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토로 여기 살아왔고, 여기서 죽으리라
나카무라 일성 지음, 정미영 옮김 / 품(도서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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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토로. 코로나 이전 몇 번 다녀온 이 곳은 교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우치(우지)시에 있다. 녹차밭이 유명한 그 땅 어느 한 모퉁이에 교토 군전투기비행장공사 강제이주자들의 집촌이 웅크리고 있다.


20년 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어, 오사카에서 홀로 배낭을 짊어진 채 버스와 기차, 그리고 뙤약볕에 길을 걸어 그곳을 찾았다. 하늘을 맑았고 바람은 가벼웠지만 마을은 오래되었고 한적했으며 무거운 적막이 나그네 발걸음을 잡았다 놓았다 했다. 입구에서부터 이곳이 생존을 위한 투쟁을 울타리 삼아 살아가는 곳이라는 글귀를 경전삼아 마을로 들어선다. 낯선 단독자가 몸하나 배낭하나 메고 느닷없이 찾아온 방문이 그들에게 뭔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노로의 책임자는 온 몸으로 환영해주었다. 마을을 둘러보도록 안내해주는 손과 발에서 누군가는 이 마을 안의 이야기를 마을 밖으로 꺼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흐르는 듯했다.


그 짧은 방문 이후 나는 두 번 더 그 마을을 방문했다. 그 틈에 마을 어른들은 더 보이지 않고 그 마을의 지도자가 노로의 어른에서 젊은 지도자로 새롭게 바뀌었다. 나의 마지막 직접 방문은 이후 초등, 중학교 아이들과 '세계관학교'라는 제목으로 함께 다녀온 것이었다. 그 때 이 평범한 마을에서 아이들은 몸과 마음이 솔깃했고, 그곳의 어른들은 이 고국의 어린 아이들이 이 마을을 찾아온 것에 대해 혈육이 방문한 것처럼 살갑게 대해주었다. 그 때 그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쉼없이 감사하다며 말해주었다. ‘누군가가 그들을 기억하고 찾아주었다는 것그것이 전부였다.


그 후로도 몇 번 영상과 이야기로 그 곳 소식을 간간히 전해 들었다. 거주지 강제 이전 문제와 보상 문제는 난항을 겪고 있었고, 우리 정부와 일본 기업 사이에 팽팽한 줄다리기도 일본쪽으로 유리하게 흐르고 있었다. 마을은 그대로이고, 역사도 그대로인대 그 당연한 책임을 감당해야 할 사람과 기업만 더 비겁한 방법을 찾고 있다. 나는 그것이 그 때나 지금이나 마음이 아프다. 아니 숱한 철거의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며 잘 버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평화로움을 유지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슬픈 일이다. 어쩌면, 그 땅을 되팔고 사들여 자기 세계를 견고히 하려는 이들은 시간이 흘러 이 지역이 자연스럽게 도태되기를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우토로 관련 방송이 나오던 날, 함께 보던 아이도 슬프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에게 물었다. ‘저 곳을 다녀왔는데 기억하냐?’. 아이는 기억이 날 듯, 아닐 듯 하단다. 너무 어릴 적 기억이라서, 그래도 이제 청년이 된 아이는 그 날 그 방문에서 보았던 마을 구석구석을 잊지 않고 있다. 방송에서야 숱한 구호들이 빠진 낭만의 장소만이 흐르고 있을 때 그 방송 너머 드러나지 않았던 슬픈 장소들을 아이는 잘 기억해주고 있었다. 뙤약볕에 마을 골목을 걸으며 마을 우물과 하수구, 공사장 식당의 스러진 지붕, , 굳게 닫힌 문 등이 마치 나의 집처럼 선명하다는 듯 잘 떠올려주었다. 오래전부터 철저히 망각의 장소이자, 고립의 장소를 살려내는 일은 기억이라는 것도 아이들을 통해 다시 깨달았다. 그래서 나도 그곳을 다녀온 후, 홀로 그 기억들도 찾아보고, 공부도 해 봤지만, 그것 이상으로 내가 해낼 수 있는 일들은 많지 않았다. 아쉬운 채로 그 기억만을 유지한 채 이제까지 흘러왔을 뿐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스러운 것은 유투브같은 매체에 우토로라고 한번 치기만 하면 그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세계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나의 망각의 강은 여지없이 깊고 길게 흐르고 있지만.

 

최근 반갑게 우토로 여기 살아왔고 여기서 죽으리라(글 나카무라 일성, 정미영 옮김. 도서출판 품, 2022)가 출판되었다. 표지부터 내가 걸었던 그 길, 그 옛 기억을 되살려준다. 그 속깊은 사정을 내가 다 알지 못해서 늘 아쉬웠지만, 그 마을을 책으로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책 내용은 인터뷰를 기본으로 한 우토로마을의 역사다. 증언과 취재가 어우러져서 글은 고발문 같이 건조하지만, 이 마을에 얽힌 역사를 생각하자면, 이것도 매우 아름다운 고발이라는 생각이 든다. 재일교포 3세인 저자가 마을을 드나들며 애쓴 흔적들이 역력하다. 저자의 이런 말은 이 책에서 우토로를 다시 기억하는 이유가 명확해진다.

