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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사진전을 보러 DDP에 갔었다. SNS에 근사한 사진들이 넘쳐나서 건물 자체에 대한 호기심도 컸다. 동대문역사공원1번 출구에 섰더니 대략 난감했다. 입구는 조그많고 둥근 지붕이 사람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하늘도 잘 안 보이고 출입구도 잘 안 보이고. 일단 구멍을 찾아 전시관을 무사히 찾았다. 친구가 도착 전이라 둘레길이라 이름붙인 길을 따라가봤다. 건물이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 건물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건축물 같았다. 널직한 길을 따라가는데 볼 것이 흰벽과 흰바닥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곡선이라 전방에 뭐가 있는지도 알 수 없고. 그리하여 나는 바닥과 벽에 가느다란 금이 수도 없이 나 있는 걸 발견했다. 볼 거라곤 이것 뿐. 이러다 곧 무너져서 대형참사로 이어지는 상상까지 나아갔다. 마치 길을 잃고 찾아 헤매는 악몽의 소재로 쓰이면 좋을 구조였다.

 

나는 건물이 특히 미술관이 이렇게 인간배척적인데 깜짝 놀랐다. 전시를 보고 잡담도 하고 무언가 생각도 좀 정리하고 하는 공간이 있어야하는 게 아닌가. 미술관 카페에서 창 밖을 내다보며 차 한 잔 하는 기분이 얼마나 근사한데. 미술관 옆 카페는 창고처럼 붙어있고 의자도 등받이 없는 어수선한 임시장소 같았다. 주객이 전도된 매우 안 좋은 건축물의 예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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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트시네마가 낙원동 시절을 마감한단다. 불편한 점이 아주 없는 게 아니지만 일단 극장 앞이 널직한 옥상이라 시원하다. 주로 흡연자들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빈공간을 남기지 않는 소비주의 사회에서 공간을 비워놓는다는 건 엄청난 발상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역시 테이블과 의자가 많이 놓여있다. 멀티플렉스가 의자에 얼마나 인색한지. 기껏해야 불편한 의자를 넓은 공간에 어수선하게 놓는다. 주변은 카페  천지고 안락한 카페로 발걸음을 옮기게 만드는 전략이기도 하다. 씨네큐브만해도 의자에 너무 인색해서 미리 도착하면 있을 곳이 없다. 아트시네마의 언제나 남아도는 테이블과 의자. 이 잉여로운 공간만으로도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영화를 본다는 행위가 단순한 소비행위가 아니라 문화행위라고 위안을 삼을 수 있는데 공간도 중요하지 않을까.


아트시네마가 서울극장으로 새둥지를 튼단다. 그리고 잉여로운 시간을 보낼 공간인 라운지를 만들기 위해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다. 관심있으신 분은..요기로.

http://www.funding21.com/project/detail/?pid=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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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5-03-25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끊었지만, 저도 아트시네마 옥상에서 인사동 내려다보면서 담배 꽤나 피웠어요. 영화 보고 나와서 다음 영화 기다리면서 한대 빼어 물면 어찌나 그렇게 좋던지요. 서울극장에서나마 오래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DDP는 겉에서 볼 때도 그닥이었는데, 안에는 더 비호감인 모양이군요.

넙치 2015-03-27 14:36   좋아요 0 | URL
소격동에서 낙원동으로 옮겨왔을 때 정 안 갈 거 같았는데 서울극장으로 이전한다는 말을 들으니, 모르는 사이에 낙원동도 꽤 정들었던 거 같아요. 요즘은 예전만큼 잘 안 가게 되지만 제가 할머니 되서도 남아있었으면 좋겠어요.

DDP는, 제겐 좀 충격적인 공간이었어요.@.@
 

외출할 때마다 가방에 어떤 책을 넣을 지 고민한다. 책 내용도 중요하지만 휴대하기에는 책의 무게도 중요한 요소이다. 책 무게를 따지다 전혀 읽고 싶지 않은 책을 넣어서 나가기도 한다. 읽고 있는 책들은 대체로 무거워서 마치 1킬로 아령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기분이다. 어떤 날은 한 시간 가량의 독서시간이 있을 거를 예측하면서도 가벼운 책을 못 찾아 그냥 나갈 때도 종종 있다. 그런 날이면 별 목적없이 핸드폰을 들여다보게 된다. 눈이 침침해지고 시간은 낭비되고...난 책을 읽고 싶은데....

