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의 박물관 동문선 문예신서 196
앙드레 말로 지음, 김웅권 옮김 / 동문선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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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류의 책을 읽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이 책을 통해 지식을 얻으려고 하거나 감상을 얻으려고 한다면 실망 또는 좌절을 하기 쉽다. 방대한 작품들과 시공간을 초월한 예술에 대한 사유들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앙드레 말로의 예술관에 대해 깊은 애정도 없는데 이 책을 읽고 정리하는 의미란?

예술사라함은 흔히 연대기적 서술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루브르나 오르세에서 작가 중심으로, 또는 연대기 중심으로 방을 구성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말로는 이 일반적 방법론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방식을 취한다. 즉 상상의 박물관이란 일반적 개념의 박물관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예술가의 정신에 녹아있는 가치를 생각하게 유도한다. 장황하고 난해한 글이 즐거움을 찾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하지만 서구의 박물관  수집벽에 대한 비판, 예술과 신성한 것의 차이에 대한 관점이 지뢰같은 문장들 속에 숨어있다. 

가령, 보티첼리의 그림 속 여인들이 피카소의 그림 속의 여인보다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입체파의 초상화는 모델과 암시적으로 닮을 수 있지만 모델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지 않는다라고.  다소 보수적 견해기도 하지만 옳은 말 아닌가! (물론 이런 식의 단순화가 옳다는 건 아니다)

또 "사람들이 사물들의 본 모습도 전혀 찬양하지 않는데 사물들의 유사함을 통해서 찬양을 유도하는 회화는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그렇담 미술관에서 모네가 에트르타를 그린 그림을 보는 것보다 에트르트타에 가서 절벽 위로 변하는 하늘과 해를 관찰하는 것이 때로는 더 값질 것이다.

이 책이 쓰여진 시기는 모더니즘기였으므로 꼭 그곳에 간다기 보다는 사물에 대한 진정한 애정을 기울이라는 부르주아에 대한 풍자가 아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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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133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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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 책 전반에 걸쳐 주장하는 바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일 것이다. 이 말은 과거의 존재는 현재와 관계에서 가치있고, 현재는 과거의 영향 아래 이루어진 것을 의마흔 것이리라. 과거와 현재의 함수 관계는 비단 역사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살아가는 진리라고 말하고 싶다.

어제의 내가 있기에 오늘의 내가 있고, 오늘의 내가 있기에 과거의 내가 있다. 말 장난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한 개인은  뫼비우스의 띠같은 시간 속을 유영한다. 과거에 집착하고 현재보다 좋은 점만을 보는 사람은 향수에 젖어 시간을 소모할 것이고, 과거에서 일어난 일의 인과관계를 분석하며 객관성(카는 객관성을 불가능함을 인식하는 일이라고 한다)이루어 더 나은 현재란 시간을 설계할 것이다.

진보란, 카도 말했듯이, 현재에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추상적이다. 그러라 까뮈를 떠올려보자. 손을 놓고 입으로만 진보인지 아닌지 말하는 게 추상이다. 따라서 판단은 미래에게 맡겨두고 오늘, 과거의 일을 취사선택하여 인식함으로써 과거와 현재가 대화할 수 있는 진정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사실 새로운 말은 하나도 없다. 워낙 알려진 책이기도 하고, 이미 이 책이 쓰여진 이래로 여러가지 역사관이 나왔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핵심적 사상은 역사가에게 뿐 아니라 모든 생활인에게 지침이 될만하다. 그리고, 현재 내 상황. 남의나라 80년대를 정리하면서 머리를 드는 혼란스러움에 조금은 위안이 된다.

중요한 건 취사선택해서 통찰력을 갖고 인식하는 것.  언제쯤 난 통찰력 있는 인식을 하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까?.과연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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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적 사실주의
Lois Parkinson Zamora 지음, 우석균 외 옮김 / 한국문화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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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처럼 마술적 사실주의의 정의를 다룬 소논문 모음집이다. 모두 3부로 나누어졌고 1부는 특히 마술적 사실주의란 용어에 대한 개괄이다. 개괄서가 그렇듯 반복된 말들을 하고 있지만 마르께스나 보르헤스를 읽지 않고, 순전히 통밥으로 행간을 읽는 내겐 유용하기도 했다.

문학론이라기보다는 전반적 예술사조에서 마술적 사실주의를 다루고 있다. 개념정의는 미술사를 넘나들고 있다. 2부는 문학이론을 다루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논문은 2부에 있는 테오 L. 단Theo L. D'haen의 "마술적 사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특권화된 중심의 탈중심화"였다.  이 논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내 생각과 정확히 일치!하는 부분을 발견했다. (이것만으로도 내겐 너무 값진 책으로 기억될 것이다.) 미국과 유럽은 모두 제 1세계지만 그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용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분명하다. 미국이 이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텍스트의 탈정치성과 유희성에 집중되어있고, 맑시즘 비평과 해체 비평에서 바라본 관점은, 바로 텍스트의 탈정치성을 크게 부각시켜 비판한다는 논지. 그러나 이 두 상반된 견해 모두 제1세계적 성향으로 '특권 중심적'이다.

