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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권력 관계


이 글이 장애인을 타자화하고 희생자화하는 데 일조하지 않을까, 그렇게 읽히지는 않을까 매우 두렵다. 며칠 전 나는 휠체어에 누워서 이동해야 하는 뇌성마비에다가 지체 장애를 가진 중증 장애인이자 무학으로 한글을 모르는 이들을 상대로 3회에 걸쳐 여성학 강의를 했다. 미국인 중에서, 남성 중에서, 비장애인 중에서, 이성애자 중에서도 문맹이 있을 수 있고, 실제로 많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문자를 모른다는 것이 장애인이 겪어야 할 상식적인 현실이거나 운명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 대상이므로 그날 강의에서 나는 일단 칠판에 필기를 할 수 없었다. 시청각 교재가 나을 것 같아, 낙태 관련 영화를 보여주었는데 이번에는 비디오 자막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이기 전에 남성이거나 여성이어야 하는 한국 같은 철저한 성별 사회에서 장애인은 무성적 존재, 즉 젠더 이전의 비인간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장애인의 현실에서 생물학적 성별인 섹스와 사회문화적 성별인 젠더 개념에 대한 나의 설명은 중증 장애인인 그들의 삶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나는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성활동이 남성 성기 중심적이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강사로서 나는 비참했다. 남성 장애인은 남성이라기보다는 장애인이었고, 기본적으로 기존의 섹슈얼리티를 실천할 몸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웅동체인 양성구유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은 양성으로 구분할 수 없다, 자웅동체는 하등동물, 자웅이체는 고등동물로 배웠던 고등학교 생물 수업은 자연과학에 남성중심주의가 반영된 왜곡된 지식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들이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는 점점 할 수 있는 말을 찾기 어려웠다. 나의 이 우스꽝스러운 점입가경의 절정은, “즐거운 금요일 주말 밤이죠”라는 수업 끝 인사였다. 집밖으로 이동이 정치적 투쟁인 그들에게는 매일매일이 주말인 것을 ….

나의 여성주의를 그들에게 전달하기 힘들었던 것은, 페미니즘이든 마르크스주의든 자유주의든 이론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의 결과이다. 하지만 내게는 이 문제보다 더 중요한 깨달음이 있었다. 물론 이 깨달음조차도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주체인 비장애인이 자기 성찰과 인식의 확장을 위해, 타자인 장애인의 삶을 활용, 동원하는 또다른 비장애인의 권력일지 모른다. 지배와 피지배는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같은 언어를 공유할 때만 가능하다. 모든 권력의 작동과 지속은, 지배자의 언어와 논리를 피지배자에게 강요하고 피지배자는 이를 수용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애인 시설 ‘정립회관’은 정립(正立), ‘바로’ 서기는 비장애인 중심의 담론이다. 서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은 누구의 논리인가.

피지배자가 지배자의 언어 배우기를 거부하면, 이때 당황하는 사람은 지배자이고 지배 논리의 관철은 불가능하게 된다. 다른 강의에서 수강생들은 5분마다 웃음을 터뜨리고 내게 열렬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나는 자신감 넘치는 강사였다. 그런 반응에 익숙해 있던 내게 이들의 ‘무표정’한 얼굴은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곧 그들이 나의 말하기에 열정적으로 반응하는 뛰어난 청자이자 저항 세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반응이 없는 것이 아니라, 뇌성마비 상태인 그들의 몸이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그 언어를 내가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소통되지 않는 상황의 답답함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정의하기 힘든 엄청난 힘의 분출을, 폭발하는 자의식을, 격렬한 지적 호기심을 느꼈고 몹시 당황했다. 문맹은 나였다. 그들은 비장애인의 언어와는 다른 방식의 언어로 나와 소통하고자 했지만, 나는 장애인의 언어를 읽을 수 없는 문맹이었다. 그들의 언어와 나의 언어 중 나의 언어가 소통의 기준이 되는 언어, 우월한 언어라는 인식은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 편승한 무임승차 행위일 뿐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한겨레 2004.02.04(수)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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