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금요일) 낮에 일이 있어서 문학과지성사에 들렀는데, 마침 [테러 시대의 철학]을 한 권 줘서(공짜밝히기는 ... -_-;;;) 조금 읽어봤다. 생각대로 번역이 괜찮더군. 아직 책을 못본 분들을 위해 한 대목을 맛보기로 인용해 보면(저작권 시비에 말려들지는 않겠지???) ...

 

보라도리: 9.11은 대사건major event이라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우리 생애에서 목도하게 될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 가운데 하나라는 인상을 말이죠. 세계대전을 경험해보지 못한 우리에게는 특히 그렇습니다. 그렇죠?

데리다: Le 11 septembre[이하 9.11]라고, 혹은 우리가 두 언어로 말하는 데 동의한 이상, "september 11"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나중에 우리는 이 같은 언어의 문제로 되돌아와야 할 겁니다. 또한 더 이상 아무것도 없이 딱 날짜만을 말하는 이러한 명명 행위의 문제로도 되돌아와야 할 거구요--당신은 '9.11'이라 말하면서 이미 인용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아닌가요? 이에 대해 제가 뭔가를 말하도록 권유하려고 당신은 지금까지 5주 동안 우리의 공적 공간과 사생활을 점령하고 있는 어떤 날짜 혹은 날짜 기입을 마치 따옴표 안에서인 듯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프랑스 숙어로 말하자면, 뭔가가 날짜를 만듭니다fait date. "날짜를 만들다, 획기적 사건이 되다", 이는 늘 두드러지게 각인되는 사건, 유일무이한 사건, 여기 식으로 말해, "전례 없는" 사건으로 느껴지는--외견상 직접적으로는 그런 사건으로 [인식된다기보다는] 최소한 느껴지는--무언가에 의해 가해진porte 일격이며, 이것이 남긴 효력portee 자체입니다.

물론 저는 "외견상 직접적"이라 말했습니다. 이 '느낌'이란 게 보기보다 덜 자생적이거든요. '느낌'이란 대부분 조종된 것이며, 짜맞춰진 건 아닐지라도 구성된 것, 어쨌든 경이적인 기술-사회-정치적 기계로 매개된 것, 매체화된 것입니다. 하여간 "획기적 사건이 된다는 것"은 '뭔가'가, 아직 어떻게 정체를 부여하고 규정하고 인지하고 분석해야 할지 알 수는 없지만 이제부터 망각할 수 없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뭔가'가, 보편력calandrier universel의 공용 문서고에 남게 될 지워질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말입니다. 물론 이는 가정상의 보편력인데, 왜냐하면 우리에겐 가정과 전제들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시작에서부터 강조하고 싶군요. 이러한 가정과 전제는 유치하고 독단적인 전략이거나, 아니면 심사숙고되고 조직되고 계산된 전략이거나, 그도 아니면 둘 다일 겁니다. 왜냐하면 이 날짜를 가리키는 색인, 날짜만을 부르는 수식 없는 벌거벗은 행위, 극소적 지시사, 이것이 겨냥하는 극소주의적 표적, 이는 또한 뭔가 다른 것을 표시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뭘까요? 그건 바로, 방금 일어난 이 '것', 이 가정상의 '사건'을 어떻게든 달리 명명할 수 있는 개념이나 의미가 없다는 사실, 바로 그겁니다. 가령, '국제 테러리즘'이라는 행위--우리는 이 문제로 다시 돌아올 겁니다--, 이는 우리가 말해보려는 어떤 것의 독특함을 파악케 하기에는 결코 엄밀하고 만족스러운 개념이 아닙니다. 뭔가가 일어났습니다. 아무도 그것이 도래하는 걸 보지 못했다고 느끼지만, 이 '것'은 특정한 귀결들을 부인할 수 없도록 펼쳐냅니다. 그러나 이것 자체, 이 '사건'의 장소와 의미는 여전히 형언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마치 개념 없는 직관처럼, 지평에 아무런 일반성을 지니지 않는, 심지어는 어떠한 지평도 수반하지 않는 유일무이함처럼, 이것은 언어의 범위를 벗어납니다. 언어는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게 되고, 결국 어떤 날짜를 기계적으로 발음하는 것으로, 이 날짜를 끝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한정해버립니다. 일종의 제의적 주문처럼, 이와 동시에 축귀의 시처럼, 저널리스트적 연도(連禱)나 자신이 뭘 말하는지 모르고 있음을 자백하는 수사적 상투어처럼 말이죠.

