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그 은밀한 삶과 치욕스런 죽음 - 불멸의 음반 100 최악의 음반 20
노먼 레브레히트 지음, 장호연 옮김 / 마티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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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에 인켈 오디오가 생겼을 때 나는 석 장의 LP를 샀다. 들국화 1집, WHAM의 <Make it big>, 이문세의 2집이다. 오디오라고 해봐야 컴포넌트 시스템이었지만 얼마나 쓸고 닦았는지 자동차를 산 후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음반의 역사로 보자면 나는 LP시대부터 시작해서 CD 그리고 MP3의 시대까지 살고 있는 셈이다. 다음에 어떤 포맷이 주류를 차지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 음악파일의 형태와 PC를 통한 재생 방식이 아닐까 싶다. 그런 흐름들은 이미 대중음악팬들에게는 익숙한 광경이다. 클래식쪽은 사실 이런 변화에 좀 느리다. 클래식 소비자들의 보수성에 기인하는 것이 가장 클 듯 하다.  기술적으로도 음원압축 방식이 가진 음질문제는 클래식 소비자들의 마음을 아직 편하게만들지는 못했다. 이와중에 여름날 잠시 소나기 그리워하는 반응들도 나타나곤한다. 아날로그나 빈티지에 대한 선호층이 생기는 것 말이다. CD탄생기때부터 아날로그와 디지털사이에는 그런 티격태격이 있었다. 잠정적 결론은 음질이나 음의 풍요로움면에서 아날로그쪽 주장이 승리를 한 것 같다. 그렇다고 CD가 그것때문에 물러날 일은 전혀 없다. CD는 그런 미세함을 양보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여러가지가 있기때문이다. 즉 아날로그로의 퇴행이 주류적 소비방식이 되긴 어려다는 말이다. 결국 앞으로도 소수 매니아들의 소비를 위해 상대적으로 고가의 LP를 찍어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주류 음악시장을 넘볼 수는 없을 것이다. (장비만 좀 된다면 나도 LP쪽으로 좀 가보고 싶다. 내게도 LP의 기억은 소중하니까..) 앞으로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CD포맷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가 정도가 관건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CD의 시대가 그리 오래 갈 것 같지는 않다. 최근에 클래식 음반업계는 구음원 덤핑으로 일부 손해를 만회하려는 추세이다. 과거의 훌륭한 음원들이 저가에 풀리는 것이 반갑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TOP 가격으로 산 음반이 버젯 가격에도 못미치게 나오는 걸 보면 속 쓰리기도 하고 CD도 다됐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 씁슬하다. 

이 책 <클래식, 그 은밀한 삶과 치욕스런 죽음>의 저자가 최근의 'CD덤핑'을 목도했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 책 결론에서 이미 CD의 종언을 선언했기 때문에 덤핑이 비즈니스적으로 당연한 수순임을 저자도 알았을 것이다. 평생을 클래식 음악과 음악평론가로서 살았던  저자는 '눈물의 고별전' 을 앞두고 있는 클래식음반 100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싶었을 것이다. 일종의 '클래식 음반 추도문'으로서 말이다. 살아생전의 영광과 그 마지막을 증명해야하는 마지막 생존자로서의 의무감같은 것이 들만도 하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이 책 <클래식, 그 은밀한 삶과 치욕스런 죽음>이다.  

