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이야기 살림지식총서 89
김성윤 지음 / 살림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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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 지식총서는 숨겨 논  주전부리같다.  각종 주제를 얇고 가볍게 써서 머리를 식히기에 그만이다. 그렇다고 내용이 허술하진 않다. 책을 읽는 시간에 비하면 얻을 수 있는 지식은 배부르다. 작년에 몇 권 사서 그 자리에서 읽고, 서가에 꽂아두었다 오늘 우연히 눈에 띄어 다시 한번 훑어 보았다.  빗소리 들으며 커피 이야기..사실 내용은 그닥 낭만적이진 않다. 커피의 개괄적 역사로 유럽인의 아시아 침략사를 엿볼 수도 있다. 또 현재 커피 원두의 유통 메커니즘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아프리카인들의 고통도 슬며시 눈에 띈다. 그러나 이런 주제를 전면에 내세우진 않는다. 나라별 혹은 대륙별 커피의 유입 시기과 과정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등장하는 지명과 커피의 종류, 카페 이름은 낭만적이다. 낭만이란 외적인 것이 아니라 책을 읽고 상상하는 자의 것이므로 터키 식 커피,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의플로리안florian 카페, 파리의 cafe deux magots, de flore, de la paix 등등을 활자로 보기만해도 머리 속에서는 영사기가 줄곧 돌아간다. 사실, 이 카페들에서 예전의 문학적, 철학적 향기를 찾는 건 힘들다. 지금은 관광객들만이 넘쳐나는 곳이지만 파리인들은 모를 거다. 이런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이방인에겐 어떤 설렘이 피어오르는지.

커피를 좋아하니 커피를 파는 가게인 카페를 좋아할 수 밖에 없고, 맛 있는 커피를 제공하는 카페를 찾아내는 것은 작은 즐거움 중 하나다. 또 다른 나라 사람들은 커피를 어떻게 마시는지도 관찰하게 된다. 이 책에서는 터키인들(그러니까 오스만 제국일 때)은 커피를 몹시 즐겼다고 했는데 실제로 내가 본 현 터키는 애플 티를 더 즐겼다. 터키식 커피는 담뱃가루를 내린 물처럼 걸쭉하고 텁텁해서 여간해서는 즐기기 힘들었다.

내 입에 맞는 커피는 프랑스 커피와 이탈리아 커피. 에스프레소도 좋고 아침에 커다란 대접에 따뜻한 우유에 커피를 타 먹는 카페 오레도 오늘 처럼 으슬거리는 날에 딱이다. 우리는 우유 농도가 묽어 아무리 그 맛을 내려고해도 불행히도 그 맛이 나지 않는다. 우리식 다방 커피도 공복시에 포만감을 주고 한동안 못 먹으면 먹고 싶다. 커피가 지천인 다른 나라에 갈 때도 믹스 몇 개는 꼭 챙겨갈 정도로 말이다. 커피에 대해 가장 힘들었던 도시는 상하이였다. 그들은 아직 커피 보다는 차를 즐기는 문화로 카페란 개념 자체가 없다. 차는 식당에서 식사와 함께 하는 것이지 찻집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여행자에게 카페는 중요한 곳이다. 힘든 다리를 쉴 수도 있고, 생각을 가다듬고 다음 행보를 정하고, 또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곳인데 상하이에서 카페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카페는 서구화된 지역에만 있거나 아님 마작방(?)에서나 가능했지만 그 농도만은 마음에 들었다. 물처럼 연한 커피는 질색인데 다행히 그들은 우리 나라 커피보다 한 세 배 쯤 진하게 마시는 듯하다. 오늘도 많이 마셨는데 이 글을 쓰다보니 맑고 진한 원두 한 잔이 그립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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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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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소설이다. 작가는 언어를 무척 잘 다룬다. 실제로 비어와 속어가 난무하는 버니는 제쳐두고 소설집 표제인 <최순덕 성령충만기>를 보면, 형식적으로 성경을 차용해서 새로운 분위기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그렇다고 형식의 참신함이 그의 소설의 전부는 결코 아니다.

 작가가 후기에서 밝혔듯이, 소설 속 인물들은 대개 주변인이다. 눈에 띌것 없는, 아니 어쩌면 비루한 존재감 때문에 눈에 띄는 그런 인물들이다. 단순히 에피소드의 나열이 아니라 사건에 휘말리는 인물들의 배경에는 항상 권력층 내지는 기득권이 존재한다. 이기호는 드러내놓고 제도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인의 우스꽝스러움을 통해 권력의 허풍과 야만성을 풍자한다.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에서 순녀에게 감자 농사는 우주요, 삶의 원천이다. 자갈밭에 거름을 주고 애정을 주며 가꿔오던 중 군부대가 들어서서 그녀의 우주를 가로채려하자, 이런 말을 한다. "도대체 국가가 누구냐, 그렇게 신성한 것이 어찌 자주 피난을 가버리느냐, 멧돼지도 피난 한 번 안 갔다.." 일자무식인 순녀에게 반체제 발언은 생존본능이었을 것이다. 더불어 위기에 처한 현대 소시민이 처한 상황이기도 하다. 문명이란 이름 하에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각종 정책들이 등장하고 따를 수 밖에 없는 소시민, 또는 이익집단 내에 있는 힘없는 구성원들이 하고 싶은 말과 일맥상통한다.

