴함이 '오른쪽'에서 부터 기인했음을 확인한다. 하지만 그 뿐만은 아니다. 동시에 엉성한 왼쪽에서도 초래되었다는 평가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주시하는 바는 우리 사회 겉으로 드러나는 숱한 현상들이 사실은 오랫동안 누적되고 마침내 길을 잃어버린 것들이라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똑바로 서 있어도 삶이 왜곡되고, 편향되었음을 진단한다. 불편하다

.

4.

나는 그의 책 4부를 관심 있게 본다. <아득하지만 가야 할 좌파의 길>이라는 제안이다.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그의 대안이기도 하다. 그는 앞뒤도 고려하고, 좌우도 살피면서 시대를 위한 대안적 '실천이념'을 제안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권리'가 정당하게 회복되는 사회적 이념 실현에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아주 쉽게 망각하는 사회이념이기도 하다. 그는 이것이 재생되고 재활되기를 제안한다.


5.

그가 제시하는 대안을 이념적 명명으로 하자면 '사회주의'다. 아직도 어감이 유쾌하진 않다하겠지만, 이 용어는 본래 ‘타인과의 관계’를 우선하자는 이념이었다. 그가 주장하고 싶은 바는 어정쩡한 좌파의 우유부단함과 겉만 요란한 피상적 개혁에 뜻밖에도 ‘인간성’이 소실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런 위기에 대해 인간 본연의 삶의 자리를 복구시키고 그 권리를 보전하는 대안적 이념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심지어 그가 주장하는 '사회적 이념이 '인생이다'라고까지 말한다. 그런 맥락을 따라 그는 인생의 세 층위를 이렇게 말한다.


"기본적 층위는 생물학적로 생존하는 것이다. 그 다음 층위는 기본적인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마지막 층위는 관계나 창조적 노동이나 어떤 애타적 실천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다." (303/304쪽)


그는 '사회적 이념'의 목적지도 설정한다. 바로 '애타적 실천'이다. 핵심은 온전한 '개인'의 확립이다. 이는 공동체의 단위로서 모든 애타적 실천의 출발이다. 저항과 혁명은 바로 이 견고한 '개인'에게서 발원한다.


6.

솔직히 나는 그의 글의 흐름을 견실하게 따라가는 편은 아니다. 그의 한국사회 분석은 선명하고, 정확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사회적 이념’이라는 틀에 경도된 것은 아닌지 의심을 갖는다. 문제 분석은 한국의 속살을 냉철하게 드러냈지만, 대립되는 이념사회인 우리에게는 그 대안이 아직 걸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7.

박노자의 분석이 아니더라도 21세기, 우리를 둘러싼 사회 환경은 더욱 푸석해지고 있다. 그가 비판한 것처럼 우리가 가장 힘겹게 직면하는 문제는 '애타적 삶'이 실종되었다는 점이다. 저자가 단호하게 종교적 삶마저도 제 길을 잃어버렸다고 말한 것은 지금도 정확하다. 종교는 특히 '타인을 배려하는 삶'이 사라지고 극단적인 '자기사랑'으로 왜곡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분석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는 땅은 이 왜곡된 상황을 화석화하면서 정치화하여 이용하고 있다. 어느 분야든 ‘자기 의도를 감추고 타인을 이용하려는 웃음에 절어있는 사람’들이 우리 앞을 자유롭게 거닐고 있다. 이런 시대를 우리는 힘을 내어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너'나 '그들의'의 문제는 아니다. '나' 자신에게 잠복되어 나를 위협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나'도 언제든 나의 생존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정치화될 수 있는 변형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8.

전염병이 끝없이 진화하며 세계를 맴돌고 있다. 언제 끝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해결을 위해 노력하자면 여전히 장담할 수 없다. 우리 사회가 겪는 문제가 이 판데믹만은 아니다. 국가의 책임이 감지되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 묻혀가는 숱한 국가사고 이야기들이 여전히 있다. 이런 현상들은 더욱 '악의적으로 정치화'되어가고 있다. 가볍게 생각하더라도 사회가 발전해도 아직 우리 사회는 진지하게 '타인을 품어내는 사랑'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굽어진 실존들이 너무 많다.


