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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굴의 시대 - 침몰하는 대한민국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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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굴의 시대』(박노자, 한겨레출판, 2014.)

- 침몰하는 대한민국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1.

『비굴의 시대』는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학교)가 정의한 21세기 한국사회의 단면이다. 그가 한 일간지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서 2014년 출판했다. 제목이 다소 직설적이다. 부제는 '침몰하는 대한민국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이 제목만 보더라도 그는 ‘비굴의 시대’를 규정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마땅한 대안을 찾아보려는 의지를 내비쳤다.


2.이 책을 다시 꺼내본다. 나는 그가 지난 날 우리 시대의 비굴함을 어떤 유형으로 분석했는지 또 확인할 마음은 없다.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 '비굴'해지는 법을 더욱 터득하기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를 제대로 관통할 수 없다는 ‘불안’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음을 실감해왔다. 솔직히 나는 사회가 비굴하다는 것보다 나 자신이 오히려 비굴함에 더 익숙해져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러니 비굴의 시대는 우리의 문제이기에 앞서 나의 문제다.


3.

그는 본래 왼쪽에 서서 세계를 본다. 물론 그는 우리 시대의 비굴함이 '오른쪽'에서 부터 기인했음을 확인한다. 하지만 그 뿐만은 아니다. 동시에 엉성한 왼쪽에서도 초래되었다는 평가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주시하는 바는 우리 사회 겉으로 드러나는 숱한 현상들이 사실은 오랫동안 누적되고 마침내 길을 잃어버린 것들이라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똑바로 서 있어도 삶이 왜곡되고, 편향되었음을 진단한다. 불편하다

.

4.

나는 그의 책 4부를 관심 있게 본다. <아득하지만 가야 할 좌파의 길>이라는 제안이다.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그의 대안이기도 하다. 그는 앞뒤도 고려하고, 좌우도 살피면서 시대를 위한 대안적 '실천이념'을 제안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권리'가 정당하게 회복되는 사회적 이념 실현에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아주 쉽게 망각하는 사회이념이기도 하다. 그는 이것이 재생되고 재활되기를 제안한다.


5.

그가 제시하는 대안을 이념적 명명으로 하자면 '사회주의'다. 아직도 어감이 유쾌하진 않다하겠지만, 이 용어는 본래 ‘타인과의 관계’를 우선하자는 이념이었다. 그가 주장하고 싶은 바는 어정쩡한 좌파의 우유부단함과 겉만 요란한 피상적 개혁에 뜻밖에도 ‘인간성’이 소실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런 위기에 대해 인간 본연의 삶의 자리를 복구시키고 그 권리를 보전하는 대안적 이념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심지어 그가 주장하는 '사회적 이념이 '인생이다'라고까지 말한다. 그런 맥락을 따라 그는 인생의 세 층위를 이렇게 말한다.


"기본적 층위는 생물학적로 생존하는 것이다. 그 다음 층위는 기본적인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마지막 층위는 관계나 창조적 노동이나 어떤 애타적 실천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다." (303/304쪽)


그는 '사회적 이념'의 목적지도 설정한다. 바로 '애타적 실천'이다. 핵심은 온전한 '개인'의 확립이다. 이는 공동체의 단위로서 모든 애타적 실천의 출발이다. 저항과 혁명은 바로 이 견고한 '개인'에게서 발원한다.


6.

솔직히 나는 그의 글의 흐름을 견실하게 따라가는 편은 아니다. 그의 한국사회 분석은 선명하고, 정확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사회적 이념’이라는 틀에 경도된 것은 아닌지 의심을 갖는다. 문제 분석은 한국의 속살을 냉철하게 드러냈지만, 대립되는 이념사회인 우리에게는 그 대안이 아직 걸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7.

박노자의 분석이 아니더라도 21세기, 우리를 둘러싼 사회 환경은 더욱 푸석해지고 있다. 그가 비판한 것처럼 우리가 가장 힘겹게 직면하는 문제는 '애타적 삶'이 실종되었다는 점이다. 저자가 단호하게 종교적 삶마저도 제 길을 잃어버렸다고 말한 것은 지금도 정확하다. 종교는 특히 '타인을 배려하는 삶'이 사라지고 극단적인 '자기사랑'으로 왜곡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분석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는 땅은 이 왜곡된 상황을 화석화하면서 정치화하여 이용하고 있다. 어느 분야든 ‘자기 의도를 감추고 타인을 이용하려는 웃음에 절어있는 사람’들이 우리 앞을 자유롭게 거닐고 있다. 이런 시대를 우리는 힘을 내어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너'나 '그들의'의 문제는 아니다. '나' 자신에게 잠복되어 나를 위협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나'도 언제든 나의 생존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정치화될 수 있는 변형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8.

전염병이 끝없이 진화하며 세계를 맴돌고 있다. 언제 끝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해결을 위해 노력하자면 여전히 장담할 수 없다. 우리 사회가 겪는 문제가 이 판데믹만은 아니다. 국가의 책임이 감지되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 묻혀가는 숱한 국가사고 이야기들이 여전히 있다. 이런 현상들은 더욱 '악의적으로 정치화'되어가고 있다. 가볍게 생각하더라도 사회가 발전해도 아직 우리 사회는 진지하게 '타인을 품어내는 사랑'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굽어진 실존들이 너무 많다.


9.

박노자교수가 '비굴의 시대'라고 명명한 것은 옳다. 물론 그가 '인간화'에 집중한 사회적 이념을 낯설게 여기는 경향이 많다고 해도 나는 그가 말하는 ‘인간의 시대’가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나아가 나는 그가 말한 '사회적 인간화'를 ‘관계적 인간화’라는 말로 풀어 이해하고 싶다. ‘신이 창조한 인간’이라는 신앙 언어를 빌려서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된 인간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 사회 속에 이미 퇴색해버린(?) 이 인간이해를 이 굽어진 현실에서 재활시키고 싶다는 것이다. 그의 책은 오늘 다시 나를 채근한다. 무엇보다, 나의 신앙을 경각시킨다. 나는 나에게 묻는다.


“'이 세계의 굽어짐을 공의와 정의의 ‘야훼’(YHWH)가 허용하고, 야훼 자신이 그 징계와 치유를 모른 척 아직도 유예하며 방관하고 있다면, 나는 지금 야훼의 행동의 의도를 어떻게 따라가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야훼의 카이로스는 지금 어디쯤에 있을까?”