책은 1920년 빌헬름 캠프가 베토벤의 <바가텔>을 연주하며 실황과 레코딩의 차이를 인식하는 대목부터 시작한다. 이어서 슈나벨과 카루소의 녹음, SP시대와 LP 시대의 도래..위기...CD의 등장..인물들의 흥망성쇠....등등 시간적 서술 속에서 작가는 음악가 개인보다는 레코딩을 중심으로 한 음악 비즈니스와 그 주변인물들에 촛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한다. 이 책에서 주인공은 연주자나 지휘자이기 보다는 음반 프로듀서, 레코딩 엔지니어, 음반사 사장 등이다. LP나 CD 자켓에서 곡명, 작곡가, 지휘자,오케스트라, 독주자..그리고 저 밑에 등장하는 사람들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에 대표적인 프로듀서들의 이름을 클래식애호가들은 기억한다.) 물론 중간 중간 연주자나 지휘자들과 이들 사이의 상호협력 또는 갈등 관계의 뒷 이야기들이 숨어있기도 하다.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 중에 어떤 것들은 이미 많이 알려진 것들이다. 그런 내용들은 사실 이런 저런 잡지나 책에 듬성듬성 실려있기때문에 언뜻 언뜻 기억날 뿐 하나로 묶여지지는 않는 내용들이다. 일단 음반을 중심으로 책을 쓰면서 저자는 여기저기 실린 관련 일화들이나 인용들을 꽤나 많이 찾아냈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다. 음악평론가를 하며서 직접 인터뷰한 내용이나 그와의 편지, 또는 사적인 만남등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들도 등장한다. 그렇기때문에 여기에 무슨 역사학의 사료명료성같은 것을 기대해서는 곤란하다. 증언들은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독자는 그냥 여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음악관련 인사들의 에피소드나 후일담들을 흥미롭게 '그랫군' 하면서 읽으면 된다. 

이 책에서 SP시대와 LP 초기 시대에는 음반 프로듀서가 주인공이다. 프레드 가이스버그, 월터 레그, 존 컬쇼, 잭 파이퍼들의 이름을 만날 수 있다. 저자는 클래식 메이저 음반사들을 중심으로(EMI,DECCA,DG,RCA,CBS,PHILLIPS) 그들의 태동과 발전,또 상호간의 경쟁구도를 이런 저런 야사를 섞어서 들려주고 있다. 몇 몇 음악잡지나 책이 실린 이야기들도 있겠지만 관계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저자가 얻게된 정보들도 꽤나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다. 물론 여기에 무슨 사료적인 의미의 절대성 같은 것은 없다. 주변사람들의 평가나 반응같은 것들이 주관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흥미롭게 '그랫군' 하면서 읽으면 된다. 특히 이 책에서는 저자 노먼 레브레히트의 영국인 음악가로서의 전통적인 입장이 살짝 묻어 있기도 하다. 클래식 음악팬들은 <그라모폰>지의 취향을 떠올려보면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6대 메이저에서 데카사운드와 조직운영방식에 가장 호감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물론 저자거 대놓고 '나는 데카 매니아요'라고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EMI는 보수적이고 월터 레그의 상술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DG는 결국 후에 음반사의 중심이 되고 지금도 그렇지만 저자 입장에서는 그 출발부터 못마땅하다. DG의 출발에 나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DG의 모기업이 나치 친위대로부터 노예인력을 사들였다고 비난한다.그러면서 도덕적으로 때묻은 회사가 독일 음악의 부흥을 이끄는데 앞장섰다는 점이 영 못마땅하다는 투로 이야기를 흘린다. DG가 전후 아우슈비치에 수용될 뻔한 엘자 실러를 회사 전면에 내세운 이유가 전후 음악가들의 불편한 심기를 은폐하기 위함이었다고 본다. 아이러니 한 것은 DG의 여제가 물러나면서 DG의 실제적 권한의 바톤을 이어받은 것은 나치 복역문제로 시끄러웠던 황제 카랴얀이었다. 미국쪽으로 보자면 RCA는 대형스타와 웅장한 소리를 지향했고 CBS는 자유분방한 민주당의 이미지에 가까왔다. 그가 가장 호의적으로 말하는 곳은 DECCA이다. 그들은 민주적 게이집단이었다. 권위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고 소통을 중시했다. 또한 레코딩 엔지니어들의 진취성도 어느 집단보다 뛰어났다. 훌륭한 음악가들을 포진시켰고 존 컬쇼나 크리스토퍼 래번같은 프로듀서들은 뛰어난 기획력을 보이기도 했다. 실제 아날로그 매니아들 중에는 60년대 데카사운드를 높이 평가하는 층이 꽤있는 걸로 안다.   

