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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늘 그렇듯이, 길 걷기를 좋아하는 나는 길을 걷는 동안 가끔 서시를 되새긴다.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흔들리는 길에서 나는 이 서시를 다시 처음부터 되새겨 상상한다. 이른 바 나의 도석(道釋)’이다. ‘길 위의 해석’. 집에 돌아와 아무래도 오늘 나의 해석을 조금 부연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 결과를 여기에 적어둔다.

 


1.

우선, 내가 길을 걸으며 시를 해석한 방식을 잠깐 언급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히브리인들의 시를 즐겨 읽는다. 사실, 여러 시읽기 방법 중에 시 자체를 자세히 읽는(close reading)것을 선호한다. 이것이 어떤 방법인가 싶지만, 사실, 단순히 말하자면, 시를 무한 반복하여 되내이는 것이다. 시를 소리내어 읽어가면서 반복하며 상기한다. 암송하면서 되새긴다. 핵심은 시를 반복해서 소리내어 읽고 떠올리는 것이다. ‘읊조린다는 표현이 조금 더 어울린다. 그래서 어떤 해석이 도출될 것인지, 시에 부합되는 해석을 끄집어 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물론 당연하다. 늘 과한 작업일 수도 있다. 다만, 나는 시가 해석대상이 아니라 감상하는 것으로서 그 싯구를 통해 시인이 말하는 자기 정황(저자의 자리)를 이해하는 통로라는 생각을 한다. 이런 시읽기를 통한 시해석은 일단 2차자료을 굳이 옆에 두고 대조할 필요가 적다는 점이 큰 유익이다. 당연히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시인이 남긴 그 시를 자기 세계로 억지로 끌어다가 매조지하는 경우다. 그리하여 시읽기 마지막은 시가 나에게 들려주는 것, 시가 나에게 읽히고 싶은 것, 시가 나를 읽고 남겨둔 그 소리를 귀담아 새겨두는 일이다. 시가 말할 때, 시 읽기는 끝난다. 그렇게 시인은 시를 통해 자신을 말하고, 시는 시로써 말을 남긴 시인을 나에게 보여준다. 히브리인들의 시쓰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시는 글자 배열이 아니었다. (그들은 물론 암기목적에 부응하도록 댓구법을 정형으로 사용했다. 글이 귀했으니 듣기에 편리해야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는 시인의 마음, 생각, , 이상을 글자로 그려낸 자화상이며 수채화다. 시의 분석은 시인의 마음을 따라가는 것일 때 마감되면 좋다. 어쟀든 오늘 이 시읽기는 나의 해석을 전제한다. 내가 서시에서 읽은 시인 윤동주의 마음, 생각이다. 이제 시작해 본다.

 

2.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20

그가 남긴 시 원본을 일단 보겠다. 이 시는 194111월에 쓰여졌다. 200자 원고지에 세로쓰기(아마도 연필이었을텐데)로 모두 89글자다.(제목과 기록 날짜는 제외) 시 제목은 따로 보이지 않는다. 싯구는 따로 구분하지 않고 여덟 줄을 연달아 썼다. 이어 한 줄 건너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마침표를 세 번 찍었으며, 쉼표를 한번 사용했다. 처음 썼던 글자를 수정한 경우도 한 번 있다. ‘나않테나안테. 물론 고친 것도 표기가 정확하지는 않다. 표준어라면 나한테가 맞을 것이다. 이후 필사자들은 수정해서 나에게로 쓴 경우가 많다. 여덟 번째 열 끝 단어 거러도 역시 오늘날 표기와 다르다. 대체로 걸어로 수정한다. 첫 열 우르러도 오늘날 표기는 우러러. 나는 수정없이 읽는다. 이 정도가 시 원본에서 대략 발견할 수 있는 특징들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글씨체다. 여느 원고도 그렇지만, 대체로 가지런하다. 오른쪽으로 조금 누운 듯한 모양새가 시종일관 유지된다. 아마도 시인이 시를 쓸 때 자세인 듯하다. 그는 한글자 한글자 천천히, 또박또박 써낸다. 그것이 습관이었던 것 같다. 글씨만으로 보자면 이 시는 뭉특하고 단아하다

 

3.

이제 시를 보자. 시는 모두 세 문장이다. 여덟 행까지가 두 문장이다. 마지막 행이 한 문장이다. 이제 각 문장을 읽히는 대로 적어보자. 전문적인 분석이 아니라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3-1 첫 째 문장.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이 문장에서 가장 눈여겨 읽어야 할 것은 두 번째 행(없기를,) 끝에 있는 쉼표. 나는 이 쉼표가 이 문장을 이해하는데 읽어서 아주 중요하고, 다양한 관점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이 시를 되새길 때, 이 쉼표에서 항상, 반드시 멈추면 좋을 것 같다. 이 쉼표를 고려하면 이 문장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읽게 된다.

