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학사상 세계문학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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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문학을 잘 모르면서, 또 모르기 때문에  편견을 갖고 있다. 현대 일본 작가들의 참을 수 없는 가벼운 글을 멀리하고 있다. 하루키, 에쿠니 가오리 작가 정도의 책을 각각 한 권씩 읽은 적이 있을 뿐이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다시 읽었지만 어린 날 내가 무엇 때문에 흥분했는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 역시 문학이란 영역에서 볼 때, 그닥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리고는 하루키 유행에 동요하지 않는 걸 내심 기특해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05년, 소세키의 데뷔작인 이 책을 읽는 동안 많이 즐거웠고, 또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일본 문학이란 것이 얼마나 빙산의 일각인지 확인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근대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탈근대 시대에 근대적 취향을 갖고 있다면 퇴행성 인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근대에는 매력적 요소가 있다. 계몽을 벗어나 사회를, 현상을 비판하는 날카로움에 나는 번번이 매료된다. 이런 매력적인 근대는 탈근대란 담론 속에서 비판을 받기 마련이다. 당시의 비판적 요소들 속에는 또 다른 권력이 형성되고, 탈근대는 근대성에 자란 권력을 붕괴하고 나아가 약자로 불리는 사회적 약자(여성, 성적 소수자, 장애우 등등)의 권리와 평등에 촛점을 둔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현재성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살아있다기 보다는 근대적이다. 우선 주인공들, 구샤미, 메이테이, 간게쓰는 지식인 계층이다. 그들을 바라보고 비판하는 건 고양이. 이들 지식인이란 작자들이 어떤 사건을 벌이거나 하지 않는 탈서사구조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상당히 현대적이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다 난데없이 고양이는 불쑥 친구 고양이들, 또는 운동 하는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다. 특히 운동하는 장면은 그림이 떠오를 정도로 경쾌하게 묘사되어있다. 이런 고양이라면 한 마리쯤 키우고 싶다는 실없는 생각도 불쑥 든다.

 주인공들이 하는 일이라곤 그저 말씨름일 뿐이다. 중학교 영어선생 구샤미가  지식인 행세를 하는 모습,  즉 서재에 들어가 책 두 페이지를 못넘기고 잠들고 마는 주인을 고양이는 노골적으로 경멸한다. 읽으면서 뜨끔하기도 한 장면이다.  간게쓰의 박사 학위를 둘러싼 외부의 시선을 사업가인 가네다네 부인의 태도를 통해 알수 있다.

매끄럽지 않은 줄거리지만 이 책은 줄거리에 집착한다면 형편없는 책으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과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과관계의 부재는 5백 페이지가 넘는 소설에서 결코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게으른 지식인들이 쓴 가면 뒤에 숨겨진 본성, 나아가 스스로 사람답다고 여기는 인간의 이면을 날카롭고 유쾌하게 지적하고 있다. 마지막 고양이의 죽음에서 일종의 체념같은 것이 느껴진다. 물 항아리에 빠져서 올라가려고 바둥거리지만 올라갈 수 없다. 고양이는 마침내 마음을 편히 갖고 아등바등하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죽어간다.

"나는 죽는다. 죽어서 태평을 얻는다. 죽지 않고선 태평을 얻을 수 없다. 나미아미타불, 나미아미타불, 고마운지고, 고마운지고. "라는 고양이의 마지막 말에서 고양이처럼 인식하는 인간은 살기 힘들다는 결론으로 받아들여진다.  씁쓸한 여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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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낭만주의자 - 위대한 예술가의 초상 4 외젠 들라크루아
외젠 들라크루아 외 지음, 강주헌 옮김 / 창해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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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미술관을 들어가자 마자 오른 쪽에 혼자 걸려 있는 그림이 있다. 바로 들라크루아의 '사자사냥'. 갈색의 향연으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지만 붓질이 만들어낸 역동성이 강하게 전해진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꿈틀거리는 거대한 힘이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것 같다. 들라크루아의 그림들에 강하게 끌리는 이유는 격정적이라는 것이다.

나란 인간이 실제 생활에서는 격정과 거리가 멀기에 격정적 그림이든 글이든, 무조건 반하는 경향이 있다. 들라크루아의 그림들이 갖고있는 경계의 모호함, 색채의 혼재, 근육의 선명함 등으로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단순한 역동성이 아니라 소용돌이 치는 듯한 붓질을 보고 있으면 끌어오르는 뭉클함이 있다. 이리하여 이 책까지 읽게 되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그림 공부 시작했을 때, 친구와 주고받는 편지글, 2부는 일기, 3부는 가장 영양가 있다. <르뷔 드 파리Revue de Paris>지와 <두 세계의 잡지>에 실렸던 평론 모음집이다. 옮긴이 강주헌 씨의 해제에 따르면, 들라크루아는 상당한 독서를 하며 글을 썼다고 한다. 3부의 평론들은 그의 취향이나 예술관을 엿보기에 좋을 뿐아니라 미술비평글을 읽는 즐거움이 있다.

