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병자호란의 성격은 이전의 임진왜란의 성격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정복 전쟁, 즉 실리를 취하겠다는 왜와 그 실리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조선의 전쟁이었고, 병자호란은 명분의 전쟁이었다. (하긴, 청의 입장에서는 정복전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청의 변방으로 복속시켰다고 생각했을지도.) 마치. 예송논쟁처럼.

김훈은 언젠가, 자신은 그 뜻을 명확히 알지 못하는 단어는 쓰지 않으려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백개 남짓한 단어만 손에 남더라나. 하기는, 생각해보면 우리가 쓰는 단어 중에 명확히 뜻을 알고 쓰는 단어는 몇개나 될까. 사랑은 무엇이고 명분은 무엇인가. 산다는 건 무엇이고 죽는것은 무엇인가. 명예를 잃고 숨길이 붙어있다면 그 사람은 살아있는 것인가 죽은 것인가. 명예롭게 죽어 이름을 남긴 그 사람은 살아 있는 것인가 죽은 것인가. 병자호란으로부터 다시 3-400년을 흘러 한국의 위인전과 교과서에 척화파의 거두 김상헌의 이름은 우뚝한데, 김상헌은 죽은 것인가 살아있는 것인가.  

이 전쟁은 명분과 명분의 부딪침이었다. 명을 정복하고 새로이 일어선 청이 대륙의 새 주인임을 인정받고자 하는 명분, 아직은 명의 명줄이 붙어있으니 이전의 사대를 유지하고자하는 조선의 명분. 이 명분의 싸움은 조선 내에서도 치열하다.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의 명분은, 재세在世, 즉 살아남음, 삶에 있다. 이 치욕을 견디고 살아남아야 그곳에 비로소 삶이 있다는 것이다. 척화를 주장하는 김상헌의 명분 또한 삶에 있다. 치욕을 견디고 살아남는 것은 이미 죽은 삶이라는 것이다. 둘의 명분과 목적은 같으면서 다르다. 해서 두사람의 주장은 첨예하게 부딛친다.  

최명길이 말했다.
-제발 예판은 길, 길 하지 마시오. 길이란 땅바닥에 있는 것이오. 가면 길이고 가지 않으면 땅바닥인 것이오.
김상헌이 목청을 높였다.
-내 말이 그 말이오. 갈 수 없는 길은 길이 아니란 말이오.
(p.269) 

눈 앞엔 단 하나의 길만이 놓여있다. 화친, 죽음과도 같은, 아니, 조선의 선비에겐 죽음보다 더한 치욕의 길. 그 치욕의 길을 건너는 자만이 저편의 삶에 닿을 수 있는데, 이미 죽음을 경험한 뒤의 삶은 삶인가 아닌가. 

남한산성 내의 싸움은 치욕을 건넌 뒤의 삶도 삶인가 아닌가를 두고 벌이는 싸움이었다. 모두가 살아남고자하고 모두가 그 치욕을 겪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에 대한 원망의 소리는 드높고 그 속에서 모두가 믿는 것은 오직하나 최명길이다. 순결한 무장 이시백은 묘당의 마음을 단숨에 정리해 준다. 

지금 싸우자고 준열한언동을 일삼는 자들도 내심 대감을 믿고 있는 것 같았소. 충렬의 반열에 앉아서 역적이 성을 열어주기를 기다리는 것 아니겠소. 이 성은 대감을 집행할 힘이 아마도 없을 것이오.
(p.218) 

그래서 그들은 차마 함께 할 수도, 그렇다고 내칠 수도 없는 최명길을 붙들고 늘어진다. 이 엇갈림 속에서 묘당의 마음은 이리저리 뒤섞여 분간할 수 없게되고, 김훈의 문체는 전에 없이 만연체로 늘어졌다. 하나의 문장이 페이지 절반을 차지할만큼 길어지는 것은 사람들의 내면을 진술할때다. 그 긴 만연의 문장을 읽고 있으면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지 헷갈린다. 아마 김훈이 노린 것도 그것일 것이다. 명분을 지키면서 삶을 얻고자하는 사람들의 욕심이 그와 같다. 중언부언 말이 길게 늘어지나 결국은 말이 아닌 말. 그래서 김훈은 청국 칸의 입을 빌어 사람들에게 호통을 친다.  

