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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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좀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올해의 발견이다. 독특한 스타일로 짜여진 찌질한 주인공들의 일상을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키득거리면서 이 소설집을 읽고 있노라면, 알것 같아, 그 마음..하는 말이 입가에 맴돈다. 웃음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처연하고 씁쓸한 뒷맛이 음주 후에 찾아오는 두통처럼 묵직하다. 주인공들은 상식을 벗어난 행위를 하고 있고, 그 속에서 깊은 고독이 전해져 온다. 그들을 고독하고 두렵게 만드는 건 뭘까. 작가 후기에서 밝혔듯이, 작가가 처해 있는 상황, 즉 직업적 소설가로서 겪게되는 정체성과 혼란의 문제다. 이런 글을 읽는 건 반갑다. 벌써 마감했어야할 질풍노도의 시기를 나는 지금도 겪고 있다. 그렇지만 괜찮아. 질풍노도기를 겪는 건 너뿐만이 아니야, 하고 이 소설집은 속삭이는 것 같다.

내 청춘을 갉아먹고 세상을 보는 눈을 어둡게하는 직장 생활 속에서 하나의 돌파구가 있었다. 바로 학교. 학교란 공간은 이중적이다. 제 나이에 다닐 때는 숨막히는 곳이지만 더 이상 다닐 수 없게 될 무렵이면, 무릉도원까지는 아니어도 그 어느 곳에도 없는 귀한 보물이 숨겨져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피곤한 몸과 달리 마음만은 쌩쌩해져서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했다. (이것도 벌써 몇 년 전이구나) 지인들에게 이제 직업을 바꿀 것이라고 헛소리를 해댔다. 이렇게 초롱초롱한 마음으로 앉아있는 신입생들에게, 그러나 대학원장님 왈,  글써서 밥 먹고 살 수 없다. 영화 만들어서 밥먹고 살 수 없다, 하셨다. 즉 내 꿈과 달리 직업을 바꿀 수 없단 말씀을 첫 시간에 하셨다. 그래도 나는 믿지 않았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 중 제 뜻대로 사는 사람은 적지만 그래도 있다. 난 그래도 있는 쪽에 속할 수 있다고 믿.었.다..믿고 싶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지만 세상은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을 뿐더러 호락호락하지도 않다. 부지런한 사람에게도 그럴진대, 게으른 내게는 더 미지수다. 현재의 상황으로 보면 대학원장님이나 까칠한 한 선배의 말이 증명되고 있는 것 처럼 보여 이따금씩 두렵기도 하다. 글을 써서 밥을 먹겠다는 생각은 처음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지않을까, 싶다. 밥벌이로서의 글쓰기보다는 글쓰는 행위 자체를 열망한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면서 밥벌이를 놓을 수 없고, 일은 좀 줄였지만 어쨌든 계속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해야한다.

이런 현재의 상황은 뭐랄까, 한편으로는 아늑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걷잡을 수 없는 갈등 요인이다. 다들 가정을 이루어 심리적 경제적 안정을 이룬 친구들을 보면서 내 성장이 이십대에서 멈춘 것처럼 느낄 때도 있다. 물론 내가 선택한 삶이고 후회하거나 그들의 삶을 부러워하는 건 아니지만 동요가 없다는 건 거짓말이다. 나도, 다들 그러는 것처럼, 안정되고 내가 잘하는 것만 하면서 취미생활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은 생각도 든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갈지자로 왔다갔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알면 이렇게 갈팡질팡하지 않겠지만. 낙천적 성격이 내 삶의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내적으로는 폭풍 속에 혼자 놓여있는 것 같다.

작가가 후기에 적어 놓은 말이 있다.

소설이 잘 써지지 않을 때마다
내가 중얼거리는 말이 있습니다.

겁 많은 두 눈아, 겁내지 마라.
부지런한 네 두 손이 다 알아서 해줄 테니.