저자는 음반산업이 최소한 저 단계에서는 단순한 돈벌이 수단은 아니었다고 본다. 상업적인 측면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당시 음악 비즈니스계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최소한 고급문화의 생산자로서 자부심과 교양같은 것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팝음악의 득세와 음반사의 과잉투자는  결국 LP시장을 붕괴시킨다. 그나마 CD의 출현은 잠시 클래식 음반에게 빛을 주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오히려 음반업계는 새로운 기획보다는 과거의 명연을 다시찍어내는 형태로 빚을 만회하는 형국에 들어서고만다. 저자는 이렇게 된 가장 큰 책임을 '월스트리트'와 '음악관계자들의 방만'에 둔다. 투자자들에게 음반사업의 가장 큰 목적은 자금의 회수와 이윤이다. 어떤 의미있는 기획도, 어떤 훌륭한 연주도 중요치 않다. 최대한 많은 이윤만 창출하면 되는 상품일뿐이다. 즉 그들에게는 '문화생산자'라는 자긍심이나 의미같은 것은 전혀 중요치 않았다. 그러니 진중한 기획보다는 한 방에 뜰만한 음반들이 중심을 이루게 된다. 크로스오버 음악이나, 각종 기능성 음반 기회들이 나오게 된데는 이런 전체적인 압박이 있었던 것이다. 음악관계자들의 문제에서 저자는 특히 두 사람을 지목한다. 황제 카라얀과 일본 소니의 노리오 오가 회장이다. 카라얀과 오가 회장은 둘 다 과시적이고 독단적이 구석이 있었다. 그들은 이미 포화된 상태의 클래식 음반시장에 과잉제작의 광풍을 불러 일으키게 만들었다. 그리고 제작 비용을 급격하게 상승시켜서 자신들 뿐만이 아니라 동종업계까지 힘겹게 만들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일관되게 이 둘의 공모에 탐탁치 않은 시선을 보낸다. 물론 저자는 이외에도 클래식 몰락을 불러 일으킨 몇 가지 추세 또는 원인들을 이야기 한다. CD의 반영구적 특성, 인터넷의 발전, 다른 매체들의 성장, 음악가들의 창의력 부족,소비층의 한정 등등이 그것이다. 

저자는 100년간의 클래식 음반사,음악비지니스계의 뒷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역사는 끝났다'라고 종언을 선언한다. 음반은 사라져도 음악은 남는다는 말로 그 쓸쓸한 퇴장에 송가를 띄운다. 물론 음반이 당장 사라지는 것은 아닐게다. 저자 역시 조금 더 수명연장은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그 수명연장도 최소한 대형 메이저 음반사들에게는 별로 기댈 것이 없다. 최근에 음반 카탈로그에 등재되는 대형 음반사들의 목록을 보면 과거 그들이 보유한 '아름다운 시절'의 복각,재출시 음반이거나 아니면 가벼운 성악음반들이 대세다. 몇 몇 보유한 스타들에 기대서 그저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다. 그들의 고비용구조와 투자자들의 도끼눈에 어떤 식으로든 의미있는 실험적인 도전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요즘 클래식음반 애호가들은 마이너레이블에서 음악듣는 즐거움을 찾는다. 하이페리온, 샨도스, 나이브, 알파, 하모니아문디, 낙소스, ECM 그외 정말 국적 불명의 수많은 마이너 레이블들이 레퍼토리나 연주력,음질 면에서 메이저를 앞선지 오래다. 메이저음반사들은 유명 스타군단의 에이전시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상태다.이 마이너 레이블들이 지향하고 도전하는 방식들을 보자면 각기 칼러가 있었던 과거 메이저 음반업계 청년기 시절이 다양성과 진취성이 엿보이는 듯 하다. 이들에게도 경영에 대한 고민은 없지 않겠지만 아직까지는 이들을 대표하는 힘은 메이저 음반 종사자들이 버리고 온 음악에 대한 애정과 깊은 사랑이 아닐까 싶다.  