9.

박노자교수가 '비굴의 시대'라고 명명한 것은 옳다. 물론 그가 '인간화'에 집중한 사회적 이념을 낯설게 여기는 경향이 많다고 해도 나는 그가 말하는 ‘인간의 시대’가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나아가 나는 그가 말한 '사회적 인간화'를 ‘관계적 인간화’라는 말로 풀어 이해하고 싶다. ‘신이 창조한 인간’이라는 신앙 언어를 빌려서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된 인간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 사회 속에 이미 퇴색해버린(?) 이 인간이해를 이 굽어진 현실에서 재활시키고 싶다는 것이다. 그의 책은 오늘 다시 나를 채근한다. 무엇보다, 나의 신앙을 경각시킨다. 나는 나에게 묻는다.


“'이 세계의 굽어짐을 공의와 정의의 ‘야훼’(YHWH)가 허용하고, 야훼 자신이 그 징계와 치유를 모른 척 아직도 유예하며 방관하고 있다면, 나는 지금 야훼의 행동의 의도를 어떻게 따라가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야훼의 카이로스는 지금 어디쯤에 있을까?”


서재 밖에서 공기에 흠칫하는 시간이 밀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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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원고 - 논픽션 대가 존 맥피, 글쓰기의 과정에 대하여
존 맥피 지음, 유나영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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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무한책임이 있다. 여기서 ‘글’은 논픽션(non-fiction)이다. 이 글은 적확한 사실과 주밀한 관찰에 근거하여 자기 주장이나 세계관을 정치하게 구성하는 문학이다. 따라서 ‘글쓰기’는 작가가 지난한 고통 끝에 잉태한 생명이다.”


1.

『네 번째 원고』(Draft No.4 ) (번역.유나영)존 맥피(1931~)의 2017년 연속에세이모음집, 모두 여덟 편에 걸쳐 ‘글쓰기 과정’을 소개했다. 샘 앤더슨에 따르면 이 글은 본래 ‘1975년 이래 프린스턴에서 강의한 강연록’(16쪽)에 근거하고 있다. 말을 글로 다시 옮긴 것이다. 한편, 번역 제목 『네 번째 원고』는 ‘초고를 수정하고 수정해서 네 번째 단계에 이른 글’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한 편의 초고가 세상에 나올 글로 완성되는 마지막 과정이다. 동시에 이 제목은 이 글쓰기 과정에서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계를 함축한다.


2.

국내에 책이 출판된 이후 작가에 대해서 이미 충분히 알려진 듯 하다. 저자는 미국 유력 신문사와 잡지에서 기자와 전문칼럼니스트로서 돋보이는 경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그가 평생 몰두했던 글쓰기 분야인 ‘논픽션’을 염두에 둔다. 기사나 언론 등에 실릴 기사나 칼럼을 쓰는 매뉴얼같은 글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단지 글쓰기에 필요한 기술을 일러주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그의 글쓰기를 ‘문학적 논픽션’이라고 평가한다. 이는 그가 게재한 기사와 칼럼이 ‘사실(fact)’과 ‘문학적 창의성’을 절묘하게 조화시키려는 구조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일반적인 소설이나 시, 또는 개인수필과 같은 글쓰기를 직접 논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글쓰기에 대한 일반적인 지침은 물론이고 우리 시대에 글쓰기의 의의에 대한 지나칠 수 없는 이념을 담고 있다.


3.