나에게 위로가 되었던 이 말이,
당신에게는 미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미소지을 수 없다.  게으른 내 두 손은 다 알아서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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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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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맛나고 유익한 책을 이제야 만나게 되다니, 오호통재라! 사실 표지 그림 때문에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인간이란 화장실 들어갈 ‹š와 나올때 마음이 달라진다고 하지 않는가. 책을 읽고 나면 이 표지 속 호랑이는 사랑스럽고 정겹게만 느껴진다. 나의 간사함이란.

그동안 미학서나 미술서를 닥치는대로 읽어왔다. 뛰어난 감식안은 없어도 풍월 정도는 읊을 수 있다고 자만했지만 오주석 선생의 글을 읽고 이런 내 생각이 얼마나 초보자 단계인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한테 결핍된 요소 때문에 살짝 괴롭기도 하다. 선생이 말하는 그림 감상 원칙은 '마음'이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란 옛 글을 인용하고 있다. 마음의 원칙은 비단 그림 감상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크고 작은 일에 적용될 수 있다. 모든 일은 마음 먹기에 달려있지만 안타깝게도 마음이란 건 다루기 힘들다.

강의체를 그대로 사용해서 현장에서 강의를 듣는 것처럼 재밌게 읽으면서 내 습관을 뒤돌아보게 된다. 선생의 말대로 나는, 특히나 서양화에 길들여져 있고 서양 사상, 특히 제1세계가 요동치고 변화하는 과정에 흥미를 느끼고 그런 분야의 책과 함께 그들의 세계에 길들여져 있다.

그러나 내 탓만은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다. 나처럼 지극히 평범한 인간은 선전에 약하다. 1세계인들은 자신의 문화를 알리는데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을 하고 있다. 문화를 전파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자본이 들기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는 아직 후진국 대열에 속해있다. 고전문화가 아무리 빼어나도 알리고 함께 감상해줄 후손이 없다면 그 문화는 죽은 문화다. 감상하는 눈은 저절로 길러지는 게 아니다. 보고 들을 기회를 많이 가져야하고, 그러한 기회 확장은 누구 한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각종 전시회가 풍요로운 요즘, 우리 문화 홍보는 그닥 접해보지 못했다. 서양 미술사조를 줄줄 읊을 수는 있지만 우리 미술사는 커녕 대표적 작가들도 말할 수 없다. 이런 재밌고 쉬운 책들이 더 많고, 다양하게 나오는 것 역시 긍정적 역할을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점은 우리 문화를 긍정적이고 자주적으로 보는  선생의 시각이다. 그림을 속에 담긴 당대의 풍속을 들려주면서 우리가 너무 부정적인 면에만 강세를 두고 있다고 한다. 한민족의 기질이란 것이 우뇌형 인간형으로 감정이 발달했는데 어떤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주먹구구식으로 전개하는 것같다. 이 방식은 문화 전파에서도 마친가지여서 무조건 훌륭하다는 말만 들었지 왜 훌륭한지 들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런데 오주석 선생은 그림을 세세히 보여주면서 논리적으로 증명한다. 선생같은 한국미술 전문가의 글은 언제든 찾아 읽고 싶다.

아무튼 오주석 선생 살아 생전에 강의를 들어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뒤늦게라도 선생이 남긴 다른 책들을 곁에 두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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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가을 우리 시대의 고전 1
요한 호이징가 지음, 최홍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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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읽기 텍스트로서 재미가 쏠쏠하다. 풍부하고 유려한 글쓰기는 역사서라기 보다는 박식한 에세이에서 찾을 수 있는 즐거움을 발견케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중세란? 극히 한정적일 것이다. 대중은 가난하고 금욕적이고, 교회는 번창해서 타락하고..이런 일련의 조합이 떠오를 것이다. 호이징가는 이런 조합을 문학적 아름다움이 깃든 문장들로 풀어간다. 그리고 그 박식함이란!

호이징가가 주장했듯이, 르네상스의 뿌리는 중세에 있으며 모든 세기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독립적 세기란 하나도 없다. 단지 동시대에는 유기적 관련성을 알 수 없을 뿐이다. 난 이런 점에서 움베르토 에코가 포스트모던한 현대 사회에서 중세를 보앗듯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중세의 그림자를 본다.