 

집필을 마치고 사람은 말로써’, 특히 먼저 떠난 이들에게서 받은 말로 만들어지는 존재임을 새삼 느낀다. 집필 작업은 그, 그녀들과 나의 한 갈무리를 의미한다. 그 헛헛함이 집필 지연의 원인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문자로 다시 태어난 증언들이 한 사람에게라도 더 많이 가 닿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나 자신도 남겨진 이로서 그 분들에게 받아든 말을 자아내 가고 싶다.”(314)

 

마지막 표현 자아내다는 안에 들어있는 것을 실을 뽑듯이 뽑아낸다는 뜻이니 채록하고 들었던 글들을 더욱 생생하게 수를 놓을 일을 다짐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생각해보면 모든 역사는 증언자와 채록하는 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말과 글의 조각보로 이어지는 것 같다. 우토로의 역사를 전혀 모르던 내가 그곳을 찾아가겠다는 마음이 든 것도 누군가의 글이었으니 말이다. 이 짧은 글도 나 역시 이 책에 담긴 우토로의 이야기가 조금 더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하는 저자의 마음과 같기 때문이다. 덧붙인다면, 이런 책이 남겨지는 가장 큰 이유는 우토로 마을을 살리겠다는 뜻 너머 세계 어디서든 사람이 사람으로서, 생명이 생명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이유가 너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우토로 마을이야기에 담긴 우토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읽는다.

 

"너희들도 말이다. 더는 기죽지 말고, 고개 들고 앞을 보고 걸어. 살아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가게 돼. 우리도 쭈-욱 그렇게 살아왔어. 이제부터라니까, 안 그래?"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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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ㅡ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울; 정음사, 1974.-


1.

()가 현실을 상상으로 그려내는 메타포라면, 시인 윤동주 님의 은 적절한 한 예가 될 것이다. 그의 다른 시들과는 별개로, 특히 이 시에는 그 메타포가 세 층위로 쌓여있는 것 같다. 나의 추론에 따르면, 맨 아래 현실 사건이 있다. 이것은 일어난 일이며, 경험한 것이다. 그 위에, 해석 사건이 있다. 그 경험된 사건으로 비판하거나 공감하며 분석한다. 마지막 맨 위층에 현실 사건과 해석 사건을 문학 사건으로 마무리한다. 그렇게 작가의 상상을 시의 언어로 변환시켜 현실 사건을 이미지로 만든다. 내가 보기에 이것의 윤동주 님의 시 이을 읽는 한 과정이라 할만하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층위를 반영하는 글쓰기는 주전 8세기 고대 히브리인들의 성서 <아모스>서를 남겼던 아모스 저자들의 서술방식과 흡사한 것 같다.

 

2.

히브리 성서 타나크의 두 번째 부분인 <느비임>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으로 구성된 아모스

(Amos)가 들어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기원전 760-775년 경에 활동했다는 이 예언자는 남쪽 유다 출신이면서 국경을 넘어 북쪽 이스라엘 지역에 가서 신언(神言)을 전한 사람이었다. 그가 전달한 주된 주제는 사회적 부정과 종교적·도덕적 퇴폐’, ‘부유층과 가난한 사람 사이의 경제 불균형, 사회 정의등을 바로잡으라는 경고였다. <아모스>서를 연구한 로버트 쿠트(Robert Coote, 1909-1982)<아모서>와 관련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표했다. 그는 이 책이 최종본으로 완성되기까지 오랜 시간 내재적 발전단계를 거쳤다고 주장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최종본은 실제 일어난 사건과 그 사건의 해석, 덧붙여 신학적 해설이 발전적으로 어우러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엇이 일어났는가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해석되었는가, 마지막에는 왜 글을 썼는가?’로 매듭지었다는 것이다. 그가 밝혀낸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 세 층은 구분되지 않으며, 하나로 어우러져 예언자의 고유한 사상을 형성한다. 따라서 <아모서>서는 산문같은 사건을 운문(마치 시와 같이)문학으로 남긴 예언서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내용으로 보자면 당대 사회에 대한 저항문학이라 할만하다. 널리 알려진 대로, ‘예언서는 미래 예견이 아니라 현재에 대해 신이 맡겨놓은() ()을 전달하는 글이다. 미래에 근거해 현재를 해석한 글이다.

 

3.

나의 이 글은 <아모스>서를 읽을 때처럼 윤동주의 시 역시 하나의 예언서(豫言書) 서술방식을 원용해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시는 고대 예언서같은 서술방식을 투사하여 문학적 서술기법을 표현함으로써 시대를 저항하는 용기 있는 인간을 묘사한다. 이 시에서 서술하는 인간은 두 가지 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하나는 현재 자기 정체성으로서 슬픈 존재로서 무기력하게 길을 걷는 인간이다. 다른 하나는 새 길을 찾아 떠나는 새로운 인간상이다. 그런데 이 두 요소는 하나로 잘 조화된다. 시인은 돌담길과 하늘을 교차대구하여 그 길에 서 있는 자신이 슬픈 가운데에서도 용기를 가지고 새 길을 찾아 떠나는 새로운 인간이라는 것을 그려낸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이 시를 읽는 한 방법으로 기호학적 관찰이 적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시를 구성하는 세 층위가 어우러져 하나의

시로 조물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시어에 활용된 공간과 시간의 기호를 따라 분석해 보는 것도 적절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시가 1940년대 이후 시인 윤동주가 보여준 깊은 감성을 바탕으로 저항적 현실참여라는 자기 태도를 그의 모든 시에 스며들게 하는 전환점에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해이다.

