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힘을 믿는다 - 정찬 산문집
정찬 지음 / 교양인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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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뮤지컬 <빨래>와 마르크 로제의 소설 『그레구아르와 책방할아버지』,(윤미연 역, 문학동네, 2020), 정찬의 산문집『슬픔의 힘을 믿는다』(교양인 2020), 사이에 어떤 문학적 상관성을 읽는다. 그것은 ‘슬픔을 삶에 대한 경이로운 위로로 수용하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1.

책을 덮었다. 노래는 여전히 흐른다. 헨릭 고레츠키의 '교향곡 제3번' 슬픈 노래의 교향곡(Henryk Gorecki:Symphony Op. 36 'Symphony of Sorrowful Songs'. 1976초연)이다. 두드러진 음없이 낮고 묵직하게 흐른다. ‘슬픔’은 삶에 배경처럼 스며든다. 보기와 달리 강인한 힘이다.


2.

나는 지금 잔인한 4월에 이어지는 ‘5월’을 보내고 있다. 여느 해라면 따뜻하고 정겨운 5월이겠지만, 2020년 5월은 윤4월에 이끌린 탓인지 아직도 서늘한 4월인 듯하다. 삶의 고통을 버텨내야 할 힘을 어디서든 끌어내야한다. 나는 지금 ‘하늘의 소망을 간직한 채 땅을 딛는 발을 버텨야 한다.’ 고도의 문명세계에 속했다해도 나는 여전히 ‘땅의 사람’, 하비루이기도 하다. 이들은 따뜻한 위로가 필요하다. 나라의 구휼미가 낯설지 않게 환생한다. 그나마 다행이다.


사실, 누가 누구를 위로할만한 여건이랄 수 없는 고통이다. 보이지 않는 힘의 위협은 생각보다 두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다정한 위로는 잃어버릴 수 없다. 두려움에 저항할만한 유력한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위로는 본래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에 터를 두고 있다. 그 출발점에 인간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는 문학이 있다.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인간을 자기 손으로 빚어낸 책임으로 끝까지 긍휼하는 신의 헤세드(사랑)가 있다. 정치하게 말하자면, 신학은 문학이며, 인간학일 수밖에 없다. 신이 허락해 준 은총이다. 그러니 ‘땅의 사람’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행동은 신에 대한 인간의 예의이기도 하다. 신이 인간을 포용하는 희생을 보여주었으니 인간 역시 타인을 수용하는 수고를 당연히 해야 할 것이다.이 글은 그런 나의 작은 노력 중 하나다. 


3.

소설가 정찬의 첫 산문집 『슬픔의 힘을 믿는다』(교양인 2020).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멀리 그가 밝힌대로, 그의 소설『슬픔의 노래』(1995, 조선일보사)에 잇대어 있다. 이 소설이 창작 동기와 배경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져 있다. 가장 알려진 바는 저 2차대전 최고 피해국인 폴란드의 음악가 고레츠기 인터뷰와 관련있는 일화다.(참고 제2부 슬픔의 힘을 믿는다 중에서 ‘슬픔의 강변에 서서, 101-108) 그에 따르면, 그는 ‘슬픔’을 여전히 그의 문학 속에 핵심언어로 두고 있는 듯 보인다. 나는 그의 이런 시도를 ‘슬픔의 해석학’이라 부르고 싶다.


이 글들은 대체로 2016-2017년 즈음에 발표한 글들이 중심이다. 시차를 두고 연재되었던 글들을 재편집했으니 대체로 한 논지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가 평소 자기 세계관을 일관되게 피력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대체로 글 상호간에 어떤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목차에 따르면, 이 산문집은 4부에 걸쳐 54개의 글이 실렸다. 책제목과 관련해서 가장 중심에 놓인 글은 2부 ‘슬픔의 힘을 믿는다’라고 할 수 있다. 혹시 저자의 기본 생각을 먼저 읽고 싶다면, 개인적으로는 2부를 먼저 읽으면 좋을 것 같다. 1,3,4부는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연재된 글들이 갖는 특성상 반복되는 소재가 있고, 비슷한 이야기가 징검다리처럼 나열되기도 한다. 하지만, 책 전체에서 그런 특징은 오히려 작가가 가진 세계인식이 일관된다는 한 방증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4.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은 제목이 전체 논지를 잘 함축해 주고 있다. 저자가 밝혔듯이, 그는 ‘슬픔의 힘을 믿’고 있다. 확실하게. 이 점에 유의하면 나는 독자로서 이 책에 관통하는 논지를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슬픔’은 보편성을 갖는다. 인간을 향해 누구에게, 언제나 어디서나, 이유없이 발현한다. 그러니 원인과 이유를 찾는 일은 가볍지 않다. 그런 시도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단순하지도 가볍지도 않다. 오히려 ‘슬픔이 무엇인가?’를 묻는 일이 필요하다. 좀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우선 ‘슬픔’이 나의 문제라는 인식이다. 또한 타인도 슬픔에 직면해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나아가 이 세계에는 슬픔이 항존하고, 그 안에 슬퍼하는 자들은 상존한다는 점이다.


한편 슬픔은 극복할 대상이 아니다. 인간을 깊이 들여다볼수록 인간 안에는 슬픔이 깊이 내재해있기 때문이다. 슬픔은 함께 가는 것이다. 나의 슬픔을 제거해내기 위해 타인의 슬픔을 강화시키거나 방조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슬픔은 공감이 필연이다. 이 때, 비로서 슬픔은 그 자체로 삶의 토대를 굳게 하는 기쁨이며, 희망으로 전환된다.


역설이지만, 적절한 슬픔과 함께 살아갈 때, 오히려 그 슬픔은 문학의 토대가 된다. 동시에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강건하게 지켜내는 힘이 될 수 있다. 이것을 일컬어 ‘슬픔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있다. 슬픔으로 희망을 노래한다.


5.

 54편 글들은 저자가 평소 쓴 글 중에서 연대와 상관없이 선별하고 배열했을 터이니 이 목차는 그의 편집의도가 적극 반영되었을 것이다. 독자의 글을 기고한 정희진은 평소 저자의 글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그의 글은 ‘줄거리의 소비’가 아니라 ‘생각하는 노동’을 요구한다.”


이 표현이 소설가 정찬에 적합한가에 대해서는 다른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사실, 어떤 면에서는 저자를 가장 함축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 산문집에도 마찬가지다. 독자에게는 가벼운 읽기일 수 없겠지만, 소설가가 가진 문학의 책임성 면에서는 가볍게 여길 수 없다. 그러니 그의 글을 읽을 때는 일단 글 전체를 통독하고 그가 말하고 싶은 어떤 논지를 추론하고 재구성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저자와 적극적인 대화가 필요하다. 질문과 답변으로. 이런 경향은 소설에서 한층 두드러진다. 산문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책의 전체 내용을 내가 이해한대로 일별해 본다.


