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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예수가 미소를 지으며 작업실 문으로 손을 뻗었다.

"대부분의 길은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아요. 당신을 찾기 위해서라면 어느 길이라도 가겠다는 뜻이죠."

-윌리엄 폴 영, <오두막,The Sheck >, 세계사, 2007/2009, 310쪽.


1

날씨는 맑다. 어느새 봄이 지나고 여름이 턱밑까지 올라왔다. 마른 장마가 무색하다. 서재로 들어오는 도로는 한참 동안 막혔다. 차선 두 개를 가로막고 공사가 한창이라는 것을 체증이 끝나는 지점에 와서야 알았다. 그나마 다행이다. 오랜 만에 들른 서재는 적막으로 가득하다.

2.

짐을 정리하고, 바닥을 닦고, 간단히 그릇을 씻어둔다. 비워둔 서재에 대한 나의 의례다. 잠시 앉아있다보니 어느 새 점심이다. 따로 준비할 것은 없다. 미리 가져 온 호밀 식빵(요즘 이런 이름 붙은 빵들이 많다)과 방금 내린 커피를 곁들였다. 습관처럼 노래를 흐르게 한다. 특별하지 않으면 김광석이 부른 노래 한 두 곡은 꼭 흐른다. 같은 가사, 곡조라도 그가 부르는 노래는 그답다. 당차다. 비장함, 슬픔마저도 옹골차다. '나의 노래'를 새겨듣는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이'는 비굴한 자기비하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노래'를 스스로 만들어 부르는 이만이 할 수 있는 선언이다. 화석같은 노래들인데도 들을 때마다 최초의 감성이 발화한다. 노래는 어디로 나를 데려갈지 모른다. 단정짓거나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 노래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다.


3.

노래가 거의 끝날 즈음에, 커피를 따뜻하게 한 번, 시원하게 한 번 번갈아 마신다. 김현

경의 사회인문학.『사람, 장소, 환대』(문학과 지성사, 2015/2020)를 마저 읽는다. 이번 달 독서나눔에서 다룰 책이다. 이야기 사이사이에 신앙고백같이 새겨둔 문장을 하나씩 꺼내 다시 읽는다. 제목으로 설정된 세 단어는 주제로 가는 징검다리들이라 할만하다. 사람은 인간과 다르고, 장소는 공간과 별개이며, 환대는 대접과 별다른 태도다. 환대없는 인간에게 이 세계는 그저 공간에 불과하다. 몸하나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이들을 받아주는 이 없다면, 이 세계는 암흑이다. ‘절대적 환대’라는 이상이 현실에 가까울수록 이 세계는 비로소 사람과 사람이 만나 어우러지는 ‘대동’이 될 것이다. 책을 덮었다. 여름의 문턱인지라 아지 해가 한참 남았다. 서재 밖으로 이어진 논길, 그 건너편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다. 잠시 몸을 일으켜 논둑길을 걷는다.


4.

논둑길을 걸으니 햇살이 평소와 달리 뭉특하다. 어느 새 논 가득 벼가 자라고 있다. 그 사이를 걸으니 마치 ‘숲’을 걷는 듯하다. 얼마 전 잠시 다녀온 어느 숲이 쉽게 떠오른다. 그 날 비가 내렸다. 비가 쏟아지고 난 다음 날, 숲은 온갖 향기로 가득하다. 빗물이 남아있는 숲 속길은 맑고 파란 하늘 아래서 목적없이 열린 세계다. 숲은 소리로 채워지고 바람도 살아난다 나뭇잎들은 바람이 부는 대로 소리를 바꿔가며 종알거린다.


5.

그 날 오름 몇 곳을 올랐다. 처음에는 가볍게 오를 생각이었다. 생각과 달리 비가 잔뜩 내리던 그 날, 고내봉에서 한참을 걸었다. 가벼운 길이었으나 무슨 이유인지 걸을수록 이러저리 얽히고 섥혔다. 높고 짙은 소나무 사이에 녹두빛 여린 잎들이 엉겨엉겨 살아가는 모습이 새롭다. 정상에서 멀리 내다보는 풍광은 막힘없이 시원하다. 비가 내렸지만, 바다와 산이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온다. 정상 표지석은 더 이상 올라갈 길이 없다는 안내자이다. 머물다가 다시 내려갈 길을 선택해야 한다. 나는 다시 돌아내려오기로 했다. 다행히 그 숲 끝까지 돌고돌아서 마침내 출발지점에 돌아왔다. 길은 어디나 이어져있었다. 산 아래 내려선 뒤에도 비는 여전하다. 그 빗 속에 저 숲은 살아있다. 숲을 사라지게 할 만한 온갖 불확정성이 난무하다해도 꿋꿋이 '숲답다.'