책의 후반부는 저자가 고른 '불멸의 명반 100'과 '최악의음반 20' 이다. 불멸의 명반은 내가 소장하고 있는 것들이 상당량되고 최악의 음반 20장 중에는 1장이 있더라...유명한 베토벤 3중협주곡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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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아버지 1937~1974
조동환.조해준 지음 / 새만화책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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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가끔 거울을 볼 때 묘한 이물감이 든다. 거울 속에 '내'가 아닌 중년으로 향하고 있는 '전-중년'의 아저씨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 때마다 아랫배를 슬쩍 쓸어본다. 익숙해져 가는 부피감과 무게감.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물체가 담고 있는 가속도에 부딪힌 듯 가슴이 뻑뻑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거울을 봐도 여전히 '그' 가 낯설다. 아무래도 최근 몇 년 사이에 많이 늙은 것 같다. 혼자서 거울 속에 비친 사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도 많이 늙었구나. 흐흐" 미용실에 앉아 있는 30분이 귀찮아서 계속 기르고 있는 머리칼은 이제 은빛이 제법 많이 보인다. 지저분하게 구렛나루쪽으로 내려온 흰머리칼들을 빙빙 돌려본다. 아내는 빨리 안씻고 뭐하냐고 지청구다.  

그래 "씻어야지. 그리고 또 출근하고.."  어푸 어푸 어푸.... 

소년이 사라진 자리에는 아버지가 들어선다. 아무리 스스로 소년이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현실의 감각적 경험은 내게 '아버지'의 이름을 더 요구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된다는 건 좋은 일이면서도  슬픈, 모순적인 일이다. 내 머리칼이 하얗게 변하는 것 만큼 아이는 새로운 세계의 언어를 하나씩 배운다. 이제 아이와 함께 '대화'라는 것을 제법 길게 할 수 있다. 내가 요즘 제일 궁금한 것은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어떻게 어울려 생활하고 있을까 하는 것이다. 매일 저녁 퇴근하면 가장 먼저 아이에게 "오늘 어린이 집에서 뭐하고 놀았어?" 하고 묻는다. 아이는 가끔 길게 설명해줄 때도 있고 아닐때도 있다. 이미 아이의 세계에는 내가 침범하지 못하는 그의 세계가 생긴 거다.  

아이가 생겨서 가장 좋았던 점 중 하나는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진 시간들을 연역적으로 재구성해보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사진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 온전한 기억에 남아 있는 최초의 시간은 내다섯살 즈음이다. 수동펌프를 공동으로 사용하는 달셋집에서 아버지와 엄마와 살던 시간. 동생을 낳으러 엄마가 병원에 가고 할머니와 기다렸던 때가 아주 희미하게 기억난다. 그 이전의 시간은 내 기억 속에는 없다. 그건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시간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나는 아이가 처음 걸었을 때 아버지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말 못하는 아이가 심하게 아팠을 때 어머니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사는 모습도 사람도 다르지만 세대를 넘나들며 공유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결국 나는 아이를 통해서 내 잊혀진 시간의 조각을 채워넣는다. 그 때마다 나는 왠지 내 삶이 어떤 형태로든 완전성을 갖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생각은 이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모들의 삶까지 이어진다. 그 분들이 20대였을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었을까? 어떤 고민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을까? 