 



4.

먼저 이 시의 층위는 모두 세 개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이 시의 기록 연대가 1941년 가을 즈음이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시인 윤동주님은 연희전문학교에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시절에 그는 북아현동, 옥인동 일대에서 하숙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일대는 요즘도 좁은 골목과 인왕산으로 오르는 언덕길이니 그 시절에 그의 삶의 환경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1 층위

이 시의 가장 아래 층위는 그가 어느 날 골목길을 걸었다는 소소한 일상이다. 이 시에서 골목길에 대한 기본적인 묘사를 찾아보면 이렇다.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이어져 길은 돌담을 끼고 있다

‘(길의)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았고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길에는 풀 한 포기 없다

 

그가 살았다는 북아현동 하숙집을 생각하면, 이 시의 배경이 된 그의 길 걷기는 아마도 인왕산 한양

도성길, 서대문 형무소, 조금 멀리는 덕수궁 길 중 하나였던 것 같다. 그가 조금 우울한 기분으로 길을 걷는 모습이 연상된다. 이 시기에 일제의 검열도 심해지고, 그 사이에 시인으로 막 등단한 윤동주에게 졸업을 앞두고 첫 시집을 발간하려 했던 상황들은 하루하루 매우 불안하게 흘러갔던 모양이다. 그가 일본 유학을 생각했던 것도 어쩌면 그런 불안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불가피한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불안한 그는 지금 돌과 돌이 이어져 있고, 풀 한 포기 제대로 나 있지 않은 채 쇠문으로 굳게 닫힌 골목길을 늦은 오후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시간에 우연히 걷고 있다.

 

2 층위

돌담길을 걷는 시인은 그 길을 걸으면서 이 길에 대해 몇 가지 설명을 이어간다. 가장 먼저 그는 이 길이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다고 적는다. 밤새 길을 걸었는지 모르지만 이 구절은 완벽한 시적 표현이다. 독자에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 종일 이 길을 걷는 시인을 연상시킨다. 이 시를 쓴 시간이 해가 떠있는 어느 낮(‘그림자가 길게 늘어진)시간이라는 것을 추정하면, 그는 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 심지어 다음 날 아침까지 꼬박 하루를 하릴없이 길을 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이 길을 걷다 눈물 짓는 모습도 그대로 보여준다. 그 길에서 하늘을 바라보니 부끄럽게 푸르다’. 그의 시에서 자주 언급되는 부끄러움은 내적 감정이 아니라 자기 존재감을 일깨우는 특별한 수사어다. 다른 이들에게 비치는 모습은 더욱 아니다. 오히려 자기 스스로 성찰하는 상태에 가깝다. 이처럼 그는 이 길에서 하늘을 보고, 그 푸르름에 부끄러움을 발견한다. 따라서 이 시에서 두 번째 층위는 밤새 골목을 걷는 자신이 하늘을 올려다보니 부끄럽다는 자기 이해를 함축하고 있다.


3 층위

길을 걷는 자신(1 층위), 부끄러운 자신(2층위)에 이어 마지막으로 문학 사건을 읽을 수 있다. 가장 먼저 제1연으로서 이 시의 문학적 출발이다. 그는 목적어를 쓰지 않은 채 잃어버렸다라고만 표현했다. 이런 서술은 시 전체를 읽기도 전에 나에게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모른다고 말했을 때 나도 그 길에서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생각이 든다. 시인은 불안한 마음에 두 손을 주머니에 넣어 이리저리 더듬는다그러다 우연히 주머니를 통해 길에 나아갔다’. 이 주머니 속 우연한 길을 헤집고 더 깊이 들어간 시인은 마침내 더 길고 긴 돌담까지 이른다. 그리고 이 시의 문학적 사상은 마지막 연에서 더욱 세밀하게 드러난다. 이 부분에는 그가 이 길을 걷는 이유가 점층적으로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첫 번째 이유는 담 저쪽에 내가 있기 때문이. 이어 다른 이유가 이어진다. ‘내가 사는 이유는 다만 잃는 것을 찾는 까닭이다.’ 이 두 이유는 연관성이 있으면서 없다. 연관성 있다는 것은 그가 잃어버린 것이 담 끝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밝혀 준다는 점이며, 연관성이 없다면, ‘담 끝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과 별개로 그는 여전히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골목을 마냥 걷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 3 층위를 따라 읽어보면 시인은 그가 잃어버린 것을 문학적 이중성으로 표현하려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이 잃어버린 또 다른 어떤 것일 수 있다.