(1)과거 회상:이 경우 이 쉼표는 문장을 전반절과 후반절로 나눌 수 있다. 쉼표 앞 문장은 상상하는 사색 문장이 된다. 자기 마음 속 말이며, 간직하고 살아왔던 고백이다. 이어 쉼표 뒷문장 나는 괴로워했다는 자기 회한과 아쉬움이 가득하다. 자기가 살아오는 시간내내 그는 부끄럼이 없기를희구했지만 실제로는 늘 그렇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보인다. 그는 심지어 잎새에 이른 바람에도괴로운 것이다. 이 때는 과거회고문장으로 읽힌다.

(2)현재 성찰:다른 한편, 나는 이 쉼표가 도치 구문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주어 나는과 서술어 괴로워했다사이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인에게 하늘을 우러러...’라는 괴로움이 지배하는 것이다. 자기가 살아가는 세계가 부끄럼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렇게 읽으면 이 문장은 현재가 된다.

 

이제 시인이 첫 문장에서 사용한 잎새에 이는 바람을 보자. 마치 계절어같다. ‘잎새라는 말 속에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 생동하는 느낌이 강하다. 바람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어린 잎이라지만 살랑살랑 부는 모습이 선명하다. 시인은 미세한 감촉을 발휘애서 관찰한다. 하지만, 그것은 시인이 괴로워하는 흔적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괴로워했는가? 만약 앞서 본대로, 현재를 성찰하는 것으로 읽는다면, 그는 지금 자신이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러움을 갖고 있다고 인정한다. 자기 현재가 그렇다. 하지만, 과거를 회고한다는 것으로 읽는다면, 그는 아직도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괴로움'을 자초하면서까지 자기 삶을 자기 고백에 부합하도록 견인하고 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그는 자기 의지를 선명하게 확인한다. 괴로움은 그런 흔적이다. 시인은 언제나 하늘을 향한 자기 시선을 간직하다가 미세한 바람에 살랑이는 잎새를 직시한다. 마침내 그 시선은 자기자신을 관조한다. 이런 시선의 이동은 시인이 자기가 살아온 삶, 앞으로 살아갈 삶을 하늘-잎새-자신에게로 초점화하여 그려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이 쉼표를 과거 회상으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3-2 둘째 문장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언뜻 읽으면, 두 문장처럼 보인다. 사실 한 문장이다. 두 번째 행 사랑해야지다음에 문장기호가 없다. 어색하게 접속사 그리고를 굳이 사용했다. 이렇게 하여 앞 뒤 구문은 서로 병렬 형태가 되었다. ‘A 그리고 B그렇다면 두 개는 같은 내용에 대한 나열일 가능성이 크다.

 

