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대개 두 가지로 나뉜다. 일본 소설을 읽다보면 우리와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전이라면 가부장제라든지 가족에 대한 생각 같은 것이 비슷해서 크게 위화감을 느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일본 소설을 읽다보면 이름들이 헷갈리고 도무지 외워지지 않아서 집중해서 읽기 어렵다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일본 소설뿐만이 아니라 많은 외국 문학들은 낯섦과 익숙함의 경계에 서 있다. 그나마 익숙한 영미나 일본 소설의 경우에는 약간은 익숙하다. 허나 깊이까지 들어가면 우리와 다른 탓에 이방인의 시선으로 읽게 되고 만다. 더욱이 그 외의 다른 나라의 책을 읽노라면 전혀 다른 모습에 낯설어도 이렇게 낯설 수가 없다. 단 한 번이지만 먹어봤던 음식과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독특한 향취의 음식을 먹는 경험과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 <보트>는 굳이 분류하자면 후자에 들어간다. 아버지는 '바', 어머니를 '마'로 부른다던지 기억하기도 어려운 이름, 음식까지 등장해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기 급급해진다. 그럼에도 책장이 물 흐르듯 넘어가게 되는 것은 이 책의 전반적 내용이 열에 들뜬 아이의 사고가 전환되듯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가끔 사람의 생각이나 대화만큼 뜬금없는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경험들을 바탕으로 이 얘기를 하나 싶으면 저 얘기로 거침없이 전환되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모든 단편들은 사건에 따라 전개 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등장인물이 가지고 있는 생각, 후회들이 뒤엉켜 물 흐르듯이 흘러서 지나가버린다. 그래서 후에 생각하기에는 그리 많은 사건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마치 풍경화를 긴 이야기로 읽어내려 한 것 같기도 하고 생각의 한 뭉치를 베어낸 것 같기도 하다. 그 와중에 베트남, 이란 등 이국적인 나라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흘리니 그 독특한 문화에 따른 향취가 배어든다. 그런 낯섦을 넘어서고 나면 베트남 대학살이라든지 역사적 아픔과 가족의 유대를 공유하고 있는 익숙함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버지와 반목하기도 하지만 끝내는 그 끈을 놓지 못하는 남자가 아버지의 경험을 소설로 쓰는 모습, 어머니의 죽음을 앞두고 혼란에 빠진 소년, 한 번의 바람으로 딸을 영영 볼 수 없게 된 아버지 등 소재는 다르지만 어쩐지 익숙함이 배어나오는 내용이다. 여러 단편이 실려 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보트 피플을 다룬 단편 <보트>다.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어린 딸의 보트에 태워 보내는 부모와 그런 부모를 떠나 두려움에 떠는 소녀의 모습은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뉴스에서나 봤던 보트피플이 어떻게 바다를 건너오는지를 읽는 것은 놀라우면서도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배에 실은 물은 한정이 있는 지라 식수가 부족해지면 사람들을 점차 앓게 되고 죽게 된 사람들은 바다에 버려진다. 그것을 기대하고 상어 떼가 배를 따라오며 탈수와 피로, 기아에 지친 사람들은 때로 자살을 선택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도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그런 보트 안에서 소녀는 잃어버린 가족을 생각하고 다른 가족의 끈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어린 아이를 맹목적으로 돌보려 드는 것이다. 지친 아이 엄마도 소녀를 동생이라고 칭하면서 아이를 넘겨줄 듯 싶다가도 이내 이성을 잃고 자기 아이를 내놓으라며 달려든다. 그 기묘한 상황에서 그들을 지탱하는 것은 새로운 가족의 연대감이라니 그것이 더 측은했다. 수없이 혼란에 빠지고 아파하며 헤매지만 결국 다시 가족이란 끈으로 버티는 사람들, 그 끈을 놓치고 만 사람들은 바다에 천천히 가라앉는다는 느낌이었다. 언젠가 그 끈이 다시 이어지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