서재 밖에서 공기에 흠칫하는 시간이 밀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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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원고 - 논픽션 대가 존 맥피, 글쓰기의 과정에 대하여
존 맥피 지음, 유나영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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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무한책임이 있다. 여기서 ‘글’은 논픽션(non-fiction)이다. 이 글은 적확한 사실과 주밀한 관찰에 근거하여 자기 주장이나 세계관을 정치하게 구성하는 문학이다. 따라서 ‘글쓰기’는 작가가 지난한 고통 끝에 잉태한 생명이다.”


1.

『네 번째 원고』(Draft No.4 ) (번역.유나영)존 맥피(1931~)의 2017년 연속에세이모음집, 모두 여덟 편에 걸쳐 ‘글쓰기 과정’을 소개했다. 샘 앤더슨에 따르면 이 글은 본래 ‘1975년 이래 프린스턴에서 강의한 강연록’(16쪽)에 근거하고 있다. 말을 글로 다시 옮긴 것이다. 한편, 번역 제목 『네 번째 원고』는 ‘초고를 수정하고 수정해서 네 번째 단계에 이른 글’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한 편의 초고가 세상에 나올 글로 완성되는 마지막 과정이다. 동시에 이 제목은 이 글쓰기 과정에서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계를 함축한다.


2.

국내에 책이 출판된 이후 작가에 대해서 이미 충분히 알려진 듯 하다. 저자는 미국 유력 신문사와 잡지에서 기자와 전문칼럼니스트로서 돋보이는 경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그가 평생 몰두했던 글쓰기 분야인 ‘논픽션’을 염두에 둔다. 기사나 언론 등에 실릴 기사나 칼럼을 쓰는 매뉴얼같은 글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단지 글쓰기에 필요한 기술을 일러주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그의 글쓰기를 ‘문학적 논픽션’이라고 평가한다. 이는 그가 게재한 기사와 칼럼이 ‘사실(fact)’과 ‘문학적 창의성’을 절묘하게 조화시키려는 구조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일반적인 소설이나 시, 또는 개인수필과 같은 글쓰기를 직접 논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글쓰기에 대한 일반적인 지침은 물론이고 우리 시대에 글쓰기의 의의에 대한 지나칠 수 없는 이념을 담고 있다.


3.

이 책은 모두 여덟 장에 걸친 저자의 글과 프롤로그 성격의 기고글(Sam Anderson, The Mind 0f John McPhee:A deeply private writer reveals his obsessive process. The New York Times Magazine, September 28, 2017.로 구성되었다. 특히 이 글은 서론 격이다. ‘존 맥피의 정신’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어판에 유일하게 실린 이 기고문은 존 맥피의 글쓰기 속에 담긴 어떤 정신을 추적한다. 그 중 앤더슨은 ‘보존’을 언급한다. 좀 추상적이긴 하지만, 이 말은 ‘대립되는 삶의 단면’을 조화롭게 담아서 삶을 전진시키켜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의 글은 ‘삶을 보존’하려는 ‘연대기적 의미(과거-현재-미래)’를 전제하면서 그 글이 우리 시대에 갖는 의의(공시적인 의미로서 현재-과거-현재-미래)를 실현하는 글쓰기를 시도한다.


“맥피의 중요한 테마는 언제나 보존conservation이었다. 여기서의 보존이란 이 단어가 띠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보존, 즉 있음과 없음, 머무름과 떠남, 존재와 무 사이의 끝없는 긴장을 뜻한다. 물론 이것은 *지는 싸움이다.”(29쪽)(*‘지는 싸움’이란 표현은 아무래도 ‘져주는 싸움’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4

‘보존’이라는 주제는 맥피가 제안하는 글쓰기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 이 책에 언급된 여덟 개 주제는 맥피가 제안하는 글쓰기의 실제 과정이다. 비록 주관적인 관점이겠지만, 결과적으로 어떤 글의 기획되고 완성된다는 점에서 보자면, 간과할 수 없는 적확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모든 글이 이런 과정을 기계적으로 따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중에서 특히 두 번째 장, ‘구조’와 여덟 번째 장, ‘생략’은 어떤 글쓰기에도 적용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우선 ‘구조’는 글의 뼈대이자, 글이 흘러가는 길이다. 독자들이 쉽게 눈치채지 못하게 하면서도 작가 스스로는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할 단계다. 특히 논픽션이 ‘문학’의 특징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보자면 이 ‘구조’는 핵심이다. ‘글을 완성시키기 위한 전략’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특히 이 구조에서 힘써야 할 부분은 ‘도입구’다.


“그러면, 도입부란 무엇인가? 우선 도입부는 글을 쓰는 데 있어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그리고 끔찍하게 형편없는 도입부를 쓰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104쪽)


도입부와 관련해서 맥피는 한 가지 재밌는 제안을 한다. ‘마중물’같은 도입부를 써보고 싶으면 ‘손으로 써본다’는 것이다. 생각을 자극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글은 어떻게 마감하는가?’라는 질문이 당연히 든다. 그는 답한다. ‘작가의 느낌이다.’


“사람들은 이게 끝이라는 걸 어떻게 아느냐고 자주 묻곤 한다. 언제 끝마무리에 다다랐는지뿐만 아니라, 초고를 쓰고 다시 수정하고 한 단어를 다른 단어로 교체하는 과정에서 이제 더 이상 해 볼 게 없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언제가 끝일까? 그냥 안다.”(120쪽)


도입와 결론에 대한 확실한 구상이 끝났다면, 이제 그 사이를 정확하고 성실하게 배열한다.


5.

저자가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한 내용은 어느 글쓰기에서나 상당히 중요한 전략이다. 바로 ‘생략’이다. 글을 덜어내는 것이다. 동시에 단어를 교체하거나 함축, 요약, 개념화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글쓰기는 선별이다. 글을 시작만하려 해도 언어에 존재하는 100만여 개의 단어 중에 한 단어, 딱 한 단어를 택해야 한다. 이제 앞으로 나아간다. 다음 단어로는 뭐가 올까?

(중략)

“글 한편의 분량은-더도 덜도 말고-그 글에서 택한 재료로 뒷받침할 수 있는 만큼이 적당하다.”(291쪽)


사실, 네 번째 초고에 이르는 과정은 결국 이 ‘덜어냄’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의도적인 여백 만들기라 할 수 있다. 이로써 저자는 “창의적인 독자”를 자극하는 셈이다. 


