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1 -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9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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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는 박통의 시대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학교에서 근/현대사 부분은 늘 뒷부분에 배치되어 있었다. 2월이면 수업이 거의 이루어 지지 않았고, 근/현대사 부분은 늘 깨끗하게, 밑줄 하나 치지 않은 채 역사시간이 공식적으로 끝나곤했다. 그리고 새 학기가 시자되면 다시 고조선부터 배우는, 아니 암기하는 죽은 역사 교육이 반복되곤했다. 근/현대사는 그렇게 역사책에서 부록으로 남아있는 것으로 기억된다. 어린 마음에 지루한 고조선이 나오는 앞부분만 맨날 반복하지말고 거꾸로 수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70년대는 내가 숨을 쉬고 있었던 시대이지만 사물의 이치를 판단할 수 없는 아기 때이다. 박통 시기를 살았지만 박통 시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당시의 사건들, 비화들이 80년대 후반 민주화란 이름하에 90년대에 걸쳐 에피소드들이 파편처럼 흩어져 나왔었다. 90년대에는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것을 말할 수 있는 기쁨에 성찰보다는 센세이셔널한 효과가 더 컸었던 것 같다. 

2000년대 들어서 경제는 침체기고, 우리 사회와 개인의 삶 속에 깊숙하게 스며있는 파시즘의 근원을 추척하면서 박통 시기가 성찰되고 있다. 사실, 이 정도로 심각한 줄 몰랐다. 박통은 대통령이라기 보다는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봉건시대의 군주와 같은 모습이다. 오늘날의 사회, 정치, 경제 문제는 최근의 일이 아니라 수십년 동안 계속되온 구조적 문제점 때문이다. 이 구조적 문제점을 인식하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 역사를 반추하는 이유다.

이런 책을 읽고 숙지해야할 사람은 사실 정치권이나 지배층이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에 관심이 없을 것이고 현재 얻을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것이다. 국가는 개인이 만든다. 의식있는 개인이 없는 한 박통의 변종은 끊임없이 나올 것이다. 그러면서 나란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역시 내 앞의 이익을 챙기기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본다. 부르주아적 삶을 영위하면서, 또는 꿈꾸면서 의식의 한 귀퉁이에는 미미한 저항이 있다. 이 미미한 저항을 볼때마다 나는 이중인격자고 비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까뮈의 자살, 벤야민의 자살, 전태일의 분신자살을 감히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해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별개다. 나는 행동하는 인간이 아니라 이해하는 인간으로 남아 하늘이 내게 준 생을 다 할 것이다. 이해하는 인간의 고통, 그것이 내 운명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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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탱 게르의 귀향
내털리 데이비스 지음, 양희영 옮김 / 지식의풍경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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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봤더라면 아마 사지 않았을 책이다. 제라르 드 빠르디유가 가짜 마르탱을 연기했던 <마틴 기어의 귀향>을 보면서 심하게 흥분했었다. 본지 몇 년이 흘렀지만 영화 내용보다는 영화를 보고 난 후의  흥분을 더 선명하게 기억한다.  나중에 리처드 기어가 주연을 하고 <서머스 비>로 리메이크 되었지만 할리우드 냄새가 솔솔나는 영화로 원작의 섬세함에는 견줄 수 없는 범작일 뿐이었다.

대략적 줄거리는 진짜 마르탱이 부재한 동안 가짜 마르탱이 나타나 아내와 상속될 재산을 가로채려하는데 진짜 마르탱이 나타나 전모가 밝혀진다. 현란한 상황 재연없이 법정에서 인물들이 증언을 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고 그들의 얼굴표정에서 긴장감이 감도는 심리묘사가 빼어난 영화였다. (이 문장을 쓰면서 깨닫는데 난 법정 드라마를 좋아하는거 같다)

그리고 내가 충격적으로 기억하는 건 바로 베르트랑드의 반응이었다. 그녀는 가짜 남편의 정체를 알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아는 사람"(내 기억력을 믿을게 못되지만 대략 이런 말이었다)이었기 때문에 가짜 남편을 진짜 남편보다 더 좋아했다.

이런 영화에 대한 기억에 힘입어 어쩌다 읽게 되었다. 영화가 만들어진 후 쓰여진 책은 흥미롭지 않은데 이 책은 다행히도 단순한 줄거리 나열이 아닌 것에 일단 안도했다. 역자 후기를 보니 미국인 프랑스 역사가인 저자는 영화를 만들 당시에 참여했는데 사실과 벗어난 극적 구성을 극복해보려고 쓴 책이란다.