 

이처럼 세 층위를 살펴보면 이 시는 어느 늦은 오후 집 근처 돌담으로 길게 늘어선 골목길을 걷던 시인이 자기가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사람인 것을 인식하고 부끄러워하다가 그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 나서겠다는 용기를 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잃은 것을 찾아 나선 길 위에 있는 사람인 셈이다. 그가 일본 유학을 떠나는 이유를 이 시에서 읽을 수 있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5.

이제 이 시를 기호학적 표기들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특히 이 시에서 서술된 공간과 시간을 주목하는 것이다. 시인이 말하고 싶었던 것과 함께 독자가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를 관찰하는 독법이다.

 

<공간>

이 시는 수평 공간과 수직 공간이 교차한다. 수평 공간은 우선 돌담이 이어진 긴 골목이다. ‘돌담을 끼고 갑니다라는 표현은 이 길이 여느 골목처럼 구불구불하고 휘돌아나가는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수직 공간은 골목 어딘가 머물러 서서 쳐다본곳이다. 시인은 그 자리에서 눈을 위로 올려 하늘을 쳐다본다. ‘긴 골목을 걸어왔던 그가 수평 공간을 지나온 것이라면, ‘하늘을 쳐다보는 그는 수직 공간에 멈춰 있는 것이다. 이 표현들은 전진적으로 행동이 이어진다:‘긴 길을 걷고- 돌담에서 멈춰서서-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다시 길을 걷는다.’ 따라서 걷고-멈추고, 서서-쳐다본다는 일련의 과정은 시인이 점유한 공간이 평면이 아니라 입체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담 저쪽이라는 표현에서 시인이 서 있는 곳이 담 이쪽이라는 것을 연상시킨다. 이런 정황들을 종합하면, 그는 담으로 길게 이어진 길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 주목할 공간이 있다. 그것은 주머니. 마치 오즈의 마법사에서 여주인공 도로시가 토네이도에 휩쓸리다 우연히 오즈 대륙에 들어서게 된 것 같다. ‘주머니는 모든 길과 모든 공간으로 이어지는 좁은 출입구이며 최후의 공간이다. 모든 공간들은 주머니에서 이어진 미로처럼 시작한다.

 

<시간>

이 시에서는 시간도 두드러진다. 시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라는 시간을 쓰고 있다. 마치 히브리 성서 첫 번째 책인 창세기 1장의 문학적 표현을 연상시키는 이 구문은 현실의 시간일 수도 있으나 상상의 시간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가 지금 돌담길에 서 있는 시간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시간, 즉 낮의 어느 한 지점이다. 아침이 밝아오는 시간이라면, 저녁은 어둠으로 들어가는 시간이다. 그 사이에 낮과 밤이 일정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 두 시간은 어김없이 반복적으로 교차하고 있다. 아침과 저녁은 무한 반복하고 서로 꼬리를 물고 회귀하여 더 먼 시간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시인의 표현에 따르면, ‘아침-저녁-저녁-아침이 통하는 것은 더 이상 시간 구분이 의미없어짐과 같다. 그러니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돌고 있고, 돌고 있으면서 흐른다. 마치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돌담을 끼고 가는 것같은 모양이다.

 

<시공간>

앞서 읽은 대로 이 시에서 공간과 시간은 구분되면서 한데 어우러져 있다. 시공간인 탄생한 셈이다. 이런 시공간은 이른바 시의 토포스를 형성한다. 이 단락을 다시 읽어 보자.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시인은 길에서 시간과 동시에 공간을 경험한다. 이 동시 지점은 바로 그가 돌담을 더듬다 눈물지으면서서 있는 자리다. 수평적으로 아침과 저녁 어느 지점이며, 수직적으로 땅과 하늘로 이어지는 지점이다. 신학 용어로 말하자면, 이 지점은 카이로스(kairos)’이다. 신적 은총의 시간이다. 주목할 것은 이 지점에서 그가 보여주는 반응이다. 이 시에 따르면, ‘돌담을 더듬다눈물 짓는다는 연속되는 행동이다. 이 두 행동은 눈물 짓다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 시인이 설정한 시공간은 그가 선 채로 눈물짓는 토포스다. 그 눈물은 하늘을 바라보게 되는 동인이었으며, 동시에 자신이 부끄러운 존재라는 것을 일깨우는 근인이었다. 더구나 이 토포스가 함축한 눈물은 그 자리가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는 자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토포스에서 푸르른 하늘풀 한포기 나지 않은 길의 대조 역시 시대 속에서 부끄러운 자아를 더욱 부각시킨다.

 

6.

