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의 번역본이 다음 달에 출간될 예정이었다.
이 책은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에는 발리바르가 1985년에 낸 [스피노자와 정치]라는 작은 단행본 책자가 수록되어 있고,
2부에는 발리바르가 스피노자에 관해 쓴 주요 논문들, 곧 [스피노자, 반오웰: 대중들의 공포]라는 논문과
[스피노자에서 개체성과 관개체성]이라는 논문, [스피노자, 루소, 마르크스]라는 논문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3부는 [역자 해제]와 용어 해설, 연표, 참고문헌 등이 들어갈 예정이다.
그.런.데.
정말 뜻하지 않은 암초에 걸려서 원래의 계획대로 책을 내는 것이 어려워지고 말았다.
1부에 수록된 [스피노자와 정치]는 당연히 프랑스대학출판부(PUF)와 정식 계약을 맺고 판권을 얻었다.
그리고 2부에 수록된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논문들은, 2002년인가 2003년에 발리바르에게 메일로
연락해서 출판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나는 이걸로 이 책의 저작권과 관련된 문제는 모두 매듭이
지어졌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며칠 전 출판사에서 2부에 수록된 글들의 판권을 어떻게 할 것인지 문의를 해왔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좀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2부의 논문들에 대해 발리바르로부터
정식으로 판권을 얻은 게 아니라 구두로(또는 이메일로) 출간 허락을 받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만약 2부에 수록된 논문들 또는 그 논문들이 수록된 책들이 국내에 출판되었거나 출판될 예정이 아니라면
발리바르의 출판 허가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겠지만, 문제는 하필이면 이 논문들 중 제일 중요한
[스피노자, 반오웰] 이라는 논문이 수록된 {대중들의 공포}라는 발리바르의 또다른 책을 국내의 다른 출판사,
"도서출판 b"라는 출판사에서 출간하기로 계약을 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나는 출판사에서 2부에 수록될 논문들을 (이메일로 출판 허락을 받은 이후에) 발리바르와
정식으로 계약해서 판권을 얻은 줄 알고 있었는데, 그게 그렇지 않았고 출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지금
바로 이 문제가 터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별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라는 책은 15편 가량의 논문들을
묶은 논문모음집에 원서로 450쪽이 넘는 방대한 저작인 반면, [스피노자 반오웰: 대중들의 공포]는
그 책에 수록된 한 편의 논문에 불과하고, 따라서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에 관한 글을 모아서 내는
{스피노자와 정치]}같은 책에 [스피노자 반오웰] 같은 논문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사정을
도서출판 b쪽에서 충분히 이해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 논문이 {스피노자와 정치}에 수록된다고
해서 나중에 출간될 {대중들의 공포}에 이 논문을 다시 수록하지 못한다는 법도 없거니와, 약 10여년
가까이 발리바르의 책들이 국내에 소개되지 못해오다가 올해와 내년 동안 적어도 3권의 책이 함께
출간될 예정인데, 서로 다른 주제의 책이 3권 맵시있게 출간되면 서로서로 긍정적인 효과를 미칠 수도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어려운 상황에 처한 국내의 인문학 출판사들끼리 서로 그 정도 사정이야
못봐주겠느냐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어이없게도 도서출판 b에서는 한 마디로 단호하게 잘라 거절했다고 한다. 절대 수록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쪽에 문의하지 않고 책을 냈을 경우에는 소송을 준비하려고 했다고
한다. [스피노자, 반오웰: 대중들의 공포]가 35쪽 정도 되는 상당히 긴 분량의 논문이고, 발리바르가 이 논문
에서 {대중들의 공포}라는 책의 제목을 따온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논문이 {대중들의 공포}라는 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다른 책에 이 논문을 수록하는 것을
허락하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점은 십분 이해는 가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한번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제안에 대해 일언지하에 만날 필요도 논의할 필요도 없다고 거절하는 건
정말이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태도가 아닌가 한다.
발리바르의 출판 허가 언질만 믿고 정식 판권 계약을 미뤄둔 출판사나 이 문제를 좀 더 꼼꼼히 챙기지
못한 나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겠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도서출판 b에 대해, 국내 출판계의
풍토에 대해 정말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그래서 아마도 5월 중에 {스피노자와 정치}가 출간되기는 하겠지만, [스피노자 반오웰: 대중들의 공포]라는
논문은 그 책에 수록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아니, 지금으로서는 사실상 불가능하게 됐다. 그래서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곰곰히 생각 중이다. 잘 살펴보면, 전화위복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어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그리고 지식의 생산과 유통을 전지전능한 법으로
좌우할 수 있다고 믿는 도서출판 b 같은 곳에게 교훈을 주는 길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직 확신이 서지는 않는다.
하여튼 주말에 골치썩여야 할 일이 하나 또 생긴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