<놀라운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들' 의 지난 이야기다. 이 책의 주인공이자 아버지인 조동환 선생이 막내 아들인 화가 조해준의 도움을 받아 복원한 지난 시간의 이야기이다.(사회학자 조희연교수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일제 시대 징용간 아버지를 따라 북해도에 간 이야기, 그 곳에서 학교 생활, 아버지의 죽음, 부산에서 주경야독 하던 시절의 이야기, 교직 생활시의 에피소드, 그 외에 시골에서 살면서 친척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들었더 이야기들이 한 컷의 만화 속에 꾸며진다. 그림 한 컷은 가끔 민화가 되기도 하고 사진이 되기도 한다. 투시도법을 이용하여 설계도가 될 때도 있고 영화의 스토리보드 그림판이 되기도 한다. 이 그림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겪었던 삶의 한 부분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이 직면했던 역사의 소용돌이와 그것을 뚫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게된다. 일단 그들에 비해 평온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경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어떻게 저 고비들에서 쓰러지지 않고 살아내었는가 하는 점에서 말이다. 물론 그 시절을 통과했다고 모두 영웅이고 훈장을 받아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한 개인을 뒤흔들어 놓고도 남는 광풍을 견디어 내었다는 것에 작은 경의를 표하는것이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다. 특히 그들이 역사의 마도로스를 자임하면서 이리 저리로 키를 옮겨대던 권력자들이 아닌 이상은 말이다.  거대한 흐름을 피하지는 못하지만 그 안에서 가족의 안위와 생의 희망을 위해 주체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그런 민초들의 모습은 결코 '나라 이 꼴로 만든 노인네들의 회고담'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조동환 선생의 이야기에서 나는 북해도 시절과 부산 시절 이야기가 마음을 끈다. 전자는 유년 시절의 기억이고 후자는 청년시절의 기억이다. 아무래도 북해도 시절은 우리 역사의 아픔에 대한 선험적 정보들을 가지고 있기 대문에 더 절절하게 느껴진다. 아이 엄마가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몇 날 며칠을 기차를 타고 또 배로 갈아타고 그러면서 아버지를 찾아 북해도까지 간다. 지금처럼 편안한 여행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온가족이 함께 산다는 희망을 안고 그 탄광마을까지 도착하는 여정은 요즘 같으면 그것 자체가 하나의 다큐멘터리 주제가 될 법도 하다. 탄광마을에 도착한 아들은 마을 공동목욕탕에서 아버지의 품에 안겨 목욕을 한다. 그 따뜻한 온기를 70이 넘은 아들은 아직도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해도에서 돌아가시고 만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골을 안고 아들은 다시 그 먼길을 돌아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런 이야기를 현재에 살고 우리가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어디 드라마같은 곳에서 나오는 이야기 아니던가... 한 사람의 삶을 뒤적이면 사실 그 안에는 TV속 드라마보다 더 많은 드라마들이 숨어 있다. 부산 시절 이야기가 재미있었던 것은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지명이 수시로 나오기 때문이다. 조동환 선생은 내가 한 때 자취를 했던 부산 교대(아마 위치는 좀 옮겨진 듯 하다) 미술과를 나오셨다. 밤에 미군 부대 하역일을 도왔기 때문에 초량 근처의 산복도로쯤에 산 것 같다. 조동환선생의 기억에 의하면 거기서 전철을 타고 동래까지 오고 갔단다. 지금은 도심으로 변한 곳이지만 그 때는 온통 산이고 논이었을 것이다. 부산 시절 조동환 선생의 고생기를 보면 어른들이 '우리 때 어떻게 공부했는지 아니' 라는 말이 그냥 빈말은 아니다. 지금 아이들은 교육에 대한 필요성보다는 '사교육 과잉'의 왜곡된 교육열에 바짝 타들어가고 있지만 말이다.이런 사교육 시스템에 좀 혁명적으로 바뀌어서 현재의 아이들이 "우리 땐 어떻게 공부했는지 알아?' 라고 그 후세들에게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놀라운 아버지>를 보고 나면 누구나 자신의 가족들을 붙잡고 인터뷰를 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내 아버지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자주 해주시는 편이었다. 내가 첫사랑에 질질거리고 있을 때 동네 놀이터에서 아버지의 첫사랑 실패 경험을 이야기 해주시기도 했다. 가정형편상 -아마 그 아주머니는 좀 사는 집이었나 보다- 연애질은 사치라고 생각한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끊었나 보다. 물론 마음은 아팠겠지만 일단 가족들과의 생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외에도 내가 아버지에게 들은 당신의 작은 이야기들이 꽤 있다. 내가 아쉬운 것은 이것들을 어떤 형태로든 정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매번 마음만 정리해야지 정리해야지 하면서 귀찮음을 핑계로 늘 다음을 외친다. 올해 아버지는 고희다. 더 늦기 전에 그 분의 삶을 어떤 형태로든 정리하고 기록에 남기고 싶다. 아들로서 그 정도는 해드리고 싶다. 나도 궁금하다 어떤 이야기들이 더 나올지...그래서 <놀라운 아버지> 아닌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가장 잘 모르는 것이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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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 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문학과 예술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장호연 옮김 / 마티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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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빔밥, 자장면, 팥빙수의 공통점은?  