이 책은 모두 여덟 장에 걸친 저자의 글과 프롤로그 성격의 기고글(Sam Anderson, The Mind 0f John McPhee:A deeply private writer reveals his obsessive process. The New York Times Magazine, September 28, 2017.로 구성되었다. 특히 이 글은 서론 격이다. ‘존 맥피의 정신’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어판에 유일하게 실린 이 기고문은 존 맥피의 글쓰기 속에 담긴 어떤 정신을 추적한다. 그 중 앤더슨은 ‘보존’을 언급한다. 좀 추상적이긴 하지만, 이 말은 ‘대립되는 삶의 단면’을 조화롭게 담아서 삶을 전진시키켜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의 글은 ‘삶을 보존’하려는 ‘연대기적 의미(과거-현재-미래)’를 전제하면서 그 글이 우리 시대에 갖는 의의(공시적인 의미로서 현재-과거-현재-미래)를 실현하는 글쓰기를 시도한다.


“맥피의 중요한 테마는 언제나 보존conservation이었다. 여기서의 보존이란 이 단어가 띠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보존, 즉 있음과 없음, 머무름과 떠남, 존재와 무 사이의 끝없는 긴장을 뜻한다. 물론 이것은 *지는 싸움이다.”(29쪽)(*‘지는 싸움’이란 표현은 아무래도 ‘져주는 싸움’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4

‘보존’이라는 주제는 맥피가 제안하는 글쓰기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 이 책에 언급된 여덟 개 주제는 맥피가 제안하는 글쓰기의 실제 과정이다. 비록 주관적인 관점이겠지만, 결과적으로 어떤 글의 기획되고 완성된다는 점에서 보자면, 간과할 수 없는 적확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모든 글이 이런 과정을 기계적으로 따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중에서 특히 두 번째 장, ‘구조’와 여덟 번째 장, ‘생략’은 어떤 글쓰기에도 적용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우선 ‘구조’는 글의 뼈대이자, 글이 흘러가는 길이다. 독자들이 쉽게 눈치채지 못하게 하면서도 작가 스스로는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할 단계다. 특히 논픽션이 ‘문학’의 특징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보자면 이 ‘구조’는 핵심이다. ‘글을 완성시키기 위한 전략’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특히 이 구조에서 힘써야 할 부분은 ‘도입구’다.


“그러면, 도입부란 무엇인가? 우선 도입부는 글을 쓰는 데 있어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그리고 끔찍하게 형편없는 도입부를 쓰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104쪽)


도입부와 관련해서 맥피는 한 가지 재밌는 제안을 한다. ‘마중물’같은 도입부를 써보고 싶으면 ‘손으로 써본다’는 것이다. 생각을 자극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글은 어떻게 마감하는가?’라는 질문이 당연히 든다. 그는 답한다. ‘작가의 느낌이다.’


“사람들은 이게 끝이라는 걸 어떻게 아느냐고 자주 묻곤 한다. 언제 끝마무리에 다다랐는지뿐만 아니라, 초고를 쓰고 다시 수정하고 한 단어를 다른 단어로 교체하는 과정에서 이제 더 이상 해 볼 게 없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언제가 끝일까? 그냥 안다.”(120쪽)


도입와 결론에 대한 확실한 구상이 끝났다면, 이제 그 사이를 정확하고 성실하게 배열한다.


5.

저자가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한 내용은 어느 글쓰기에서나 상당히 중요한 전략이다. 바로 ‘생략’이다. 글을 덜어내는 것이다. 동시에 단어를 교체하거나 함축, 요약, 개념화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글쓰기는 선별이다. 글을 시작만하려 해도 언어에 존재하는 100만여 개의 단어 중에 한 단어, 딱 한 단어를 택해야 한다. 이제 앞으로 나아간다. 다음 단어로는 뭐가 올까?

(중략)

“글 한편의 분량은-더도 덜도 말고-그 글에서 택한 재료로 뒷받침할 수 있는 만큼이 적당하다.”(291쪽)


사실, 네 번째 초고에 이르는 과정은 결국 이 ‘덜어냄’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의도적인 여백 만들기라 할 수 있다. 이로써 저자는 “창의적인 독자”를 자극하는 셈이다. 


