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대한 글을 쓴 지가 참 오래 되었다.
마음의 여유가 없기도 했지만, 가슴 속에서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 책들도 있었다.
(이런 오만이라니.)
그러다 스물스물 뭔가 끄적거려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드는 책들이 이어졌고,
결국 <애도하는 사람>에까지 이르자, 쓰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왔다.
그간의 책들은, 역시나 소설 일색이다.
소설이 아닌 책은 이윤기 선생의 <꽃아 꽃아 문 열어라> 뿐이다.
내가 역사를 공부하고 역사를 가르치는 이유는
어느 다른 시대, 어느 다른 공간에 살았던 인간이 사실은 나와 똑같이 시시한 걸로 번민하고 심사숙고하며 때론 우연적으로 때론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선택하면서 살아왔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이다.
무수한 다른 인간들이 모이고 모여 하나의 커다란 움직임으로 살랑살랑 거리며 살아가고 있다는 걸 확인하며 감동받기 때문이다.
그 부드러운 움직임들의 원형이 신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러한 지점에서 이윤기 선생의 글은 언제나 가슴을 울린다.
명확한 해석을 바랄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지금은 안계신 어른이라고 생각하니 글자 하나하나가 애틋하다.
소설은 대부분이 미스터리 소설이었다.
리사 엉거의 <아름다운 거짓말>은 충분히 매력적인 사건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자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가기가 살짝 힘에 부쳤다.
남자 주인공이었다면 애써 따라가 보려고 하지 않았을 텐데, 여자 주인공이다 보니 시나브로 감정이입이 바짝 되다가 달카닥 걸리고, 또 바짝 달아오르다가 달카닥 걸리곤 했다.
내가 이 여자처럼 아름답지 않아서일까,
내 사랑이 이 남자처럼 멋진 근육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일까, 하고 15초 정도 서성댔다.
교고쿠 나쓰히코의 <웃는 이에몬>도 기대만큼 가슴을 적시진 못했다. 차분한 울림이 참 좋았는데, 언젠간 와르르 나를 무너뜨리는 격정이 있겠지 하는 기대도 못내 버리질 못했었다. 물론 기다리다 그냥 끝내고 말았지만.
애틋한 사랑을 조금씩 욕심내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화르륵 괴담으로 변해서, 흠칫 놀랐다.
예상외로 즐거웠던 독서는 <인생의 베일> 이었다. 배경지식이 전무한 상태여서 한장 한장 넘기는 게 낯선 음식을 맛보는 것 같은 설레임이 있었다.
게다가 1920년대 동아시아는 가장 좋아하는 역사의 무대이기도 했다. 후텁지근하고 뇌쇄적인 원색의 홍콩이라니.
끈적한 불륜의 공허한 공기와, 메마른 무채색의 콜레라의 공기. 그 속을 똟고 황금빛으로 빛나던 이국의 지붕들.
키티의 삶은 뱅글뱅글 도는 다람쥐통이 되어 버려서 중심을 잡으려면 그녀는 쉴새없이 눈을 굴려야 했다.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건 불가능했고, 사실 그럴 의지도 없었다.
그래서 그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그녀는 다만 조금 성장했을 뿐이었다. 넘치는 사랑도, 뜨거운 열정도, 헌신적인 희생도, 그 무엇도 그녀를 구원하진 않았다.
그저 한 여자로 (곧 어머니가 될) 성장했을 뿐이다.
곤노 빈의 <은폐수사>는 다 읽자마자 시리즈 다음권을 샀다. 장바구니를 클릭하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주인공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현실에서 만났더라면 이런 고지식하고 답답한 아저씨 같으니라구. 하며 상종도 안했을 게다.
세상에, 마약에 손을 댄 (아주 살~짝 손댄) 아들을 두고 진지하게 자수를 먼저 고민하는 경찰 간부 아버지가 말이 되냐구.
지나치게 강직한 엘리트, 멋도 없고 밥맛도 없는데, 이 사람의 결정들이 왜 이렇게 통쾌한 거지?
우리 사회가 정의가 없는 곳이긴 한 가보다, 교과서 같은 주장들이 먹히는 게 이렇게 신기한 걸 보면.. 이러면서 이 책의 재미를 정리했다.
뒷부분에서 감동하며 그를 보내는 부하직원이라거나, 남편의 결정을 무조건 믿어주는 아내라거나, 그런 사람들을 보며 찔끔 흐르는 주인공의 눈물, 같은 부분은 좀 흥,이다.
이 고질적인 일본식 권위주의 같으니라구.
마지막으로 지금 읽고 있는 책은 텐도 아라타의 <애도하는 사람>이다.
나에겐, 책장을 펼치기도 전부터 마음에 무거운 돌덩이 하나를 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일본작가가 둘 있는데, 기리노 나쓰오와 텐도 아라타가 그 사람들이다.
뭐랄까, 인생이라는 파도에 정면으로 부딪히며 걷고 있는 느낌이랄까.
일단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미간도 찌뿌려지고.
그래서 책장에서 오래 묵혀두었었는데, 이제 읽을 만한 때가 되었다고 느껴졌는지, 손이 절로 이 두꺼운 책에 가닿았다.
시즈토의 애도하는 여행을 따라가는 길은 알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다. 말끔하게 해명된 것이 하나도 없는 채였지만 애도하는 그의 손짓을 저도 모르게 눈으로 쫓고 따라하고 있었다.
난 이렇다할 큰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는데도 죽음을 대하는 그의 태도을 절대로 웃어 넘길 수 없었다.
470쪽이 넘었는데도 그의 여행이 과연 언제 어떤 모습으로 끝이 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어머니의 마지막을 꼭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램뿐이다.
이 책의 책장을 덮고 났을 때 또 나는 어떤 마음일까.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