그렇다. 비벼먹는 음식이다. 나는 이 음식들을 먹을 때 몇 번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같은 소리를 듣는다. " 왜 비빔밥을 그렇게 대충 비벼? " " 왜 팥빙수를 거의 안 비비고 드세요? "  나는 통상적으로 잘 비벼먹어야 한다고 알려진것들을 잘 비벼먹지 않는다. 성격이 별나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내 나름대로하는 답은 여러번 섞기 귀찮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진짜 정답이 아니다.  진짜 잘 섞지 않는 내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다분히 아도르노적이다. 비빕밥이나 팥빙수를 잘 섞으면 그 맛은 비교적 균질적이다. 그것은 변증법적인 합의의 총체성이며- 위대한 비관주의자의 말을 빌자면- '동일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번 숟가락을 통해 입으로 들어가는 맛이 비슷하다.  나는 그게 좀 재미가 없다. 대충 섞으면 어떤 부분은 고추장이 많고 어떤 부분은 밥이 많다.  어떨때는 좀 짜고 어떨 때는 좀 싱겁다. 한 그릇의 비빕밥 안에 다양한 맛을 느끼게 된다. 이게 '동일성 부정'의 철학이다. 팥빙수는 더 하다. 잘 안 섞고 숟가락 가는데로 퍼 먹으면 어떨 때는 얼음맛이, 어떨 때는 과일 맛이 더 많이 난다. 이게 아도르노 미학이 폭로한 대량문화의 획일성을 피하고 사이드가 말하는 주체의 개인적 즐거움을 즐기는 방식이다. (웃자고 한 소리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에 전체적으로 아도르노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있다.말년의 양식'이라는 말도 아도르노의 표현에서 빌어온 것이다. 그는 말년을 '파국'의 개념으로 말했다. 책에 여러번 인용되며 또 대미를 장식하는 글이 이것이다. 

"객관은 파열된 풍경이고, 주관은 그 속에서 활활 타올라 홀로 생명을 부여받는 빛이다. 그는 이들의 조화로운 종합을 끌어내지 않는다. 분열의 원동력으로서 그는 이들을 시간 속에 풀어헤쳐 둔다. 아마도 영원히 이들을 그 상태로 보존해 두기 위함이다. 예술의 역사에서 말년의 작품은 파국이다"   

(와우...! )

대게 도덕책 좀 읽었다는 사람들이 바라는 말년은 일종의 '구루' 또는 '현자'이다. 세상사의 이치를 깨닫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어디에도 얾매이지 않는 초연한 사람이다. 대게는 공기마저 답답한 병실에서 생을 마감하지만 말이다. 하여간 도덕적 환상의 지지물로서 그런 '현명한 늙은이'에 대한 이미지가 존재한다. 그런데 이 책에 등장하는 말년성은 이를 거부한다. 죽어가면서까지 쓸쓸한 독을 뿜는다. 그리스 서사극의 주인공들처럼 비장하지 않은가. 하여간 그들은 맹독성 동물이다. 또한 세속적이면서 초인적이다. 

사이드는 질문한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더 현명해지고, 예술가들이 경력의 말년에 이르러 얻게 되는 독특한 특징의 인식과 형식이 과연 존재할까? " 

 대게의 흐리멍텅한 대답은 '그렇게 되도록 수양해야지요' 라는 것이다. 알란파슨스 프로젝트의 'old & wise' 가 되고 싶은 것이다. (물론 가장 큰 적은 치매이다.)  현실의 나이브함 속에 자리한- 지젝식으로 말하자면- '대상a' 로서의 말년성은 분리수거된다.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에서 사이드가 말하는 '말년'은 결코 연대기적 의미도 아니다. 예술가의 어떤 작품은 -예를 들자면 모차르트의 <코지판 투테>,브리튼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연대기적으로 말기에 위치해 있지 않으면서도 이미 '말년성'을 보인다. 희곡가 장 주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같은 이들은 삶의 어느 시기에서-생물학적으로 보자면 젊은- 이미 '말년'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이드는 이탈리아의 도시인 베네치아에서도 '말년의 파국성'이 느껴진다고 분석한다. 그렇다면 이제 눈먼 장님이라도 사이드의 '말년성'이 결코 생물학적 연대기의 끝을 뜻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이드는 이제 그가 이 책 전체에서 입증할 질문이자 답을 던진다.  

