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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세트 - 전10권
최명희 지음 / 매안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김이경의 소설 <순례자의 책>에 보면 저승에 가서 책을 저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단다. (아직 주문해 놓고 받진 못했다.) 그 구절을 보며 무릎을 탁 쳤다. 내가 죽어 저승에 간다면, 나는 최명희 선생님을 꼭 만나고 싶다. 선생님은 아마, 저승에서도 혼불을 쓰고 계실거다. 아, 저승에 있는 사람들은 좋겠다. 혼불을 읽고 있을 거 아닌가. 보르헤스가 그랬다던가, 천국은 아마 도서관의 풍경과 닮아 있을 거라고.(정확한 표현인지 모르겠다.) 내가 상상하는 천국도 그렇다.
이 소설 혼불은, 미완의 소설이다. 98년 암으로 세상을 뜨신 선생님은,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도 혼불의 6-7부를 구상하고 계셨다고 하니. 실제로 이야기는 막 시작하려다 끝이 나버린다. 강모는 아직 뜻을 펼치지도 못했고, 강실이의 운명은 오리무중이고, 효원이는 아직, 종부의 막중한 책임을 지고 가문을 일으켜 세우지도 못했다. (혼불은 본래, 효원이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이야기를 중심축으로 할 것이었단다. 서희가 최참판댁을 재건하는 것처럼.)
이 소설, 혼불은 내게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와 전혀 다르면서도 닮은 꼴이다.
박경리 선생님이 처음 토지를 구상하실때 본래 생각했던 지역은 전라도였단다. 경상도는 산이 많고 평야가 협소하여 만석꾼이 나올수가 없는 곳이라 만석꾼 최참판댁을 건설하기가 힘들었던 것. 그러나 경남 통영-진주 태생인 박경리 선생님은 전라도 사투리에 자신이 없어 막상 전라도를 선택하기도 망설이고 있던 차에, 당시 불교 미술을 공부하던 딸과 함께 여기저기 다니다 하동 평사리를 보고는 그곳을 토지의 배경으로 삼고 집필에 들어간다. 실제로, 박경리 선생님이 토지를 쓰는 내내 평사리에 내려간 적은 없단다. 하긴, 만주 용정땅의 서희를 그린 2부를 집필하던 시기엔 한국과 중국이 수교국이 아니라 용정 땅을 가 볼수도 없었다. 박경리 선생님은 그 땅의 지도 한장을 벽에 갖다 놓고 소설을 썼다는데 훗날 수교후 가 본 실제 용정땅은 박경리 선생님이 묘사한 것과 거의 흡사해(실제로 하동촌도 있단다)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소설가의 상상력이란 참 대단하다.
박경리 선생님이 하동 평사리를 선택해 경상도를 묘사해 낼 때, 최명희는 전라북도 남원을 선택해 전라도를 묘사해 낸다. 전라도의 음식과 전라도의 풍속과 전라도의 섬세한 아름다움이 최명희의 붓끝에서 아름답게 피어난다.
효원과 강모의 혼례식때 효원의 대례복 입는 장면의 묘사는 박완서 선생님의 <미망>에서 태임이의 송도 혼례식 특유의 큰머리(화환) 장식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한국 문학의 백미라 할만하다. 전라도 특유의 내방가사가 그대로 살아나오기도 하고, 신분제도와 관혼상제의 풍속에 관한 묘사, 집안 내부 묘사나 바느질에 관한 묘사 등등은 섬세함의 극치를 달린다.
물론 이 아름다운 소설도 단점은 있다. 지나치게 자료조사와 고증에 빠진 나머지 일정부분 남원 사지같은 느낌을 주는 부분도 있고, 소설이 이제 막 전개될 즈음에서 작가가 사망한 탓에 주인공 강모의 성격도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면도 있다. 강실의 운명은 너무 가파르게 하향곡선을 타기만 해서 안타깝게 만드는데, 이 역시 작가의 죽음으로 구제받지 못하고 저 구렁텅이에 빠진채 끝이난다. 이 소설을 읽고나면, 정말이지,
저승에 가서라도 그 뒷이야기를 읽고 싶어진다. 효원은 아마, 서희 못지 않은 대찬 여인이 되었을텐데.
토지 집필기간 26년, 혼불 집필기간 17년, 배경으로 하는 시대는 비슷한 구한말부터 일제시대이고, 여인 중심의 이야기 구조도 동일하다. 최명희가 살아 있었다면, 우리는 토지에 버금가는 훌륭한 문화유산을 얻었을텐데 안타깝다는 말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