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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세상의 많은 기호들과 상징들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며 자기 안에 체계화시키는 방식은 모두 제각각이다. 우리가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며 사회적 언어로 서로 대화하고 있다고 해도 그 동의된 사회적 행위들 마저도 모두 완벽하게 같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나 쉽게 잊는다.
완벽한 개인의 세계에서 사회적 세계로의 확장을 강요받게 되는 사춘기 시절에는, 그 생소함이 너무나 가슴 아프고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하루는 난 이중인격자야 라고 자책하다가 다른 날은 난 아웃사이더구나 하고 서러워 하고 가끔은 난 외계인이 아닐까 체념하기도 했다. 가슴에 생채기를 내곤 했던 그 경험들이 어느새 묻혀버리고, 지금은 모두가 같다고 그래서 다른 사람은 이상하다고 치부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루 애런데일은 자폐인이다. 나는 자폐인이란 자기 안의 세계에 갇혀 지내는 병을 가진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만의 언어와 체계로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과 관계하고 있다는 건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이 설마 세상과 소통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루의 입으로 말해지는 이 이야기는 모든 게 새삼스러운 경험이었고, 또한 형언할 수 없는 미안함 그 자체였다. 물론 이 이야기는 근미래의 어느 시점, 자폐아들이 충분한 교육을 통해 기본적인 사회 생활을 부족함없이 영위할 수 있는 때의 이야기지만, 루가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고 사고를 처리하는 방식은 현재의 어느 시점이라고 해도 무방할 터이다. 오히려 자폐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와 결함에 대해 생각하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내가 루에게 가진 미안함의 정체는 비단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몰이해와 무관심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해야 하는 뼈아픈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어른으로서의 미안함이다. 당신이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얼마나 선물 같은 일인지 보여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이다. 그래서 루가 교회에서 목사님과 대화하는 장면에선 온몸이 돌로 변한듯 굳어버렸다. 가슴에 눈물이 소리없이 차올라 공기의 흐름도 멈춰버렸다. 아마도 루의 변화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톰의 마음이 이랬을 것이다.
정상인들은 어떻게 느낄까? 중학교 과학 시간에 했던 실험을 기억한다. 비스듬히 놓은 화분에 씨를 심었다. 식물들은 줄기가 어느 쪽으로 굽어지든 간에, 빛이 있는 방향으로 자랐다. 누군가 나를 비스듬히 놓은 화분에 심었던 걸까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362)
빛을 향해 곧게 자라고 싶던 루는 이제 선택의 순간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가 선택을 위해 고민했던 시간을 따라가면서 나는 오히려 내가 더 자폐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끊임없이 사람들을 패턴에 따라 분석하고 분류하는 생활, 내가 가진 방식과 다른 방식에는 그냥 귀를 닫아버리는 자포자기. 안으로만 파고드는 두더지같은 관계들. 나는 이러한 나의 방식에 만족하며 잘 살아가고 있는데, 그동안 루, 당신만 책망해서 너무 미안해.
긴 여행길에 함께 했던 책이었는데, 아드리아해의 망망한 바다 위에서 읽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잔잔한 물결이 가슴을 계속 때려서 간간히 멈춰서야 했다. 내가 루를 만난 것에 감사하며 책장을 덮었다. 그와의 만남이 아주 즐거운 일이었다는 것도 전해주고 싶다. 그가 끝에 이렇게 말했으니 모든 게 다 잘될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자, 나는 과거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이유는 알지 못한다. (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