1부는 문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자 답이다. 그는 문학이, 문학에 기여하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슬픔’을 내재하고 있음을 들춰낸다. 그 슬픔은 고립일 수도 있고, 자발적 격리이거나 스스로 경계로 밀려나는 시도이기도하다. 문학은 이런 다양한 ‘슬픔’을 모태로 태생한다. 1부에 소개하는 인물들은 우리 문학사에서 한번쯤 접했을 사람들이 다.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흔적인 듯하다. 여기서 소개된 문학가들의 슬픔은 ‘세계 너머’를 보는 ‘견자’가 누리는 권한에 필연적으로 파생하는 무게다. 그것이 무겁다. 2부에는 4편의 글이 있다.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다) 묵직한 글들이지만, 작가가 설정하는 슬픔의 문학적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작가가 오래 전부터 ‘슬픔’이라는 감정을 주목한 이유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 글들을 되돌아보면, 그가 슬픔을 단지 감정차원이 아니라 사회와 역사 속에서 배태된 인간본성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이 단락이 이 책의 중심 주제와 연관있어 보인다. 3부는 슬픔이 가진 사회역사 현상과 사건을 소개한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 시대 ‘슬픔’에 내재된 실제 아픔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일방적으로 결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슬픔은 보편성을 상실했다. 땅의 사람들에게 너무 가중된 슬픔이 얹혀져버렸다. 권력은 자기 슬픔을 제거하여 타인에게 지워버리는 나쁜 힘으로 작용했다. 저자는 이런 불균형 속에서 가중된 자기 슬픔을 끌어안고서도 타인을 위협하는 나쁜 힘에 희생으로 저항하는 이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슬픔’을 버텨내고 마침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삶의 방식을 보여주었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삶의 방식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방식이 무엇인지 찾아 저자와 공감하는 즐거움이 크다. 마지막으로 4부는 슬픔 그 자체가 곧 희망임을 시대에 비추어 서술한다. 이 단락에서 저자의 관심은 정치와 녹색운동, 기후위기와 같은 시대아픔을 아우른다. 이로써 슬픔의 힘은 문학의 책임이자, 문학이 가진 철학의 기초까지 제공할 수 있다.


6.

그렇다면 저자가 ‘믿는’ ‘슬픔의 힘’은 어떤 것일까? 먼저, 당당하게 경계인으로서 광장에 서는 용기인듯하다. 저자는 최인훈의 소설 『광장』(1960년 11월 「새벽」지에 첫 연재)을 독자에게 상기시킨다. 한 때 슬픈 존재였던 ‘경계인’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우리 역사에서 ‘경계인’은 남북 이념의 희생자였다. 그 상징적 인물은 재독사회철학자 송두율이었다. 내가 아는 대로, 경계인은 위태롭다. 그가 서 있는 경계가 너무 협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계인이야말로 시대에 적합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니 경계인이 서 있는 경계선을 넓혀 경계광장으로 만들자는 의도는 적절하다. 그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또한 기억저항이라는 행동을 각인시킨다. 다시 말해 슬퍼하는 이는 바로 기억할 수 있는 이다. 저자는 ‘슬픔의 힘’을 기억저항으로 이어지는 저력으로 서술한다. 그러니 슬픔을 성급하게 억지로 밀어내려고 하는 이들은 어쩌면 그 왜곡된 슬픔의 원인제공자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점을 지나치지 않고 싶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글 곳곳에서 슬픔의 힘은 그것이 곧 기다리는 결실을 가져다주는 영양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박노해 시인의 한 글을 인용한다. 저자가 말하는 ‘슬픔의 힘’이 이 시인이 노래한 ‘깊은 슬픔’에서 발원했을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이렇게 쓴다.


“한 시대의 끝 간 데까지 온 몸을 던져 살아온 나는, 슬프게도 길을 잃어버렸다. 나는 이 세계의 경계 밖으로 나를 추방시켜, 거슬러 오르며 길을 찾아 나서야했다. 내가 가닿을 수 있는 지상의 가장 멀고 높고 깊은 마을과 사람들 속을 걸었다.”(박노해)


그 길 속에서 시인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시 <살아서 돌아온 자>를 썼다.

“진실은 사과나무와 같아 / 진실한 사람의 상처 난 걸음마다 / 붉은 사과알이 향기롭게 익어오느니...자, 이제 진실의 시간이다.”


‘진실의 시간’은 상처 난 가슴에 스며들어 고인다. 상처의 힘 속에서 사과나무가 숨쉬는 것이다. 그 상처난 심연에서 피어오르는 사과나무 향기를 우리는 맡고 있다.”(‘살아서 돌아온 자’, 64쪽.)


7.

한가지 덧붙이자면, 이 책은 한 번 읽고 끝내기보다, 책읽기 모임 등에서 함께 나눌 수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이런 질문을 서로 제시하고 함께 답을 찾아보는 것이다.


2부를 읽고, Q1.문학에서 슬픔은 어떻게 기원하는가?

1부를 읽고, Q2.문학/문학가에게서 ‘슬픔’은 어떤 유형으로 서술되는가?

3부를 읽고, Q3.문학은 슬픔의 범위을 어디까지 다루는가?

4부를 읽고, Q4.문학에서 슬픔의 힘은 어떤 행동방식으로 나타나는가?

전체 토의: 우리 시대에 문학을 통한 ‘슬픔의 힘’을 실현할 수 있는 생활방식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


8.

나는 이제 세 번에 걸친 글을 정리한다. 다소 장황한 글이 되고 말았다. 아직 판데믹을 지나가는 우리 시대는 슬픔을 짊어지고 있다. 이런 시대에 나는 ‘땅의 사람들’을 위한 따뜻한 위로를 이 문학들을 통해 배운다. 잠정적이지만, 이제 이렇게 정리해 둔다.


첫 번째 글(3-1), 빨래. 이것은 슬픔을 승화시키는 우리의 공동의식을 반영한다. 타인을 향해 내밀어주는 손이 결국은 함께 자신을 정화시키는 시도로 전환되면 좋겠다. 배려와 환대가 그것이다.


두 번째 글(3-2), 『그레구아르와 책방할아버지』. 이 책에서 나는 문학의 위로를 생각한다. 특히 책을 읽고, 읽어주는 이들로부터 당연히 파생할 포용과 사랑의 위로를 생각한다. 차별없이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을 몸에 새겨둔다. 작지만 무시할 수 없는 따뜻함으로.