A.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B.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하지만, 실제로 읽어보면, 이 두 문장은 동일한 내용을 나열한 것같지가 않다. 이질적인 내용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A그리고B’는 시간의 연속, 이어짐일 수 있다. A가 먼저 일어난 일이고 B가 이어진 것이다. 그러니 A가 실현되지 않으면 B는 일어나지 않는다. A여야 B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그리고를 쓴 이유는 명확해진다. 그는 시간적으로, 사건적으로 언속적되는 표현을 원했다. 동시에 서로 다른 두 내용을 동일한 사건으로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제 A 문장부터 좀 더 읽어보자.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너무 서정적이어서 손대기가 머뭇해진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일단 앞문장 끝에 으로부터 보자. 이 표현은 어떤 방법이며, 수단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도대체 어떤 방법인가? 무엇을 상상하는 것인가? 혹시 시인이 유학을 떠나기 전, 용정 밤하늘에 펼쳐졌던 그 별들을 보며 괜한 감정이 솟아올랐던 것일까? 그럼 별을 노래한다는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일까? 정확히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실제로 노래를 한다는 것인지, 은유적인지. 알 수 없다. ‘을 이상화된 세계로 쉽게 내다보는 것도 썩 내키지 않는다. 시인에게 이 이상화된 대상이라면 이어지는 다른 모든 것도 다 비현실이 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 시 첫 문장과 견주어 본다면 조금 다른 느낌이 들지 모른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곧 하늘을 우러러라는 행동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첫 문장에서 하늘을 우러러가 빛이 가득한 낮을 연상하게 한다면, 별을 노래하는라는 표현에는 깊은 밤이 어울린다. 시를 되새기다 보면, 시의 리듬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시인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을 그려냈는지, 아니면 별을 노래하는마음을 보고 있는지 말이다. 그가 연상하는 것은 별인가’ ‘마음인가?’ 당연히 별을 보고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 대목은 별을노래하는 마음이라는 리듬으로 읽는 것이 좋다. 그랬을 경우, ‘별을노래하는 마음이 곧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다짐하던 그 고뇌와 이어질 것 같다. 시인에게는 낮과 밤 어느 시간에도 자기 삶을 관조하는 영역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가 괴로워했던 것도 새롭게 변주된다. 바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과 이어진다. 생각해보면 잎새가 살아나는 묘사라면, ‘죽어가는 것은 그 반대편에 있다. 따라서 잎새죽어가는 것은 삶의 시작이과 동시에 삶의 끝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좀 더 주목해보자. 오늘 내가 이 서시를 생각하게 된 동기이기도 하다. ‘죽어가는 것을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것이다. 시인이 모든 죽어가는 것을이라고 쓴 것을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이라고 필사하는 경우다. 단수와 복수라는 차이가 선명하다. 시인은 단수로 쓰고, 이후 필사자들 중 어떤 이들은 복수로 썼다. 우리말에서 단수와 복수의 차이가 그리 명쾌하지 않다는 것을 감안한다며, 그리 큰 문제랄 수는 없다. 나와 우리가 혼용되는 일은 흔하다 복수형 어미 도 사실은 그 앞에 전칭 단어들(. 모든, , 전부)이 있다면 사용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는 단수로 쓰는 것이 특별해 보인다. 시인은 그 앞에 이미 모든이라는 말을 썼다. 따라서 뒤에 이 있던 없던 전체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시인이 상상하는 것이 단수의 경우 조금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모든을 맨 앞에 씀으로써, 이 말은 죽어가는 것하나하나를 따로따로 대하는 시인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하나씩 모인 전체를 전제한다. 그저 모든 것이 아니다. ‘하나하나로 존재하다가 모든으로 모인 것들이었을지 모른다. 시인은 죽어가는 것하나하나를 보고 그것들이 한데 모여있는 것에 시선을 둔다. 이제 시인이 사랑한다는 말을 쓴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첫 문장, ‘괴로워한다와 대응했을 것이다. ‘사랑괴로움이다. 괴로워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는 죽어가는 것을 하나하나 자기 마음에 담아두고, 괴로워하며 사랑한다. 자신도 그 죽어가는 것에 포함되어 있으니 더욱 그렇다. 그는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을 괴로워한다. 그렇게 살아오고 살아가는 것이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는삶이었다. 시인은 지금 자신이 걸어온 길을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

 

다음으로 B문장이다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그리고에 이어지는 문장이다. 일단 그리고그리고 난 뒤라는 시간이어짐으로 읽는다는 것이 좋겠다고 앞에서 말했다. 그걸 가정하고 읽으면, ‘나한테 주어진 길은 다름 아닌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과 연동된다. 다시 말해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짐하고 분투하는 삶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그 삶은 자신이 만든 길, 자신이 해보고자 하는 길이 아니다. 여기서 은 전적으로 현실이다. 상징, 메티포로서 은 아닌 듯하다. 자신이 직접 살아온, 살아가야 할 삶 그 자체이다. 그는 지금 그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한다. 다짐이다. 결의이며, 다시 괴로워 할 것을 감당하겠다는 선언이다. 그는 걷고 걸을 것이다. 한걸음, 한걸음. 길을 걷는 시인이다. 그는 뛰거나 서두르거나, 다급해하지 않는다. 한글자 한글자로 쓰고 있는 시어는 그가 걸어가는 걸음을 투영한다. 자기 운명을 기꺼이 자기 걸음으로 재현한다. ‘~겠다라는 이 표현이야말로 괴로움사랑해야지라는 자기 결의를 극한까지 심화시킨다. 지금도 걸어왔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걸어가야겠다는 자기 고백이 여실히 묻어난다.

 

나는 이 시를 되뇌이면서 오늘, 첫 문장과 두 번째 문장이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새삼 주목해보고 있다. 첫문장이 회고라면, 두 번째 문장은 전망이다. 지난 날도 그렇게 살았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이제 시인은 고국을 떠나 타국으로 떠날 참이다. 고향 용정에서 보낸 하루하루, 낮과 밤에 그는 숱한 자기 결의와 고백, 다짐을 해왔다. 이제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세계로 나갈 것이다. 거기는 어쩌면 더욱 더 죽어가는 것으로 가득찬 세계일지도 모른다. 이제 그는 그 죽어가는 것을 괴로워하고, 사랑하기 위해, 운명처럼 주어진 을 걸어가겠다고 다짐한다. 상상해보면, 그는 지난 날에도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자신의 로써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할 것이다.

