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데리다 저서들이 속속 번역되고 있습니다.

올해 이미 출간된 책만 해도,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동문선)와 [시선의 권리](아트북스) [법의 힘](문학과 지성사), [테러 시대의 철학](문학과 지성사)가 있고, 조만간 출간될 [목소리와 현상](인간사랑)까지 하면 다섯 권이 출간되는 셈이죠.

지난 번에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번역 상태에 관해 간단한 글을 올린 적이 있고(그런데 후속 글은 계속 감감무소식 ... -_-;;;), [시선의 권리]가 출간되었을 때에도, 번역상태에 대해 불안감이 든다는 지적을 했습니다(7월 10일 마이페이퍼).

오늘은 간단하게, 최근 번역된(그리고 앞으로 출간될) 세 권의 책, [테러 시대의 철학], [목소리와 현상](출간예정)과 [시선의 권리]에 관해 몇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글을 씁니다.

먼저 좋은 소식(아마도)에 관해 말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는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이번 주 초에 [테러 시대의 철학]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지오반나 보라도리라는 철학자가 데리다와 하버마스를 각각 초빙해서 인터뷰를 하고, 이 사람들에 관해 해설을 붙인 책입니다. 데리다와 하버마스라는 동시대의 두 거장, 더욱이 그동안 상이한 철학적 입장을 보여온 두 사람이 9, 11 테러라는 중대한 사건에 관해 견해를 밝힌 책이라는 점 때문에, 출간되기 전부터 영미권과 유럽 철학계에 큰 화제를 불러모은 책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데리다가 직접 저술한 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데리다가 현재의 국제정세에 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고, 또 하버마스의 견해와 비교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번역본을 읽어보지 못해서 섣불리 단정적으로 좋은 번역이다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또 번역자들 중 두 사람(한 분은 지방국립대의 전임교수로 재직중인 선배고, 다른 한 사람은 제 후배입니다)이 저하고 가까운 사람들이어서 오해를 살 염려도 있지만, 번역자들이 꼼꼼한 사람들이고 이미 다른 책들을 잘 번역한 경험들이 있어서 이 책의 번역도 잘 되었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프랑스에 유학 중인 제 후배 한 명이 [목소리와 현상]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번역은 다 끝나고 이제 교열을 보고 있는데, 저에게도 원고를 보내줘서 읽고 있는 중입니다. 이 친구는 원래 후설의 현상학을 공부했고 석사논문으로 데리다의 후설비판을 다루었습니다.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다 잘 하는 데다가 [목소리와 현상]이라는 책을 석사논문 주제로 삼았으니, 국내에서는 이 책의 번역자로 더 이상의 적격자를 찾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그리고 원고를 읽어보니, 실제로 번역도 매우 공을 들인 좋은 번역이더군요. 덕분에 신뢰할 수 있는 데리다 한글본을 한 권 더 얻을 수 있게 된 듯합니다.

 