“창의적인 작가는 장과 장 사이, 절과 절 사이에 여백을 남긴다. 창의적인 독자는 이 여벽에 나타난, 적히지 않은 생각을 침묵 속에서 명료화한다. 이 경험을 독자의 몫으로 남겨라.”(297쪽)


6.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글쓰기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공공성’이다. 비록 ‘논픽션’ 분야에 관한 글이지만, 이런 질문은 모든 글쓰기에서 유효할 것이다. ‘글쓰기’는 두 가지 개념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글’이다. 다른 하나는 ‘쓰기’다. 이 책에 따르면, ‘글’은 작가가 자기 몸으로 살아온 몸안과 밖의 경험을 실감나게 표현해내는 도구다. 그런 점에서 ‘쓰기’는 그 도구로서 우리가 지향하는 공공성을 자신과 타인에게 남겨두려는 아비투스(Habitus)다. 나는 이런 ‘글쓰기’와 관련해 맥피가 제안하는 두 가지 사실을 새겨둔다. 하나는 ‘진지한, 솔직함’이다. 다른 하나는 ‘친절한, 상세함’이다.

또한 나는 이 점에서 문학으로 논픽션이 가진 ‘공공성(公共性)’을 생각한다. ‘기사’나 ‘칼럼’이라는 글이 우리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맥피의 제안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가짜뉴스를 아무렇지 않게 써내는 글도 적지 않은 시대다. 그런 점에서 『네 번째 원고』는 공공을 위한 글을 써내기 위해서 더욱 절실하다. 글을 쓰는 이들이, 사실에 근거하고, 구도를 명확하게 하며, ‘참조틀’(196쪽)을 정직하게하고, 결론을 독자에게 남겨두는 여유가 있다면 좋을 것이다.


7.

이 책에서 유의할 것이 있다. 모든 예화를 소화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미국 사회 논픽션 기자가 겪은 경험을 토대로 한 강연이기 때문이다. 그가 소재로 삼은 에피소드들은 읽는 대로 곧바로 동감하기 쉽지 않다. 굳이 이런 예화들을 정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한 모국어 아닌 영어권 글들이 대체로 두괄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각 문단에서 맨 첫 문장에 특히 유념해도 좋겠다. 글 전체가 낯설지 않을 것 같다. 소개해 준 에피소드들은 과감히 ‘생략’하는 것도 묘미다.


이렇게 쓰고 나니 한 문장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친애하는 조엘, 자네가 이를테면 회색 곰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치자. 그런데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는다.(중략) 벽에 부딪혔다. 막막하다. 가망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할가? 그럴 땐, ‘사랑하는 엄마에게’라고 써라. 엄마한테 글을 쓰다가 막혔다고, 막막하다고, 나는 무능하고 가망 없는 인간이라고 써라.(후략)”(257쪽)


문득, 이런 “‘글쓰기’는 마치 생명을 잉태하는 듯한 수고다.”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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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이다. 하루 해가 뜨고 진다. 앉을 겨를 없이 쉼없이 움직인다. 마침내 일손을 놓는다. 마쳤다. 여전히 맑은 저녁이다. 아침보다는 볕이 뜨거워졌지만 바람은 선선하다. 걷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다. 조금 멀리 떨어진 전철역까지 걷는다. 이른 퇴근이라 역은 여유롭다. 

자리에 앉아 아침 그 책을 꺼낸다. 펼친다. 읽는다.

" 곤경에서 벗어나려면 그 벽에 창문을 낼 수 있는 내면의 힘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의미의 길을 세우고, 존재 이유를 만들어내고, 즉흥적이든 혹은 지속적이든 흥분을 만들어내고, 존재감을 되살리는 일이다. 그 결과는 때로 오래 걷기를 통해 자신 앞에 열린 길과 관계된다."
(221쪽) -길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

가만히 이 글을 보고 있으니 
광화문에서 부산역까지 길게 걸었던 
그 때 그 길이 스르륵 열린다. 










길 끝에는 '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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