 

3-3 셋째 문장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인은 숨을 한번 고른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대한 자기 고민이 깊어지고, 자기 사랑이 더욱 짙어가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다. 그는 이 시를 쓰면서도 괴로워하는 회한과 사랑해야겠다는 다짐에 뒤섞인 자신을 보고 있다.

 

마침내 그는 마지막 문장을 쓴다. 나는 반복해서 읽는다. 걸으면서, 앉아서, 생각하면서 말없이 쉬지 않고 되새긴다. 그의 떨리는 손이 떠오른다. 깊은 호흡소리도 들린다. 창밖에 어둠이 내리고, 그는 시를 쓰고, 자기 길은 주어졌다. 그는 이제 앞서 써 두었던 싯구에서 두 단어를 다시 꺼낸다. ‘바람이다. 앞선 대목에서 마음과 이어졌었다. ’바람은 여린 생명과 맞닿았다. 시인에게 별과 바람은 자기 존재와 상관된 존재를 의미할 수 있다. 여리기만 한 생명,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자신 말이다. 별이 자신이라면, 바람은 생명을 어루만져주는 힘이다. ’별이 바람에라는 표현은 주어와 부사구가 어울리지 않는다. 서술어를 보면 명확하다.

스치운다’. ‘스친다를 현재 사역형같이 표현했다. ’~ㄴ다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동작이다. ’오늘 밤에라는 표현이 이 시제와 상응한다. ’~~’는 사역(다른 이에게 시키는 동작)이다. 하지만 묘하게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수동형같기도 하다. 동작이 주어에게 영향을 준다. 이 문장에서 주어는 별이이고 서술어는 스치운다이다. ‘별이 스치운다.’ 시키면서 영향을 받는 동작을 감안하면 이 문장은 두 요소가 섞여있다. 하나는 별이 스치게 하다다른 하나는 스침을 당하다’. 이제 부사구 바람에를 넣어 읽어보자. 사실, ‘바람이 별을 스친다’.라고 했다면 선명했을 것이다. 바람이 하늘에 떠있는 별 곁을 지나가고 있는 모습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묘사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는 되지 못했다. 시인은 바람이 별 옆을 스치게 하고 동시에 별은 바람이 스쳐감을 당한다는 의미를 창조했다. 이 표현은 저 첫 문장 잎새에 이는 바람에 대한 정확한 대구문장으로 읽을 수 있다. 잎새가 겪는 바람이 이 마지막 문장에도 나타난다. 동시에 주어진 길에서처럼 수동형이기도 하다. 그러니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는 바람이 별에게 부는 모습이기도 하고, 별이 바람에게 다가가는 모습이기도 하다. 무엇이 주체이고 무엇이 객체인지 구별하는 일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별이 바람에, 바람이 별에 일치되었기 때문이다. ‘이 자기가 관조하는 대상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자기 운명과 동일하게 되었다. 바람은 생명을 일깨우고, 자기존재를 각성시키면서 동시에 자기 운명을 안내하는 힘이 되어버렸다.

그것이 오늘밤에도그렇다. ‘~는 동일한 사건의 반복이다. 그가 지내온 평생에 늘 만났던 오늘밤마다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을 떠올리고, 아침을 기다리는 습속을 간직했다. 별을 보며 하늘을 보고, 바람을 보고 별을 떠올린다. 시인의 시점은 대체로 을 기준으로 아침과 낮으로 향한다. 밤은 현실이며 과거이다. 아침과 낮은 미래이며 과거이다. 시인은 밤이어도 상관없다. 그는 언제나 빛과 밝음의 세계를 내다보고 있으니 말이다. 그에게 가 그 길이다.

 

4.

이제 마지막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는 시인 윤동주가 자기 첫 번째 시집을 염두에 두고 이 시를 맨 마지막에 썼다는 것을 항상 상기한다. 서시(序詩)는 마지막에 쓰고 모든 시 앞에 두는 자기 고백이다. 시집을 시작하는 시. 이 시는 자기가 남겨놓을 ’ 19편에 대한 회고였으며, 전망이었던 것이다. 시인은 자기가 삶을 걸었던 를 모아 세계에 내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그 때 시인은 희망을 가지고 이 서시를 남겼다. 시인은 시가 남겨질 때마다 하늘을 향해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짐했었을 것이다. 그것은 비록 실패같았을지 모른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한 편 시가 태어날 때마다 미세한 바람에도 괴로워해야만 했다.

