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많은 책을 읽지는 못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구매가 중고도서로만 이루어지다 보니, 신간 책들에 안달복달하던 모습을 많이 버리게 된 점이 좋았다. 역시나 소설들 일색이지만, 꼬리를 물고 읽고 싶어진 책들이 많이 생겼다는 점에서는 스스로 대견해하고 있다.
그저 그랬던 책들은, 나카지마 라모의 <오늘 밤 모든 바에서>, 가이도 다케루의 <마리아 불임 클리닉의 부활>,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처녀들, 자살하다>


나카지마 라모의 책은 북스피어를 믿고 구입한 책이지만, 요즘 번번히 실패하고 있어서 이미 사 둔 <가다라의 돼지>를 어찌해야 하나 고민 중이다.
<마리아 불임 클리닉의 부활>은 도통 주인공의 캐릭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의료 행정이나 관료에 대해 불평을 할 때는 완전 화르륵 불타올라서는 왜 이렇게 흥분하시나 싶다가도, 진료하는 모습을 보면 지나치게 건조하고, 계속 용의주도하다 치밀하다 설명하고 있지만 그다지 그래보이지도 않고... 소설이라기보다는 작가의 의료행정에 대한 불만을 피력한 사심 글로 보여졌다. 더구나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도대체 일본의 관료들이 뭘 어쨌길래 그렇게 지역 의료가 붕괴됐다는 건지 잘 이해할 수가 없다.
<처녀들, 자살하다> 역시,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도무지 모르겠다. 남겨진 건 줄줄이 죽은 리즈번 자매들의 마지막 모습 뿐이다. 왜 죽었다는 거야? 리즈번 부부의 양육 방식이 문제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렇게 기이한 자살행렬을 낳기까지는 뭔가 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실망하지는 않았지만 감탄하지도 못했던 책들은, 미야베 미유키의 <지하도의 비>, 그리고 김남희의 <일본의 걷고 싶은 길1-홋카이도, 혼슈>

미야베 미유키의 책은 기본적으로는 장편을 더 좋아하고, 이 책은 단편들 사이에 낙차가 좀 있는 편이었다. 전체적으로는 억지로 설명을 덧붙이려는 부분이나, 지나치게 설명을 생략한 듯한 느낌이 있었다. 왠지 완성본이 아니라, 뭔가를 위해 준비를 해둔 상비군의 느낌. 젤 맘에 들었던 단편은 '안녕 기리하라씨'(이것도 그래. 차라리 능청스럽게 SF로 나갔다면 더 좋았을 텐데)와 '무쿠로바라'.
김남희의 걷기 여행 책도 어정쩡했다. 여행 에세이로서의 컨셉 자체를 잘못 잡은 듯 하다. 완전한 에세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보가 풍부한 것도 아니고, 다녀온 곳들 걷기 좋은 곳들을 소개한다고 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부분도 많았다. 지루한 글들, 혹은 매력없는 이야기. 너무 일반적인 지역들, 혹은 구미는 당기지만 설명이 부족한 지역들 일색이었다. 애초에 홋카이도와 혼슈를 묶어 놓았다는 데서 깊이를 예상했어야 했다.
즐거웠던 독서는 우선, 마이클 코넬리의 <시인>
나무랄 데 없는 미스터리 소설이었다. 주인공과 주인공을 둘러싼 환경들, 인물들의 관계가 매력적이었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속도감이 있고 흥미진진했다. 결말이 다소 어설펐지만, 이 사람, 속편 내려고 하는구만, 하고 넘어갈만한 정도였다. 그 속편까지 보고나서, 그 범인이 정말 범인(시인)스러운 사람인가를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아, 그런데 속편격인 <시인의 계곡>에는 매커보이가 안나온다네. 음.. 난 이 주인공이 좋았는데. 그리고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와 <블러드 워크> 먼저 읽어야 한다는군.)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도 다시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가 중3 때인가 했었으니까, 빙리 라는 이름말고는 거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은 상태였다. 지금 다시 읽고 보니, 그때 뭘 안다고 이걸 읽었을까 싶다. 제법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기 한데, 얼마큼 이해하고 읽은 건지도 모르겠다. 이러다 그때 읽었던 그 많은 고전들을 다시 읽어야 할 판이다. <적과 흑>이며 <골짜기의 백합> 같은 책들을 나는 얼마나 공감했던 걸까.
아무튼, 박장대소도 몇번인가 하며 즐겁게 읽었다. 이 허세의 수사법이 즐거워지는 날이 오다니. ^^ 특히,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베넷씨의 대사만 한데 모아 다시 봐야겠다.
덕분에 몇몇의 읽고 싶은 책들도 생겼다. 제인 오스틴의 다른 책들(<설득>이라거나)은 물론이고, 비슷한 시기에 읽었거나 비슷한 분위기가 난다고 생각했었던 책들(<폭풍의 언덕>도 다시 읽어야지. <인생의 베일>도 읽어볼까), 汎가족적인 거한 연애이야기들도 (<어떤 여자>나 <세설>도 그래서 샀지), 그리고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까지.







(또 다른 소개해주고 싶은 책들 읽으면 추천 좀 해주세요~~)
지금 읽고 있는 책은 베르나르 키리니의 <육식이야기>.
이거 쫌. 많이. 굉장히. 멋지다.
장편인 줄 알고 집었다가, 단편이길래 그냥 내려 놓으려고 했는데 오렌지쥬스에 피를 섞어 마시던 한 남자의 얘기에 완전 넘어가버렸다. 하나씩 아껴가며 읽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읽으면서 내내 침을 꼴까닥꼴까닥 하고 있다.
불현듯 언젠가 읽었던 단편소설집이 생각났는데, 오늘 찾아다녀보니 무라카미 하루키의 <렉싱턴의 유령>이었다. '토니 다키타니' 나 '얼음 사나이' 같은 이야기를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낯선 것들을 대면했을 때의 그 생경함과 묘한 끌림. 하루키의 소설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읽는 내내 내게서 무언가를 하나씩 가져가는 느낌이었는데, 이 책은 어떨까.
생각하다 보니 미하엘 엔데의 <자유의 감옥>을 처음 읽었을 때와도 비슷한 경험이었던 게 기억난다. 아, 진짜 그랬었지. 그치만 미하엘 엔데의 글들을 읽으면 무언가 내 세상이 한꺼풀씩 열리는 느낌이었다. 이 책은 어떨까.
책을 읽고 나면 사고의 간섭이 심해서, 단편소설들도 하루에 하나씩 밖에 못 읽는데, 아, 이 책은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