시인 윤동주 님의 시는 땅에서 하늘을 읽는 예언시다. 운문으로 남겨진 그의 시는 가벼운 노래로 끝날 수 없는 예언이다. 그 예언은 현실에 맞부딪혀 비틀거리면서도 정의로운 길로 걸어가는 자아를 지지하는 하늘의 힘이기도 하다. 그가 가벼운 어투로 스치듯 자기 일상을 소개하는 시조차도 가히 넘볼 수 없는 예언의 힘이 스며있다. 그의 시 에서 우리가 의 상징성만을 주목하는 것은 자칫 이 시가 가진 현실 저항적 예언성을 지나치는 아쉬움을 초래한다. 시인에게 은 공간이며 시간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잃어버린 무엇인가가 감춰진 곳이며, 자신이 하늘을 바라보며 부끄러움을 인식한 공간이면서, 그 끝이 언제 끝날지 몰라 당황하는 슬픈 자신이 멈춰 서버린 토포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시는 결국 돌담 길 어딘가를 반복해서 걷고 있는 부끄러운 자아에게 아직 용기가 남아있음을 말하고 싶은 따뜻한 권면을 굳게 견지한다. 익히 알 수 있는 대로, 윤동주 시에 등장하는 는 자주 슬픈 존재. 슬프다는 것은 눈물을 전제로 하지만, 그 눈물이 그 존재를 결정짓진 않는다. 그는 그 눈물을 인정하면서 그 부끄러운 존재에게 다시 잃어버린 무엇인가를 찾아 나설 용기를 다독여주기 때문이다. 그 용기 있는 존재는 강한 용사가 아닌 연약한 젊은이 같은 모습을 띠고 있다. 나는 이 시에서 부드러운 강인함으로 길을 걸었던 청년 예수의 이미지를 어렵지 않게 떠올린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는 우리에게 예언이다.

 

7.

나는 그 못지 않게 길에서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는 일이 많다. 이 시가 노래하는 것처럼 찾아나서기도

하지만, 문득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조차 잊어버려 그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볼 때가 있다. 그럼에도 그의 시를 읽으며 나도 용기를 내서 그 잃어버린 것을 찾아보려고 애쓴다. 그가 담백하게 적어둔 그 1940년대 어느 동네의 돌담을 끼고 늘어서 있지만, 시공간을 넘어 이제 2022년 오늘 나의 삶에까지 이어져 있는 길이다. 그 길 끝에 내가 서 있다. 이 시를 읽은 나는 시인처럼 골목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 푸르름에 부끄러움을 부정할 수 없지만, 시인의 말에 힘입어 이 시대를 견뎌낼 용기를 다져보는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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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부력 - 2021년 제44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이승우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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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가 이승우님의마음의 부력(문학사상, 2021)'보았다.' 그런데 나는 평소 그의 소설들을 일부러 찾아 읽는 것은 아니다. 그가 등단한 이래 몇 권 읽어보긴 했지만 아직도 낯설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그가 '관념'을 현실처럼 써내기 때문이다. 사실, 현실을 관념처럼 써낸 글은 어느 정도 따라 읽어낼 수 있지만, 관념을 애써 현실로 바꾸어 매조지한 글은 아무래도 나의 독서 습관만으로는 잘 따라가지 못했던 것 같다. 나의 현실과 무관하다 싶으면 굳이 따라 읽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앞섰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써냈다는 평가를 받는 소설의 작가들은 이런 평가가 달갑진 않겠지만, 그래도 그런 사소한 비평이라도 소설이 감당해야만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써내는 것도 쉽지 않고 내 마음에 있는 어떤 뭉특한 감정을 살갑게 글로 입혀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것을 읽는 내가 괜한 이질감을 느낄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은 소설이라고 평가받을 때 가장 슬픈 듯하다. 이번 글도 처음에는 사실 그랬다.

 

2.

소설 마음의 부력은 계간문학과사회(33(1), 2020. 봄 호, 68-97.)에 게재되었던 단편소설이다. 개인적으로는 ''부력'이라는 말이 한참 마음에 걸렸다. 얼핏 보아도 '부력''뜨는 힘'이다. 물론 '뜨게 하는 힘'일지, '떠 있는 힘'일지를 판단하긴 쉽지 않다. 혹시나 뒤이어 덧붙여진 평론(소설가 정용준)을 따라 '중력에 반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뜨려는 힘'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할지도 모른다.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이 '부력'을 자기 방식으로 잘 해석해낼 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지점에 안전하게 닿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소설이 끝났을 때 더는 그런 해석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력은 '뜨게 하든', '떠 있든', '뜨려 하든'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중력에 반하는 거센 저항이라한들 상관없었다. 소설에서 이 부력은 가라앉는 마음을 오히려 수직으로 끌어올려 주는 힘, 삶을 떠받쳐주는 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부력'을 위로 끌어올려주고 아래서 받쳐주는 힘', '아래로 끌어 당기려 힘을 거슬러 위로 향하게 하는 힘'으로 이해했. 무엇보다 이 부력은 몸을 뜨게 하는 힘이 아니라 마음을 그렇게 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낯설었으나 곧 의심없이 공감했다.

 

3.

나는 이승우님의 소설이 어떤 '관념'에 뿌리 깊은 터를 두고 있다고 생각을 오랫동안 해오고 있다. 그런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사실 그 관념이 무엇인가보다도 그것의 소재/재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었다. 생각해보면, 그의 관념은 '사랑'을 다루는 것 같다. 특히 신이 인간에게 베푸는 사랑이다. 따지고 보면, 그의 작품이 단지 소설 아닌 소설인 이유도 신이 베푼 사랑을 인간의 관점에서 쓰려는 의지가 강한 것에서 비롯된 듯하다. 이런 쓰기는 아마도 그 몸 속에 형질이 되어버린 '신학'과 그것이 육화된 '철학'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 중에서도 히브리인들의 이야기는 그가 천착하는 소재 중 하나인 것 같다. 이 고대 글에 나타나는 신과 그가 선택한 사람들의 사랑 관계가 그의 관념을 바닥으로부터 지배함으로써 오늘날 자기 글로써 이 시대의 '인간'을 다독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작가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4.