한 사건을 두고 여러 사람의 진술을 객관적 사료를 바탕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지명과 여러가지 시대 상황에 대한 이해가 짧아서 두 번 읽었다. 분량이 짧아서 다행이지. 짧지만 많은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먼저 16세기 결혼 제도에 대한 야만성. 마르탱이 아내와 아들을 남겨둔 채 홀연히 떠나는 이유는 바로 제도가 부과하는 가장이란 임무에 순응하지 못한 인물로 비춰진다. 그는 가족 밖의 세계에 대해 꿈을 꾸었고 결국 8년 동안 잠적한다. 베르트랑드 역시 마르탱이 없는 동안 아르노(가짜 마르탱)한테서 열정을 느꼈기 때문이고 의무적 결혼 생활이 아닌 자발적 결혼 생활로 주체적 삶을 꾸려간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 삶이 거짓에 기초한다할지라도.

마지막 부분에  몽테뉴가 이 사건을 언급한 에세이, 그리고 판사가 쓴 책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간의 객관성이란 취약하기 그지 없는 것으로 법정에서도 진실을 구별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시사하고 있다. 파스칼의 명언이 생각난다. "피레네 이쪽에서는 진실인 것이 피레네 저쪽에서는 거짓이다." 절대적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진실을 규정하는 것은 인간이 처한 상황이다. 또 며칠 전에 읽은 글귀도 떠오른다. 인간관계란 같은 방식으로 보는 것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보는 방식을 "존중"하는 데 기초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혼란스러웠던 이유가 독자에게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여러 시각을 조명하면서 존중하는 걸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명심하고 또 명심할지어다. 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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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1-25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넙치님 탱스투~

넙치 2011-01-25 22:04   좋아요 0 | URL
저도 땡스투..ㅋ 오래 전에 끼적거린 걸 다시 읽어서 좋네요. 삼 년 전에는 이런 생각을 했구나...하고 근데 몹시 부끄럽네요. 사고의 폭이 좁아서.ㅜㅜ
반딧불이님은 어떤 생각을 하실까, 궁금해요.
 
파놉티콘- 정보사회 정보감옥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3
홍성욱 지음 / 책세상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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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헤이워드의 책을 읽다가 시선의 권력에 관한 대목을 만났다. 거기서 제레미 벤담의 파놉티콘에 관해 말하고 있어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쓰기 전에 먼저, 수전 헤이워드의 글쓰기 방식이 사뭇 유행적 흐름을 타고 있는데 정이 쬐금 떨어졌다. 뤽 베송을 분석하는 두껍지 않은 책에서 그녀는 모든 사회학적 이론을 언급하고 있다. 부르디외의 문화계급론, 보드리야르의 소비사회와 시뮬라시옹, 로라 멀비의 에세이, 이제 벤담과 푸코의 파놉티콘까지...뭐 덕분에 파놉티콘 뿐 아니라 푸코의 <감시와 처벌>까지 들추어보긴 했지만 문제는, 수전 헤이워드가 이 방대한 개념들을 얄팍하게 다루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유행에 민감한 글쓰기가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책 얘기를 정리해 보면, 정보화 사회의 감옥을 벤담의 원형 감옥과 연결짓고 있는 저자의 순발력과 재치가 번뜩인다. 인간은 어떻게 보면 이 원형감옥에 적합한 존재가 아닌가도 싶다. 어떤 제도든 시작할 때, 선의에서 시작하지만 적응의 동물 인간은 곧 어떤 제도에든 익숙해진다. 그리고는 변종을 만들어 그 순기능에 반대되는 역기능을 사용하는 자들이 권력을 획득한다. 이런 권력의 메커니즘은 벤담의 시대든 현대든 변함없이 이어져온 것처럼 보이고, 단지 도구만 '발전' 또는 '개발'이란 이름으로 치환되어오는 듯해 절망감이 든다.

저자는, 파놉티콘 개념을 통해 넷Net상의 감시 기능 수행을 말하고 사생활privacy 강화를 주장하지만, 나는 이 프라이버시 강화 필요성에 회의적이다. 누구를 위한 프라이버시인지 모호하고,  프라이버시의 정의 또한 분명하지 않다.

얼마전, S-Oil 카드를 만들었다. 에스 오일 주유소를 그동안 한 번도 이용하지 않다가 무려 50원!이나 저렴한걸 발견하고 기름을 넣으면서 만들었다. 그리고 적립금이 있다는 삼성카드로 결제 했다. 이로써 나는 삼성화재에서 한 통의 전화와 에스 오일로부터 세 통의 전화를 받았다. 물론 텔레마켓팅을 위한 전화였고, 나는 바쁘다고 약간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정보화 감옥이란 이런 것이다. 내가 적립금을 위해 삼성카드를 사용하면서 카드사가 아닌! 화재사에 내 정보를 누출했고, 역시 에스 오일 주유소 적립금을 위해 에스 오일사와 연계된 회사에 내 정보를 나도 모르게 내 준 것이다.  소비사회에서 공짜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이런 사소한 일에서도 드러난다. 모든 적립금은 내 정보를 팔아먹은 대가다. 그러니 적립금을 포기하고 내 정보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적립금은 그대로 두고 내 정보를 지켜달라고 항의할 것인가. 이런 종류의 항의란 너무 귀찮은 일이고, 그렇다고 소비사회 이전의 삶을 사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자, 선택의 여지가 있는가, 대안은? 솔직히 말하자면, 악당들에게 도용되지만 않는다면 나는 내 정보의 일부를 팔아먹어도 신경쓰고 싶지않다. 귀찮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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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루쉰 지음, 이욱연 엮고 옮김 / 예문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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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산 책을 올해 주워들었다. ^^