세 번째 글(3-3). 『슬픔의 힘을 믿는다』. 나는 우리시대를 이해하는 틀로서 슬픔의 해석학을 생각한다. 슬픔에 함께 공감하는 삶을 상상한다. 타인의 슬픔을 자기 삶에 적극 투영하는 희생을 연습한다. 이로써 슬픔을 희망이 발원하는 원천으로 함께 만들어 가보고 싶다. 마침내 우리는 차별없이 ‘공재(共在)’한다. 이를 위해 슬픔이 기울어지게 만드는 시대가 지속되지 않도록 나의 방식으로 저항한다. 잊지 않는, 

‘기억저항’을 유지한다.



시대를 생각하면서 사유하며 돌아볼 수 있는 괜찮은 산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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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은 이야기를 마치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도서관에 좀 들러야겠어"

K는 아직 자리에 앉아있었다.

"왜?"

"아니 도서관에 가는데 왜가 어딨어? 당연히 책 좀 보고, 대출하려는 거지...”

K는 머쓱해졌다. 식어버린 커피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했다. 이내 마셔버렸다. 약간의 원두가루가 잔 바닥에 남아있다. 끊긴 말을 다시 이어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이유인지 자리에서 일어서다 주저앉았다. 몸을 한번 뒤로 젖히고 다시 의자 깊숙이 밀어넣었다. 잠시 뒤, 맞춰두었던 알람이 정확하게 울린다. 알람을 기다렸다는 듯, K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도서관 속을 좀 걸어보자.’'

사람들은 약속 시간이 조금 남거나 또는 미적한 시간을 얼른 끝내버리고 싶을 때, 또는 애매한 시간을 보내는 한 방법으로 도서관을 선택하곤했다. 다행히 자주 실패한 결단은 아니었다.


2.

까페밖으로 나왔다. 바깥공기는 아직 군데군데 서늘한 기운이 남아있다. 멀지 않은 곳에 도서관이 있다. 길은 여러 곳으로 갈라져있다. 까페 바깥쪽 문으로 나서서 조금 넓은 광장을 가로질러 오른쪽으로 구부러진 계단을 지나는 것이 가장 좋다. 좋은 길은 몸에 맞는다. L은 이미 이 길로 지나갔을 것이다. 일부러 K는 실내 문을 통해 미끄러지듯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섰다. 거기서 광장으로 들어서지 않고 곧바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계단을 내려서고 바로 왼쪽으로 구부린다. 이내 휠체어 길로 몸을 돌린다. 사람 둘이 서면 꽉 찰 듯한 제한된 길이다. 오고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길을 가끔 온 몸이 건장한 K가 스스럼없이 선택한다는 것은 조금 멋쩍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아량으로 받아줄만하다. 사실 이 길은 '도서관'에 가장 멀리 둘러가는 길이다. 동시에 가장 어울리고 멋진 길이다. K,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것을 알고서 은근히 누리고 있었다. 햇빛이 들고, 바람이 적당하게 불어준다. 길 한쪽은 거대한 벽이 견고하고 다른 한쪽은 환히 열려있다. K는 이 길을 ‘사색로(思索路), 책방으로 가는 길’이라 스스로 불렀다. 도서관은 거기에 이어진 길부터 시작된다.


3.

도서관은 이 전공분야에서는 제법 크고 시설 좋기로 이름이 나있다. 문을 들어서면 다른 것들에 비해 조금 넉넉해 보이는 현대식 전산 시설들이 좌우로 보좌하듯 진열되어 있다. 그 자리는 빈틈없이 채워져있다. 그 바로 앞에 출입구가 있다. 그 앞에서 머뭇거림없이 자신의 신분증을 당당하게 내리찍듯 올려두면 잠시 후 입장을 허락한다는 초록색 불이 들어온다. 누구 눈치 볼 필요없다. 책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문을 들어선다. 들어서자마자 왼쪽에 정보실이 있다. 다시 층을 하나 내려서면 참고서적들의 방이다. 바닥층으로 내려서면 이제 책들의 집 서가다. K는 이 도서관을 이유없이 누비는 것을 즐긴다. 그러다 어떤 서가에 한참 서서 눈에 띄는 책을 마냥 읽는다. 다시 책을 제자리에 정성껏 세워둔다. K는 책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을 즐기기 위해서 도서관을 걸었다.


4.

이 서가 출입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오래전부터, K는 따뜻한 공기에 떠밀리고 이끌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는 바람같이 책들 사이를 다시 한바퀴 돈다. 일종의 책들의 안녕을 묻는 의식이다. 이런 인사는 늘 그렇듯 기분이 좋다. 도서관의 책들은 언제나 사람을 기다린다. 그러나 그렇게 기다린다고 해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열 권 중 아홉 권 정도는 하루종일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할 것이다. 도서관은 흩어진 책들을 정성껏 모아서 돌봄을 받는 책들의 공동체라 할 수 있지만, 그들이 이곳에 모여든 이후, 사실은 조용히 삶을 마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언제부터인지 K는 일부러 자신과 전혀 무관하게 보이는 서가를 거르지 않는다. 그렇게 서가를 거치고, 책들 사이를 이리저리 헤치고 다닌다. 지하에서 올라오는 습한 냄새와 약간 어두운 듯한 조명아래 책들이 고요히 놓여있다. 책들은 어제도, 오늘도 또 그렇게 내일도 서가 밑으로 한번도 내려오지 못한 채 주어진 시간을 보내고 있다. 도서관은 늘 그렇듯 자리를 지키고 있는 책들에 비해 드나드는 사람들이 훨씬 적다. 어떤 날은 드나드는 사람이 책장 하나에 가끔씩 거꾸로 잘못 꽂혀있는 책의 수보다도 적을 때가 있다. 결국 한 번도 사람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채 이 지하에서 삶을 마감할 수도 있다. 그런 생각때문인지, K는 자기가 필요한 책 한권만 달랑 빼내서 돌아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지적충전소'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아도 즐거운 산책이 가능한 곳, '지적산책로'라고 하는 게 적절했다.

도서관으로 들어오는 길 옆으로 나무와 풀과 새와 꽃들이 있듯이, 이 눅눅한 서가에는 숱한 책들이 있다. 마치 나무와 풀과 벤치와 그늘처럼 오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한다. K는 도서관에서 책을 만난다. 책과 이야기하고, 책의 안녕을 살피고, 책에게 바깥 공기를 실어다준다. 책이 말을 걸어오면 들어주고, 멈춰준다. 책이 말해주고 싶은 삶의 이야기들을 가만히 들어본다. 어느 사이 오솔길을 산책하듯 책사이를 걷는다. 지적산책로, 지적휴게소다.


5.