 

영문판 페이퍼백들은 새털처럼 가벼운데 왜 우리 출판사들 책은 이렇게 무거울까. 영문판 페이퍼백들은 휴대하기에 전혀 부담이 없다는 걸 요즘 새삼 느낀다. 내가 알지 못하는 출판계의 사정이 분명히 있겠지만 요즘 책들은 터무니없이 무겁다. 빳빳한 표지와 두꺼운 내지는 심지어 자꾸 덮여서 신경질적으로 자꾸 손으로 누르게 되는 책도 있다. 표지가 두꺼운 거 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두꺼운 내지를 사용하는 건 왜 일까? 독서대에 책을 올려놓고 클립으로 고정시켜도 책이 자꾸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 덮이려고 하는 책도 많다. 마치 책은 펴서 읽는 게 아니라 책장을 덮어서 그대로 보기만 하라는 말인 것처럼.

 

언젠가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책 무게 때문에 출퇴근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인구가 줄었다고. 이 말이  빈말만은 아니다. 내가 그 줄어든 인구 중 1인이다. 제발 책 좀 가볍게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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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9-10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동의합니다.
책세상문고의 책이 그래서 좋더라고요. 크기가 작거든요. 근데 페이지 수가 많아 두꺼운 책이 많아요. 두껍지 않게 1,2권으로 만든다면 가벼워서 좋을 것 같아요.
저도 어디 갈 때 가방에 꼭 책을 넣고 싶은 1인입니다. ^^

넙치 2014-09-11 14:58   좋아요 0 | URL
책세상 문고는 휴대하기에는 좋은데 그닥 독서 욕구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게 함정..;;; 전문서는 어쩔 수 없더라도 문학만이라도 가볍게 만들어줬으면 좋겠어요. 그럼 지금보다 두 배는 책을 읽을 거 같아요!ㅎㅎ;
 

http://medical.jinbo.net/xe/?mid=page_ZhRN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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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1월 1주

과거는 떠나보내야 한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말이면 송년회란 의식을 치루곤하죠. 그런데 과거는 정말 보낼 수 있을까요? 아니요. 한 살 더 먹으니까 과거에 대한 여러분들의 말이 떠오르네요. "미래는 과거 기억의 부분들로 이루어져있고 현재는 과거가 될 부분들"이라구 프루스트가 말했어요. 과거는 현재와 미래에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는 말이잖아요. 과거를 잊으려하기 보다는 어떤식으로 기억하는지가 새해에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해서 과거를 기억하는 시선이 담긴 영화를 세 편 골랐어요. 세 편 모두 죽음을 소재로하고 있네요. 새해부터 왠 죽는 이야기냐, 재수없다 하실까봐 망설여졌지만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작은 출발점이라 생각해 주세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여름의 조각들>, 그리고 <러브 스토리>

 

 

 아내의 죽음으로 남자는 새로운 삶, 아니 새로 태어납니다. 일상적인 공에서 샌드위치 만드는 일도 낯설기만합니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 후지산을 보고 싶어했지만 남편은 들은 척도 안 했죠. 아내가 과거 속으로 사라질 줄 몰랐던 탓이죠. 갓난 아기가 엄마 품을 떠나 방황하는 것처럼 남자는 후지산을 보러 갑니다. 아내가 왜 후지산을 보고 싶어했는지, 아내가 없지만 아내가 느꼈을 감정을 대신 체험해봅니다. 벚꽃이 비처럼 뿌리는 길에서 남자는 혼자 서성입니다. 과거에 아내가 남자 옆에서 이런 심정이 아니었을까요...아내의 마음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남자는 과거와 다르게 살지 않을까요.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겪어보면서 미래에 남자는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바뀔 수 있을 거 같은 희망을, 저는 봤어요.

 

 

 

이 영화는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해서 자식들이 어머니의 유품을 처리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기억은 물질에서 비롯된다고, 프루스트가 말했습니다. 마들렌느 과자를 한 입을 베어 무는 순간 어린 시절로 여행을 할 수 있다고요. 마들렌느 과자가 타임머신인거죠.

 

어머니의 유품을 처리하는 방법을 두고 형제들이 모여 의논을 합니다. 각자만의 생활이 있어 오래 고민할 시간도 없고 물질적 기억에는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유품 처리할 때 가장 슬퍼했던 사람은, 집안일을 도와주는 분이었습니다.  그 물건에 간직된 이야기가 사라지는 것이니까요. 많은 골동품들이 결국 오르세 박물관으로 갑니다. 어머니의 유품들이 전시실에서 유리상자를 입고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자식들이 그 전시품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이 있는데 어머니의 과거는 그 자식의 것이 되지 못하고 불특정 다수의 사람의 것이 됩니다. 불특정 다수는 물건에 깃든 이야기를 활자와 도슨트 같은 걸로 전해 들으면서 개성에 맞는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가겠죠. 그러니 자식들이 매정하기만 한 건 아닌 거 같아요. 