 

동시에 시인에게 시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을 담아 둔 자기 고백이다. 이제 자기 시는 죽어가는

이다. 시인은 그 죽어가는 시를 괴로움같이 사랑하겠다고 다짐한다. 그 뿐 아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시인의 길을 시와 함께 걸어가겠다고 한다. 한걸음, 한걸음씩 걸을 것이다. 그에게 시는 삶을 견인하는 지고한 힘이며, 토대이다. 그가 걸어온 길은 가볍지 않았고,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시로써어둠을 밝히려한다. 시인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어둔 밤에 빛나는 별을 보며 그 마음에서 시를 꺼낸다. 그 별에 바람이 스쳐가고 별이 바람을 스치우게 한다. 잎새에 그랬던 것처럼 별에도 파동이 일었을까? 아니 바람은 별로 인해 추동했을까? 시인이 별을노래하는 마음으로 남긴 시들은 이제 바람을 흔들어 잎새에 일게 하고 마침내 죽어가면서 죽어가는 삶을 일깨울 것이다. 그가 이듬해 시를 마음에 품고 몸 하나로 현해탄을 넘어 밤의 나라, 군국에 물들어있던 땅으로 고요하게 밀고 들어갔듯이 말이다.

 

오늘 나는 서시를 읽으며

죽어가는 시로써 죽음을 이겨냈던

시인 윤동주를 마음에 다시 품는다.

그는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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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래된 소설, <악당 임꺽정>을 꺼내 들었다. 사실 임꺽정에 대한 이야기는 벽초 홍명희의 작품이 최고일 것이다. 그의 장편작 <임꺽정>(10)은 소설의 구성 뿐만이 아니라 수려한 우리말의 복원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적 가치가 입증되었다. 무엇보다 이 소설 속 임꺽정은 권력의 정의로운 실천적 가치를 일깨우기에 충분하다. 어떤 분들의 평가처럼 실제와는 다를 수 있지만, 의적 임꺽정이라는 이미지는 벽초의 소설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2.

2000년 소설가 구효서는 재밌는 제목의 소설을 출간했다. 이름하여 <악당 임꺽정>. 소설은 임꺽정 이 그동안 철저하게 이미지화된 것을 탈색시켜 인간 그 자체로서 임꺽정의 이미지를 복원하겠다는 의지였다. 소설의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이렇게 밝혀둔다.

 

"옳고 그름이 세상을 어지럽게는 할 수 있을망정 사람의 마음까지는 마침내 속일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이 글을 쓰게 했다. 시비공론은 한때의 이런저런 사정에 따라 막힐 수는 있겠지만 하늘의 이치는 결코 면멸하지 않는 법. 현란한 시비는 반드시 후세를 기다려 정해지고 두절된 공론은 반드시 후세를 기다려 행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예로부터 간흉의 극악함이 세도를 잡고 살륙의 위엄을 빌려서 천하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충성되고 어진 자들을 대악으로 몰아 마침내 불측한 화를 빚어왔다.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해 비록 당장에는 감히 저항하지 못하나, 후세에 이르러서는 옮고 그름이 판가름나고 공평한 논의가 크게 일어나는 법이다.

섣부르게 속지 말라는 것이다. 앞날에 대한 허망한 꾐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이쪽의 것이든, 저쪽의 것이든, 기만적인 대의명분 따위에는 속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행악이 가능하게끔 비겁하게 굴지 말라는 것이다. 나의 불행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것이다."(악당 임꺽정 제2, 284)

 

임꺽정의 신복이었지만 변절하다시피해서 탈출하여 밀고자가 된 서림. 그의 입을 빌어 서술한 이 마지막 이 고백은 구구절절 임꺽정이 이룬, 아니면 벽초 홍명희에 의해 철저히 이미지화된 임꺽정에 대한 반론이며, 그에 대한 이미지 해체를 시도하는 작업에 무색하지 않다.

 

3.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작가 구효서가 의도한 바대로 임꺽정에 대한 외전을 정, 반의 관점에서 읽을 수 있는 영역을 확보한 셈이다. 따지고 보면 구효서의 소설은 임꺽정에 대한 문학적 위상의 균형을 맞췄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확보하면서 의적 임꺽정이 온전한 권력자가 아니라 자기 왕국을 꿈꿨던 악의적 야망을 감춘 악당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셈이다. 작가가 서림의 마지막 서술을 통해 들려준 이 말은 몇 번을 읽어도 구구절절 타당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소설의 마지막 서술이 제시하는 가장 큰 의의는 그것이 의적 임꺽정을 비트는 자리에서 발설되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교리적 정당성, 사회적 비판을 정당화하려는 글이라면 그것이 적용되어야 할 바람직한 맥락을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4.