-말을 접지 말라. 말을 구기지 말라. 말을 펴서 내질러라.
(p.284)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의미다. 인조에게서 나는 결정권자의 외로움을 읽는다. 치욕을 견디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치욕을 견딜것인가 말것인가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무섭다. 치욕을 견디는 것은 가벼운 일이다. 왕은 신하들의 손에 등떠밀려 어쩔수 없이 신하와 나라를 구해 치욕을 견디는 자의 위치로 가고자 하나 충렬의 반열에 앉고자 하는 신하들은 끝내 결정은 니가 내리고 나는 너를 따를 뿐이라고 말한다. 하긴, 그게 충이긴 하다.

-비록 야지에서곤고하나 이 나라는 전하의 나라이옵니다. 중론을 묻지마시고....
-묻지 말고, 어찌하라는 말이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p.297)

이 책을 2년 전 출간 직후에 읽었었다. 그때는 글쎄, 그렇게까지 재미있게 읽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신하들의 만연체 문장에 휘말려 이게 도대체 뭐하자는 말인가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게 뭔가 허둥지둥 문자를 따라가기 바빴었다. 2년여를 묵혀뒀다 다시 읽으니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선연하게 잡힌다.  

명분(명예)도 지키고 삶도 얻는 길은 없다. 살아남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대가를 치루어야 하며, 그 대가를 치루는 것이 치욕이라고 말할수도 없는 것이다. 김훈이 말한다. 명분을 지키고 충열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내가 아닌 누군가의 치욕을 딛고 가는 그것이 가장 치욕스런 일이라고.  

한때 나는 남한산성이 별로라고 생각했다. 이 책이 출간되었을 당시의 열풍을 이해하지도 못했었다. 이 책은 칼의 노래와 같이 나를 매혹시키지는 못했다. 그 생각을 지금에사 수정한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열광하지 않을수 없었을듯. 아무런 치욕도 책임도 감당하지 않으면서 오직 명예를 지킨 삶만을 원하는 사람이 얼마나 혐오스런 존재인지 이 책은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들의 내면을 만천하에 펼쳐보인다. 삼엄한 시선이다. 무섭다. 김훈이 묻는다. 너는 뭐 했느냐고, 치욕을 견디지 않은 너는, 치욕을 당면하지 않은 너는 과연 순결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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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09-12-14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마님은 소설 다시 읽으시나요? 전 한 번 읽고 그냥 둬서 그런지 이런 깊이 있는 리뷰가 안나오네요. 좋은 리뷰입니다. 김훈 책을 무조건 사서 읽는데 저도 솔직히 남한산성은 집중이 안되더라구요.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아시마 2009-12-14 16:31   좋아요 0 | URL
몇몇 소설은 여러번 읽죠. 책을 읽을때마다 느낌이 달라지는 글들이나 중심이 변화하는 소설들이 있거든요. 전 그런걸 좋아하거든요. 내가 아주 조금이나마 달라졌다는 걸(그게 발전이든 퇴보든) 느끼게 해 주니까요. 문체가 아름다운 소설은 그 문체에 반해서 여러번 읽기도 하고요. 토지랑 빨간머리 앤은 열번 넘게 읽은 것 같아요. 빨간머리앤은 우울할때 읽으면 완전 행복해지거든요. 토지는 읽을때마다 연애하는 기분이 들어요. 막 새로운 인물을 만나거든요. 태백산맥이나 칼의 노래도 다섯번 넘은 것 같고... 음. 읽었던 소설을 또 읽으면 새로운 소설을 읽을 때와는 또 다른 맛이 있어요. 처음 읽어서 이해가 잘 안되는 소설은 일부러라도 한 1-2년 묵혀뒀다 다시 읽기도 하구요. 아, 박완서는 무조건 재독 삼독 하죠. 매번 읽어도 매번 재미있어요. 이건 새로운 느낌 때문이라기 보단 말 그대로 재미 때문에 새로 읽어요.
결국 전, 읽었던 소설 다시 읽는 걸 좋아하나봐요.^^