 

 

 

말이 필요없는 영화기도 하죠. 저 어렸을 때, <나 홀로 집에>만큼 자주 텔레비전에서 방영하곤 했었습니다. 무슨 때만 되면 볼 수 있었던 영화였는데 십대, 이십대, 삼십대마다 느낀 점이 조금씩 다르더군요. 십대 때는 눈싸움 장면이 주로 남았고, 이십대 때는 혼자 남겨진 올리버 때문에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삼십대 때는 여름날 뉴욕 브라이언트 파크에서 야외상영으로 봤습니다. 공원은 연인과 친구들로 가득했습니다. 피크닉 준비해서 담소도 나누고 맥주와 와인도 홀짝이며 다들 영화를 봤죠. 저는, 여행객으로 혼자 스크린을 말 없이 스크린에만 집중했죠. 아니 실은 집중이 안 됐죠. 몇 번이나 본 영화기도 하지만 날씨 좋은 피크닉장에 준비없이 혼자 간 뻘쭘한 기분을 영화 보는 내내 느꼈답니다. 결국 영화를 끝까지 못 보고 공원에서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번에는 <러브 스토리>를 함께 볼 사람을 꼭 만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 결심은 아직도 미래 시제랍니다. 올리버가 제니와 함께 했던 과거로 과거와는 다른 올리버로 살 것처럼 저도 이 영화에 엮인 짧은 과거 에피소드로 어떤 미래를 열어두었습니다. 써 놓고 보니 출발과 맞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네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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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12월 1주

지난 주에 <푸치니의 여인>을 개봉했는데 이탈리아는 장인들의 손길이 가득한 나라인 것 같습니다. <시크릿 가든>에서 현빈이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만든 물건만 썼는데 이태리제에 길들여지면 다른 물건들은 눈에 안 들어올 것같아요. 이탈리아 영화의 탐미적 영상에 길들여지면 왠만한 영화는 눈에 안 들어 올 거 같아요. 영상도 격정적이고 인물의 심리도 격정적인 영화가, 쌀쌀한 이번 주에 어떨지요.  

푸치니가 <서부의 여인>을 작곡하는 과정을 미스테리 형식으로 담은 영화입니다. 커다란 사건이 없이 자칫 밋밋하게 보일 수 있지만 아주 시네마틱한 영화랍니다.  영화는 대사나 줄거리가 중요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정황'을 만드는 게 영화를 만드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대사 없이 음악과 인물들의 움직임을 잡아내는 롱테이크와 클로즈업의 효과적 사용으로만 이 영화는 내러티브를 훌륭하게 전달합니다.  

 

 

 

 루치노 비스콘티 역시 탐미적 영상을 추구했죠. 특히 후기 작품이 그런데요. <이노센트(순수한 사람들)>은 아내가 바람을 핀다는 심증만을 가진 남편의 시선이 두드러진 영화입니다. 권태기에 있는 한 부부의 이야기인데요.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것 같은 심증을 갖고 아내와 아내의 애인데 대한 질투의 눈빛과 남편의 심경을 표현하는 미장센은 이 영화의 볼거리입니다.  

<푸치니의 여인>처럼 움직이는 회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킵니다. 마치 19세기 박물관 속 주인공들이 다시 살아 움직이는 것 같기도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넘치는 빛과 바람에 하늘거리는 옷들도 에로틱합니다.  

 

 

 역시 비스콘티 영화인데요. 말러 교향곡5번 3악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흐릅니다. 주인공 역시 작곡가고 베니스로 요양을 옵니다. 여기서 이 병들고 시들어가는 작곡가는 한 소년을 보고 사랑에 빠집니다. 물론 소년은 아무것도 모르죠. 늙은 작곡가는 소년을 멀리서 그저 지켜볼 뿐입니다. 소년의 웃음, 해변에서 달릴 때, 식당에서 마주칠 때도 남자는 소년한테서 시선을 거둘 수 없습니다.  

이 나이든 작곡가의 시선과 관객의 시선이 일치하면 남자의 고통이 얼마나 처절한지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림같은 베니스 골목에서 몰래 소년을 훔쳐볼 때 남자의 얼굴이 트랙인 되었나 줌 아웃되면서 소년은 또 다른 골목으로 들어서고 남자는 소년을 놓칠까봐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알수 없는 힘에 이끌렸듯이 남자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는 것도 잊은 채 소년을 훔쳐보는데 몰두합니다.  

이런 거 보면 누가 이탈리아 사람이 직설적이라고 했는지,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모두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대한 격정이 표현되는 영화인데 그 격정이 참 거시기합니다. 자신말고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측면이 있어서 말하기 뻘쭘한 걸 세 영화 모두 잘 잡아내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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