작가는 의적 임꺽정에 대한 이미지 해체를 모색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난점은 바로 임꺽정에 대한 변형된 교리의 정당성이 아니라 그 확고하고 정당한 이야기가 정확하게 위치해야 할 삶의 맥락, 사회적 맥락에서 비켜나 있다는 것인 듯하다. 사실 홍명희가 그려낸 의적 임꺽정은 우리가 추구하는 의로운 권력자에 대한 비판적 저항자로서 이상형이 분명했기 때문에 이미 모든 이들에게 교리처럼 남아있다. 작가 구효서는 이 교리에 대해 의도적으로 재비판하여 '악당 임꺽정'으로 재탄생시켰다. 그것 역시 소설의 사회적 맥락을 반영했을 것이다. 한 인물에 대한 이 상반된 서술은 각자 실제 의와 악을 혼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을 정조준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교리화된 신념을 반영하는 바, 그것은 삶의 맥락과 사회적 자리를 벗어날 때 무기력해질 뿐만 아니라 삶을 짓밟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마치 구약성경에서 깊은 질문의 늪에 빠져 있는 욥을 향해, 온갖 정교한 교리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쏟아붓는 욥의 친구들의 말이 그 자체로는 하등의 문제가 없으나 그것이 욥의 실존을 파악하는 데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있기에 오히려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는 것과 흡사하다.


5.

결국 살아가는 모든 삶의 자리에서 우리가 정교한 교리와 정당하는 신념에 의해 쏟아내는 말과 글들은 인간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이끌어가는 맥락에 잘 놓여야 할 것 같다. 모든 옳은 말이 빛을 발하는 것은 그 말이 놓인 자리가 옳아야 한다. 언론가와 종교가와 정치가와 문학가라면 이 점에서 자신의 존재 역할을 제대로 찾아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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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저자의 경험담이자, 나의 어린 경험이며,

그 자신이 발견한 기쁨이며, 나의 어린 시절의 기쁨이기도 하다.


그림 저자는 글을 음악으로 만들었다.
그림 속 강물은 말이며, 음악이다.
나는 지금도 이 그림책을 음악처럼 듣고 있다.


돌이켜보면,

나는 말을 못할 때가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글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말과 모든 글은

이제 강물처럼 흘러가는 그림이 되어

나를 즐겁게 한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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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은둔의 역사 - 혼자인 시간을 살아가고 사랑하는 법
데이비드 빈센트 지음, 공경희 옮김 / 더퀘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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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낭만적 은둔의 역사』 .이 책을 읽다보면 혼자’와 ‘공동체’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삶일 때 ‘혼자’는 비로서 빛을 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낭만적 은둔의 역사』에서 ‘낭만'은 함께 있으면서도 홀로 은둔할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다. 
'혼자’가 남안이 되려면 공동체 속에서 자유로울 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은둔의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 안에서 ‘홀로 은둔할 자유'를 누리게 하는 그 공동체성’으로 수많은 '홀로'는 연결되어 
‘어울린다’ 

2.
어울리다는 것은 
하나 또 하나 
홀로 또 홀로 
하나 또 여럿 
홀로 또 다같이 

한 자리에 이리저리 흩어져도 
마치 하나인 듯 조화로운 상태이며 
떨어져 있어도 연결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어도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상태다. 

3.
생각, 마음, 행동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면서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걷거나 
앞서고 뒤서면서 적절한 거리를 두고 
즐겁게 노는 풍경이다.
그렇게 
단독자로 있으며, 유유상종한다. 
보이지 않아도
서로서로 상대에게 깊이 영향을 주고 받는다. 

4.
은둔한다는 것은 숨는 것이 아니라 따로 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은 당연히 그렇지만 
사람과 사물, 
사람과 동물이 더 잘 어울릴 때도 있다. 
가볍게 급히 산 옷이 내 몸에 잘 맞는 경우가 있고 
한적하게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나는 강아지, 고양이와도 그렇다. 
우연히 찍은 사진 한 장 속에 바다와 산과 사람이 절묘하게 자기 자리에서 서로에게 좋은 배경이 되어주는 경우도 그렇다. 
그것은 ‘환대’와 ‘배려’로 빚어내는 균형의 아름다움이다. 
홀로 빛나는 것은 사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자신이 빛나려면 다른 세계와 함께 ‘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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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인 고정희(1948-1991). 신학, 해방문학 시, 한국여성문화운동 등으로 활발히 활동하다 40대 마지막 나이에 지리산 등반 중 악천후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대중에게는 시인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의 생애에서 신학은 그 삶을 지탱한 토대였습니다. 그녀는 자기 신학을 문학/시로써 이 세계에 발현하기 위해 분투했습니다. 시를 통해 이 굴곡진 세계에서 신학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을 실현하기 위해 문학 운동을 선택하고 그것을 촉진시켰습니다. 그의 시는 어두운 세계를 균열시키는 데 작은 빛으로도 충분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기계 문명의 심화는 문학과 시의 경고를 들으면서도 그것을 극복한 힘이 인간에게 있다는 자신감으로 생각보다 가볍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세계는 기술의 발달하는 동안 인간이 건조해져 간다는 것에는 그리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시는 꿋꿋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내고 있습니다. 그는 요절했으나 시인으로서 그의 시는 여전히 이 어두운 시대 어디서든 자기 언어를 꿋꿋하게 잘 지켜 살아내고 있습니다.