“창의적인 작가는 장과 장 사이, 절과 절 사이에 여백을 남긴다. 창의적인 독자는 이 여벽에 나타난, 적히지 않은 생각을 침묵 속에서 명료화한다. 이 경험을 독자의 몫으로 남겨라.”(297쪽)


6.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글쓰기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공공성’이다. 비록 ‘논픽션’ 분야에 관한 글이지만, 이런 질문은 모든 글쓰기에서 유효할 것이다. ‘글쓰기’는 두 가지 개념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글’이다. 다른 하나는 ‘쓰기’다. 이 책에 따르면, ‘글’은 작가가 자기 몸으로 살아온 몸안과 밖의 경험을 실감나게 표현해내는 도구다. 그런 점에서 ‘쓰기’는 그 도구로서 우리가 지향하는 공공성을 자신과 타인에게 남겨두려는 아비투스(Habitus)다. 나는 이런 ‘글쓰기’와 관련해 맥피가 제안하는 두 가지 사실을 새겨둔다. 하나는 ‘진지한, 솔직함’이다. 다른 하나는 ‘친절한, 상세함’이다.

또한 나는 이 점에서 문학으로 논픽션이 가진 ‘공공성(公共性)’을 생각한다. ‘기사’나 ‘칼럼’이라는 글이 우리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맥피의 제안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가짜뉴스를 아무렇지 않게 써내는 글도 적지 않은 시대다. 그런 점에서 『네 번째 원고』는 공공을 위한 글을 써내기 위해서 더욱 절실하다. 글을 쓰는 이들이, 사실에 근거하고, 구도를 명확하게 하며, ‘참조틀’(196쪽)을 정직하게하고, 결론을 독자에게 남겨두는 여유가 있다면 좋을 것이다.


7.

이 책에서 유의할 것이 있다. 모든 예화를 소화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미국 사회 논픽션 기자가 겪은 경험을 토대로 한 강연이기 때문이다. 그가 소재로 삼은 에피소드들은 읽는 대로 곧바로 동감하기 쉽지 않다. 굳이 이런 예화들을 정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한 모국어 아닌 영어권 글들이 대체로 두괄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각 문단에서 맨 첫 문장에 특히 유념해도 좋겠다. 글 전체가 낯설지 않을 것 같다. 소개해 준 에피소드들은 과감히 ‘생략’하는 것도 묘미다.


이렇게 쓰고 나니 한 문장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친애하는 조엘, 자네가 이를테면 회색 곰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치자. 그런데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는다.(중략) 벽에 부딪혔다. 막막하다. 가망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할가? 그럴 땐, ‘사랑하는 엄마에게’라고 써라. 엄마한테 글을 쓰다가 막혔다고, 막막하다고, 나는 무능하고 가망 없는 인간이라고 써라.(후략)”(257쪽)


문득, 이런 “‘글쓰기’는 마치 생명을 잉태하는 듯한 수고다.”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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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키 문구점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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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 인용된 글들은 모두 소설 속에서 발췌했다. 인용페이지는 따로 적지 않는다. 

*요즘 글쓰기에 대한 관심과 책들이 어느 해보다 눈에 띈다. 여러 책들을 보고 있지만, 나는 이 소설도 그런 주제에 꽤나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써두었던 리뷰를 꺼낸다.  


1.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다시 자연스럽게 첫 장으로 되돌아갔다.


마디마디 조각 같은 편지글이 담겼다.

조각들은 한데 어우러져 형형색색 한 조각보가 되었다.


이렇게 저자는 독자에게 한 통의 손편지를 보낸다.

그것은 글을 통한 자기치유과정을 담은 고백문이기도 했다.

한 여름부터 시작하여 봄까지 이어진 긴 손편지를 소설로 받았다.


즐거운 일이다.


2.

오가와 이토는 데뷔 10년 후인 2008년 첫 소설을 출판했다. 작사가 경험이 있다. 즐겨 다루는 소재는 음식이었다. 아니 ‘요리’라고 해야겠다.『달팽이 식당』(食堂かたつむり, 2008)을 시작으로『따뜻함을 드세요』(あつあつを召し上がれ, 2012),와 같은 소설들이 이어졌다. 그 소설과 소설이 출판되는 사이에 음식과 요리를 소재로 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토대로 사람들과 소통해왔다. 음식전문소설가라고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다른 몇 권의 책들도 마찬가지지만, 사실 겉으로 드러난 소재나 주제는 평이해 보인다. 하지만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요리방식이다. 저자는 손편지 ‘대필(代筆)’이라는 소재를 맛깔스럽게 요리한다. 책을 읽다보면 마치 내가 언젠가 경험했을 것 같은 에피소드들이 등장한다. 게다가 손편지라는 아날로그 기표를 절묘하게 활용하고 있으니 읽는 재미가 좋다. 다양한 문맥과 재치있는 표현으로 글 곳곳에 잘 배치되어 있다. 그의 전작들과 견줘보면 단지 요리가 편지로 옮겨왔을 뿐이다. 하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색다른 소재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것은 재료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저자가 가진 탁월한 글쓰기전략이 적중한 것이라 해야겠다. 저자는 이런 전략에 능숙하다. 따라서 이 소설은 주제를 탐색하기보다 작가가 보여주는 요리방법을 눈여겨봐야 할 것 같다.


3.

『츠바키 문구점』(ツバキ文具店, 예담, 2017)(NHK동명 드라마이기도하다)은 단지 동네 문구점 에피소드는 아니다. 손편지이야기이면서 사람들 사이를 흐르는 따뜻한 감성스토리다. 사실, 오랜 전에 손편지는 기계편지로 옮겨졌다. 이걸 감안하면 편지쓰기는 과거이며 추억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츠바키문구점엔 지금도 대필손편지가 있다.’는 소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소환한다. 


대필이라는 소재도 재밌지만, 번역된 문체도 단순하고 경쾌하다. 이 책 몇 장을 넘기다보면 문득 중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에 유치하다싶은 러브레터를 잘 써주는 친구가 떠오를 수 있다. 내 기억으로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 편지는 더 세련되고 묘사가 세밀했던 것 같다. 대필가들은 으쓱하고, 의뢰인은 크크 거린다. 물론 회신과 결과는 예측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그 대필은 종종 손이 무뎌 머뭇하는 친구들을 환하게 웃음 짓게 했던 즐거운 추억이다.


4.