이상이 좋은 소식(아마도)이고, 다음은 나쁜 소식입니다.-_-;;; 지난 8월 20일경에 [한국출판인회의]에서 내는 [북 앤 이슈]라는 서평전문지에서 서평을 하나 부탁받았습니다. 바로 [시선의 권리]에 관한 서평인데요, 알고 보니까 이 단체는 한달에 한번씩 인문, 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대중문화와 예술, 실용, 청소년, 어린이 등의 분야에서 이 달의 책을 선정해서, 선정된 책에 관한 서평을 싣더군요. 인문 분야에서는 매달 6-7권 정도의 책을 선정하고 대중문화와 예술 분야에서는 2종 정도를 선정하던데, [시선의 권리]는 마침 9월의 책으로 선정되어, 저에게 서평을 부탁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밀려 있는 일들 때문에 서평을 거절했는데, 담당자가 계속 권유하고, 또 지난 번에 마이페이퍼에서 이 책의 번역상태를 한번 점검해보겠노라고 약속까지 한 마당이어서,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번역을 검토해볼까 하는 생각에 서평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바쁜 일들 먼저 해결하고 지난 주부터, 강의 준비하는 틈틈이 책을 조금씩 읽고 있는데, 참 정말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지난 번에도 "역자 소개를 보니 번역한 분은 미술사를 전공하고 영국에서 공부한 분이더군요. 번역본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정황상 번역의 상태에 대해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불행하게도 그 때의 예상, 그 때의 불안감은 그대로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시선의 권리]라는 책은, 혹시 벌써 구입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벨기에의 사진작가인 마리-프랑수아즈 플리사르의 포토-로망에 대해 데리다가 상당히 긴 '해설'을 붙인 책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데리다의 이 '해설'이 상당히 난해하다는 점이지요. 데리다가 수사법과 논증을 교묘하게 뒤섞어서 활용한다는 것은 이미 몇 차례에 걸쳐 지적한 적이 있지만, 이 '해설'은 이런 점에서 특히 두드러진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 '해설'은 문자로 된 텍스트에 대한 '해설'이 아니라, 문자와는 상이한 이미지들의 연속적인 배치에 관한 '해설'이기 때문에, '해설'을 번역하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에게는 더욱 어려움이 가중됩니다. 그래서 이 책은 데리다의 철학에 관해 상당한 식견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불어에 관한 충분한 능력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데리다의 언어유희에 관한 섬세한 주의력이 있어야 제대로 번역할 수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니까, 역자는 dont이나 que와 같은 불어의 기본적인 관계대명사의 용법이나 과거시제 등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책이 제대로 번역될리가 있겠습니까? 데리다의 '해설'은 가상적인 대화로 이루어져 있어서, 짧은 문단들이 계속 이어지는데, 이 번역은 정말 페이지마다 오역이 있는 게 아니라, 오역이 없는 문단을 찾아보기가 어렵더군요. 한 가지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역자가 달아놓은 70여개의 역주인데, 이 주들 대부분은 데리다의 논의맥락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내용이더군요. 겉보기에는 무언가 데리다의 심오한 논의를 전달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현학적인 주이지만, 실제로는 데리다의 논의와 무관하고 오히려 내용을 더 이해하기 힘들게 만드는 역주들이었습니다.

역자도 문제이긴 하지만 출판사 역시 이해하기 어렵더군요. 문학동네의 자회사인 아트북스 같은 출판사라면, 그리고 "데리다의 3대 예술서 중 하나"라는 광고(사실은 터무니없는 광고이긴 하지만.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를 낼 정도로 이 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면, 그리고 역자에게 거의 불어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이를 몰랐다고 주장할 수는 없겠지요), 적어도 불어전공자 한 사람에게 외주교열이나 교정을 맡겨야 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힘든 이런 번역을 버젓이 "데리다의 3대 예술서 중 하나"라는 허위과장광고 아래 팔아먹으려는 그 저의가 정말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니 한국출판인회의라는 단체의 공신력 역시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위촉해서 달마다 우수한 도서들을 선정한다는 발상 자체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겠지만, 이 달의 최악의 도서들 중 한 권으로 꼽힐 만한 책을 우수 도서로 선정해놓으면, 이 단체의 권위를 믿고 이 책을 마음놓고 사서 읽는 독자들이 입게 될 피해는 누가 보상할 건가요?

이래저래 1년만에 또다시 엉터리 데리다 번역본 때문에 분통이 터질 지경입니다. 어쨌든 서평을 모레까지 써서 보내고, 조만간 알라딘을 비롯한 몇 군데 인터넷 서점에 또 한번 험악한 서평을 쓰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제가 걱정이 되는 건,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이제 데리다 번역본은 읽을 만한 게 못된다는 생각을 아주 굳히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신문이나 잡지에서는 섣불리 서평을 실으려고 하지 않고, 이런저런 도서선정기관에서도 데리다는 아예 처음부터 선정대상에서 제외하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상상도 해봅니다. 그러니 차라리 점잖게 한 마디 하는 걸로 그칠까요?

---그러길래, 뾰족한 도움도 못되고 쓸데없이 어렵기만 한 철학자에 뭐하러 그렇게 관심을 두고 혼자 분통을 터뜨리고 하냐? 모른 척하고, 쉽고 유익한 이론가들 소개하고 읽으면 될 것을, 쯧쯧 ...

