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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은 붉은 구렁을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이야기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마음 깊숙이 품고 있을 의문. 마치 존재의 의미를 규명하듯이 겹겹이 싸여있는 속살을 파헤치는 물음.
성인이 된 지금도 때로는, 진짜 그럴지도 몰라 하면서, 버리지 못하고 있는 생각이 있다. 예컨대 어딘가에 이야기의 세계가 있을 거라는 생각. 어딘가 소설이 열리는 나무 같은 게 있고 거기서 이야기를 따오는 게 아닐까(150) 라고 생각한 아카네처럼, 어딘가 이야기 속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있을 거라고 믿었었다. 내가 지면에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그 반대편, 내가 서 있는 지면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거기엔 알 수 없는 이야기 속의 사람들이 숨쉬고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그래서 그 세계를 들여다 본 사람들이 이야기를 쓰는 거라고. 그렇게 믿던 시절이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믿고 있는 지도 몰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책장을 덮었는데도 책 밖에 지평선이 펼쳐지고, 어디까지고 바람이 불어갈 것 같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눈을 감으면 모자이크 같은 반짝반짝하는 단편들이 잔상처럼 되살아 날 수 있을까.(109, 393) 이야기 속의 사람들이, 그들의 삶이, 책장을 덮으면 사라져 버린다는 건, 참을 수가 없다.
그곳은 세계의 끝일 수도 있고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일 수도 있으며, 혹은 습원으로 둘러싸인 신비로운 3월의 나라일 수도 있겠지. 언제나 탐욕스러운 독자인 나는, 그리고 단순한 나는, 1인칭 시점의 주인공에게 푹 빠져서, 그가 웃으며 웃고 그가 울면 따라 울고, 그가 슬프면 덩달아 가슴이 찢어진다. 1인칭 시점에 완전 쥐약인 나같은 독자에겐, 그래서, 이야기의 세계란 더욱 절대적이다. 두 손 가득 커다란 트렁크를 들고 이야기의 세계로 떠나가는 기차에 앉아 덜컹거리는 대로 몸을 내맡겨야만 하는 것이다. 분석적인 책읽기나 비판적인 책읽기는 대학교를 졸업한 이래 깡그리 다 잊어버렸으므로, 나는 오히려 독자로서는 퇴화해 버린 셈이다.
나는 왜 이야기에 빠지는 것일까. 나는 왜 어딘가 존재하는 이야기의 세계를 그토록 신뢰하는 것일까. 책을 읽는 것에서 더 나아가 책을 탐한다는 느낌이 들 무렵, 그리고 그것이 비문학이 아니라 소설에만 한정된 탐독이란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끊임없이 든 생각. 나는 왜 이렇게 이야기에 빠지는 것일까. 왜 이야기에만...
그러다 이 책을 읽으며 비로소 알았다. 그것이 노스탤지어였음을. 소설을 쓰고 있는 그녀의 가장 큰 테마, 노스탤지어, 온갖 의미에서의 그리움(315). 그래, 그거일거야. 그리움. 언젠가 내가 꿈꾸었던, 그리고 지금도 내가 살고 있는 이야기 세계에 대한 그리움. 이야기의 기원에 대한 그리움. 그 그리움을 이야기에서 만나는 순간 ‘빙고’하고 머리 속에서 종이 울리는 거지. 야, 이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삼월은 붉은 구렁을> 이라는 책은 이상한 책이다. 미스터리라고 편의상 구분하기는 하나, 나는 이것이 미스터리인지 잘 모르겠다. 팥죽색의 표지부터가 묘하게 눈에서 뒤틀렸다. 도저히 예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표지였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트렁크를 들고 책 밖으로 걸어 나가는 이 남자가 눈에 들어왔지, 처음 책을 받았을 땐 뭐야, 애들 장난 같잖아 하는 생각까지 했다.
익숙한 미스터리를 기대하고 책을 들었다. 안쪽 책이라느니, 바깥쪽 책이라느니 하는 설명을 읽으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1부, 2부 넘어갈수록 나는 안쪽 책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찾아다니느라 바빴다.
1부에서는 거대한 저택에서 존재하는지도 모를 책을 찾아 정신을 쏙 뺐다. 읽어본 적도 없는 책 얘기를 들으며 어서 찾고 싶다, 어서 읽고 싶다는 생각에 머리 속이 번잡스러웠다. 그때까진 몰랐지. 내가 이미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찾았음을, 그래서 읽고 있다는 것을.
2부에서는 두 여인의 여행길을 따라 가며, 수수께끼의 작가를 만날 생각에 가슴이 두근댔다. 어느 자매의 가슴 아픈 성장의 기록도, 밤의 세계로 떠나 버린 누이의 모습도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더욱 읽고 싶게 만드는 하나의 장치라고만 여겼다.
3부로 가면서 생뚱맞은 두 소녀의 죽음을 만났다. 혈연관계와 ‘피’ 그 자체에 농락당하는 인간의 비극(146). 그 소녀의 피를 먹고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 자라겠구나 예상할 뿐이었다.
여기까지 읽으면서도 뭐가 뭔지 잘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저 안쪽의 <삼월은 붉은 구렁을>과 내가 지금 읽고 있는 바깥쪽의 <삼월의 붉은 구렁을>이 각각의 부마다 서로 호응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뿐이었다. 책을 몇 번이나 앞으로 되돌려 다시 곱씹기도 했다.
4부 하나를 남긴 채로 머리 속은 여전히 뒤죽박죽이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쓰고 있는 여자의 이야기, 4부에 들어서니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어디까지가 이야기이며, 어디까지는 작가의 말인지. 어디까지가 이야기이며, 어디까지가 내가 읽고 있는 것인지. 붉은 구렁에서 허우적대며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던 내가, 결정적으로 모든 것을 깨달은 것은, 그 남자를 만나는 순간부터이다.
그 남자. 부드럽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모자 밑으로 차분한 표정의 의안(384). 트렁크에 가득 이야기를 넣고 다니는 그 남자가 “그럼 갈까?” 하고 말을 거는 순간, 모든 마법이 풀려 버렸다. 그렇다. 여기는 이야기의 세계. 나의 삶 또한 이야기의 세계. 내가 이야기의 세계라고 믿고 있던 이 반대편의 세상에서 누군가 빼꼼히 나의 세상을 훔쳐 보고 있다. 아, 여기가 이야기의 세계구나 하고.

Quint Buchholz [Man In 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