도서관은 책들이 머물러 있는 동안 화려한 생기를 얻을 수 있는 집이자, 별장같은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책들은 그를 찾아와 주는 존재가 있을 때 비로소 존재이유를 확인한다. 그들은 말없이 그를 찾아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를 불러주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서 '책'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는 책은 알고 있다. 누군가 그를 꺼내들었을 때, 비로소 숨을 쉬고, 살아난다. 책은 신비로운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우리가 만나는 도서관들은 어느 덧 많은 책들의 무덤이 되어가고 있다. K는 묘지같은 서가 사이를 한참 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책덕분인지 숨이 좀 열리는 듯하다. 잠시 후 다시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광장이 환하다. 잠시 앉아 있었다. 저 멀리서 어딘가를 급히 다녀오는 L이 손을 흔들며 달려온다.


"어디 갔다와?"

"응 책 사러"

"도서관에 간다며? 빌리지?"

"책은 소장되어 있다고 나오는데 서가에 가보니 책이 없어. 아무리 찾아도 없더라구. 시간이 급해서 한권 샀어."


문득, 자리를 이탈한 책 한권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라도 삶의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신다면 천만 다행이지 않겠는가? 아마도 어딘가에 곱게 자리를 잡고 있다가 곧 돌아올 것이 분명하니... 광장의 반대편으로 해가 스르르 잠으로 떨어지듯 넘어가고 있다. 바람이 차다.


도서관, 그저 가볍게 책방이라고 하자. 그 곳은 잠시 여유가 있거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없을 때 이유없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 그런 중압감은 책에도 해롭다. 내가 저 산길을 돌아 산책하며 느끼는 그 즐거움으로 충분하다. 도서관, 책방은 그저 '아낌없이 쉬어가는 책'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도서관에는, 책방에는 오늘도 숱한 책들이 들어서고, 아쉽게도 그만큼 책세상을 떠난다. 그 떠나는 책들 중에 부디 달랑 한권이라도 마음에 새겨두자. 도서관, 책방의 책은 그저 책이 아니다. 글과 그림으로 호흡하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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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아틀리에 - 과학과 예술, 두 시선의 다양한 관계 맺기
김상욱.유지원 지음 / 민음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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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이 무엇인가?

흩어진 글들, 말들, 그림들을 가지런히 모아서 묶어놓은 집.

한 글자, 한 말, 한 사진, 한 그림 등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 존재하는 장소.


이런 집은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아도 불편하다. 적절한 규모가 있어야 한다.


흩어진 글자들을 모아 일목요연하게 배열하면 신기하게 사상이 태어난다. 글자들은 옆 글자와 어우러진다. 마침내 거대한 폭포처럼 인간의 이성에 떨어진다.


책은 글, 말, 그림 등의 조화이다. 조화란 질서다. 글쓴 이의 문학적 직관과 읽는 이의 문학적 상상이 알맞게 이어질 때 안정되게 체감된다. 마치 피아노 88건반을 적절한 손놀림과 발놀임으로 평화롭게 연주하는 연주자같이.


2.

『뉴턴의 아틀리에』(민음사, 2020). 440쪽.144x215x27mm. 573g. 총5부 26장. 책을 손에 들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단어가 있다. “경이롭다.(432쪽)” 창의성을 유달리 강조했던 문학평론가 이어령님이 내린 평가다. 언어외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이 짧은 문장만으로도 이 책에 대한 좋은 인상이 선명해진다. 물론 책을 읽기 전이라면 이 평가는 더욱 강인하게 들릴 것이다. 노로한 교수가 내린 평가여서는 아니다. 소설가 김초엽님의 말처럼 “서로 다른 영역에서 출발한 선이 무수히 교차하는 지점들이 펼쳐”(433쪽)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책자체로도 흔하지 않다. 예를들면, 책 구성(재밌다), 폰트(글씨에 대한 예술이라고 해야겠다), 종이질(후루룩 넘겨지지만, 뒷페이지가 비춰서 가독성은 조금 떨어진다), 종이감촉(부드럽다), 종이무게(분량에 비해 가벼워좋다), 판형(이것은 책디자이너의 의도가 무엇이든 독자로서는 조금 아쉽긴하다. 윗 여백이 너무 좁다. 책이 숨을 쉴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 중 한 분이 머리글에서 이 책에 관한 책제본 특징을 기술해 놓은 것을 보면, 이 책에 대한 첫 번째 경의는 책 외형에 대한 조심스러운 관찰일 것이다.


“책의 전반적인 그래픽디자인에 관해서는 『뉴턴의 아틀리에』라는 책의 정신에 일치하도록 처음에는 물리학의 개념을 응용한 디자인 프로세스를 고려했다.”(16쪽, 17쪽 그림참조)


이 말 속에서 나는 ‘책의 정신’이라는 표현에 주목했다. 어떤 정신일까? 그 다음에 이어지는 글을 읽어보면 관련된 의미를 찾을 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물리학 개념을 응용한’. 다시말해 이 책의 토대는 물리학이었던 것 같다. ‘물리학’의 관점. 따라서 두 저자 중, 조금 더 주도적인 관점은 물리학자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책 외형에 대해서 한마디 덧붙인다면, 책디자인을 유심히 관찰하면 좋을 것 같다. 저자마다 폰트를 달리하고(15쪽), 글과 글 사이에 앞 글과 다음 글의 핵심 문장이 큰 글씨로 요약되어있다. 내 기억으로는 마치 오래 전 한 문예종합지가 시도했던 방식과 흡사하다. 따라서 이 부분은 앞 글에 대한 요약이자, 다음 글에 대한 안내라고 할 수 있다. 두 글이 대립되는 관점은 아닌 듯하다. 그림과 사진 자료가 적절하게 배치된 것도 읽는 재미를 돕는다. 미리 말하지만, 이 책은 두껍다해도 읽다가 덮다가, ‘다음에 계속 읽자’하지 않을 정도는 된다. 마지막 부분에서 조금 인내하면, 어느새 책 마지막 표지를 덮을 수 있다. 어쨌든 이 책은 여러모로 유익하고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에 몇 가지 생각을 좀 덧붙인다.


3.