---"쉽고 유익한 이론가들"? 누구? 네그리? 지젝?? 촘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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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9-08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발마스님, 험한 평을 하시든, 점잖은 평을 하시든, 발마스님 응원합니다! ^^

참, 그리고 지난번에 지나는 말로 하신 주제의 강의록, 정말 궁금합니다.

balmas 2004-09-09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이 응원해주시면 든든하죠.^^

그리고 [현대의 철학적 문명론]이라는 강의에 관해서는, 사실 별로 말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데(-_-;), 다음에 한번 말씀드릴게요.

hoyami 2004-09-09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is name is Boradori? Really? Is he one of the Teletubbies? Haha. I've sent you an email, so please chek it!

balmas 2004-09-09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사실은 Borradori야. r자가 하나 더 붙지. 텔레토비 출신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메일은 잘 받았어. 그런데 부탁할 건 다른 경로를 통해서 얻었으니까, 따로 부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aporia 2004-09-09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쁜 일도 많으신데 분통 터질 일이 생기셔서 걱정이군요. 다른 건 잘 모르겠는데, 불어를 못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데리다를 번역하겠다고 나섰다는 게 좀 이해가 안 되네요. 그나저나 선생님의 불길한 예감은 그냥 예감에 그치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그래도 "목소리와 현상" 번역본이 나온다니 정말 반가운 소식입니다. 언젠가 한번은 읽어야 할 것 같은데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는 책이었거든요.
결국 선생님과 동료분들이 힘내시는 수 밖에 없겠군요. 저는 허접한 독자리뷰나마 올려서 이 책은 훌륭하다고 열심히 추천하겠습니다. 그나저나 "법의 힘" 독자리뷰를 써야 하는데,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계속 미뤄지네요. 어쨌든 힘내세요!

릴케 현상 2004-09-10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나 문제가 많다니...

balmas 2004-09-10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좀 문제가 많죠.
전 데리다 번역에서 이런 게 전형화되지 않을까, 그게 제일 걱정이예요.

릴케 현상 2004-09-11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번역서만 읽는 일반 독자 입장에서는 이런 얘기 들으면 좀 불안해져요. 그동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읽은 책도 다 문제가 있는 것인데 내가 모르고 있나보다 하는...

balmas 2004-09-11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서 내용이 잘 이해가 되고 잘 넘어가면, 대개 그 책은 좋은 번역입니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거나, 이해가 되다가 어느 대목에서부터 무슨 소리인지 잘 알 수가 없다거나 하면 그건 대부분 오역 때문이죠.
그나저나 이런저런 번역본들 비판하면서 저도 늘 사람들에게 공연히 불안감만 주는 게 아닌지 마음에 걸립니다. 쉽지 않은 인문사회과학 책들을 읽으려는 사람들이 점차 줄어드는 상황에서 이런 식의 비판이 오히려 사람들의 독서의욕을 꺾어버리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죠.
생각해 보면, 이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지식의 생산 및 소개와 유통이 겪는 문제점을 보여주는 한 사례가 아닌가 합니다. 이런저런 번역본들(특히 고전이거나 좋은 책들)의 문제점과 좋은 점들은 전문가들이나 관련된 단체들에서 공정하게 평가를 해주어야 하는데, 신문 서평은 실용서나 취미교양서 위주로 흐른지 오래되었고, 전문가들은 업적에 들지도 않는 이런저런 서평들을 외면하고 있고, 책을 내는 (몇몇) 출판사들은 저작권을 전매하고서 형편없는 오역본들을 양산하고 있고 ... 그러니 그 틈바구니에 끼어서 고통받는 건, 누가 강제하지도 않았는데 좋은 책들을 읽어보겠다는 갸륵한 마음을 품은 교양독자층이죠.
전문적인 서평지가 하나 시작되어서 모범적으로 자리잡는다면, 이런 상황이 좀 타개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 모르겠습니다. 누가 총대를 메야 하는데 ...

릴케 현상 2004-09-12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하긴 읽다가 모르겠는 부분이 나오면 그냥 내가 이해 못하나 보다 하고 피동적으로 읽는 태도를 고칠 수 있는 자극이 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좀 더 능동적으로 이해 안 되는 부분을 체크해서 번역에 이상이 있는 건지 나한테 이상이 있는 건지 한번 이상 생각해 볼 기회를 주니까요 앗! 추천했습니다.

balmas 2004-09-13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긍정적인 자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