들라크루아는 글(문학)과 미술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펜보다는 붓이 감정을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한다고 썼다. 막연히 루벤스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보니 루벤스의 영향을 받았고 내가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는 라파엘로에게 영감을 받았다. 라파엘로 그림 이야기를 읽으면서 문득 이탈리아에 다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불끈들기도 한다. (세상은 넓고 갈 곳은 정말 많고나)

모방은 창작을 하는 사람에게 필수적이다. 그러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창조적 모방만이 창작의 기본이라고 한다. "새로움은 창조하는 예술가의 정신 속에 있는 것이지 예술가가 모방하는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그의 말은 창작 기본 수칙과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느끼지만 창작이란 영역 역시 근면한 습관이라는 것. 1년이 채 안 되는 모로코 여행을 하는 동안 500장의 그림을 그릴 정도의 열정이 근면의 증거고 습관의 증거다. 그리고는 관습을 어길 수 있는 용기. 그의 그림이 낭만주의라고 불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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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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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에서 마실을 다니다보면 심심찮게 거론되는 이름이 바로 김영하다. 현작가들 소설을 사는 것이 어는 순간부터 아깝게 느껴지기 시작해 인터넷 헌책방에 들렀더니 고전에 비해 두 배 정도의 가격을 형성하고 있는 김영하. 새 책과 별반 차이가 없고(한 2천원 정도) 결정적으로 귀찮아서 새 책을 사긴했다. 이 단편집 한 권만 읽고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찝찝함에 장편도 한 권쯤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결국 검은 꽃을 다음 번에 주문하게 될 것이다.

각설하고, 한마디로 이 소설집을 요약한다면 맥시멀리즘maximalism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단편의 플롯과 묘사는 과잉으로 넘쳐난다. 난 맥시멀리즘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편들은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현작가들에게 가장 고마워하는 점이 바로 이 점이기도 하지만 이 소설집의 책장 넘김은 다른 작가들의 것과는 조금 다르다.

그의 소설에서 인물들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심리묘사보다는 행동묘사, 특히 사건묘사 중심이다. 사건을 따라가려고 나는 서둘러 문장을 읽어내려간다. 그리고 마지막에 마주하게 되는 도시의 비정함 내지는 허무. 장황하지만 그의 바람대로 '중독성 있는' 서사는 그의 장기며 단점이다. 자칫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하기 쉬울 수 있는 것이 과잉 플롯인데 마지막에서 던져주는 허무가 빈곤하게만 보이는 사실성을 회복해준다.

<바람이 분다>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게임을 하는 장면. 간결하고 속도감 있는 문체는 피가 낭자해 흐르는 스크린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게 이끈다.

 <비상구> 역시 피가 흐르는 장르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다. 박찬욱식 영화를.

<흡혈귀> 뿐 아니라 이 소설집 전반에 걸쳐 그렇지만, 순수란 존재하지 않는다. 삶에서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건 버티기에서 오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너무 절망적이지 않은가. 그의 말대로 '유독하고 매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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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예프스끼와 함께한 나날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또예프스까야 지음, 최호정 옮김 / 그린비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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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가의 아내가 아니라 한 남자의 아내가 쓴 결혼 생활 에피소드들이 감칠맛나게 쓰여있다.  이 책이 거장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적인 면모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읽기 시작했지만 700쪽에 달하는 책을 읽어가면서 안나란 여인의 성품과 이 책 자체가 갖고 있는 문학성에 매료되었다.

안나 자신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성에 미치지 못하는 고등교육을 받은 그저 평범한 여인이라고 하지만 그녀가 쓴 책에서 그녀의 예리한 지성을 느낄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연구가들에게는 필독서라는 이 책을 통해 안나란 한 여인의 문학적 감성과 재능이 숨쉬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 이 책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럽 인상기>를 읽고 였다. 이 책은 격정적이고 도박에 빠진 도스토예프스키의 일기와 편지 모음집이다. 도스토예프의 사적인 글에서 항상 드러나는 격정은 안나를 성녀처럼 생각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안나의 입장에 본 안나와 도스토예프스키는 많이 다르다.