6.

숲을 걷다보면, 사람이 자기 머무는 곳에서 이유없이 환대받는 세계라는 생각이 가끔 든다. 그 날 비가 내렸고 오늘 맑은 햇살이 논 끝에 내린다. 이 세계가 건네는 어떤 환대같다. 


시간은 시나브로 여름으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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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리샤 폴라코 지음, 서애경 옮김 / 미래연아이세움 / 2001년 5월


1.

패트리사 폴라코의 어린 시절. 그녀는 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초등학교 5학년 즈음 그녀는 기적같이 글을 읽습니다.


2.

저자는 언어의 조기교육의 중요성이나

참고 기다리면 말문이 트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다르게 두 가지 사실이 씨앗처럼 들어있습니다.


첫째, 글을 깨우친다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향한 첫걸음입니다.

둘째,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책임이 따릅니다.


3.

주인공 트리샤는 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림을 잘 그립니다. 학교 가기는 늘 두렵습니다. 이 두려움 가득한 어린 아이를 위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꿀처럼 달콤한 글씨들을 보여줍니다. 폴커 선생님 역시 이 아이가 글이 아닌 그림에 탁월한 소질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 아이가 그림을 위해 글을 읽을 수 있도록 천천히 도와줍니다.


4.

아이는 5학년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권면이 무엇을 뜻하는지, 선생님이 보여준 헌신적인 노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5.

이 아이는 자라는 동안 그림과 글을 자기 삶에 가깝게 두었습니다. 결국 어린이 동화를 만드는 직업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막연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글을 읽어 새로운 삶을 경험하고, 그 쓰인 글을 삶으로 살아낼 수 있게 된 날을 결코 잊지 않으려고 자신을 도와준 선생님들을 위한 삶이기도 했습니다.


6.

좋은 선생님은 그를 통해 앞선 세계를 미리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들은 늘 자신은 허물이 크고, 부족하다고 말씀하기를 즐깁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보다 많은 노력과 수고를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7.

자기 세계를 새롭게 열어준 ‘좋은 선생님’을 만나고, 알고, 배우게 된 후생들은 그 앞선 분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자신의 세계에서 그 뜻을 실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분'이 계시는 것은 여러 행복한 일 중에서 소중한 자산입니다. 바라기는 '고맙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말한 뒤, 잠시 후 그의 이야기를 삶의 자리에서 아무 의미 없이 밀어내 버리는‘후생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8년 전, 오늘 ‘구약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명제를 남긴 선생님이 은퇴하셨습니다. 또 며칠 전, ‘대화는 따뜻하고 포근하게’라는 지침을 남겨준 선생님이 강단을 떠났습니다. 그 분들 뒤에서 잠깐 선생이라는 별칭을 갖고 살았던 나도 나의 앞선 선생님들이 남겨 준 이야기를 오늘 다시 마음에 간직해 둡니다. ‘인간을 위한 배려와 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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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이다. 하루 해가 뜨고 진다. 앉을 겨를 없이 쉼없이 움직인다. 마침내 일손을 놓는다. 마쳤다. 여전히 맑은 저녁이다. 아침보다는 볕이 뜨거워졌지만 바람은 선선하다. 걷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다. 조금 멀리 떨어진 전철역까지 걷는다. 이른 퇴근이라 역은 여유롭다. 

자리에 앉아 아침 그 책을 꺼낸다. 펼친다. 읽는다.

" 곤경에서 벗어나려면 그 벽에 창문을 낼 수 있는 내면의 힘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의미의 길을 세우고, 존재 이유를 만들어내고, 즉흥적이든 혹은 지속적이든 흥분을 만들어내고, 존재감을 되살리는 일이다. 그 결과는 때로 오래 걷기를 통해 자신 앞에 열린 길과 관계된다."
(221쪽) -길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

가만히 이 글을 보고 있으니 
광화문에서 부산역까지 길게 걸었던 
그 때 그 길이 스르륵 열린다. 