blanca 2009-12-14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간머리앤 너무 좋아요. 드라마는 뒷부분 완전 개작해서 너무 지루하더라구요. 그래서 실제 빨간머리앤 뒷부분도 지루할까봐. 읽지는 않았답니다. 참 구실도 가지가지죠? 생일 선물로 지르려고 했는데 남편이 말려서 좌절당하기도 했구요. 지금 보니 태백산맥도 읽으셨군요. 다섯번. 우와....저 한 번 읽는 데도 살림 다 작파했었는데...이런 식이면 아시마님의 책 구입은 정당화할 만합니다. 근데 컵은 왔나요? ㅋㅋㅋ 오면 좀 사진이라도...

아시마 2009-12-14 23:29   좋아요 0 | URL
오오, 빨간머리앤은 절대 지루하지 않아요. 그런데, 동서문화사판은 솔직히 좀 별로구요. 번역도 판형도 다 그저그래요. 예전에 청화문화사라는데서 나온 8권짜리가 있어요.(전 친정언니가 청화문화사판 가지고 있고 제가 동서문화사판 가지고 있는데 맨날 바꾸자고 조르는 중) 방문판매 비슷한 형식으로 봉고차에서 강매하던 책인데 의외로 대박 괜찮았죠. ㅎㅎ
빨간머리 앤이 지루하다니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애번리에서 학교 선생하는 이야기, 레드먼드 대학다니면서 길버트 아닌 다른 남자와 연애하는 이야기, 결국 길버트랑 결혼해서 신혼 생활하고, 애 낳고(아들셋 딸셋) 그 애들의 성장기까지 보고 있으면, 정말 행복해 미쳐요. 꼭꼭 보세요.
근데 솔직히, 동서문화사판은 사라고 권하고 싶지가 않구요, 헌책방 같은데서 청화문화사 판 구할수 있으면 구해보세요.

전 토지나 태백산맥 같은 장편 대하소설은 잡으면 정말 미친듯이 읽어서(전 항상 살림은 작파했고, 대하소설 읽을때는 잠을 작파하는지라... ㅎㅎㅎ 하루에 두세권씩 휙휙 읽어제껴요. 태백산맥도 뭐 일주일이면 땡. 읽고나면 몸살하죠. 진짜 환장하게 재미있지 않아요?

컵은, 아직 안왔어요. 이번에 주문할때 구하기 힘튼책을넣었더니 내일이나 모레 온다네요. ㅎㅎㅎ 기대 만빵이죠.

blanca 2009-12-15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렇군요. 구하기 힘든 책이라니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님 때문에 왕창 지름신이...무엇보다 박완서샘의 '미망'을 읽구 싶군요. 혼불은 알라딘에서 세트로 안파네요. 참. 환장하게 재미있다, 저 뿜었습니다. 환장하죠, 그냥. 주변 사람 아무도 안알아줘서 넘 슬펐는데 아시마님이 있어 외롭지 않게 되었네요 ㅋㅋㅋ

아시마 2009-12-15 23:28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저 책 볼때 밑줄 그어가며 보는데요, 사실 태백산맥이나 몇몇 소설엔 밑줄 하나도 안그었어요. 인상적인 구절이 없어서가 아니라, 소설에 너무 푹 빠져서 밑줄 긋는 것도 귀찮더라구요. 그정도로 정신없이 읽어요.
우리집 충무공도 제가 책 읽고 있으면 가끔 글케 재미있냐? 그럴 정도예요. 아니 내 낭군 씩이나 되면서, 집에 책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책을 읽지 않을수가 있지요? 블랑카님 부군은 책 읽으시나요? 제 남편도 저를 신기해하지만 저도 제 남편이 진짜진짜진짜 신기해요.
근데근데, 저의 지름신을 분양받으시면, 움움... 저처럼 남편을 충무공이라 부르고 받들어 뫼셔야 하는 사태가 발생하실지도. 냐하하...

에파타 2009-12-21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푸하하하하~깔깔깔~정말 넘 통쾌하신 분들이군요..배꼽빠집니다.지붕뚫고 하이킥 황정음씨 때문에 배째고 사는데, 우연히 들린 실제인물들이 이렇듯 혼을 빼놓다니요..정말 행복합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