중세는 무엇보다도 이원론의 세계였다. 순수한 하나님의 왕국과 관능적이서 억압된 죄악의 세상이 그것이다. 아름다움 역시 신의 왕국에만 있는 것으로 중세인들이 실재하는 세상에는 형식만이 만개할 뿐이었다. 종교는 지극히 일상적이어서 종교적 사고를 과도하게 드러내고 물질 속에 고정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한다. 즉 아름다운 신의 세계에 이르는 모든 의식이 세속적 진부함과 물질주의로 타락한다.

현대는 이런 중세와 닮은 꼴이다. 물질이 신의 자리를 대신하고 숭배의식을 받는다. 황금이 거주하는 예배당은 도시 곳곳에 있다. 차가 드문 새벽이나 밤에 양재동 사거리를 지나는 길에 남부순환로에 서있는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들은 차갑고 육중하게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사람들은 그 건물들 중 한 칸을 소유하기 위해 하루하루의 삶을 버리고 있다. 더 나은 미래라는 미명하에 구원의 길이 아닌 타락 길을 걸으며 하루하루의 삶을 소진해가고 있다.

나는 이런 현대적 삶이 중세보다 덜 비참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호이징가가 중세를 더 혹독한 시기들로 묘사했음에도 불구하고 풍요로운 물질 속에 마음은 더 혹독한 가난을 겪고 있는 것을 안다면 그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런 내 염세적 생각은 호이징가의 말대로라면, 곧 낙관주의의 뿌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중세가 르네상스와 더불어 계몽주의에 이르러 세계를 의식 있게 개선하려는 열망, 삶에 대한 두려움이 용기와 희망으로 끌어오리려는 근간을 이루었듯이 말이다.

"매 시대마다 행복한 기억보다는 불행과 고통의 흔적을 더 많이 남긴다. 주로 불행한 일이 역사로 남는다."는 말처럼 아찔하고 혼돈스러운 현재에 스며든 행복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기를...

*호이징가의 플랑드르 화파에 대한 접근은 흥미롭다. 플랑드르 화파의 목적은 사물의 외면을 실제처럼 재현하는 것이었다. 실제와 혼동할 정도로 비싯한 그림을 보고 감동하는 것은 인간의 감수성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그 시대에 열렬한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 주제를 그림으로써 예민한 감수성을 자극한 것으로 기법도 이성도 균형도 비례도 가치선택도 웅장함도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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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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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책 장을 덮으면서 나는 과연 소설을 왜 읽는 걸까, 하는 근본적 물음을 다시 던진다. 나는 서사구조가 탄탄한 소설보다는 심리나 사회적 분위기가 잘 드러난 소설을 즐기는 것 같다. 인과관계 없이 감정에만 기대는 서사 중심의 이야기에 나는 전혀 감동하거나 느낌을 받을 수 없다. 이 소설이 마술적이지 않다고 했지만 난 마술적 느낌을 받았다. 꽉 찬 인물들과 배경 묘사는 장황하고 무거워서 더운 나라의 예술적 정서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란 노인은 연애 소설을 읽는다. 그에게 연애 소설이란, 야만성과 거리가 먼 순수한 자연의 상태를 의미한다. 노인은 자연과 인간계, 비문명과 문명의 매개자이다. 그는 글자를 쓸 수는 없지만 글을 읽을 수 있고, 아마존의 인디오가 아니지만 인디오말을 하고 인디오처럼 살아간다. 또 동물들과 교감을 할 수 있는 동시에 읍장을 비롯한 인간 무리가 벌이는 사냥의 길잡이 역할을 하기도 한다. 노인은 인간의 횡포에 죽음으로 맞서는 삵쾡이와 대적을 한다.

나는 이런 줄거리와 메시지에서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 노인이 읽는 연애 소설 글 귀에 이런 말이 있다.