소설은 모두 6개의 꼭지로 구성되었다. 처음부터 네 번째 꼭지는 계절을 따라간다. 여름부터 봄이다. 이 소설은 사실 계절이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를 그리 개의치 않는다. 습관적으로 봄을 말할 뿐, 삶은 여름으로부터, 가을로부터, 겨울로 부터도 시작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대필 편지를 쓰는 네 계절이 바뀌는 동안 사람도 성장한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되고, ‘나’는 ‘너’를 용납한다. 성장과 치유 그리고 성숙한 사람이 거기 있다. 이 모든 과정은 일본정신이라 자부하는 ‘화(和)’를 전제하는 것 같다. ‘글쓰기’는 그 토대다.


이 소설은 일단 구성이 탄탄하다. 동시에 장면장면을 독자들에게 컬러북같은 밑그림으로 제공한다는 특징도 보인다. 독자라면 누구든지 이 빈 그림틀에 자기 색연필로 마음껏 칠할 수도 있다.(다섯 번째 꼭지는 번역자 후기이다.) 또한 이 소설은 지명과 공간들을 실명으로 쓰고 있다. 번역자가 도쿄에서 열차로 55분 거리에 있는 가마쿠라로 곧바로 날아간 것도 무리는 아니다. 소설은 가상이지만, 배경은 실제였기 때문이다. 번역자가 남긴 소감을 보면 이 소설은 마치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같다. ‘그것을 보기 위해 그 곳에 가면 그것이 있다’ 마지막 여섯 번째 꼭지는 소설에 등장하는 편지들을 실제 그대로 실어두었다. 쓰인 그대로 제본해 둔 것이다. 실물편지를 보면 내용을 보기도 전에 그 주고받는 사람들이 겪었을 다양한 삶과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을 정도다. 실물편지는 그 자체로 소설을 현실로 되살려준다. 꼭 훑어봐야 한다.


5.

이 소설의 특징 한 가지를 더 언급하고 싶다. 손편지에 대한 작가 자신의 관점을 드러내는 대목들이다. 아니 좀 더 명확히 말하면, ‘손편지 대필’이라는 지난 문화를 오늘 다시 대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그것을 별도로 다루지는 않는다. 다만 계절과 계절 사이, 에피소드와 에피소드 사이사이에 드러나지 않는 표기로 방점을 찍어 배열해두었을 뿐이다. 몇 개 예를 들면 이런 표현들이다.


“편지는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함과 동시에 상대가 그것을 받아 들었을 때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글씨는 그 사람과 함께 나이를 먹으며 늙어간다…….글씨도 나이와 함께 변화한다.”

(이 문장은 결국 이 소설이 드러내지 않으면서 지향하는 내적 주제라 할만하다.)


“글은 몸으로 써야한다.”


“글은 남는 것이다. 상대가 그 편지를 읽고 나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이 글보다 말을 선호하는 이유일 것이다.)


“나도 지금까지 글씨는 그 사람 자체라고 믿었다. 촌스러운 사람은 촌스러운 글씨를 쓰고, 섬세한 사람은 섬세한 글씨를 쓴다, 얼핏 꼼꼼하게 보여도 대담한 글씨를 쓰는 사람은 성격에도 그것이 나타난다…….그런 식으로 글씨에는 그것을 쓰는 사람의 인품이 그대로 배어나온다고 믿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글씨’는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투영한다. 그러니 문체가 그 사람이다.)


“당신은 늘 말했죠.

글씨란 인생 그 자체라고.

나는 아직 이런 글씨밖에 쓰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림없는 내 글씨입니다.

드디어 썼네요.” (완전한 글체는 없다. 온전해지려는 글체가 있을 뿐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찾아 본 이 구절들 말고도 독자는 자기 방식으로 의미 있는 표현들을 더 찾을 수 있다. 글쓰기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이야기들이 소설 곳곳에 봄날 땅을 뚫고 올라올 씨앗처럼 심겨져있다. 조금만 눈여겨보면 금방 싹을 틔울 것이다.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들어가보면 저자는 ‘글’이 무엇이며, ‘글씨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인철학을 담아두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느 편지에서나 주인공은 의뢰자의 마음을 읽고 그것을 편지에 담으려고 노력한다. 대필자는 의뢰자가 쓰고 싶은 바로 그 글을 써준다. 그걸 위해 대필가가 노력하는 장면은 경건한 예식 같기도 하다. 소설 속에서 그 장면들은 아름답다. 억지스런 문장이 아니다. ‘환대와 배려’를 눈에 보이도록 실재화해준다.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생각은 우주적으로 행동은 지역적으로’라는 경구에 부합할 수 있다. 화해와 평화라는 거대한 주제를 생각하면서 편지라는 지극히 평범한 옷을 입혀서 말하고 있다. 대필가를 둘러 싼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소소한 삶들도 그런 특징에 기여한다. 소설 속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다.



6.

이 소설에서 가장 유의할 것은 빨리 읽지 않는 것이다. 이 소설은 가볍다. 표지를 보면 도서관에서 며칠 빌려 읽고 반납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 것 같다. 순식간에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책을 두고두고 꺼내서 읽어도 좋다. 느릿하게 읽을수록 좋다. 이런 독법이 이 책을 대하는 태도이다. 마치 자신이 대필가로서 글을 써야 할 사람처럼 말이다. 혹시 그대가 이 마지막 문장을 읽는 즉시 이해한다면 이 책 처음으로 돌아가 한번쯤 천천히 읽는다면 더 유익할 것이다.


이 소설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새들이 밤의 흔적을 쪼아 먹듯이 신난 목소리로 수다를 떨고 있다.”(314쪽)


이 소설은 소설 자체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글쓰기가 인간에 대한 지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진지하게 보여준다. 


저녁 무렵에 가볍게, 그러나 진중하게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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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힘을 믿는다 - 정찬 산문집
정찬 지음 / 교양인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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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뮤지컬 <빨래>와 마르크 로제의 소설 『그레구아르와 책방할아버지』,(윤미연 역, 문학동네, 2020), 정찬의 산문집『슬픔의 힘을 믿는다』(교양인 2020), 사이에 어떤 문학적 상관성을 읽는다. 그것은 ‘슬픔을 삶에 대한 경이로운 위로로 수용하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1.

책을 덮었다. 노래는 여전히 흐른다. 헨릭 고레츠키의 '교향곡 제3번' 슬픈 노래의 교향곡(Henryk Gorecki:Symphony Op. 36 'Symphony of Sorrowful Songs'. 1976초연)이다. 두드러진 음없이 낮고 묵직하게 흐른다. ‘슬픔’은 삶에 배경처럼 스며든다. 보기와 달리 강인한 힘이다.


2.

