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탱 게르의 귀향
내털리 데이비스 지음, 양희영 옮김 / 지식의풍경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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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봤더라면 아마 사지 않았을 책이다. 제라르 드 빠르디유가 가짜 마르탱을 연기했던 <마틴 기어의 귀향>을 보면서 심하게 흥분했었다. 본지 몇 년이 흘렀지만 영화 내용보다는 영화를 보고 난 후의  흥분을 더 선명하게 기억한다.  나중에 리처드 기어가 주연을 하고 <서머스 비>로 리메이크 되었지만 할리우드 냄새가 솔솔나는 영화로 원작의 섬세함에는 견줄 수 없는 범작일 뿐이었다.

대략적 줄거리는 진짜 마르탱이 부재한 동안 가짜 마르탱이 나타나 아내와 상속될 재산을 가로채려하는데 진짜 마르탱이 나타나 전모가 밝혀진다. 현란한 상황 재연없이 법정에서 인물들이 증언을 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고 그들의 얼굴표정에서 긴장감이 감도는 심리묘사가 빼어난 영화였다. (이 문장을 쓰면서 깨닫는데 난 법정 드라마를 좋아하는거 같다)

그리고 내가 충격적으로 기억하는 건 바로 베르트랑드의 반응이었다. 그녀는 가짜 남편의 정체를 알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아는 사람"(내 기억력을 믿을게 못되지만 대략 이런 말이었다)이었기 때문에 가짜 남편을 진짜 남편보다 더 좋아했다.

이런 영화에 대한 기억에 힘입어 어쩌다 읽게 되었다. 영화가 만들어진 후 쓰여진 책은 흥미롭지 않은데 이 책은 다행히도 단순한 줄거리 나열이 아닌 것에 일단 안도했다. 역자 후기를 보니 미국인 프랑스 역사가인 저자는 영화를 만들 당시에 참여했는데 사실과 벗어난 극적 구성을 극복해보려고 쓴 책이란다.

한 사건을 두고 여러 사람의 진술을 객관적 사료를 바탕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지명과 여러가지 시대 상황에 대한 이해가 짧아서 두 번 읽었다. 분량이 짧아서 다행이지. 짧지만 많은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먼저 16세기 결혼 제도에 대한 야만성. 마르탱이 아내와 아들을 남겨둔 채 홀연히 떠나는 이유는 바로 제도가 부과하는 가장이란 임무에 순응하지 못한 인물로 비춰진다. 그는 가족 밖의 세계에 대해 꿈을 꾸었고 결국 8년 동안 잠적한다. 베르트랑드 역시 마르탱이 없는 동안 아르노(가짜 마르탱)한테서 열정을 느꼈기 때문이고 의무적 결혼 생활이 아닌 자발적 결혼 생활로 주체적 삶을 꾸려간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 삶이 거짓에 기초한다할지라도.

마지막 부분에  몽테뉴가 이 사건을 언급한 에세이, 그리고 판사가 쓴 책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간의 객관성이란 취약하기 그지 없는 것으로 법정에서도 진실을 구별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시사하고 있다. 파스칼의 명언이 생각난다. "피레네 이쪽에서는 진실인 것이 피레네 저쪽에서는 거짓이다." 절대적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진실을 규정하는 것은 인간이 처한 상황이다. 또 며칠 전에 읽은 글귀도 떠오른다. 인간관계란 같은 방식으로 보는 것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보는 방식을 "존중"하는 데 기초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혼란스러웠던 이유가 독자에게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여러 시각을 조명하면서 존중하는 걸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명심하고 또 명심할지어다. 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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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1-25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넙치님 탱스투~

넙치 2011-01-25 22:04   좋아요 0 | URL
저도 땡스투..ㅋ 오래 전에 끼적거린 걸 다시 읽어서 좋네요. 삼 년 전에는 이런 생각을 했구나...하고 근데 몹시 부끄럽네요. 사고의 폭이 좁아서.ㅜㅜ
반딧불이님은 어떤 생각을 하실까, 궁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