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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를 위하여 - 새롭게 읽는 공산당 선언
황광우.장석준 지음 / 실천문학사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공산당 선언>을 처음 읽었던 것은 대학 1학년 겨울방학때이다.낭만과 자유가 가득하리라 예상했던 한 해는 대형걸개 그림과 최루탄 냄새만이 자욱한 기억을 남겼다.방학때 읽었던 <선언>에 대해 용어상의 불편함은 없었다.아마 한 해동안 지속된 의식화(?)교육의 영향이었을까.지금 생각하면 철학적 이해나 공부의 깊이에 비해 열정많이 넘쳤던 사람들과의 세미나.싫던 좋던 한 해동안의 사회과학 공부는 맑스를 1년전 공산당 수괴의 이미지에서 위대한 철학자의 반열로 옮겨놓았다. 변증법적 유물론,사적 유물론,정치경제학 등을 얽기 섥기 익히며 그 한해가 지났다.영문과 한글 번역이 함께 게재된 <공산당 선언>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기억 중 내게 떠오르는 것은 두가지이다. 우선 <선언>이 가지고 있는 함축성이다.그다지 길지 않은 글 안에 인간의 역사와 자본의 성장과 몰락,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미지까지 명료하게 써놓을 수 있다니.(그는 역시 천재였나!!!)
그 명쾌함에 대한 감정은 1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대로이다.시간이 지난 뒤에 읽어보니 또 한가지 느끼는 바는 맑스의 문장력이다.자고로 좋은 글이란 그 내용성도 중요하지만 글쓴이의 공력에서 비롯되는 문장의 힘이 필수적이다.<선언> 역시 위의 두가지 요소를 다가지고 있다.
<선언>을 처음 읽던 당시 가졌던 또 하나의 느낌은 <선언>이 유토피아적 묵시록 같다는 감정이었다.그러한 것을 목적론적 역사관이라는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조금 뒤에 알았다.맑스의 직선적 역사관이 가지고 있는 문제와 장미빛 청사진에 대해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었다.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나의 시각이 문제였을 수 도 있으나 맑스 비판자들도 지적하는 편협한 계급관이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과잉기대,계급환원주의 등등이 또 다른 의문을 가지게했기 때문이다.그리고 당시에 공부가 서로 깊지 못했던 선배들의 지협적인 해석과 경직성,몰이해등도 도매급으로 맑스철학의 문제로 넘어가는 부작용을 만들기도 했었다.
어느 학자든지 시대적 상황과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맑스 역시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문제가 생기고 혁명의 분위기가 세계를 지배하던 시기에 주요 저작들을 썻고 또 혁명운동의 브레인이 되어 주었다.그리고 100여년이 흘렀다.그의 자본주의 분석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특히 노동소외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찰리 채플린이 [모던 타임즈]에서 보여준 바로 그 꼭두각시 같은 노동자의 모습.아무리 우리가 외피를 그럴싸하게 둘러친다고 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고 있다.하지만 그의 철학을 우격다짐식으로 현실에 적용시키려는 것은 <선언>의 진짜 의미를 또 한번 왜곡하는 것이다.흔히들 맑스 교조주의라고 하는 이 우격다짐은 이제는 그다지 흔하지 않다.스스로는 부인하겠으나 공부가 어리고 의욕이 많았던 우리 선배세대들은 분명히 그러한 우를 범하였다.흔히들 말하는 일상적 파시즘의 영역에서 작동한 부분이 있었음을 외면할 수는 없다.물론 당시 시대의 절박성을 이야기할 수는 있으나 적과 싸우다 적을 닮아가는 부분에 대한 반성도 필요한 것이다.당시 선배세대들의 우상이었던 몇몇 사람은 그렇게 비난하던 보수정당에서 국회의원 노릇을 하고 있다.그나마 좀 다르긴 할 텐데...그래도 역시.
실업이 이 시대의 최대 인권이란 말이 나오고 있다.청년실업에 장년실업....등등. 일자리가 줄어들면 노동자가 되겠다는 실업자들도 힘들지만 현재 노동자들도 힘들긴 매한가지이다.노동의 강도는 높아가고 실업에 대한 우려로 낮은 포복자세로 출퇴근하기 십상이다.희망이 없는 듯 싶다.그래도 그래도 희망을 찾으려면 정치인이나 경제인은 아닐 듯 하다.결국 노동자만이 희망이 될 수 밖에....중산층이란 허위의식은 이제 버렸으면 한다.요사이엔 그런 의식도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아직도 국민의 80%는 중산층이라고 답한다.그만 속자.나는 월급 받는 임금노동자다.만국의 노동자와 억압받는 이와 개인의 자유가 사회적인 자유로 확장되길 바라는 이와 사회의 변혁을 위해 목숨바친 모든 이여 단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