사람들은 9.11, 9.11, 9.11이라고 말하거나 명명하면서도 그들 자신이 무엇을 말하거나 명명하고 있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 호명이 간결한 건(9.11, 9.11) 단지 경제적 필요나 수사적 필요 때문만은 아닙니다. 환유--어떤 이름, 어떤 숫자--의 전보문은 사람들이 [그 사건이 무엇인지] 알아보거나 재인하지 못한다는 것, 심지어는 인지하지도 못한다는 것, 아직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 스스로가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재인지함으로써 규정 불가능한 어떤 것을 털어놓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계산되었든 아니든, 잘 계산되었든 아니든) 9.11,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던 일이 가져온 최초의 효과, 논란의 여지 없는 최초의 효과입니다. 즉 사람들은 그것을 반복합니다, 그것을 반복해야 합니다, 또한 이런 식으로 명명하고 있는 것이 무언지를 아주 잘 알지는 못하기에 오히려 더더욱 그것을 반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단번에 두 번의 푸닥거리를 하기나 하려는 듯, 곧 한편으로는 '사물' 자체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이나 공포를, 주술적으로 몰아내기 위해서(반복은 늘 정신적 외상traumatisme을 중화시키고 무감각하게 하고 멀어지게 함으로써 [우리를] 보호해주는 효과를 낳으니까요. 텔레비전 이미지의 반복도 마찬가지 경우인데, 이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말하기로 하죠), 다른 한편으로는 문제의 그 사물을 적절한 방식으로 명명하고 규정하고 사유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을, 단순히 날짜를 지시하는 것 이상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9.11, 뭔가 끔찍한 것이 일어났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을 가능한 한 이 같은 언어 행위 및 진술 행위 가까이서 부인하기 위해. 실상 우리가 폭력에 대해 아무리 분노한다 한들, 다른 모든 분과 더불어 저 역시 그렇듯, 숱한 사망자에 대해 진심으로 비탄해 마지않는다 한들, 문제가 되는 것이 결국 이런 거라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저는 나중에 이 문제로 되돌아올 겁니다. 당분간 우리는 다만 그것에 대해 뭔가 말할 준비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3주 동안 뉴욕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의 사실은 제가 9월 11일 날 머물렀던 중국에서, 그 다음 9월 22일 가 있었던 프랑크푸르트에서도 이미 마찬가지였습니다) 늘 약간은 맹목적으로 이 날짜에 준거하지 않고서, 이러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서, 아무 것으로나 말을 시작한다는 건 단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금지되어 있다고, 당신에겐 그럴 권리가 없다고, 이미 사람들은 느끼고 있으며 또한 당신에게도 그렇게 느끼도록 만듭니다. 특히 공개석상에서 말이죠. 저는 어김없이 이 명령에 따릅니다.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또한 어떤 의미에선 당신과의 이 우애로운 인터뷰에 참여함으로써 저는 또다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늘 충격과 가장 충심 어린 연민을 넘어, 9.11, 여기 맨해튼의 코앞에 있고 워싱턴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이제 막 일어난 일에 대해, 일어난 듯 보이는 일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기를, 그리고 "사유하기"를 호소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이름을 붙이고 날짜를 기입하는 이 같은 언어 현상을, (수사적이면서도 주술적이고 또한 시적인) 이 반복 강박을 신중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고 늘 믿고 있습니다. 이 강박이 무엇을 의미하고 나타내고traduit 혹은 누설하는지trahir[이건 "기만하는지"나 "왜곡하는지"로 번역하는 게 낫지 않을까?---인용자]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는 성급한 사람들이 그렇게 믿게 하고 싶어하듯 언어 속에 빠져들어 감금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이는 바로 언어 너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해보기 위해서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끝없이, 그리고 뭘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9.11, 9.11, 9.11, 9.11"이라 반복하도록 부추기는지를, 언어와 개념이 스스로의 한계를 발견하게 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이해해보기 위해서입니다.