또 최순덕과 시봉은 어떤가? 순덕의 광신적 행보를 통해 소비사회에서 낙오자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해학적으로 접근한다. 순덕은 신의 응답을 받기 위해 바바리 맨이 필요하다. 바바리 맨은 무능함 때문에 회사와 집에서 당하는 무시를 견디기 위해 광신도 순덕이 필요하다. 순덕은, 아니 순덕의 맹신이 적어도 바바리 맨에게만은 위안이 될 수 있다. 생업을 팽개치고 전도에 모든 시간을 바치는 사람들을 이따금식 지하철에서 만날 수 있다. 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바바리 맨의 고뇌가 숨어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버니> 역시 사창가 풍경을 묘사한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매춘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공급자만 비난을 받는 그런 세상이다.

이기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날카롭고 슬프지만 눈물을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웃음을 택한다. 웃으면서 세상을 뒤집어 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즉 주류의 시각이 아닌 비주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을 권한다. 물론 불편하다. 세상을 비주류로 살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정작 본인은 주류라고 생각하면서 긍적적 마인드를 최고의 가치로 교육받은 사회에서 다른 목소리로 현실을 목도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적어도 타인에 대한 배려에 있을 것이다. 소외된 사람들의 우주는 사소한 것이고, 그 사소한 것이 지켜질 때 그들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우리느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우주를 하찮게 여기고 없애며 우리의 우주 또한 누군가에게 하찮게 여겨져 빼앗기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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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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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나 희망은 실망과 절망을 낳기 마련이다. 기대나 희망이 긍정적인 가치로 자리잡은 것은 절망을 이겨보려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판도라의 상자에 유일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 희망이었듯이 말이다. 성석제의 이름으로 적잖은 기대를 했고, 기대했던 만큼 실망스럽다. 그렇담 내 판도라 상자에는 무얼 넣어야할까?

단편들 자체는 유려하고 재밌다. 무엇보다도 우리말을 구사하는 유연성은 마치 스릴있는 곡예를 보는 것처럼 아찔한 체험이었다. 그러나 이기호, 김영하, 박민규, 김경욱의 단편들이 주는 강렬함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 성석제의 소설집은 힘이 딸린다. 그이들의 소설이 산악지대를 힘있게 올라가는 4륜 구동 차라면, 성석제의 소설은 좁고 한적한 국도를 안정감있게 달리는 중형차 같다. 4륜 구동에 앉아서 산악의 높낮이를 가늠할 수 있어 역동적이지만 성석제의 소설은 소음도 별로 만들지 않으면서 주변 경치를 감상하게 선사하는 관찰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게 만든다.  

성석제보다 조금 연배가 어린 일련의 작가의 소설들이 환상적이지만 현실의 단면을 볼 수 있다. 그것이 내가 그이들과 이루고 있는 시대적 감수성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성석제의 소설은 환상성만이 느껴져 말 그대로 소설에나 나올 법하다. 황만근, 남가이 등 비주류적 인물들의 분위기에서 아무런 메시지를 읽을 수 없다. 토속적이지만 입체감이 없다. 그들은 필연이 만들어낸 인물이 아니라 이야기를 위해 만들어진 철저한 허구적 인물이기 때문인 것도 같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궁금해서 다른 이들이 쓴 리뷰 몇 편을 읽어보았다. 그들 역시 썩 흡족하지는 않은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집의 판매지수는 이기호나 김경욱 소설집의 지수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나는 그 이유를 <꽃의 피, 피의 꽃>에 이런 글귀에서 찾아본다.

"노름은 믿음이다. 자신에 대한 믿음, 자신의 운에 대한 믿음, 노름의 일회성에 대한 믿음, 인생의 일회성,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노름을 하게 한다. 누구의 믿음이 큰가, 철저한가에 따라 이기고 진다. "

이기호나 김경욱의 소설집이 내 편애적 취향일 수있겠지만 다른 독자들에게는 성석제라는 패에 대한 믿음이 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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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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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 특강>을 읽고 완전히 반해서 집어든 책이고, 역시나 반할 만한 책이다. 내용면에서 중첩되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반복을 통한 학습효과도 있다. 서양화든 동양화든 그림을 본다는 말보다는 그림을 읽는다는 말이 더 매혹적이다. 본다는 개념이 물리적 행동으로 일차원적 단계라면, 읽는다는 개념은 그림을 보고 그림 속에 숨은 뜻을 미루어 짐작한다는, 업그레이드된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오주석 선생의 그림 읽기는 탁월하다. 그리고 전문가로서의 열정이 마구 느껴진다. 정선의 <인왕제색도>에서 그린 날과 날씨를 알아맞추는 과정은 한 편의 영화가 같다.