스물 다섯 살 연상의 남편과 신혼시절, 그녀 많은 시집 식구들을 미워했고 고통스러워했다. 딸린 식솔들로부터 도망치듯 바덴바덴으로 여행을 와서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4년 동안 외국에서 생활을 한다. 이 시기를 안나는 가장 좋안 던 시절 중 하나라고 회상하고 있는다. 박물관과 미술관, 도스토예프스키와의 대화 등에 대한 기쁨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아 지적 호기심이 매우 왕성한 여인인 것 같다. 레오니드 치프킨의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은 이 시기의 생활을 소재로 쓴 소설이기도 하다.

또한 안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도벽을 부추기기도 했다. 그의 불같은 기질을 잘 알고 있어서 창작의욕을 북돋아주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했다. 극심한 가난과 빚 속에서도 그녀에게 돈은 중요하지 않았다. 도박으로 남편의 기분이 전환되어 생산적 감정으로 바뀔 수 있다면 그녀는 기꺼이 자신이 가진 것을 내주었다.

이것 뿐만이 아니다. 격정적이고 참을성 없고 성격이 급한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했는데 그녀의 지혜로움이 두드러진다. 물론 그녀에게 일종의 대리만족이란 것도 전혀 무시할 수 없는 것도 같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창작을 돕는 것에 커다란 보람을 느끼고, 물심양면으로 그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일은, 스스로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면 결코 지속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들의 사랑에 질투가 나면서도 존경을 하게 된다. 사랑이란 서로 노력해야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안나는 세기를 앞서간 미래 지향적 여인이다. 가정을 경영할 줄 알고, 사랑을 경영할 줄 아는. 아, 이제 주변은 그만 배회하고 도스토예프스키를 다시 읽자.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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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 이야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8
고골리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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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갖고 있는 책은 민음사 판이 아니다. 청년사에서 나온 판으로 알라딘에는 없다. 알라딘에 없는 책은 리뷰를 쓸 수 없는 대략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는군. 책 리뷰가 검색을 하다 스치는 네티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 기억을 보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그러므로 임의로 청년사 책을 읽고 민음사 책에 리뷰를 기록해둔다.

고골리를 처음 읽었을 때는 고등학교 때였다.  고등학교 때를 떠올리면 나는 독서의 즐거움에 상당히 빠져있었다. 지금과 달리 많이 내성적이고 낯가림이 심했던 터라 책은 친구같은 역할을 했다.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면서 다음에 빌릴 책을 찜해두고 빌린 책을 빨리 읽어나갔다. 다음 책을 빌리기 위해서. 점심시간에도 읽고, 쉬는 시간에도 책을 읽고 심지어 수능과 관계 없는 수업시간에도 책을 읽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읽은 책을 모두 이해한 것 같진 않다. 그러나 내가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책은 분명히 많은 역할을 했다.

고골리의 <코>와 <외투>를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있고, 다시 읽으면서 비교적 선명하게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일차적 즐거움. 그리고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러시아 문학에 끌리는 내 성향은 변함이 없다는 것.

사실 고골리의 소설을 다시 집어든 것은 며칠 전 읽은 <마술적 사실주의> 덕분이다. 고골의 작품들, 카프카의 <변신>등도 마술적 사실주의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작품 속에 녹아 있는 정신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와 일맥 상통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계급의 문제는 어느 사회에나 있고, 계급의 차이로 인한 문제를 묘사하는 작품들도 많다.

그 중 고골리가 매력적인 이유는, 계급의 문제를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에서 기술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소박한 세계관과 순진함이 짓밟히고 사라져가는 과정이 처연하다. 마술적 요소들 때문에 익살스러우면서도 슬프다. 서구의 모더니즘이 부루주아의 실상을 직접적으로 폭로한다면, 고골의 소설은 프롤레타리아를 통해 간접적으로 부르주아를 비판한다. 물론 이 점은 사회 분위기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글자를 옮겨 적는 정서가 일인 구등관은 자신의 일에서 삶의 낙을 발견할 줄 아는 소박한 인물이다. 그는 성실함의 대명사다. 그런 그에게 재난이 닥친다. 외투가 낡아서 새 외투를 장만해야하는 것. 최소 월급을 받고 살아가는 그에게 일대의 난관이고 어렵게 장만한 외투를 둘러싸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새외투는 그를 죽음으로 몰고간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한 인간에게는 전부일 수 있다. 내 기준으로, 또는 일반적 기준으로 타인의 사는 방식을 평가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종종 이 사실을 잊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코>는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풍자한다. 코가 오등관처럼 차려입고 거리를 활보한다는 소문으로 사람들은 술렁인다. 살아가면서 실체없는 소문에 쓸려다니는 일을 없도록은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횟수를 줄일 수 있도록 경계를 할 수 있으리라. 

고골리를 읽으며 잠시 내 십대의 편린을 떠올리는 흐믓한 시간이었다. 아울러 영감이 샘 솟는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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