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편애받으면서 편애하며 자기 존재감을 강화하는 것 같다. 동시에 누군가의 편애를 자신이 받아내는 것을 감당할 수 없으면서, 반대로 누군가를 편애해야 하는 짐을 지고 살아가는 존재인 것도 같다. 그러니 사람은 누구에 대해서도 심지어 자신에 대해서도 편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 존재이리라. 아쉽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면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다. 모두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일일지도 모른다. 사랑을 받는 이는, 자기 때문에 누군가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사람을 사랑한다. 그 순간 마음에 이해할 수 없는 짐을 중력처럼 갖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한다. 그런데 사랑을 하는 이는 사랑을 받는 자의 부채감을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다. 사랑받는 이가 사랑을 하는 이와는 전혀 다른 부채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니 모든 사랑하는 이는 자신이 선택한 그 사랑으로 인해 사랑받는 이가 마음의 중력에 짓눌려 살아간다는 것을 한번쯤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야곱과 에서라면 사랑받는 야곱이 가진 짐이 그러하고, 야곱과 에서와 리브가라면, 야곱을 사랑해 준 어머니 리브가가 짊어진 부채가 그럴 것이다.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삶의 얼기설기 엮어 놓은 야훼 하나님이 에서에게 가진 사랑빚은 또 어떠할까. 그렇베 보면 소설 마음의 부력은 그런 사랑받는 이가 가진 채무 같은 중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은총이다. 작가는 작은 가족을 상정하고 그 단순한 관계 속에서도 강하게 일어날 수 있는 '사랑의 채무''그려낸다. 무엇보다, 그는 '사랑을 받는 자'가 갖고 살아가는 빚을 자유롭게 하고, '사랑을 베푸는 자'가 스스로 짊어진 채로 살아가는 채무도 아예 해방시키고 싶어한다.

 

5.

소설을 읽어가는 내내 먼저 삶을 마감한 나의 가족들이 떠오르는 것은 나이 탓일지 모른다. 등장인물들과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마치 내가 살아가는 어떤 이야기와 다르지 않고, 그들 사이에 일어난 에피소드가 나에게 일어났거나 일어날 어떤 사건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그 이야기 속에서 이제는 이 세계를 떠나 귀천한 나의 어머니가 나에게 가지고 있을 그 어떤 '부채감'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그도 행복했을 것이라는 생각보다도, 그가 나에게 모든 것으로 다 사랑했어도 아직도 사랑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마음을 가진 채 저 하늘로 돌아갔을 것 같은 생각이 마음을 휘저었다. 사랑받는 이가 가질 수 있는 부담이야 그렇다해도, 사랑하는 이가 스스로 짊어지고 살아갔던 그 사랑 부채를 나는 왜 한 번도 살며시 들어 올려주지 못했는가 말이다. 그 마음을 들어 올려 줄 힘을 조금만 베풀었더라도 그는 어쩌면 가장 자유로운 몸으로 이 세계를 떠나갈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6.

나는 소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일은 늘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관념 가득한 소설이 나의 현실이라는 것을 직감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비록 저자가 새겨 둔 관념이 슬픔 가득한 이야기였지만, 소설을 읽고 나니 오히려 그 슬픔이 나를 떠받치는 힘이라는 것을 알았다. 작가가 2021년 이상문학상(44)을 수상한 직후 남긴 글에서 나는 그 보이지 않는 힘이 위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음의 부력>은 남긴 말들을 무시할 수 없게 된 남은 사람들, 그 말들에 붙들려 상실감과 자책감에 시달리게 된 이들의 마음을 훑어본 소설입니다. 남은 사람들이 남긴 사람에게 늘어놓는 뒤늦은 변명 같은 소설입니다. 그러나 남긴 사람을 향한 이 변명들이 실은 남은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어찌 감출 수 있겠습니까?"(116)

"나는 되어진 일에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힘의 활동을 주목하는 성향의 사람입니다. '애쓰지 않고 이룰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애쓴 것이 반드시 이뤄지는 것도 아니라는 세상의 이치'를 모르지 않습니다. 애쓴 만큼 이루지 못하기도 하고, 애쓴 것보다 더 얻기도 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은 일하는 사람의 의무지만, 그 일의 성취는 일한 사람의 권리가 아닙니다."(116)

 

하여 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 변명 같이 늘어놓은 이야기에 오히려 감사한다. 내 마음에 남아있을 어떤 부채감을 수용하고 그것을 갚아내는 삶을 열심히 산다는 것이 내가 건강하게 살아지는 힘이며, 멋지게 사라지는 한 이유가 될 수도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시인 이상을 생각하면 이 문학상이 더 진중하게 발전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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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적 인간에 대하여

 

어제의 나에게는 관대하고

미래의 나를 과장하고

현재의 나를 과시한다.