책의 모태는 알려진대로, 한 일간지에 일년간 연재된 글이다(2018.7-2019.7.). 모두 26주제를 다루고 있다. 연재 당시(나는 가끔 읽었는데) 거의 매월 두 편씩 실렸고, 해당 주제는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제시했다고 한다.(17장의 ‘점’은 김상욱님(K)이, 6장의 ‘결’은 유지원(Y)님이 제안했던 모양이다.) 아마도 자신이 갖는 관심사가 적극 반영되었을지 모르겠다. 이를 토대로 보면, 첫 번째 연재 글인 ‘검정’은 K, 연재 마지막 글 주제인 ‘가치’는 Y가 제안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추론을 고려한다면, 전체 26개 주제의 제안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제안자가 되고, 다른 사람은 그 주제에 대한 대응자가 되는 식이다. 사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렇게 보면 연재글을 다시 모아 5부로 구성하고 소제목을 붙인 것은 다분히 후속 작업이었을 것이다. 연재글과 책의 차이는 사실 이 소제목이라 할 수 있다. 목차에 소개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부 관계 맺고 연결된다는 것:이야기/소통/유머/편지/시(1-5장)

2부 현실을 관찰하고 사색하는 마음:결/자연스러움/죽음/감각/보다/가치(6-11장)

3부 인간과 공동체의 탐색:두 문명/언어/꿈/이름/평균(12-17장)

4부 수학적 사고의 구조:점/구/스케일(17-20장)

5부 물질의 세계와 창작: 검정/소리/공간/재료/도구/인공지능/상전이/복잡함.(21-26장)


개인적으로 연재글이 책으로 나올 때는 항상 연재글부터 확인한다. 당연히 연재글과 책편집글은 다른 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작위로 쓰여진 연재에 비해 책은 의도된 편집의도가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목 ‘뉴턴의 아틀리에’보다 소제목이 이 책의 사고를 더 잘 반영한다. 1부에서 5부까지 제목을 보자면 일단 일관성이 보이지는 않는다. 이 분류는 연재된 26개 주제를 서로 공통점이 높은 주제들로 다시 묶어놓은 정도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크게 어긋나지는 않아 보인다. 물론 유사한 소재와 표현들이 반복되는 정도는 학습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전체적으로 크게 어색하진 않는다.


4.

책 내용과 관련해서 조금 살피려고 한다.


4-1.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책은 인간-세계가 분리되지 않고 상호 관련되어 있는 존재라는 점을 밝혀주었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나와 너, 나와 그것, 너와 그것’은 어울려있다. 이 세계를 이해하고, 나와 세계를 분리하지 않은 채 깊은 상관관계가 있음을 유쾌하게 밝혀주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글 한편 한편에 담긴 저자들의 수고가 돋보인다는 점이다. 언어디자인과 물리학, 나아가 미술이 사실 어느 한 지점에서 늘 만나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밝혀준 것은 가볍게 지나칠 수 없다. 두 사람이 이 책에서 함께 이룬 결실이라면(의도했을지도 모르겠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물리이며, 디자인이며, 예술(미술, 음악)이라는 것이다. 서로 분리되지 않고, 총합(holistic)구분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 삶의 터전인 이 세계, 현상이 전일성(全一性, holism)이자 처음부터 비국소성(非局所性, non-locality)으로 유지되었다는 점을 확증한 것이다. 저자들은 자기들의 독특한 분야를 토대로 ‘미술/음악’과 같은 예술에 제3지대를 설정하고 통합해 준다. 개인적으로, 이런 방법론은 이 책에서 다소 난해하게 읽히는 내용들을 내가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유익했다.(cf.미술을 통한 학문적 견해를 밝히려는 시도는 수용해석학이란 관점에서 최근 적극 활용되고 있다.)


4-2. 이 책을 친근하게읽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다. 하나는 ‘글’과 ‘언어’가 사상을 담은 도구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뉴턴 물리학에서 양자역학으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세계관의 변화를 인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결정론적 세계관이 불확정성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사실 큰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타이포그라피 분야나 양자물리학은 내가 전문적으로 공부한 분야가 아니어서 일천하다. 따라서 이 책에서 기술된 부분들은 두 사람의 견해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 미술에 더욱 안목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아울러, 유지원님의 글을 읽다보니, 오랜만에 한 가지 즐겁게 생각한 것도 있다. 내가 조금 공부한 고대언어(특히 고대 셈어 계열, 우가릿어나 고대히브리어)가 글자들과 ‘개념’(특히 이야기, 검정)에 관한 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언어는 사상을 담지한다. 저자(Y)가 말하듯이 ‘낯선 언어’가 사고의 간극을 만들어주고, 유연하게 이끈다는 점은 적극 동의하는 부분이다. 나는 이 대목이 이 책 전체를 견인하는 중요구절이 아닌가 생각한다.


“낯선 언어는 서로 다른 것들 간의 뜻밖의 연결을 만들어 낸다. 이 연결을 자유자재로 적절히 구사하는 능력이 곧 창의력이다.”(13장, 213쪽)


동시에 다른 저자(K)가 이와 관련해서 덧붙인 말도 유의미하다.


“언어로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왜 수학과 예술이 존재하는지 설명해준다. 우주는 인간의 언어와 이해방식이 아니라 수학과 물리학의 방식으로 기술된다.”(222쪽)


이 말과 관련해서 한가지 덧붙이자면 내 견해로는, K가 말한 ‘언어’는 오히려 ‘단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왜냐하면, 한계가 있긴 하지만, 고대 히브리어라는 언어는 ‘언어로써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예로 ‘검정’(5부21장)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도 고대히브리어는 ‘어둠’에서부터 ‘새벽’, ‘간절함’, ‘새벽의 신’, 심지어 ‘다이아몬드’까지 아울러 표현하고 있다. 언어사상가인 토클라이프 보만의 견해를 빌리자면, ‘동사’가 명사에 선행하는 언어의 특징은 그 언어가 인간 삶의 바닥에서부터 역동적으로 파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 분도출판사,1975/ 2001) 그렇게보면 수학과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가 언어로 표현하기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어쩌면 ‘언어’를 회화로 표현함으로써 의미의 지평확장을 이룬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나는 독자로서, 이 책 전반에 걸쳐 견지해야 할 틀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언어’라는 도구가 어떻게 온전하게, 편견없이, 나아가 배려하며 소통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글자에 대한 예술과 수학, 물리학이 잠재된 미술과 음악과 함께. 이 세계가 겸손하게 온전한 공동체로 살아가기 위해서.


5.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던 부분들을 적어둔다. 독자의 미진한 능력 탓이겠지만, 다음에 읽을 분들에게서도 혹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1)1장 제목‘이야기’: 이 용어는 명확한 정의가 먼저 되었으면 좋았을 거 같다. 스토리인지, 내러티브인지.

(2)43쪽."그런데 이런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문장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3)102쪽. ‘결’:유익하게 읽었다. 다만, ‘결’이 가진 다층적인 의미가 뒤섞인 듯했다.

(4)131쪽. “혹독한 겨울을 밝히는 구세주의 탄생, 대림절의 간곡한 기다림,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긴 겨울이 저물고..”: 내가 이해할 때, 이 부분이 교회절기의 흐름을 순차적으로 염두에 둔 것이라면, 아예 ‘대림절의 간곡한 기다림, 혹독한 겨울을 밝히는 구세주의 탄생’으로 글 순서를 옮겨 읽는 것이 좋겠다.