나는 지금 잔인한 4월에 이어지는 ‘5월’을 보내고 있다. 여느 해라면 따뜻하고 정겨운 5월이겠지만, 2020년 5월은 윤4월에 이끌린 탓인지 아직도 서늘한 4월인 듯하다. 삶의 고통을 버텨내야 할 힘을 어디서든 끌어내야한다. 나는 지금 ‘하늘의 소망을 간직한 채 땅을 딛는 발을 버텨야 한다.’ 고도의 문명세계에 속했다해도 나는 여전히 ‘땅의 사람’, 하비루이기도 하다. 이들은 따뜻한 위로가 필요하다. 나라의 구휼미가 낯설지 않게 환생한다. 그나마 다행이다.


사실, 누가 누구를 위로할만한 여건이랄 수 없는 고통이다. 보이지 않는 힘의 위협은 생각보다 두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다정한 위로는 잃어버릴 수 없다. 두려움에 저항할만한 유력한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위로는 본래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에 터를 두고 있다. 그 출발점에 인간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는 문학이 있다.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인간을 자기 손으로 빚어낸 책임으로 끝까지 긍휼하는 신의 헤세드(사랑)가 있다. 정치하게 말하자면, 신학은 문학이며, 인간학일 수밖에 없다. 신이 허락해 준 은총이다. 그러니 ‘땅의 사람’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행동은 신에 대한 인간의 예의이기도 하다. 신이 인간을 포용하는 희생을 보여주었으니 인간 역시 타인을 수용하는 수고를 당연히 해야 할 것이다.이 글은 그런 나의 작은 노력 중 하나다. 


3.

소설가 정찬의 첫 산문집 『슬픔의 힘을 믿는다』(교양인 2020).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멀리 그가 밝힌대로, 그의 소설『슬픔의 노래』(1995, 조선일보사)에 잇대어 있다. 이 소설이 창작 동기와 배경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져 있다. 가장 알려진 바는 저 2차대전 최고 피해국인 폴란드의 음악가 고레츠기 인터뷰와 관련있는 일화다.(참고 제2부 슬픔의 힘을 믿는다 중에서 ‘슬픔의 강변에 서서, 101-108) 그에 따르면, 그는 ‘슬픔’을 여전히 그의 문학 속에 핵심언어로 두고 있는 듯 보인다. 나는 그의 이런 시도를 ‘슬픔의 해석학’이라 부르고 싶다.


이 글들은 대체로 2016-2017년 즈음에 발표한 글들이 중심이다. 시차를 두고 연재되었던 글들을 재편집했으니 대체로 한 논지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가 평소 자기 세계관을 일관되게 피력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대체로 글 상호간에 어떤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목차에 따르면, 이 산문집은 4부에 걸쳐 54개의 글이 실렸다. 책제목과 관련해서 가장 중심에 놓인 글은 2부 ‘슬픔의 힘을 믿는다’라고 할 수 있다. 혹시 저자의 기본 생각을 먼저 읽고 싶다면, 개인적으로는 2부를 먼저 읽으면 좋을 것 같다. 1,3,4부는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연재된 글들이 갖는 특성상 반복되는 소재가 있고, 비슷한 이야기가 징검다리처럼 나열되기도 한다. 하지만, 책 전체에서 그런 특징은 오히려 작가가 가진 세계인식이 일관된다는 한 방증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4.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은 제목이 전체 논지를 잘 함축해 주고 있다. 저자가 밝혔듯이, 그는 ‘슬픔의 힘을 믿’고 있다. 확실하게. 이 점에 유의하면 나는 독자로서 이 책에 관통하는 논지를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슬픔’은 보편성을 갖는다. 인간을 향해 누구에게, 언제나 어디서나, 이유없이 발현한다. 그러니 원인과 이유를 찾는 일은 가볍지 않다. 그런 시도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단순하지도 가볍지도 않다. 오히려 ‘슬픔이 무엇인가?’를 묻는 일이 필요하다. 좀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우선 ‘슬픔’이 나의 문제라는 인식이다. 또한 타인도 슬픔에 직면해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나아가 이 세계에는 슬픔이 항존하고, 그 안에 슬퍼하는 자들은 상존한다는 점이다.


한편 슬픔은 극복할 대상이 아니다. 인간을 깊이 들여다볼수록 인간 안에는 슬픔이 깊이 내재해있기 때문이다. 슬픔은 함께 가는 것이다. 나의 슬픔을 제거해내기 위해 타인의 슬픔을 강화시키거나 방조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슬픔은 공감이 필연이다. 이 때, 비로서 슬픔은 그 자체로 삶의 토대를 굳게 하는 기쁨이며, 희망으로 전환된다.


역설이지만, 적절한 슬픔과 함께 살아갈 때, 오히려 그 슬픔은 문학의 토대가 된다. 동시에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강건하게 지켜내는 힘이 될 수 있다. 이것을 일컬어 ‘슬픔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있다. 슬픔으로 희망을 노래한다.


5.

 54편 글들은 저자가 평소 쓴 글 중에서 연대와 상관없이 선별하고 배열했을 터이니 이 목차는 그의 편집의도가 적극 반영되었을 것이다. 독자의 글을 기고한 정희진은 평소 저자의 글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그의 글은 ‘줄거리의 소비’가 아니라 ‘생각하는 노동’을 요구한다.”


이 표현이 소설가 정찬에 적합한가에 대해서는 다른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사실, 어떤 면에서는 저자를 가장 함축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 산문집에도 마찬가지다. 독자에게는 가벼운 읽기일 수 없겠지만, 소설가가 가진 문학의 책임성 면에서는 가볍게 여길 수 없다. 그러니 그의 글을 읽을 때는 일단 글 전체를 통독하고 그가 말하고 싶은 어떤 논지를 추론하고 재구성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저자와 적극적인 대화가 필요하다. 질문과 답변으로. 이런 경향은 소설에서 한층 두드러진다. 산문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책의 전체 내용을 내가 이해한대로 일별해 본다.