선생의 글을 읽어가면서 글 속에서 드러나는 동서양의 세계관을 비교하게 된다. 오랫동안 서양 중심의 세계관에 익숙해져서 선조들의 세계관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가령, 윤두서의 <자화상>을 읽어주는 꼭지에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신체를 귀중히 여기는 정신이 그림 속에 들어가 있다고 한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작은 점, 흉터라도 그림에서 조차 없애지 않으려는 정신. 오늘날 결점을 가리기 위해 포샵질은 일반적이고, 나아가 성형이 대세를 이루는 것과 대조적이다. 현대 의학/과학 기술에 기대는 것은그 자체로 악덕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의 정신이 죽어있다면 기술은 독과 같다. 선생의 글을 많은 사람들이 읽고 감동한다면 소비사회의 소란함과 경박함이 조금은 덜어지지 않을까, 꿈을 꿔본다.

그리고 내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점은 평면성이다. 서양화에서 르네상스 이후로 인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초상화가 많지만 한국화에서는 산수화가 지배적이다. 서양화가 빛의 움직임, 다른 말로 바꾼다면, 외부 환경에 따라 변하는 모델을 많이 연구했다면, 한국화는 외부환경에 관계 없이 산수, 인물 그 자체에 관해 집중한다. 지리적 위치 때문일까? 오주석 선생은 마음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지만 난 물리적 원인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부르디외가 말했듯이, 문화적 취향은 학습되는 것이다. 입체파의 왜상anamorphosis는 알지만  한국화의 삼원법은 모르는 것은 분명 우리 교육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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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1-23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에 사는 교포2세분과 함께 읽어보려구요. 책을 선택하는데 넙치님의 리뷰가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넙치 2010-11-24 10:20   좋아요 0 | URL
지금 써논 리뷰 다시 읽어보니..부끄럽군요;;
제 리뷰는 허접하지만 책은 정말 훌륭해요. 사실전달과 약간의 감동이 있어요.
 
장국영이 죽었다고?
김경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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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지 여러 날이 지났지만 무슨 말을 쓸지 모르겠다. 내가 읽은 첫 소설집, 즉 이 소설집 전 소설집,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를 읽고 당시에는 그닥 마음에 들지 않는 작가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비슷한 연배 작가들보다 내가 좋아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현대 작가들의 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한 건 얼마되지 않았다. 아무런 글도 읽을 수 없을 때, 현대 소설은 유용하다. 활자 중독은 아니지만 며칠이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삶을 낭비하고 있다는, 정말이지 쓸데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사실은 이 두려움 때문에 내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소설이라도 읽으면 두려움을 조금은 진정시킬 수 있다.

김경욱 작가의 소설집 제목은 모두 대중문화와 관련이 있다. 바그다드 카페, 베티, 커트 코베인, 장국영. 그리고 부재나 상실과 관련이 있다. 커피가 없다, 누가 죽였나, 죽었다고에서 보는 것처럼 말이다. 지난 번 소설집보다 문장이 매끄러워지고 거슬리지 않는다. 그러나 충격은 덜하다. 작가가 말하는 방식에 이미 익숙해졌다고 할 수도 있겠다. 작가와 같은 시기를 살아왔고, 같은 문화를 체험고 있지만 인터넷 문화 속으로 나는 작가만큼 깊숙히 들어와 있는 것 같진 않다. 인터넷이 만들어주는 우연에 기반한 서사는 흥미로우면서도 낯설다.

김경욱의 단편들에서는 차가운 냉소가 돋보인다. 차가운 대리석 위에 맨살이 닫는 느낌이 좋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절망적이어서 싫기도 하다. 대리석에 닿은 살은 처음에는 차갑지만 시간이 흐르면 살은 체온을 빼앗기고, 대리석은 체온을 얻어서 차가움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 이 때, 따뜻해졌다고 착각할 수 있고, 실제로 대리석의 차가움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 그러나 이 소설집은 내 체온만 계속 빼앗가는 것 같아 점점 한기만을 준다. 읽으면서 따뜻한 온기가 간절하다. 책에서 이렇게 온기를 갈구하는 걸 본다면, 실제 내 삶에 온기가 부족한건 아닐까, 또 두려운 생각이..-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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