(5)189쪽.‘이마누엘 칸트’: ‘Emanuel’이 칸트의 세례명이지만, 이후 그가 히브리식 이름인 ‘Immanuel’로 바꿨으니 이왕 발음한다면, ‘임마누엘’이 더 적절할 것 같다.

(6)220쪽. '하나의 전자는 두 장소에 동시에 존재한다.: 이 내용은 글 전체에 자주 반복된다. 연재된 글의 흔적이어서인지 글의 흐름을 조금 흐트린다.


6.

한 가지 주제를 두 사람이 자기 관점으로 써내려가는 글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예전에도 이런 방식으로 역사관점을 나눈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모처럼 그 때 그 즐거움을 다시 누린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실린 여러 그림 중에 두 가지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처음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시 보는 것이다. 우선 책 표지에 실린 'Prat is Quality.'는 책 전체 성격을 보여주는 듯, 초현실적이며 새롭다. 다른 하나는 이응노 화백의 「군상」(1986)이다. 비록 ‘무제’라는 단락에 소개되었지만, 그 무명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역사가 지금 우리 앞에 있다는 것을 새삼 다시 일깨우는 그림이다. 다시 보니 마음을 일신하게 된다. 화가의 직접체험으로 잘 알려져있듯이, 1980년 5월18일이 운동이 그림 군상들에게서 다시 살아나는 듯하다. 


이런 그림들을 소개해 준 두 저자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글 전체가 유익한 책이다. 게다가 단숨에 읽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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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문학동네, 2012)


1.

언젠가, 중국문학평론가들이 위화(余华, Yú Huá)의 소설을 다룬 소논문 몇 편을 읽은 적이 있다. 여러 사람들이 각기 다른 시점에 써놓은 글들인데도 글감으로 다루는 그의 소설들은 거의 엇비슷하다. 영화로도, 책으로도 소개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솔직히, 그는 우리 사회에 이례적이다. 이질적인 이념에 점철된 자기역사를 다루면서도 우리에게는 소설문학으로 꽤 잘 알려진 중국작가가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의 소설도 인상적이지만, 가끔 그의 에세이를 다시 읽는다.『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원제:十個詞彙中的中國) (문학동네, 2012)도 그 중 한 책이다.

2.

이 책은 그가 체험한 역사를 토대로 한다. 동시에 그의 사상을 은근히 드러내는 사회에

세이다. 소설가로 알려진 것에 견주면, 에세이는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사실, 나는 중국 작가 위화를 잘 알지 못한다. 그가 1996년에 발표한 『허삼관 매혈기』(번역:푸른숲, 2007/영화 2015개봉)가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책이다. 당시 나는 ‘매혈기(賣血記)’라는 말을 한참 생각했다. ‘피를 판다’는 것이 단지 공익에 기여하는 ‘헌혈’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슬픈 웃음으로 범벅되어 비열하다시피한 자구책이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후, 이런 저런 이유로 중국 여러 곳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에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다행히 그 여행에서 나는 중국 현대사를 거쳐 온 이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이 들려준 몇몇 이야기들은 위화의 글을 조금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되었다.


3.

그의 책『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는 번역본 주제목이다. 이것만 보자면 이 문장은 인문학적 출판문학이 상상해낸 결실이다. 위화가 본래 정한 제목은 부제로 달려있다. :『10개의 단어로 본 중국』. 출판사입장에서 보자면 번역본의 승리다. 아쉽게도 번역본 제목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개념은 아니다. 다만 독자에게는 무거운 위화의 생각이 이런 제목으로 인해 좀 더 편안하게 전달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래도 이 책을 읽을 때는 원제목을 고려하는 것이 좋겠다.


제목만 보았을 때, 나는 이런 질문이 들었다. ‘과연 중국을 설명하는 10개의 단어들은 어떤 것들인가?’, ‘이 단어들이 거대한 중국 전체를 포괄할 수 있을까?’ 완전하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조금 기우였다. 책을 읽고나니 이 단어들이 현재 중국을 이해하는 좋은 지침이 될 것이라는 확신마저 들었다. 솔직히, 여전히 중국은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다. 그래도 위화의 글을 통해 어려운 퍼즐 중 몇 개는 맞춰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가 선택한 숫자 하나와 열 단어를 보자.:5월35일. 인민, 영수,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혁명, 풀뿌리, 산채, 홀유. 얼핏 읽어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들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 단어들에게서 그가 지향하는 의도를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이 단어들은 정치적인 진술이 아니라 정치문학적 진술이다. 그는 정치자체를 분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학에 기대어 정치를 파악하고 있다. 이 열 단어는 그 분석 틀인 셈이다. 이를 토대로 정치, 문화, 역사를 엮어 문학으로 실현하려고 애쓴다. 중국현대사를 이해하는 문학적 기본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이 단어들을 기초로 각 단락에서 자신을 포함한 당대 사람들이 겪은 개인 경험과 사회적 반응, 그리고 그에 대한 진술을 엮어 공동 역사로 재구성해준다. 그가 1966년 마오 쩌뚱의 문화대혁명을 출발선으로 삼고, 이후 등소평을 거쳐 최근의 중국 사회를 아우르는 서술방식을 택한 것도 염두에 둘만하다.


4.

위화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있다. 1989년 천안문 사태이후, 중국은 하나의 문으로만 드나드는 사회로 더욱 견고하게 재편성되었다. 그 문은 갈수록 더욱 공고해졌다. 5월35일(6월4일 천안문사태를 일컫는 말)은 그 경직된 현대중국을 상징하는 표기다. 그보다 앞서 문화대혁명시기(1966.5-1976.12)는 대체로 그의 글들이 시작되는 문학기점으로 보인다. 하여 작가의 입장에서 굳게 닫힌 천안문은 오늘날 중국을 상징하는 문이 되어버렸다. 개방적인 사회로 보이면서도 안으로는 막아둔 세계다. 역설적으로 이런 그의 글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중국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바깥 사람들의 관음적인 욕구를 어느 정도 해소해주는 매력이 곁들여져 있다. 그는 이 글의 목적을 이렇게 밝힌다.


“나는 이 책에서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성질을 두루 갖추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초연한 서술과 절실한 삶이 책 속에서 걸어가는 길은 서로 다르지만 결국 같은 곳에 도착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또한 이 열 개의 단어 속에서 호메로스와 맹자의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태도를 계승할 수 있기를 바란다.”


5.