 

동시에

 

어제의 너를 폄하하며

미래의 너를 혐오하면서

오늘의 너에게는 위장한다


정치에서 '우리'란 허상인가?. 

 

신영복 님의 <청구회 추억>(1969)을 읽으면서 

뜻밖에 오늘날 정치의 인간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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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치 혼자서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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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섬세한 사랑의 아름다움’. 누가 생각했을까? 늘 들어도 마음에 간질간질한 꽃말이다. 먼 옛날 이집트 사막 앞에서 어느 사람이 이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런 감정을 느꼈던 걸까? 하와이 모래해변 해 지는 저녁, 온 바다에 붉은 물감 풀리듯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는 누군가가 이런 마음을 가졌던 걸까? 슬픔 삼킨 오키나와, 어느 농장 상쾌하나 쌀쌀한 바람부는 날, 틈을 헤집고 붉은 꽃잎을 거둬들이는 손 끝에 촉촉하고 세밀한 사랑이 닿았던 걸까?

속설은 속설을 낳는다니, 어느 날 이 붉은 꽃이 거친 들에 아름답게 피어난 샤론의 장미, 다시 또 어느 날, 하루살이 역경에도 영원과 진정한 충성을 향해 살아내는 무궁화(Hibiscus syriacus L)꽃으로 재생했다. 저 달콤새콤한 사랑만으로는 아쉬웠을테다. 마음깊이 각인하는 운명같은 사랑을 꿈꿨던 모양이다. 오늘 아침, 저 꽃잎 곱게 말려 뜨겁지 않은 물을 붓고, 붉은 빛이 물 속에 퍼져 알맞게 살아난 붉은 물빛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붉그스름 안에서 상쾌하게 신 맛이 솟아난다. 이 맛을 섬세한 사랑의 아름다움이라고 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히비스커스(Hibiscus)가 붉그스름한 향을 풍긴다.


2.

언젠가 미얀마 이야기로 세상이 어두워졌을 때 한 소녀가 상사화를 불렀다. ‘사랑을 넘어선 사랑’, ‘보지 못하고도 사랑하는 사랑이다. 들을 때마다 깊은 한을 내리 누르기도 하고, 끌어올리기도 했다. 애틋한 가사도 첫 구절에 마음 빗장을 열어버릴 때가 많다. 사랑이 묻혀버린 마음이라면 금방이라도 사랑비가 쏟아질지도 모른다그 노래를 부르는 아이는 아름답게 당당하다노래는 삶이 실릴 때 짙은 향기가 되는 모양이다. 노래는 물처럼 아래로 아래로 흘러 저만치 혼자서 흐르다가 개여울을 만나 휘돈다. 낮은 절벽에서도 낙수로 쏟아지다 잔잔하다 살랑인다. 살랑하다 보슬보슬하고 그러다 아침이 오면 윤슬이 내려앉는다. 빛구슬을 이고 물은 계곡을 따라 다시 저만치 혼자서 미끄러지듯 떠내려간다. 그러니 보는 이의 시선으로만 저 상사화를 슬퍼하거나 떠내려가는 노래를 안타까와하지 말고 스스로 자기 길을 당당하게 흐르는 삶과 노래를 응원함이 마땅하다.

 

3.

소설가 김훈 님의 두 번째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2022, 문학동네)를 읽었다. 실린 글들은 2013년 이후 계간지 문학동네에 먼저 소개된 것들과 미발표작 <48GOP> 등 일곱 편이다. 책 제목은 이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명이기도 하다. 이 소설집의 특징을 얼핏 살펴볼 수 있는 흔적들이 있는데 우선 광고용으로 사용하는 책 띠지에 새겨진 문장이다. ‘나는 한 사람의 이웃으로 이 글을 썼다.’ 또 다른 하나는 작가가 책 말미에 덧붙인 <군말>이다. 에필로그가 아니라 각 소설들이 생겨나게 된 실제 사연이다. 사연과 소설은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군말>은 각 소설들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가늠할 수 있는 지표가 될만하다. 그러니 이 소설읽기의 순서라면 <군말>을 먼저 읽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 작가가 보여주는 문체, 문장의 의도적 수려한 수사가 장점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좀 더 강하게 들었다.


4.

이 소설집을 펼치기 전에 나는 소설집의 제목 저만치 혼자서를 생각했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시인 김소월이 남긴 산유화」 중의 한 싯구다. 소설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나는 이 제목부터 조금 더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월의 시 산유화는 이미 알려진 대로 산 어디나 있는저 꽃을 노래한다. 시를 해석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유로운 일이니, 이 시가 관념을 형상화한 것이라든지, ‘저항을 상징한다든지 하는 것은 독자 누구에게나 열린 결론이다. 무엇으로 읽든 그리 신경 쓸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어떤 관점이든 저만히 혼자서라는 말에 대해서는 좀 더 유의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아쉽지만 본래 소월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직접 알아볼 방법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니 어떻게 이해해도 나의 주관에 불과할 것이지만, 이 소설의 작가가 저 제목을 소월의 시에서 가져왔다고 밝혔으니(214) 아무래도 이 소설집을 잘 읽기 위해서는 저 시 구절을 다시 한번 해석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무래도 그것이 이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을 이해하는 방법일 것이고 가능하다면 이 소설집 전체를 한데 묶어내는 주제가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굳이 주제를 하나로 엮어 읽을 이유가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런 가능성은 작가가 이미 밝힌 한 사람의 이웃으로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미리 정리하자면 저만치 혼자서에 대한 작가의 제목 설정에 대한 나의 생각은 한편으로는 긍정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시 되새겨 할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5.