1부는 문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자 답이다. 그는 문학이, 문학에 기여하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슬픔’을 내재하고 있음을 들춰낸다. 그 슬픔은 고립일 수도 있고, 자발적 격리이거나 스스로 경계로 밀려나는 시도이기도하다. 문학은 이런 다양한 ‘슬픔’을 모태로 태생한다. 1부에 소개하는 인물들은 우리 문학사에서 한번쯤 접했을 사람들이 다.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흔적인 듯하다. 여기서 소개된 문학가들의 슬픔은 ‘세계 너머’를 보는 ‘견자’가 누리는 권한에 필연적으로 파생하는 무게다. 그것이 무겁다. 2부에는 4편의 글이 있다.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다) 묵직한 글들이지만, 작가가 설정하는 슬픔의 문학적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작가가 오래 전부터 ‘슬픔’이라는 감정을 주목한 이유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 글들을 되돌아보면, 그가 슬픔을 단지 감정차원이 아니라 사회와 역사 속에서 배태된 인간본성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이 단락이 이 책의 중심 주제와 연관있어 보인다. 3부는 슬픔이 가진 사회역사 현상과 사건을 소개한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 시대 ‘슬픔’에 내재된 실제 아픔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일방적으로 결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슬픔은 보편성을 상실했다. 땅의 사람들에게 너무 가중된 슬픔이 얹혀져버렸다. 권력은 자기 슬픔을 제거하여 타인에게 지워버리는 나쁜 힘으로 작용했다. 저자는 이런 불균형 속에서 가중된 자기 슬픔을 끌어안고서도 타인을 위협하는 나쁜 힘에 희생으로 저항하는 이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슬픔’을 버텨내고 마침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삶의 방식을 보여주었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삶의 방식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방식이 무엇인지 찾아 저자와 공감하는 즐거움이 크다. 마지막으로 4부는 슬픔 그 자체가 곧 희망임을 시대에 비추어 서술한다. 이 단락에서 저자의 관심은 정치와 녹색운동, 기후위기와 같은 시대아픔을 아우른다. 이로써 슬픔의 힘은 문학의 책임이자, 문학이 가진 철학의 기초까지 제공할 수 있다.


6.

그렇다면 저자가 ‘믿는’ ‘슬픔의 힘’은 어떤 것일까? 먼저, 당당하게 경계인으로서 광장에 서는 용기인듯하다. 저자는 최인훈의 소설 『광장』(1960년 11월 「새벽」지에 첫 연재)을 독자에게 상기시킨다. 한 때 슬픈 존재였던 ‘경계인’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우리 역사에서 ‘경계인’은 남북 이념의 희생자였다. 그 상징적 인물은 재독사회철학자 송두율이었다. 내가 아는 대로, 경계인은 위태롭다. 그가 서 있는 경계가 너무 협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계인이야말로 시대에 적합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니 경계인이 서 있는 경계선을 넓혀 경계광장으로 만들자는 의도는 적절하다. 그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또한 기억저항이라는 행동을 각인시킨다. 다시 말해 슬퍼하는 이는 바로 기억할 수 있는 이다. 저자는 ‘슬픔의 힘’을 기억저항으로 이어지는 저력으로 서술한다. 그러니 슬픔을 성급하게 억지로 밀어내려고 하는 이들은 어쩌면 그 왜곡된 슬픔의 원인제공자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점을 지나치지 않고 싶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글 곳곳에서 슬픔의 힘은 그것이 곧 기다리는 결실을 가져다주는 영양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박노해 시인의 한 글을 인용한다. 저자가 말하는 ‘슬픔의 힘’이 이 시인이 노래한 ‘깊은 슬픔’에서 발원했을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이렇게 쓴다.


“한 시대의 끝 간 데까지 온 몸을 던져 살아온 나는, 슬프게도 길을 잃어버렸다. 나는 이 세계의 경계 밖으로 나를 추방시켜, 거슬러 오르며 길을 찾아 나서야했다. 내가 가닿을 수 있는 지상의 가장 멀고 높고 깊은 마을과 사람들 속을 걸었다.”(박노해)


그 길 속에서 시인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시 <살아서 돌아온 자>를 썼다.

“진실은 사과나무와 같아 / 진실한 사람의 상처 난 걸음마다 / 붉은 사과알이 향기롭게 익어오느니...자, 이제 진실의 시간이다.”


‘진실의 시간’은 상처 난 가슴에 스며들어 고인다. 상처의 힘 속에서 사과나무가 숨쉬는 것이다. 그 상처난 심연에서 피어오르는 사과나무 향기를 우리는 맡고 있다.”(‘살아서 돌아온 자’, 64쪽.)


7.

한가지 덧붙이자면, 이 책은 한 번 읽고 끝내기보다, 책읽기 모임 등에서 함께 나눌 수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이런 질문을 서로 제시하고 함께 답을 찾아보는 것이다.


2부를 읽고, Q1.문학에서 슬픔은 어떻게 기원하는가?

1부를 읽고, Q2.문학/문학가에게서 ‘슬픔’은 어떤 유형으로 서술되는가?

3부를 읽고, Q3.문학은 슬픔의 범위을 어디까지 다루는가?

4부를 읽고, Q4.문학에서 슬픔의 힘은 어떤 행동방식으로 나타나는가?

전체 토의: 우리 시대에 문학을 통한 ‘슬픔의 힘’을 실현할 수 있는 생활방식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


8.

나는 이제 세 번에 걸친 글을 정리한다. 다소 장황한 글이 되고 말았다. 아직 판데믹을 지나가는 우리 시대는 슬픔을 짊어지고 있다. 이런 시대에 나는 ‘땅의 사람들’을 위한 따뜻한 위로를 이 문학들을 통해 배운다. 잠정적이지만, 이제 이렇게 정리해 둔다.


첫 번째 글(3-1), 빨래. 이것은 슬픔을 승화시키는 우리의 공동의식을 반영한다. 타인을 향해 내밀어주는 손이 결국은 함께 자신을 정화시키는 시도로 전환되면 좋겠다. 배려와 환대가 그것이다.


두 번째 글(3-2), 『그레구아르와 책방할아버지』. 이 책에서 나는 문학의 위로를 생각한다. 특히 책을 읽고, 읽어주는 이들로부터 당연히 파생할 포용과 사랑의 위로를 생각한다. 차별없이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을 몸에 새겨둔다. 작지만 무시할 수 없는 따뜻함으로.


세 번째 글(3-3). 『슬픔의 힘을 믿는다』. 나는 우리시대를 이해하는 틀로서 슬픔의 해석학을 생각한다. 슬픔에 함께 공감하는 삶을 상상한다. 타인의 슬픔을 자기 삶에 적극 투영하는 희생을 연습한다. 이로써 슬픔을 희망이 발원하는 원천으로 함께 만들어 가보고 싶다. 마침내 우리는 차별없이 ‘공재(共在)’한다. 이를 위해 슬픔이 기울어지게 만드는 시대가 지속되지 않도록 나의 방식으로 저항한다. 잊지 않는, 

‘기억저항’을 유지한다.