"폴은 모험에 다라 나선 친구이자 공모자인 사공이 다른 곳을 보는 척하는 도안 그녀에게 뜨겁게 키스했다. 그사이에 부드러운 방석이 깔린 곤돌라는 베네치아의 수로를 따라 유유히 미끄러지고 있었다."

노인은 이 문장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뜨겁게 키스 하는 것이 어떤 건지 모르고, 또 베네치아의 곤돌라가 왜 수로를 따라 미끄러지는 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바로 노인의 심정을 가졌다. 삵쾡이와 아마존 밀림의 나무들과 동물들이 낯설고 단어 하나하나를 음미하는 노인에게 애정을 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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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 - 전2권 세트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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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사태 당시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국경일도 아닌데 갑자기 동네에 태극기들이 나부꼈다. 어린 내 눈에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과 달리 국경일이면 태극기를 열심히 게양하던 시절이었으므로 태극기의 등장은 국가와 관련된, 그런 어렴풋한 기억만이 있다. 나중에 듣기로 대통령이 죽었다는 걸 알았지만 어떤 슬픔도 걱정도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그 일이 10.26이었음을 알았고, 앞 집에 걸린 태극기가 선명하게 떠올랐고, 지금까지도 10.26은 앞 집 태극기와 더 관련이 있어보인다. 대학을 들어가서도 우리는 사회의 자유화 시위보다는 학내 민주화 시위에 더 익숙했다.

 한번은 명동에 놀러나간 적이 있는데 그날 대규모 집회가 있었다. 집회를 저지하는 최루가스에 익숙했던 시기였으므로 대수롭지 않았다. 옷가게가 즐비한 골목에서 우연히도 달아나고 있는 동기를 한 명 만났다. 검문이 있던 시기였지만 심하지 않았으므로 별 걱정하지 않고 가볍게 안부를 묻고 헤어졌다. 다음 날, 물론 그 친구를 학교에서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민주화 시위의 상투성에 길들여졌고, 쇠락해가는 구호 속에서 젊음을 보냈다. 여러 친구들이 소위 '운동'에 발을 담갔지만 바깥에서 보기에 치열하지도 않았고, 그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거 같다는 빛도 볼 수 없었다. 욕 먹을 말일지 모르겠지만 젊음 시절의 치기쯤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나와 같은 과 친구들은 문화 생활에 열중이었고, 사회보다는 자신에게 더 몰두해 있었다. 이건 당연한 일이었고 선배들은 우리 학번의 개인주의적 성향을 비판하기도 하고 힘겨워하기도 했다. 군부 독재 하에서 초,중,고교 시절을 보낸 우리 학번은 민주화라는 말에 흥분하거나 감동할 수 없는 세대가 되었다. 이미 내가 대학을 들어갔을 때는 군부독재가 말년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렇게 나는 고스란히 현대사 속에서 살아왔지만 체험한 것이 아니다. 광주항쟁의 처참함을 뉴스나 비디오 화면으로 보았을 뿐이다. 10.26이 일어난 날 펄럭이던 태극기처럼 말이다. 그리고 <오래된 정원>을 읽으면서도 배경은 아득한 남의 나라 얘기처럼 들린다.

 이건 황석영 선생이 의도한 바인지도 모른다. 제목처럼 오래된 정원을 훗날, 가만가만 산책하는 느낌이었다. 정원 속에 배어있는 눌물, 웃음, 피는 모두 바래서 이제는 하나의 추억으로 보듬을 수 있는 것처럼 아늑했다. 아픈 시간은 오래된 정원 속에서 아름답고 서정적인 하나의 러브 스토리로 변해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랑이 사는 곳, 사랑하는 부모와 형재가 사는 곳이 내가 사랑해야하고 살아가야하는 사회라는 걸 말하는 것 같다. 그곳이 사회주의 국가든, 자본주의 국가든, 또는 감옥이든.

 이 책을 읽기 전에 사실 나는 약간의 비장함을 기대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은 비장하지도 않고 당시의 사회적 아픔을 간접 체험하게 하지도 않는다. 단지 사랑하자, 있는 그대로,란 실천하기 어려운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약간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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