이제 그가 제시한 열 단어들을 보자. 첫 단어는 인민, 마지막은 홀유(忽悠)다. 나는 이 열 단어들을 크게 이렇게 세 부류로 재분류해 봤다: 제1부류 <1.인민>, <2.영수>. 문화대혁명이후 중국사회를 지배하는 정신적 기틀을 보여준다. 제2부류 <3.독서>, <4.글쓰기>, <5.루쉰>. 중국사회를 관통하는 저력으로서 글과 말의 함의다. 제3부류 <6.차이>, <7.혁명>, <8.풀뿌리>, <9.산채>, <10.홀유>. 문화대혁명과 경제대혁명을 거쳐오는 중국사회의 내면과 외형의 부조화를 지적한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제시한 산채와 홀유라는 현상은 주목할 개념들이다. 이것들은 현대 중국사회를 제대로 이해하려는 중국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아주 유익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된다.

한편 이 단어들 중에서 그가 은근히 강조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5.루쉰>이다. 그는 현대 중국을 이해하는 핵심인물로 마오 쩌뚱이나 등소평을 선정하지 않았다. 중국개화기 인물인 루쉰을 전면에 세웠다. 위화 스스로 문학가로서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드러낸다. 그는 루쉰을 이렇게 평가했다.


“루쉰은 마침내 하나의 단어에서 하나의 작가로 돌아왔다”


위화에게 루쉰은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문학정치의 기본점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루쉰을 공적으로 앞서나갔다.

다른 단어들도 한 가지 공통적인 관점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중국 사회가 정치에 의존한 정치집단체제를 벗어나 경제에 의거한 정치집단체제로 이행되고 있음을 드러내려했다. (예:인생/살아간다는 것). 아이러니하게, 그의 진단에 따르면, 경제를 중심으로 한 정치체제는 분열상황이나 삶의 격차를 감내해야했다. 이로써 정치사회의 표리부동이나 사회적 삶의 차이를 감수하는 사회체제로 갈 수밖에 없는 한계에 직면하는 일은 당연하다.


6.

여느 글도 마찬가지지만, 위화의 글을 읽는 데는 전제해 둘 것이 있다. 그것은 그의 글(소설이든, 에세이든)에서 자신이 체험한 중국 현대사를 되새김질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의 글은 ‘해석된 현실’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실제 겪은 일을 자기 방식으로 요리한 음식같은 것이다. 그가 자기 체험을 다룬다해도 그것은 사실을 전달하는데 활용하는 소재이면서 자기 가치 판단에 근거한 해석된 이야기다.


위화는 이 책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개념’을 선택했다. 그런 점에서 좀 특별하다. 단순한 ‘말’이 아니라 중국을 이해하는 개념을 설정한 것이다. 일종의 ‘개념사(槪念史)다. 아마도 그는 이 단어들이 과거로부터 현재, 앞으로 미래까지 중국인들의 마음에 여전히 흐르고 있음을 감지했던 모양이다. 중국사회를 관통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자 기술적인 능력인 셈이다. 그는 이 단어들로써 중국사회가 ‘가치개념이 흘러가는 역사’로 이해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위화가 기여한 바는 이렇다. 그는 중국을 통시적으로 읽으면서 동시에 공시적으로 읽어낼 틀을 제시했다. 이 개념들은 중국만의 특징적인 가치개념들에 불과하다해도 그것을 선택한 문학가의 글을 내가 읽는 이상 나도 그 개념들의 타당성을 스스로 물어야 할 것이다. 이 시대의 보편적인 가치에 어떤 도전을 하며, 어떤 변화를 촉구하는지도 물어야 할 것이다.


7.

그가 제시한 열 단어는 현대 중국사회의 아픈 현실이다. 작가는 그것들을 더 나은 세계로 이행될 때 반드시 수정되고 개정되어야 할 삶의 방식처럼 들린다. 그는 보편적인 세계가치를 열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여 나는 그가 제시한 열 단어들에 관해 내가 지향하는 보편가치를 대입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이렇게 써보다.


1.인민=시민중심사회

2.영수=낮아지는 지도자

3.독서=상식과 보편윤리지침 공유

4.글쓰기=사상의 자유로운 실현

5.루쉰=역사의 중심을 유지하는 인물

6.차이=삶에 균형잡힌 질서

7.혁명=반성과 개혁

8.풀뿌리=올바른 부를 누리는 사람들

9.산채=공의와 정의의 공동체

10.홀유=표리일치의 말로 소통하는 삶


물론 이 단어들의 상관성 여부는 좀 더 면밀한 작업이 필요하다. 오해일 수도 있다. 다만 이 개념들을 대조해 봄으로써 내가 머물러 살아가는 이 땅에서 현재 겪고 있는 사회와 정치의 중요한 개념들을 재고해 볼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깊이 되돌아보는 문학(과 신학)이 지향하는 인문학의 책임을 상기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8.

위화의 글을 읽다보면, 소설일 때와 수필일 때 구분없이 무거운 위트가 묵직하게 놓여있다. 가벼운 위트라도 꼭 비온 뒤에 거칠게 흐르는 개울물같은 느낌이다. 그의 글은 중국을 이해하려는 관점에 도움이 되지만, 뜻밖에도 한국 현대사가 여전히 해결하지 않고 지나가는 비극들을 다시 살펴보는데도 유익해 보인다. 가볍게는 왜 중국에서 그렇게 많은 짝퉁이 범람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산채와 홀유)


위화의 소설과 그 밖의 글을 평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그는 '중국 문화대혁명이라는 거시사로부터 같은 공간에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인간 본연의 태도로 대하려는 미시사로의 수렴'한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그는 밖으로 향하려는 거창한 역사인식과 안으로 집약되는 미세한 인간인식을 교차시키려고 노력한다. 하여 그가 현실참여문학가라고 해도 타당할 것이다. 어쩌면 그는 이 땅에서 그의 글을 읽는 이들이 기억해 두어야 할 시대책임을 ‘글’로써 상기시켜주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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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조덕환(63세). 2016.11.14 본향으로 돌아간 사람.

밴드 들국화 기타리스트(1985-1987).

2011년 솔로 1집 The long way Home <수 만리 먼 길>발표.

2018. 10.11. 미발매곡들 중 2집 유작 <인생> 발표.(LP 발매)


<2집 수록곡>

1. 인생

2. Morning Rain

3. 새아침

4. Fire In The Rain

5. Goodbye Gloomy Sunday

6. I Don’t Wanna Sleep Here Alone Tonight

7. 봄


1.

지난 4년 전 나는 한 장례식에 참여했습니다. 마침 그 기간에 또 다른 이의 장례식에도 방문해야 했던 터였습니다. 죽음으로 환송하는 자리에서 또 다른 죽음이 겹쳐지는 것은 우연일테지만, 죽음은 죽음에 이어지고 있다는 당연한 생각을 파란 하늘 아래서 한번쯤 다시 가졌습니다. 삶이 끝나가는 날이야 회색빛 같으리라 짐작하겠지만, 사실 그 날 하늘은 무척 푸르렀습니다.


2.