길 끝에는 '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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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역을 지나자 예상대로 맑은 하늘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다비드 르 브르동의 <<느리게 걷는 즐거움>>(글항아리, 2014/2020)이다. 아무데나 펼쳐 읽는다. 앉아있어도 걷는 기분이다.햇살도 촣다.

아침 로스팅 첫 원두는 Colombia D.caf이다. 다크하지만 순수한 원두다. 불꽃 속에서 변화하는 콩을 향과 색으로 본다.

익어가는 동안, 타인의 서재를 찾아본다. 유익한 글들이 많다. 오늘 특히 독일 사회주의 신약성서학자 G.타이센의 글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비아,2019)에 대한 포스팅을 잠시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히브리성서(TNK)의 코헬렛(전도서) 한 구절이 소개되었다.전도서 9장7절이다. 히브리본문도 곁들여 한번 다시 읽어본다.

"지금은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을 좋게 보아 주시니, 너는 가서 즐거이 음식을 먹고, 기쁜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셔라."(표준새번역개정)
오늘 하루 기분 좋은 날일듯 하다.

전도서는 참 좋은 책이고 나도 참 좋아한다.
자크 엘룰의 <<존재의 이유>>도 조금씩 같이 읽으면 더욱 좋다.

덧.그 포스팅 글에 이 구절이 잠언7:9로 소개되어있어서 확인도 해 볼 겸 덕분에 한번 더 읽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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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에서 소리가 난다』(김장성 글/정지혜 그림, 사계절, 2007년 06월 18일)


1.

여유로운 오후, 맑았던 아침날씨가 오후 되니 흐릿해진다. 햇살이 사라지면 신기하게 사방이 조금 무거워진다. ‘사라진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기도 하다. 가볍게 시간을 보내다가 무심코 그림책 한 권을 떠올린다. 출판된 지 10년도 훨씬 넘었다. 흐린 오후는 시원한 커피와 함께 과거를 추억하기 좋은 시간이기도 하다. 책을 펼칠 필요는 없다. 읽어둔 책이라면 그저 떠오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어떤 장면, 문장을 되새겨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마지막 그림을 자주 기억한다.

이 그림책은 골목을 따라 흐르는 소리를 찾아다닌다. 그 소리 뒤로 조금 허전한 눈빛이 뒤따른다. 이 허전함에는 이유가 있다. 골목에 가득 찼던 그 ‘소리’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골목에 대한 작가의 애틋함이 깊다. 물론 그 소리를 개발비용으로 기꺼이 지불한 건 어른들이라는 아쉬움도 크다.

어떤 소리든지 그것은 ‘살아있음’의 증거다. 소리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것들이 내뿜는 생존증명이다. 소리로써 슬픔과 즐거움이 드러난다. 아우성과 탄식, 환희와 기쁨도 극대화된다. 무엇보다 소리에는 ‘눈빛’이 담겨있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는 어떤 눈빛이 함께 있다. 소리와 눈빛이 공존하는 세계, 거기가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이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곳은 골목이다. 


2.

그림책에 담긴 ‘소리’를 떠올리다보니, 간단한 영화 한편도 생각난다. 2009년 개봉 독립영화「워낭소리」다. 구차한 소환일 수도 있으나 이즈음에 한번쯤 봐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 영화는 이 세계를 살아내는데 적절한 방법, 즉 ‘공감(empathy)’이며, ‘공존(co-exist)’을 일깨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소리’와 ‘눈빛’이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도록 돕는다. 그것은 ‘나와 너, 나와 그것, 너와 그것, 나-너-그것’ 사이의 연대다.













이충렬감독, 다큐멘터리(78분), 2009-01-15개봉


2-1 소리, 소리들

영화 ‘워낭소리’는 소리가 중심이다. 소리는 영화 속 인물들이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다. 영화를 보는 이는 자신도 모르게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소리를 따라가면,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한 마리의 소가 있다.


영화 속 소리는 서로 다르다. 그에게서는 그 소리만 난다. 할아버지의 소리와 할머니의 소리는 다르다. 노부부의 소리와 워낭소리도 확연히 구별된다. 할아버지의 소리는 낮고, 자기를 향해 구부러진 소리다. 들릴 듯 말듯하다. 자칫 왜곡되기 쉽다. 소리의 양은 너무 적어서 상대방에게 겨우 전달될 정도다. 그러니 자칫 이기적인 소리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그는 할 소리만 하고, 하지 말아야겠다는 마음먹으면 아예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소리는 종종 끄집어내자마자 바람 속으로 사라진다. 그 때마다 영화 속에서 그의 존재감도 가물가물하다. 이 할아버지 소리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때가 있다. 워낭소리와 소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그 순간이다.


