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피노자와 정치]에 수록될 "용어 해설" 중 몇 가지를 올립니다. 한번 읽어보시고 부적절한 내용이나
잘못된 설명, 또는 우리말답지 않은 표현들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댓글을 달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물론 사례는 없죠. ^-^;;;
민주화주의démocratisme
“민주화주의”라는 개념은 발리바르가 스피노자식의 민주주의 개념의 독특성을 표현하기 위해 고안해낸 신조어로 보인다. 곧 발리바르가 보기에 스피노자의 민주주의는 고대에서 유래하는 보수주의 전통이 주장하는 중우정치로서의 민주주의라는 관점과 다르지만, 근대 계약론에서 유래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법적 관점과도 다르다. 게다가 이는 루소나 마르크스주의에서 유래하는 인민민주주의 개념과도 차이가 있다. 전자의 두 관점이 대중의 근원적인 정치적 무능력과 통제 불가능성을 가정하고 있는 데 반해, 후자는 대중의 혁명적 역량을 선험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전자처럼 대중 그 자체는 정치체제에 파괴적이고 위협적인 존재라는 보수적 관점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또한 후자처럼 대중은 정치체제를 구성하는 가장 근원적인 역량이라는 관점을 고수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전자와 후자의 관점 모두에게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기형적인 괴물(또는 네그리의 저서의 제목을 빌리면 ‘야생의 별종’)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정치론의 마지막 11장에서 민주주의야말로 “완전하게 절대적인” 정체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대중 개념을 포함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 개념을 제대로 사고할 수 없으며, 역으로 민주주의 개념을 “절대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모든 정체의 구성적 토대로 대중 개념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발리바르가 보기에 이는 스피노자 정치학의 아포리아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몰락 이후 한층 더 분명하게 드러난 근대 정치학 자체의 아포리아다. 그리고 발리바르는 이처럼 매우 독특한 스피노자의 민주주의 개념을 지시하기 위해 “민주화주의”라는 용어를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볼 때 이 용어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이 용어는 계약론에서 유래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법적 관점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곧 민주주의를 하나의 통치 유형이나 정체로서만 이해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정치적 핵심을 법적 제도의 틀 안에 가두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이는 민주주의는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구성과 봉기, 해체와 재구성을 거듭하는 과정으로서 존재한다는 점을 함축한다. 다음 인용문에 나오는 발리바르의 지적은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역설적으로 정치론의 미완성은 이론적 이점을 내포한다. 즉 민주주의의 이론 대신에 그것은 모든 체제들에 응용될 수 있는 민주화의 이론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스피노자, 정치와 교통」, 윤소영 옮김, 알튀세르의 현재성 공감, 1996, 180쪽(강조는 발리바르). 따라서 민주주의 개념을 적합하게 사고하기 위해서는 이상적 모델(칸트식의 규제적 이념이든, 하버마스식의 규범적 모델이든 간에)에 의존할 게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세력들 사이의 갈등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활력과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기초 요인이라는 점에 입각해서 사회적 갈등의 “대표representation”를 민주주의 제도의 핵심 요소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