 

  이른바 사건이 가져온 이와 같은 일차적 효과에 대한 사유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좀더 알려고 해야 합니다. 또한 여유를 가지고서 자유롭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말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결국 아직 알지 못하는데도, 그리고 당신이 부르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는데도, '9.11' '9.11'이라 명명하라는, 반복하라는, 또다시 명명하라는, 그 자체 위협적인 이러한 명령. 도대체 어디서 이러한 명령이 우리에게 도래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명령에 강제될까요? 누가 혹은 무엇이 우리에게 이 위협적 지시를 내렸을까요?(다른 사람들은 이미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이는 테러리스트가 명령한 건 아니더라도 그 자체가 테러를 가하는[공포에 몰아넣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당신 말에 동의합니다. 즉 의심의 여지없이 이 '것', '9.11'은 "우리에게 대사건major event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이 경우 인상이란 뭘까요? 사건이란 또 무엇입니까? 특히 '대사건'이란 무엇입니까?

당신의 말을 그대로 받아서 저는 하나 이상의 주의 사항을 강조하려 합니다. 물론 경험주의를 넘어서기를 겨냥하면서도 저는 이를 외견상 '경험주의적' 스타일로 수행할 겁니다.  분명 18세기 경험주의자라면 문자 그대로 이렇게 말하겠죠. 거기 어떤 '인상'이 있었노라고, 그리고 이는 당신이 영어로--이는 우연이 아닙니다--'대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이 준 인상이라고. 저는 영어를 강조했는데, 물론 이는 영어가 당신의 언어도 저의 언어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기 뉴욕에서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영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반복하라는] 명령이 무엇보다도 영어가 지배하고 있는 곳에서 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단지 미국의 거의 두 세기를 거치는 동안--정확히 말해 1812년 이래로--처음으로 제 국토에서 표적이 되고 습격당하고 침범당했다 해서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스스로가 이 폭력의 표적이 되었다고 느끼는 세계 질서가 대부분 앵글로-아메리카 고유어idiome[이런 경우에는 "방언"이라고 번역해도 좋을 것 같다-인용자]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계 질서에서 이 고유어는, 세계 무대를 지배하는 정치적 담론과, 국제법, 외교 관례, 미디어, 그리고 가장 거대한 기술과학적, 자본주의적, 군사적 권력과 불가분하게 연계되어 있죠. 그리고 지금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헤게모니가 지닌 여전히 수수께끼같으면서도 결정적인critical 본질입니다. 결정적인''이라는 말을 저는 '결정하는' '잠재적으로 결정하는' '결정을 내리는'의 의미로 사용하는 동시에, '위기에 처한'이라는 뜻으로도 사용합니다.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더 공격에 노출되어 있으며 위협받고 있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이 '인상'이 정당하든 아니든, 이 '인상' 자체가 하나의 사건입니다. 바로 이 점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확실히 분화된 방식으로 고유하게 세계적인 효과일 때는 특히 그렇습니다. '인상'은, 그것을 숙고하고 소통시키고 '세계화'한, 뿐만 아니라 이와 동시에 그것을 우선적으로 형성하고 산출하고 가능케 한 일체의 정서와 해석 및 수사법들과 떼어낼 수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인상'은 그것을 산출한 "바로 그 사물 혹은 사태"와 닮게 되죠. 이른바  '사태'가 '인상'으로, 따라서 사건 자체가 '인상'으로 환원될 순 없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건은 (일어난 혹은 도래한) '사태' 자체와, 이른바 '사태' 자체가 부여하고 남겨두고 만들어낸 (그 자체 '자생적'이면서도 '조종된') 인상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인상이 'informee[형식을 부여받는다/정보화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

 

좀더 인용했으면 좋겠지만, 타자치기 싫어서(;;;), 사실은 저작권법에 저촉될까 두려워서(;;;) 이만 줄인다. 하지만 데리다의 전형적인 논변(또는 이 경우에는 즉흥적인 대담)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글로 씌어졌을 경우에는 훨씬 더 다양한 수사법적 장치가 동원되고 논변의 가닥이 좀더 복합적이겠지만, 인용한 이 구절만으로도 데리다 특유의 논변을 맛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이 논변과정에서 중요한 한 문장이나 한 문단이 제대로 번역되지 못하면, 그만큼 데리다의 논변의 의미, 그것이 낳는 의미효과를 이해하기 어렵게 되는데, [시선의 권리]를 포함한 많은 국역본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번역된 문장들, 문단을 찾기가 더 어렵다. 그러니 이해가 되지 않을 수밖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데리다의 난해함의 8할은 바로 이런 오역 때문에 생겨나는 난해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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