할머니의 소리는 어떤가. 할머니의 소리는 높고, 꽹과리 치듯 요란하다. 말에 담긴 단어 수는 할아버지의 것에 비할 데 없이 많다. 음색은 얼음장 갈라지듯 얇다. ‘쩡’하고 날카롭게 갈라져 그 파편이 사방에 꽂힌다. 할머니의 소리는 먼저 상대방을 겨냥한다. 그리고 이내 자신을 향한다. 자기 삶에 대한 이유 없는 한탄이 끼어든다. 까닭 없이 상대에 대한 한이 서려있다. 동음반복일 때가 많다. 그 이유인지 몰라도 그 말들은 상대방에게 가닿지 못한다. 할머니 주위를 빙빙 돌고만 있다. 소리는 할머니를 벗어나지 못하고, 할머니는 소리를 놓아주지 못한다. 할머니에게서 떠났다 싶은 말도 무슨 메아리처럼 이내 다시 돌아온다.


소의 소리는 또 다르다. 소는 자기 소리는 물론이고 또 다른 소리를 가지고 있다. 태생과는 무관한 인위적인 소리다. 워낭소리다. 아이러니지만, 소는 자기 울음소리로는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못한다. 그저 ‘워낭소리’만이 존재감의 근거다. 이렇듯 소의 존재감은 인위적이다. 피동적이다. 그 소리에 반응하는 자가 있을 때만 비로소 존재의의를 갖는다. 영화에서 소의 워낭에 반응하는 이는 유일하다. 할아버지다. 할아버지 손길이 아니면 잠시도 자신을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음식은 물론이고, 자기 거처에 안전하게 되돌아올 수도 없다. 설령 할아버지 도움 없이 집으로 돌아온다 해도(할아버지가 만취되었을 때 소가 집을 찾아왔다는 이야기)안정된 쉼을 취할 수는 없다. 소는 자기 존재를 스스로 드러낼 수 없다.


2-2 관계, 관계들


이 소리들은 서로 연관되어있다. 세 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 할아버지와 할머니, 둘째, 할아버지와 소, 마지막으로 할머니와 소의 관계다.


첫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마치 기름과 물과 같다. 두 소리는 한 집에서 울리지만 거의 일방적으로 그친다. 대체로 할머니는 소리를 내고, 할아버지는 반응하지 않는다. 아예 흘려버린다.(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 할아버지는 그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 아니다. 듣지 않은 척 할 뿐이다. 할아버지는 다른 소리를 더 잘 듣고 싶기 때문이다. 두 소리를 모두 듣기보다 자신이 더 기울여야 할 그 소리를 선택한 것뿐이다.


둘째, 할아버지와 소는 할아버지가 적극이다. 할아버지는 소의 ‘모든 소리’에 응답한다. 소도 그러할까? 짐작컨대 그러할 것이다. 소는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다. 특이한 것이 있다. 할아버지는 어떤 경우에도 소에게 자기 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그는 다만 소를 위해 불편한 자기무릎을 꿇은 채 꼴을 벤다. 소의 먹을거리를 위해서라면 농약도 치지 않고 직접 잡초를 제거한다. 그는 말을 하기보다 그 말을 자기 행동으로 드러낸다. 그는 소를 위해 모든 행동을 한다. 그는 사람들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침묵으로 일관한다. 마치 수행자답다. 그의 침묵 속에 소는 그의 소리를 듣는다.


끝으로, 할머니와 소는 무관심이다. 할머니에게 소의 소리는 없는 소리다. 무의미하다. 만약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자기 존재, 자기 삶을 더욱 핍절하게 만들어버린 원인일 뿐이다. 그녀에게 소의 소리는 마른하늘에 벼락 치는 것만큼이나 섬뜩한 소음일 뿐이다. 소리가 커질수록 할머니의 고통도 깊어진다.


소의 자리에서 보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대척점이다. 소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이에서 보이지 않게 소리를 전달하는 매개자다. 그렇게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잇대어 있고,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닿아있다. 워낭소리가 들릴 때마다. 이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어느새 드러나지 않았던 눈빛이 보인다.