우선 나는 저만치 혼자서라는 제목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들을 잘 읽기 위해서는 작가의 말대로 이웃으로 썼다는 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장하는 인물들, 다루는 소재들, 생각하는 주제들이 모두 저자의 이웃들일 수 있는 사람들의 경험이자 그들에 대한 관찰이며 그들을 통한 자신의 성찰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웃이라는 관점이 선명하다. 작가가 자기 주변 삶에 대해 오랫동안 겪어온 이야기들이라는 점에서 이웃으로 썼다는 말은 이 소설집이 진솔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 준다. 이런 관점은 소설집에 실린 내용이 무엇이든지 간에 읽는 이에게 유익한 점이 있다. 다시 말해 그가 보여주는 이웃으로서 관찰은 그 소설에 등장하는 이에게 나도 이웃처럼 다가갈 수 있는 여지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선험’(先驗, transzendental)이 아니라 대신 체험하게 돕는 추체험(追體驗, Nacherleben)’을 제공한다는 장점이다. 그러니 이 소설을 읽는 것은 혹시라도 이 세계에서 나의 이웃이 겪는 일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무관심했던 것에 대해 일말의 가책을 느끼는 이에게, 또는 이 세계의 아픔에 대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이들의 상사화같은 심정에 내면의 해갈을 해 주기에 충분하다. 나는 늘 이것을 김훈 소설의 유익한 점이라 여긴다. 이것은 마치 그의 소설이 대리 고해성사같은 장점이 선명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것에 더해져 문학적 수려한 수사가 어우려서 읽는 이에게 기호에 맞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을 더해주는 것 같다.

 

6.

다른 한편으로 나는 이 제목과 그의 소설에 대해 이번 만큼은 독자로서 스스로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도 생각해두려 한다. 우선, 나는 이 소설집에 실린 작가의 시점이 조심스럽다. 무엇보다 이웃이라는 부제를 염두에 두면 특히 그렇다. 게다가 소월의 싯구가 남긴 그 속뜻을 추론해볼 때도 그렇다. 나는 이 소설의 제목과 소월이 남긴 싯구 저만치 혼자서가 조금 다른 뉘앙스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생각하기에 소월은 저만치 혼자서당당한 존재자로 본 것같다. 그 존재는 관찰의 대상도 아니고, 심지어 그리움의 대상도 아니며, 홀로 피어 외로울 거라는 연민의 대상이라하기에는 당당함이 짙게 묻어난다. 내가 읽기에 소월의 산유화는 이 산 저 산 어디에서나 자기 모습 그대로 당당하게 핀 을 노래한 것이지 그 에 대한 측은지심을 발휘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집의 작가는 저 제목을 토대로 쓴 일곱 째 소설에서도 그러하고, 나머지 여섯 편의 이야기에도 이웃으로서 자기 이웃에 대한 쓸쓸한 연민이라는 작가 중심적 시점을 한결같이 유지한다. 각 소설이 나오게 된 시점이 달라서 그 시절을 반영하는 다양한 소재들이 제시되지만, 작가의 관점은 의도적으로 일정하다. 사회적 아픔을 소재로 삼았지만, 이웃으로서 바라보는 어느 시점들은 시대가 지나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이 소설을 읽는 독자가 스스로 채근해야 할 것은 이웃으로서 그들을 보는 어떤 관점은 작가의 반대편에서 이웃을 있는 그대로 읽어내려고 시도하는 태도로 보인다. 작가는 모든 상황에서 이웃으로서, 연륜깊은 소설가로서 관찰하는 태도를 잘 유지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은 어떤 면에서 자녁 내기 장기를 두는 사람 주변에 서 있는 훈수 두는 사람과 같은 경우도 보인다.

 

7.

나는 어느 작가든지 전작주의를 선호하지 않는다. 다만, 책이 나오면 자주 사서 읽어두는 작가들은 있다. 소설가 김훈 님도 그 중 한 분이다. 이유라면 문체가 나에게 적절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몇 편 글들은 만족스럽다. 그의 소설이 말해주는 것처럼 오늘도 세계는 격동하고, 삶은 깊은 한숨이 사라지지 않는 날이 계속된다. 그래도 가만히 앉아 히비스커스 차 한 잔을 다 마실 때까지 상사화를 상상한다. 그것마저도 살아가는 즐거움이다. 작가가 이웃으로서 썼다는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저만치 혼자서라는 말이 이웃에 대한 위로부터 연민이 아니라 그들도 당당하게 자기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간다는 아래로부터 공감으로 읽는 것은 나의 몫인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소설도 늙어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일까

태백 산맥이 해안을 바싹 압박하면서 가파른 경사로 물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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