시대를 생각하면서 사유하며 돌아볼 수 있는 괜찮은 산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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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아틀리에 - 과학과 예술, 두 시선의 다양한 관계 맺기
김상욱.유지원 지음 / 민음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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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이 무엇인가?

흩어진 글들, 말들, 그림들을 가지런히 모아서 묶어놓은 집.

한 글자, 한 말, 한 사진, 한 그림 등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 존재하는 장소.


이런 집은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아도 불편하다. 적절한 규모가 있어야 한다.


흩어진 글자들을 모아 일목요연하게 배열하면 신기하게 사상이 태어난다. 글자들은 옆 글자와 어우러진다. 마침내 거대한 폭포처럼 인간의 이성에 떨어진다.


책은 글, 말, 그림 등의 조화이다. 조화란 질서다. 글쓴 이의 문학적 직관과 읽는 이의 문학적 상상이 알맞게 이어질 때 안정되게 체감된다. 마치 피아노 88건반을 적절한 손놀림과 발놀임으로 평화롭게 연주하는 연주자같이.


2.

『뉴턴의 아틀리에』(민음사, 2020). 440쪽.144x215x27mm. 573g. 총5부 26장. 책을 손에 들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단어가 있다. “경이롭다.(432쪽)” 창의성을 유달리 강조했던 문학평론가 이어령님이 내린 평가다. 언어외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이 짧은 문장만으로도 이 책에 대한 좋은 인상이 선명해진다. 물론 책을 읽기 전이라면 이 평가는 더욱 강인하게 들릴 것이다. 노로한 교수가 내린 평가여서는 아니다. 소설가 김초엽님의 말처럼 “서로 다른 영역에서 출발한 선이 무수히 교차하는 지점들이 펼쳐”(433쪽)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책자체로도 흔하지 않다. 예를들면, 책 구성(재밌다), 폰트(글씨에 대한 예술이라고 해야겠다), 종이질(후루룩 넘겨지지만, 뒷페이지가 비춰서 가독성은 조금 떨어진다), 종이감촉(부드럽다), 종이무게(분량에 비해 가벼워좋다), 판형(이것은 책디자이너의 의도가 무엇이든 독자로서는 조금 아쉽긴하다. 윗 여백이 너무 좁다. 책이 숨을 쉴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 중 한 분이 머리글에서 이 책에 관한 책제본 특징을 기술해 놓은 것을 보면, 이 책에 대한 첫 번째 경의는 책 외형에 대한 조심스러운 관찰일 것이다.


“책의 전반적인 그래픽디자인에 관해서는 『뉴턴의 아틀리에』라는 책의 정신에 일치하도록 처음에는 물리학의 개념을 응용한 디자인 프로세스를 고려했다.”(16쪽, 17쪽 그림참조)


이 말 속에서 나는 ‘책의 정신’이라는 표현에 주목했다. 어떤 정신일까? 그 다음에 이어지는 글을 읽어보면 관련된 의미를 찾을 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물리학 개념을 응용한’. 다시말해 이 책의 토대는 물리학이었던 것 같다. ‘물리학’의 관점. 따라서 두 저자 중, 조금 더 주도적인 관점은 물리학자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책 외형에 대해서 한마디 덧붙인다면, 책디자인을 유심히 관찰하면 좋을 것 같다. 저자마다 폰트를 달리하고(15쪽), 글과 글 사이에 앞 글과 다음 글의 핵심 문장이 큰 글씨로 요약되어있다. 내 기억으로는 마치 오래 전 한 문예종합지가 시도했던 방식과 흡사하다. 따라서 이 부분은 앞 글에 대한 요약이자, 다음 글에 대한 안내라고 할 수 있다. 두 글이 대립되는 관점은 아닌 듯하다. 그림과 사진 자료가 적절하게 배치된 것도 읽는 재미를 돕는다. 미리 말하지만, 이 책은 두껍다해도 읽다가 덮다가, ‘다음에 계속 읽자’하지 않을 정도는 된다. 마지막 부분에서 조금 인내하면, 어느새 책 마지막 표지를 덮을 수 있다. 어쨌든 이 책은 여러모로 유익하고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에 몇 가지 생각을 좀 덧붙인다.


3.

책의 모태는 알려진대로, 한 일간지에 일년간 연재된 글이다(2018.7-2019.7.). 모두 26주제를 다루고 있다. 연재 당시(나는 가끔 읽었는데) 거의 매월 두 편씩 실렸고, 해당 주제는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제시했다고 한다.(17장의 ‘점’은 김상욱님(K)이, 6장의 ‘결’은 유지원(Y)님이 제안했던 모양이다.) 아마도 자신이 갖는 관심사가 적극 반영되었을지 모르겠다. 이를 토대로 보면, 첫 번째 연재 글인 ‘검정’은 K, 연재 마지막 글 주제인 ‘가치’는 Y가 제안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추론을 고려한다면, 전체 26개 주제의 제안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제안자가 되고, 다른 사람은 그 주제에 대한 대응자가 되는 식이다. 사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렇게 보면 연재글을 다시 모아 5부로 구성하고 소제목을 붙인 것은 다분히 후속 작업이었을 것이다. 연재글과 책의 차이는 사실 이 소제목이라 할 수 있다. 목차에 소개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부 관계 맺고 연결된다는 것:이야기/소통/유머/편지/시(1-5장)

2부 현실을 관찰하고 사색하는 마음:결/자연스러움/죽음/감각/보다/가치(6-11장)

3부 인간과 공동체의 탐색:두 문명/언어/꿈/이름/평균(12-17장)

4부 수학적 사고의 구조:점/구/스케일(17-20장)

5부 물질의 세계와 창작: 검정/소리/공간/재료/도구/인공지능/상전이/복잡함.(21-26장)


개인적으로 연재글이 책으로 나올 때는 항상 연재글부터 확인한다. 당연히 연재글과 책편집글은 다른 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작위로 쓰여진 연재에 비해 책은 의도된 편집의도가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목 ‘뉴턴의 아틀리에’보다 소제목이 이 책의 사고를 더 잘 반영한다. 1부에서 5부까지 제목을 보자면 일단 일관성이 보이지는 않는다. 이 분류는 연재된 26개 주제를 서로 공통점이 높은 주제들로 다시 묶어놓은 정도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크게 어긋나지는 않아 보인다. 물론 유사한 소재와 표현들이 반복되는 정도는 학습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전체적으로 크게 어색하진 않는다.


4.

책 내용과 관련해서 조금 살피려고 한다.