3.눈빛

눈빛은 존재들이 보내는 메시지다. 영화 속 세 존재는 눈빛을 보여준다. 그 눈빛은 두 종류이다. 애틋함과 애처로움이다. 애틋함은 사랑하는 감정이고, 애처로움은 질투하는 감정이다. 애틋함은 소와 할아버지가, 애처로움은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소에게 보내는 눈빛이다. 

눈빛은 관계를 말한다. 이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져’ 있음을 의미한다. 상호 의미

있음이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 유대종교철학자)의 견해를 따른다면 애틋함은 ‘나와 너’의 관계에서 일어나고, 애처로움은 ‘나-그것’의 관계를 암시한다과 할 수 있다. 소와 할아버지는 서로 교감한다. 서로는 서로에게 의미 있다. 소와 할머니의 관계는 그렇지 못하다. 할머니는 소를 하나의 사물로 대한다. 그것은 가축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소와 할아버지를 동시에 바라보는 할머니는 그 두 존재가 자신에게 애처로울 뿐이다.


영화 첫 장면은 계단을 함께 오르는 노부부의 모습이다. 말없이 오르다 먼저 말을 꺼내는 이가 있다. 할머니다. 나는 생각해 본다. 할머니는 홀로 걷는 할아버지를 보면 마음 깊이 애틋함을 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소와 함께 있을 때, 할머니 눈에 할아버지는 그저 애처로운 상대일 뿐이다. 소가 사라지고 나면 할머니의 본래 마음은 ‘애틋함’으로 되돌아온다. 사람들은 두 사람 사이에 다른 어떤 것이 끼어들기를 원치 않을 때가 있다. 눈빛은 그것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드러낸다.


이 영화에서 눈빛은 사람이나 가축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카메라 역시 또 다른 눈빛이다. 카메라는 감독의 눈빛을 대변한다. 감독의 눈빛은 어떠한가? 그는 이 노부부와 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영화를 추억해보니, 감독의 눈빛은 자주 할머니를 응시하고 있었다. 카메라는 ‘워낭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사실은 더 자주, 눈을 들어 ‘할머니’를 주목한다. 카메라는 할머니의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한다. 그리고 그 눈을 직시한다. 할머니는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경우가 많다. 관객을 소리로 안내하는 동안 카메라는 할머니 얼굴을 비춘다. 영화에서 할머니는 자주 카메라에 노출된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할아버지의 눈빛보다도 할머니의 얼굴과 그 눈빛을 더 잘 기억한다. 아마도 카메라의 눈빛이 강렬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카메라가 할머니를 응시한 이유가 궁금하다.


할머니는 소의 존재와 눈빛을 수용하지 않는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할머니는 소의 존재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것은 할아버지를 향한 소와 자신의 동병상련을 암시한다. ‘주인을 잘못 만난 악연?’ 이 지점에서 영화는 단지 의미가 확산된다. 서로 물려있는 관계. 고착되지 않고, 일방적이지 않고, 틀에 박힌 방향이 아닌 말 그대로 상호 그물망이 되는 그런 관계인 것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소는 어떤 한 방향으로 그 관계가 규정되지 않는다. 할아버지와 소가 긴밀한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카메라의 눈빛을 통해 나는 할머니와 소가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실상은 함께 걷고 있다. 그래서 소와 노부부는 카메라의 시선에 의해 한 자리에 함께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4.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관계, 사람과 사물 사이 관계는 눈빛, 시선으로 극화될 때가 많다. 대면해서, 표정을 보며, 눈빛을 감지하면서 관계는 깊어진다. 기계를 통해 들리는 말과 소리를 넘어 말 그 자체, 소리를 들음으로써 우리는 관계의 정도를 가늠한다. 그 소리에 실린 눈빛으로써 관계의 질적 깊이를 확인한다.


아쉽지만, 소리가 사라진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끝이 언제일지도 모른다. 비대면이 자연스럽고, 거리를 유지하는 일은 불문율이다. 얼굴을 볼 수는 있지만, 눈빛을 감지하기는 쉽지 않다. 소리는 들리지만, 눈빛을 가까이 보기는 어려운 시간이다. 그것이 자연스럽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자기도 모르는 ‘바람’이 휘돌아 감는다. 그 바람으로써 이 세계는 생존할 이유를 찾는다. 바람을 타고 들리는 소리, 그 소리에 실려 오는 눈빛이 선명할 때, 우리는 공동체다운 연대감을 공고히 만들어갈 수 있다. 배제를 넘어 포용으로, 홀로 있되 함께 있는 그 따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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