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안,지날 때까지>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피안 지날 때까지
나쓰메 소세키 지음, 심정명 옮김 / 예옥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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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소설 <노생거 사원>의 여주인공 캐서린 몰랜드 양은 소박하고 다정한 숙녀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큰 단점이 하나 있다. 무료한 생활 속의 유일무이한 자극인 고딕 소설에 푹 빠지다보니 때로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구분 못한다는 것이다. 옹고집의 속물적인 남자를 예전에 아내를 죽인 소름끼치는 과거가 있다고 상상하거나 아름다운 건물 어딘가에 비밀의 방이 숨어 있어 그리 가는 문을 찾게 되지 않을까 고대한다.

그런데 여기도 그런 사람이 하나 있다. 법학사로 학교를 졸업하고 변변히 직업을 구하지 못한 게이타로라는 남자다. 그는 일종의 로맨티스트로 사람들이 가진 숨은 이야기에 빠져들고 싶어 한다. 철없이 탐정이 되보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점술에 의지해보기도 한다. 거리에서 스쳐지나가는 여성에게서 숨은 이야기를 추측해보기도 하는 그의 일상은 캐서린 몰랜드 양과 마찬가지로 다소 무료한 것이었다. 친구 스나가는 그의 탐정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듣고 하면 되지 무엇이 문제냐고 묻는다. 이에 게이타로는 변명을 늘어놓는다.

말하자면 그는 모험을 사랑하지만 그런 위험을 견딜 배짱도 마음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누군가의 이야기 속으로 발을 들여놓고자 하지만 이 책 <피안 지날 때까지>가 끝나도록 이야기의 중심으로 들어서지 못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단편집 <피안 지날 때까지>는 독특한 맛이 남는 소설이다. 단편인가 싶으면 이어지고 밍밍한 맛이 나는가 하면 담백한 여운이 남는다. 작가는 제목에 대해서도 설날부터 춘분 혹은 그 전후 7일을 나타내는 피안 때까지 쓰려고 했기 때문에 붙였다고 하지만 저승을 나타내는 피안을 들여다보는 것 같기도 한 것이 분위기도 경계도 모호하다.

게이타로는 목욕 후에서 독특한 인물 모리모토와의 교우 관계를 잇는다. 약간은 소극적이지만 원칙을 지킬 줄 아는 게이타로와는 무언가 맞지 않는 인물임에도 게이타로는 모리모토와의 만남을 즐거워했다. 불한당이라는 평을 들을 것 같은 모리모토지만 그만큼 다양한 경험을 했고 자신의 경험담을 과장 섞은 모험담으로 풀어놓을 줄 아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게이타로의 성격과 이 책의 분위기가 결정된다. 모험담을 좋아하지만 결코 그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게이타로, 그리고 누군가의 이야기다.

이 책을 구성하는 단편들은 대개 게이타로가 경험했거나 게이타로 주변 인물들이 후에 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이다. 이 모든 이야기에서 게이타로는 호기심을 품고 자기 나름대로 상상력을 발휘해 이야기를 꾸며가지만 실제로 그 이야기를 전개시켜나가는 것은 그가 아니고 실제로 벌어진 일도 게이타로가 생각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게이타로가 궁금해 하지만 몰랐던 곳에서 사람들은 서로 엉키기도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 관계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복잡하게 얽힌 뿌리 같아서 게이타로에게 점술가가 했던 조언 '자기 같으면서 남 같고, 긴 듯 하면서 짧고, 나올 듯 하면서도 들어갈 듯' 모호하기만 하다.

그 과정에서 게이타로의 작은 모험이 살짝 싹을 틔우지만 일상의 범위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 모호함 속에 피어나는 안개 같은 분위기는 읽는 사람의 마음을 천천히 젖어 들게 하고 뿌옇게 김이 서린 유리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기분을 선사했다. 소설에는 긴박감 있는 전개로 끌어가는 이야기 중심의 것이 있는가 하면 모호하게 흘러가지만 생각거리를 남기는 것이 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피안 지날 때까지>는 그런 면에서 후자라고 할 수 있다. 책으로 담았을 뿐이지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삶에 잠시 스쳐지나가는 것 같으며 이 책이 끝난 이후에도 누군가의 삶은 계속 진행 중일 것 같다는 생각마저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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