산문이라고 하기에 아주 짧은 글들 모음이지만 시류를 담고 있고, 고민한 흔적들이 날카롭게 전개된다. 마치 김훈 씨의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느꼈던 상쾌함이 있다. 구체적 배경을 다 알수 있는 건 아니지만 추천의 글에 리영희 선생의 말대로, "루쉰의 글 속에서 오늘날의 우리와 나를 본다."

20세기 초에 진보적 생각을 품은 이가 루쉰 혼자는 아니지만 글 속에 녹아있는 날카로움은 루쉰만의 색채일 것이다. 놀라운 점은 상당히 공격적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루쉰의 글을 내가 읽고 있겠지만.  지식인의 고뇌와 고민이 수동적이고 체념적 어조이기 쉬운데 루쉰은 약간 투쟁적이다.

글을 쓰고 이렇게 절규한다. " .....이상은 모두 빈말이다. 붓으로 쓴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말인가. 총에 맞아 청년의 피가 쏟아졌다. 피는 먹으로 쓴 거짓으로는 가릴 수 없으며, 먹으로 쓴 만가輓歌로도 취하게 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위력으로도 짓누를 수 없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정신을 개혁할 수 있는 것은 문학과 예술 뿐이며 한 사람이라고 깨어나게 할 수 있다면 글을 쓰겠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로 글을 썼다. 그는 희망에서 절망을 보지만 그의 절망 속에서 후대는, 희망을 보았다. 20세기 초반의 인물의 글이 한 세기를 넘는 21세기에도 읽혀지는 이유이다.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꿈에서 깨어났으나 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아직 갈 길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제일 중요한 것은 그를 꿈에서 깨우지 않는 것입니다." 루쉰이 말하는 꿈이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꿈이다. 미래는 잊고 현재를 위해 꽃을 피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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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와 인간 - 가면과 현기증 (Le masque et vertige)
로제 카이와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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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서적을 읽으면서 고민하게 되는 점은,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들것인가, 이다 . 놀이하는 인간이란 개념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것도 아니고 유행의 꼭지점에서 내려오고 있는 중인 것 처럼 보인다. 옷이나 액세서리만 유행이 있는게 아니라 학문에도 유행이 있기 때문이다. 호이징가의 <호모 루덴스>를 읽지 않아서 비교는 할 수 없지만 일단 로제 카이와가 정의하는 놀이 개념이란 다음과 같다.

아곤(경쟁), 알레아(운), 미미크리(모의), 일링크스(현기증). 각각 대응하는 놀이와 타락했을 때의 효과를 주장한다. 이런 개념 용어를 접할 때마다 내 머리는 단단한 화석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긍정할 수 있는 보편성에서 독특한 개념 용어를 나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만들지 못하며 유연한 두뇌를 가진 훌륭한 이들의 개념을 읽으며 감탄하는 운명으로 생을 마칠 것이다. -.- 이렇게 운명 운운하는 걸 보면, 나는 어느 정도 내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어두운(?) 미래를 맞아 마음이라도 편하게 준비하기 위함이다. 카이와에 따르면! "운명에 몸을 맡기는 자는 그 판결을 미리 알거나 그 은혜를 받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라고 했다.

또 한편으로는 종교가 없는 내게 종교 교리로 삼을 만한 말도 들어있다. 자유롭고, 분리되며, 확정되어 있지 않고, 비생산적이며, 규칙이 있고(일상의 법규를 정지시키고 일시적으로 새로운 법규를 확립), 허구적 활동이 놀이의 특징이다. 어떤 면에서 나는 완벽한 놀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세워 놓은 미래상을 위해 한걸음씩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중이긴 하다.

작업실에 나가기 시작한 지 이제 한달이 넘었다. 바삭거리는 햇살을 쬐며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까지 걸어가는 5분 남짓한 시간에 나는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 한다. 어떤 날은 바깥 날씨와는 상관없는 어두운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고 걷는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서 심호흡을 하고 진정한 놀이를 하고 있다고 토닥인다. 때로 이 토닥임은 유효하기도 하다. 난 경제적 인간 보다 한 수 위인 호모 루덴스야, 하고 거울을 보며 마음으로 말한다. 그리고 미소 짓는 것처럼 입가를 올려보며 일주일의 첫날을 시작한다. 놀이의 특성상 불확실한 활동으로 결말에 대한 의문이 지나치게 넘쳐서 내 목을 조이지 않는한 나는 앞으로도 계속 놀이하는 인간으로 남아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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