4-1.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책은 인간-세계가 분리되지 않고 상호 관련되어 있는 존재라는 점을 밝혀주었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나와 너, 나와 그것, 너와 그것’은 어울려있다. 이 세계를 이해하고, 나와 세계를 분리하지 않은 채 깊은 상관관계가 있음을 유쾌하게 밝혀주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글 한편 한편에 담긴 저자들의 수고가 돋보인다는 점이다. 언어디자인과 물리학, 나아가 미술이 사실 어느 한 지점에서 늘 만나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밝혀준 것은 가볍게 지나칠 수 없다. 두 사람이 이 책에서 함께 이룬 결실이라면(의도했을지도 모르겠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물리이며, 디자인이며, 예술(미술, 음악)이라는 것이다. 서로 분리되지 않고, 총합(holistic)구분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 삶의 터전인 이 세계, 현상이 전일성(全一性, holism)이자 처음부터 비국소성(非局所性, non-locality)으로 유지되었다는 점을 확증한 것이다. 저자들은 자기들의 독특한 분야를 토대로 ‘미술/음악’과 같은 예술에 제3지대를 설정하고 통합해 준다. 개인적으로, 이런 방법론은 이 책에서 다소 난해하게 읽히는 내용들을 내가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유익했다.(cf.미술을 통한 학문적 견해를 밝히려는 시도는 수용해석학이란 관점에서 최근 적극 활용되고 있다.)


4-2. 이 책을 친근하게읽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다. 하나는 ‘글’과 ‘언어’가 사상을 담은 도구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뉴턴 물리학에서 양자역학으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세계관의 변화를 인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결정론적 세계관이 불확정성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사실 큰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타이포그라피 분야나 양자물리학은 내가 전문적으로 공부한 분야가 아니어서 일천하다. 따라서 이 책에서 기술된 부분들은 두 사람의 견해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 미술에 더욱 안목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아울러, 유지원님의 글을 읽다보니, 오랜만에 한 가지 즐겁게 생각한 것도 있다. 내가 조금 공부한 고대언어(특히 고대 셈어 계열, 우가릿어나 고대히브리어)가 글자들과 ‘개념’(특히 이야기, 검정)에 관한 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언어는 사상을 담지한다. 저자(Y)가 말하듯이 ‘낯선 언어’가 사고의 간극을 만들어주고, 유연하게 이끈다는 점은 적극 동의하는 부분이다. 나는 이 대목이 이 책 전체를 견인하는 중요구절이 아닌가 생각한다.


“낯선 언어는 서로 다른 것들 간의 뜻밖의 연결을 만들어 낸다. 이 연결을 자유자재로 적절히 구사하는 능력이 곧 창의력이다.”(13장, 213쪽)


동시에 다른 저자(K)가 이와 관련해서 덧붙인 말도 유의미하다.


“언어로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왜 수학과 예술이 존재하는지 설명해준다. 우주는 인간의 언어와 이해방식이 아니라 수학과 물리학의 방식으로 기술된다.”(222쪽)


이 말과 관련해서 한가지 덧붙이자면 내 견해로는, K가 말한 ‘언어’는 오히려 ‘단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왜냐하면, 한계가 있긴 하지만, 고대 히브리어라는 언어는 ‘언어로써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예로 ‘검정’(5부21장)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도 고대히브리어는 ‘어둠’에서부터 ‘새벽’, ‘간절함’, ‘새벽의 신’, 심지어 ‘다이아몬드’까지 아울러 표현하고 있다. 언어사상가인 토클라이프 보만의 견해를 빌리자면, ‘동사’가 명사에 선행하는 언어의 특징은 그 언어가 인간 삶의 바닥에서부터 역동적으로 파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 분도출판사,1975/ 2001) 그렇게보면 수학과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가 언어로 표현하기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어쩌면 ‘언어’를 회화로 표현함으로써 의미의 지평확장을 이룬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나는 독자로서, 이 책 전반에 걸쳐 견지해야 할 틀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언어’라는 도구가 어떻게 온전하게, 편견없이, 나아가 배려하며 소통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글자에 대한 예술과 수학, 물리학이 잠재된 미술과 음악과 함께. 이 세계가 겸손하게 온전한 공동체로 살아가기 위해서.


5.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던 부분들을 적어둔다. 독자의 미진한 능력 탓이겠지만, 다음에 읽을 분들에게서도 혹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1)1장 제목‘이야기’: 이 용어는 명확한 정의가 먼저 되었으면 좋았을 거 같다. 스토리인지, 내러티브인지.

(2)43쪽."그런데 이런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문장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3)102쪽. ‘결’:유익하게 읽었다. 다만, ‘결’이 가진 다층적인 의미가 뒤섞인 듯했다.

(4)131쪽. “혹독한 겨울을 밝히는 구세주의 탄생, 대림절의 간곡한 기다림,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긴 겨울이 저물고..”: 내가 이해할 때, 이 부분이 교회절기의 흐름을 순차적으로 염두에 둔 것이라면, 아예 ‘대림절의 간곡한 기다림, 혹독한 겨울을 밝히는 구세주의 탄생’으로 글 순서를 옮겨 읽는 것이 좋겠다.

(5)189쪽.‘이마누엘 칸트’: ‘Emanuel’이 칸트의 세례명이지만, 이후 그가 히브리식 이름인 ‘Immanuel’로 바꿨으니 이왕 발음한다면, ‘임마누엘’이 더 적절할 것 같다.

(6)220쪽. '하나의 전자는 두 장소에 동시에 존재한다.: 이 내용은 글 전체에 자주 반복된다. 연재된 글의 흔적이어서인지 글의 흐름을 조금 흐트린다.


6.

한 가지 주제를 두 사람이 자기 관점으로 써내려가는 글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예전에도 이런 방식으로 역사관점을 나눈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모처럼 그 때 그 즐거움을 다시 누린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실린 여러 그림 중에 두 가지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처음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시 보는 것이다. 우선 책 표지에 실린 'Prat is Quality.'는 책 전체 성격을 보여주는 듯, 초현실적이며 새롭다. 다른 하나는 이응노 화백의 「군상」(1986)이다. 비록 ‘무제’라는 단락에 소개되었지만, 그 무명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역사가 지금 우리 앞에 있다는 것을 새삼 다시 일깨우는 그림이다. 다시 보니 마음을 일신하게 된다. 화가의 직접체험으로 잘 알려져있듯이, 1980년 5월18일이 운동이 그림 군상들에게서 다시 살아나는 듯하다. 


이런 그림들을 소개해 준 두 저자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글 전체가 유익한 책이다. 게다가 단숨에 읽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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