그 후 2년 뒤, 그의 추도일이 다가오는 즈음에 유가족들이 고인의 유작 앨범곡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음악과 더불어 평생 살았던 이가 마지막까지 남겨 두었던 기억이자 흔적들입니다. 앨범에는 타이틀 곡 <인생>에 이어 6곡이 수록되었습니다. 모두 7곡입니다. 나는 이 유작앨범이 무척 반가왔습니다. 마지막 ‘죽어가는’ 길에서조차 그는 <인생>을 희망가득한 哀歌로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3.

타이틀 곡 <인생>. 이 곡은 이미 '본향'에 도착한 이가 아직 그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을 위한 '묵시적 기도'입니다. 이 타이틀 곡에 이어지는 여섯 노래들 모두 어쩌면 그가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죽음을 예고받으면 쏟아내고 싶었던 '노래하는 기도'였을지 모릅니다. 그가 살아서는 은닉해 두었던 기도문을 마음 깊은 곳에서 스스로 봉인해제시킨 고백이라고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4.

track1 <인생>. 피아노 선율이 옛스럽게 흐릅니다. 가사를 읊조리는 노래가 따라붙습니다. 그가 노래합니다.


"인생은 연기, 세월,바람, 순간,영원, 시간, 자연, 계절 속에

저물어가는 들녁 저녁 석양 바라보며

내 마음도 따라서 춤을 추는데

가을 잎의 노래 울려 퍼지며

내 마음도 따라 울리네

(피아노 간주)

인생은 연기, 세월,바람, 순간,영원, 시간, 자연, 계절 속에

흩어내리는 저 가을빗소리 들으며

내 마음도 따라서 춤을 추는데

가을잎의 노래 울려퍼지면

내 마음도 따라 울리네

욕망의 열차는 끝없이 끝없이

날 깨워 달려오는데

내 마음의 열차는 흔~들리면서 천천히 가려하네

(피아노 격정 1)

욕망의 열차는 끝없이 끝없이

날 깨워 오라하는데

내 마음의 열차는 흔~들리면서 천천히 가려하네

(피아노 격정 2)"


피아노 마지막 파열음 노래 끝.


5.

모든 곡을 듣고 나니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이 노래들을 스스로 녹음해 두었을 때, 그는 이 노래들이 제 발로 세상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이 노래들의 운명을 그가 알고 있었을까?' 그는 기대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아쉽게도 그 간절한 기대가 이뤄지기 전에 그는 삶의 행진을 마감해야했습니다.


노래 <인생>을 몇 번째 듣고 있습니다. 그의 노래는 낮고, 단조롭고, 거묵합니다. 나는 이 노래에서 그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흔들리는 생의 길에서 한순간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또박또박 봅니다. 말로 드러내지 못해도 어떤 위기감같습니다. 허나 그 목소리는 꾸며지지 않은 아이의 마음 같이 단순합니다. 따박따박 말하지만 마음은 애절합니다. 간절합니다. 말하지 않고서는 안되겠다는 여린 희망이 짙은 사투리에 실려 있습니다. 명쾌하게 떨어지는 도시 발음과는 처음부터 동떨어졌습니다. 비록 흔들리는 길이어도 생의 리듬은 조화롭게, 견실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선명한 소리 속에서 이 노래들은 희망을 소생시키고 있습니다.


6.

일곱 개의 노래들은 그가 말없이 수용하며 살았을 삶을 단순히 구조화하여 보여주는 듯 합니다. 피아노 선율에 실린 첫 곡 <인생>을 지나 기타와 하모니카를 거쳐 마지막 곡 <봄>에 다라릅니다. 역시 피아노 소리에 실렸습니다. 수미쌍관처럼 두 곡은 필연적으로 조우합니다. 기타소리와 하모니카가 뒤섞인 길 위에서 다시 피아노 선율이 정갈하게 흐르는 마지막 곡으로 넘어오는 것도 인상적입니다. 피아노는 격정적으로 등장했다가 다시 물이 흘러 내려가듯 조용히 페이드 아웃으로 사라집니다. 삶의 시작과 끝을 떠올립니다. 이 두 곡을 들으면 그가 '영원을 향해 가는 시공간'을 지나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마침내 '푸르른 생명의 숨소리 온 세상에' 가득찬 그 길에 다다릅니다. 마치 자기 생이 그렇게 마칠 것을 예견했던 것 같습니다. 죽음으로써 그는 다시 '새로운 인생'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하여 조심스럽게 나는 그가 그의 노래를 통해 죽음 앞에서 '죽음너머' 삶을 향한 분투흔적을 남겨두려고 했다고 받아들입니다. 이 두 곡 사이에 다섯 곡이 ‘길의 정점’처럼 자리합니다. 길에서 부르는 그의 노래들입니다. '본향을 향하는 길', '내리는 비', '쏟아지는 햇살', '화사한 아침', '새로운 일요일'을 붙잡고 있습니다. 앨범<인생>은 이렇게 절망의 옷을 입은 채로 희망의 길을 걸어 궁극적으로 <봄>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가 노래하듯 겨울같은 <인생>이라도 어김없이 <봄>에 다다를 것입니다. 그의 고백을 빌리자면 <새로운 일요일>이 시작될 것입니다.


7.

그 장례식을 마친 날 나는 이렇게 썼습니다.


" '새로운 일요일, 축복합니다'. 그가 남긴 이 노래들은 그가 수만리 먼 길을 노래와 함께 걸어온 흔적이자, 나그네로서 자신에 대한 축복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를 마지막으로 배웅하기 위해 모인 이들을 위해 들려주고 남겨주고 싶은 유언같은 축복의 노래였습니다."


다시 몇 년이 흘렀습니다. '새로운 일요일'을 앞둔 오늘 나는 이렇게 씁니다.


"나는 그의 노래 가사처럼 '흔들리는 삶'에 늘 직면합니다. 열차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따라오라는 손짓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만약 그가 일러주지 않았다면 그 열차의 이름이 <무한욕망>이라는 것을 몰랐을 겁니다. 흔들리는 길에서 '멈추지 않는 열차'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노래를 통해 나에게 남겨 준 유산이 있습니다. 이 무도한 열차에 저항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용기입니다. 나는 그가 저항하는 방식을 다시 배우고 있습니다. 그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흔들리는 길에서 열차로 올라타고 싶은 유혹에 대해 노래로써 저항한 것입니다. 다행스럽게, 그의 은닉된 노래가 기도처럼 세상에 나와 나의 손에 들려졌습니다. 나는 지금, 다시 그가 부른 노래를 통해 그 저항지혜를 경각합니다."



오늘, 짙은 전염질병의 시대에 나는 나의 <인생>에서 다시 <봄>같은 <새로운 일요일>을 만끽할 채비를 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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