반면에 제3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마술적 사실주의는 탈중심적이라고, 3세계가 갖고 있는 주변적 성향을 인식한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에 의해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보다 앞서 발달했다. 단은 마술적 사실주의를 포스트모더니즘보다 보완된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제3세계의 작품들 뿐 아니라 서구의 작품 속에서도 마술적 사실주의의 혼재를 긍정한다. 그러나 1세계는 마술적 사실주의란 말을 포스트모더니즘에 포함시키기를 거부함으로써 '특권화된 중심'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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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 시공아트 12
프랭크 휘트포드 지음, 김미정 옮김 / 시공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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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위인전에 속하는 책이건, 영화건, 그저 감탄만 하기엔 내가 너무 나이들었음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누군가에 대해서 애정을 갖기 시작하면 그 사람의 내면세계가 궁금하다. 주변에 있는 사람이야 만나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며 애기를 나누면서 습관과 버릇 등을 체험한다. 죽은 사람, 또는 너무 성공해서 가까이 갈 수 없는 사람의 경우에는 종종 그와 관련된 책을 찾는다. 이런 경우, 섭외 1순위는 문학성에 관계 없이 잡문이라도 그 인물이 쓴 책이다. 다소 솔직하지 못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 역시 그 사람의 내면세계의 일부인 것이다.

그 인물이 쓴 책이 없을 경우에는 아주 난감한 상태에 처한다. 제 3자가 쓴 책은 자료와 정보는 더 많을 지 모르지만 저자를 통해 주인공을 바라보고, 또 다시 내가 그 주인공을 바라보는 삼중창을 가져야하기 때문에 주인공의 내면세계와는 정작 거리가 멀어져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프랭크 화이트포드를 통해 바라 본 에곤 실레는 더 궁금하다. 저자에 따르면, 실레는 이중성을 갖고 있었다. 나는 곧 프랑스와 트뤼포를 떠올렸다. 실제 생활에서는 여자를 좋아해서,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성욕이 왕성해서 매독에 걸려 살았던 그다. 그런데 자신의 작품에서 그린 사랑은 순수하고, 특히 육체적 순결을 중요시 한다. 또 어렸을 때, 극심한 가난을 겪어서인지 부를 동반한 성공에 용의주도하게 다가갔었다.

이 책의 내용에 따르면, 실레 역시 후원자들이 많았고, 자신이 밝혔던 대로 가난 속에서 살면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바로 이 점이 아이러니하면서도 고통으로 일그러진 자화상 및 초상화의 대가로 이끈 구심점이 아닐까. 당시 부르주아지의 후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그는 거부할 수 없었고, 육체적 안락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부르주아지의 허영에 깊은 염증을 느낀다. 이런 분열이 그의 재능을 통해 구상화되어 그림으로 나타난 게 아닐까. 이 책을 읽고 난 내 느낌이다. 지나치게 유물론적 관점이기도 하지만 확실히 흥미로운 부분이다. 결핍은 욕망을 낳고 욕망은 불안을 낳는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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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
루쉰 지음, 전형준 옮김 / 창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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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편의 단편이 들어있는 소설집으로 상하이로 출발하기 전날 서둘러 사서 상하이 행을 함께 한 책이다. 고단한 하루 끝에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루쉰이 죽음을 맞이한 도시에 가면서 루쉰의 책은 관성과도 같은 끌림이었고, 선택이었다.

 <아Q정전>은 그 옛날,  속편하게 공부만 했던 어린 시절에 읽었다는 기억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나의 기억력이란 늘 이 모양이다. 다시 읽고는 감탄, 또 감탄을 한다. 십대에 어찌 이런 깊이를 이해할 수 있으리. 이 책은 서른이 넘어야 가슴으로 와 닿는 책이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날카로운 통찰력과 유머, 그리고 비장미를 되새김질하면서 김승옥의 소설들이 오버랩된다.

다른 단편들도 좋지만 너무 짧아서 상징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아Q정전>은 아큐란 인물이 상징하는 소시민의 일대기를 엿볼 수 있다. 이 소설은 중국 근대역사 속에 위치하는 개인의 운명이 갖는 질곡에 대한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평범하고 선한 아큐가 도둑이되고 죽는 과정을 말하면서 아큐의 일생이 아니라 사회의 시선, 권력을 경원시하는 사람들의 우매함,  역사의 흐름을 말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크게 변하지 않은 거 같다. 현재성을 지닌 책들은 미래에도 읽을 가치가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알면서도 고칠 수 없는 문제기도 하다. 나는 어디 쯤 속해 있을까. 아큐일까, 아니면 아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주변인일까. 차라리 아큐가 되고 싶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 실제로는 주변인에 묻혀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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