 

2.

어느 날 불연듯 그의 시가 다시 살아난 것도 그 증거 중 하나입니다. 내가 참여하는 단체 카카오톡 나눔 방에 그의 시 한편이 올라왔습니다. 어느 분이 아침 모빌(모닝바이블)로 공유된 시편 125절을 읽다가 개인적인 감회가 컸다는 설명과 함께 그의 시 "눈물샘에 대한 몇 가지 고백"의 후반부를 공유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은 이렇습니다.

 

"<전략>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바람 부는 광장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어두운 골짜기를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서러운 강기슭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눈물샘을 모른다

 

반복되는 어구, '사랑하지 않으면'은 시인의 의도일 것입니다. 그는 '사랑으로만', 저 감춰져 있거나 드러내지 않으면 가까이 들여다볼 수 없는 인간의 눈물샘을 알아챌 수 있으리라 확신했던 것 같습니다. 


3.

기독교 신앙을 선택한 이들에게 시편은 참 특별한 내용입니다. 인간이 신을 향해 마음껏 탄원하고 그 느린 응답을 항의하기 때문입니다. 그 날 함께 읽고 암송하려했던 시편 125절은 이렇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한글개역개정>

 

이 시편의 구절을 읽는 순간 어느 분은 곧바로 시인 고정희 시를 자기 오랜 기억 속에서 현재로 소환

한 것입니다. 공감은 전이되어 곧이어 다른 한 분은 시인 박노해를 떠올렸습니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로 앞선 분의 마음에 화답해 주었습니다. 결국 아침 시편이 저녁 두 시인의 시들로 결론 내려졌습니다. 두 시인이 천착하는 시세계가 '눌림(가슴이 압박당하는)''탄식(숨막히는 상황)'으로 하루를 열고 닫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이 세계를 향해 저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렇게 신학이 문학으로 이어지는 결마무리가 좋습니다. 사실, 야훼 신앙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당연하고 적절한 결론이어야 한다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그런 점에서 고정희 시인은 신학에 발을 들인 문학도답게 신학이 인간현실에 공감하는 현실참여-실천문학에 닻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시의 언어로 강하게 웅변해야 한다는 신학의 책임을 성실하게 잘 감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사실, 저 고대의 시편을 통해 나는 함께 주목해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말 번역에 소개된 '안전한 지대'라는 표현입니다. 이 구절은 들으면 익숙한 구절이지만, 히브리 성경을 보자면 여러 번역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말 새번역 성경이 조금 결이 다른 번역을 선택한 이유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가련한 사람이 짓밟히고, 가난한 사람이 부르짖으니, 이제 내가 일어나서 그들이 '갈망하는 구원'을 베풀겠다."<새번역>

 

'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그들이 갈망하는 구원'으로 옮겼습니다. 이 두 번역은 모두 야훼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상상하도록 돕는 은유입니다.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는 곧 '그가 갈망하는 구원'과 한 의미단위(semantic unit) 안에 들어있습니다. 문학으로서 은유는 적절한 상상을 촉발할 때 의미를 심화해줍니다. 이 시편도 그런 은유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강조했습니다. 가슴이 막히고(눌림), 숨이 막히는(탄식) 이들은 필연적으로 구원을 갈망한다는 것을 이 고대 시인은 간파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적절한 구원은 그들이 보호받는 '안전한 지대'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둘은 긴밀합니다. 시인에게 야훼의 구원은 야훼가 '안전지대'를 확보해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야훼 자신이 안전한 피난처, 공간으로 실현되는 것을 상상하도록 자극합니다. 최근에 김현경이 주장한 '사람에게 장소를 확보해주는 것은 그가 환대받는다는 증거'(김현경 저,사람장소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도 이런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

 

4.

