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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최전선
허동현·박노자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우리 역사에서 가장 역사학자들의 편애를 받는 부분이 개화기와 해방 전후 시기이다.그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보면 ,우선 다른 시대에 비해 참고자료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다음으로 당시의 역사가 현재 우리 시대의 문제와도 맥이 닿아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이 책의 중심이야기 역시 개화기 즉 19세기 말 부터 20세기 초로 집중되어있다.
<우리 역사 최전선>은 이 시기에 펼쳐진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의 사상을 근대와 탈근대라는 두가지 시각으로 두명의 학자의 필담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해방이후 우리 역사의 주류는 근대우월적인 사관이었다.대표적으로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부국강병론이 그것이다.그리고 저항적 민족주의와 일제식 국가주의가 우리인식의 주류를 차지했다.이러한 흐름에 반대하며 역사속의 개인과 소수자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는 흐름이 나온 것은 근자의 일이다.박노자 교수는 이러한 탈민족적,탈국가적인 역사해석과 소수자운동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우리 역사 최전선>에서도 박노자 교수는 탈근대적인 시각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역할을 맡았다.박노자 교수는 근본적으로 서구의 근대라는 개념 자체를 무리하게 적용하는 과정의 문제를 지적한다. 부국강병이란 이름하에 무리하게 추진되는 일본따라가기식 근대화는 인류의 보편적 정서와 진리에 처음부터 격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갑신정변이나 황서영의 백서 사건들을 인류의 보편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그 예이다.반면 허동현 교수는 박노자교수의 생각에 많이 동의하면서도 좀더 현실적인 시각을 제시한다.역사라는 것이 개구리 뛰듯 점프할 수 없다는 것으로 단계적으로 필요불가결하게 거쳐가는 과정으로 이를 설명한다.그러면서 '인간의 얼굴을 한 근대'가 현실에 존재한적이 없음을 주장한다.하지만 두사람 다 우리의 근대화가 일본지향적이었고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함정에 빠져있다는 것에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기본적으로 지금 우리사회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개인주의자라고 생각한다.이는 그동안 우리가 반동적이었던 저항적이었던 전체라는 이름 또는 국가와 민족이란 이름에 개인의 희생을 너무 당연시 해왔기 때문이다.이러한 교육은 사실 아직도 유효하다. 예를 들어 지난 월드컵때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선수의 팀을 응원했던 한 네티즌은 수많은 네티즌들에 의해 매국노로 IMF를 몰고온 주범같은 부류로 몰렸다.(너 같은 X들이 많아서 IMF가 온 거다.라는 식의..) 얼마나 애국적인 국민인가? 다양성과 개인의 의지나 취향은 애국의 이름하에 묵살되어져야만 한다.이것이 우리들의 지배적인 역사관이고 국가관이다.
오래전에 그런 질문을 해본적이있다.만약 우리가 일본보다 강해서 일본을 침략했다면 우리는 선의를 사랑하는 민족이기때문에 '위안부'도 '일본에 대한 수탈'도 '일본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고문'도 하지 않았을까? 만약 '우리는 그러지 않았을거야 '라는 사람이있다면 교과서에 배운대로만 말하는 순진한 사람이거나 파시스트 둘 중에 하나였을것이다. 이 책의 말미에는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이 나온다. 일제시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일한 일본인-대개 좌파거나 아나키스트 였지만-들이다.이들을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우리를 도왔기때문에 좋은 사람이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또한 잠재적 파시스트 일원이다.그들은 그들의 소신에 따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일본에 반대한 것이다.역으로 대한민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어도 그것이 인류의 보편적 정의에 어긋나면 반대하는 것이 진정 옳은것이다.우리는 주변에 너무 많은 애국자를 갖고 있다.해외에서 뛰고 있는 스포츠 선수들도 우리에겐 한국의 국위를 떨치는 용사이다.세계적인 음악가들에게도 그런 호칭을 붙인다.어디가나 애국이고 국위선양이다.
우리에겐 해결하지 못한 근대적 과제가 많이있다.하지만 단계적 발전만 주장하며 탈근대적 질문들을 외면할 수만은 없다.특히 우리의 왜곡된 근대가 낳은 패해들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한다.지금쯤이면 우리도 민족과 국가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반성할수 있는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