기독교가 엉망이 되어가는 현실에서 다시 새로운 기대를 갖기 위한 노력이 의미가 있을까?라는 자조적인 질문이 여전하지만, 나는 아직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이 희망을 위해 나는 신학이 자기 규범을 되돌아보고 이 세계와 유연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노력을 지난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나에게 있어서 신학은 문학으로써 현실에서 빛을 발하고, 신학의 상상은 문학 속 은유로서 이 세계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되새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계 설정은 사실 과장이 아닙니다. 마사 누스바움(Martha, C, Nussbaum, 1947~ 미국법철학자)은 정치와 법으로 통치되는 이 세계에서 '공감의 철학'이 갖는 의의를 문학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문학은 인간의 삶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러나 시민의 삶에 문학이 기여하는 가장 큰 공헌은, 종종 둔감하고 무딘 상상력을 가진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이나 사고나 감성 속에서나마,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애써 인정하도록 만드는 그 능력에 있다.”

 

민주적 시민과 서사적 상상력”,오늘의 문예비평2010. 11, 22-46중에서 45.(황은덕 역)

출처:Martha, C, Nussbaum, “Democratic Citizenship and the Narrative Imagination”, Year-Book National Society for the Study of Education, 2008/107(1), pp.143-157.

 

그러므로 문학은 (시와 소설의 경우) 인간이 인간으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가장 적합한 환대를

이끌어 내도록 공감하도록 안내하는 도구인 셈입니다. 그러니 신학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학의 얼마나 현실과 밀접하게 체화될 수 있는지가 관건입니다. 이 점을 일찍부터 간파한 고대 시인은 자신의 신학을 이 현실에서 문학으로 설명하기 위해 부단히 분투했습니다. 그래서 이 히브리 시편 시인은 철저하게 인간의 삶을 공감하는 신학적 문학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날 그런 삶을 유지해온 많은 시인들 중에서도 시인 고정희도 그 중 한 문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시인 고정희가 남긴 유고 시집에는 아주 극적인 시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 시 일부는 이렇습니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표제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라는 시입니다.

 

이 시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무덤'이며, '죽음'입니다. 시인에 따르면, '부재(不在)',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시인의 시선은 이 죽음너머 '탄생'에 닿아 있습니다. 죽음이 탄생으로 이어지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여백'입니다. 그것은 시인의 상상입니다. 여백은 '빈 공간', '비어있는 장소'입니다. '물러남'이며, '간격'이고, '벌어짐'이며, '이완'입니다. 하지만 시인이 무덤 앞에서 상상해낸 여백은 죽음을 탄생으로 견인하는 힘입니다. 이 문학이 생성하는 상상이 이 흔들리는 세계에서 우리가 견지해야 할 신학의 체현(體現)이라해도 좋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신학에 근거한 문학적 상상은 현실을 해석하는 하나의 나침반 같습니다. 해석의 방향이자, 안내라는 것입니다. 비록 삶의 모든 것은 손에 잡히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을지라도, 신앙의 유연함에 근거한 한 편의 시는 우리가 이 세계를 어느 방향으로 해석해야 하는지를 일러줄 수 있습니다.

 

6.

우리 시대는 전염병과 세계 정치의 불안정, 정의와 공의가 엉켜버린 시대에서 구원을 갈망하는 이들,

안전한 지대가 꼭 필요한 이들이 많습니다. 느닷없이 일어나는 일들, 예고없이 다가오는 일, 예측불가한 이야기들은 여전합니다. 나는 이 힘겹고, 무고한 싸움에 직면한 이들에게 '피난처인 야훼'를 상상해낼 힘을 제공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일은 사실 시인들의 시로, 소설가들의 소설로, 누구나 쓸 수 있는 아름다운 산문으로 잘 드러나기를 기대합니다. 신학은 신학에만 몰두한 이들에 의해 그 자체로 세계를 지탱할 위로와 권면의 힘을 스스로 소실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험곡같은 현실에서 '안전한 지대'로서 야훼의 따뜻한 위로가 삶을 진솔하게 대면하는 소설로 구현되기를 기대합니다. '구원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야훼 자신이 피난처'라는 사실을 한 편의 산문에 담기길 소망합니다. 물론 어느 것도 현실일 수 없고, 상상일 뿐이라고 정확하게 비판할 수 있지만, 나는 기대합니다. 신학은 이 불가항력같은 삶에도 여백이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문학의 상상을 통해 손에 잡히도록 글로 표현해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문학적 상상이야말로 우리 현실에 대응하는 '현실적 힘'이라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여전히 나는 신학이 우리가 함몰된 어떤 상황으로부터 우리에게 여백을 선물처럼 만들어준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학이 이 문학이라는 여백 안에 몸을 맡길 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자기 상상을 땅의 현실로 실현해낼 수 있다는 세속적 희망을 더 강력하게 옹호한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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