"하지만 예술적 말년성이 조화와 해결의 징표가 아니라 비타협,난국,풀리지 않는 모순을 드러낸다면 어떨까?" 

사이드의 '말년성'은 바로 이것이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화해불가능성'이며, 여기에 있지만 여기에 있지 않는 '초월성'이다.'찟겨나가고','옆에 내던져지고 포기되는' 속에서 즉 '예술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현실에 저항하면서 발생한다.' (여기서 현실은 미학적 현실이다.) 역자의 서문에는 사이드의 말년성을 몇 가지로 정리한다. '망명과 주관/ 비극적 & 유희적인 면/ 화해하지 않음/시대착오성' 이다. 아도르노는 망명의 형식을 '파국'이라고 설명한다. 그에게 말년성은 용인되고 정상적인 것을 넘어 살아남는 개념이다. 또한 말년성은 누구든 실제로는 넘어설 수 없다는 생각을 담고 있기도하다. <신음악철학>에서 아도르노는 베토벤 말년 작품의 혁신성을 '부정성,화해불가능성'으로 이해하여 쇤베르크까지 그 연장선 속에서 위치시킨다. 그리고 이는 아도르노 본인에게도 해당된다. 사이드는 베토벤이나 바흐처럼 아도르노 역시 말년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등장시킨다. 즉 개념의 틀을 제공해준 선생이 다시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는 아도르노를 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도르노를 읽으면서 우리는 그가 스스로를 더 작은 부분들로 해체하는 격노한 기계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아도르노는 이들로부터(20세기의 형식들) 초연하게 거리를 두면서도 한편으로는 공모관계에 있었던,비시의적이게도 19세기 후반 낭만주의 이념에 사로잡혀 이들에게 실망하거나 각성한 인물이었다."  

내가 이 책 전반에 아도르노의 향기가 배어있다고 한 부분은 기본적으로 이 책에서 말하는 '말년성'이 일종의 '통합불가능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년성을 끌어내며 자주 등장하는 '부정', '부조화','비총체성' 등은 아도르노에게 핵심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에서 깜짝 발견한 그리스의 시인 콘스탄티노스 카바피가 '오딧세이아'를 인용한 싯구절도 호르크하이머와의 작업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카바피의 '이타카'라는 시는 비록 부분 인용이었지만 두꺼운 오딧세이아를 10행 정도로 요약한 놀랄만한 것이다.) 아도르노의 '총제성'에 대한 부정은 유명하다. 헤겔의 긍정의 변증법을 부정하는 책이 바로 <부정 변증법>이다. 쉽게 말하자면 헤겔의 '정반합'(헤겔은 이렇게 말한적이 없지만)의 '합'은 결국 '동일성'의 체계로 다시 화합시키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이런 개념화에 발생하는 폭력적인 면을 발견해내고 개면화되지 않는 '비동일성'의 측면을 부각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아도르노를 '포스트모던의 시초'라고 보기도 한다. 대중산업으로서의 문화에 그가 부정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런 '동일화'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사회를 균질화시키는 역할을 해대고 있기때문이다. 아도르노의 문제는 옮바른 지적에도 불구하고 대중문화의 자발성이란 측면을 간과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엘리트주의 -실제로 아도르노는 출신면에서 엘리트라 할 만하다-라는 욕을 먹기도 한다. (사이드는 아도르노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아도르노식 '관리사회'에서 훨씬 더 자유롭다.) 

사이드와 아도르노가 평가를 달리하는 인물 중에 하나가 R 슈트라우스이다. 글렌 굴드는 R슈트라우스에 대해 매력적인 평가를 했다.( 글렌 굴드의 R 슈트라우스 피아노소나타 느린 악장은 재발견이라고 할 만큼 아름답다.) R 슈트라우스에 대한 평가는 사실 '크게 판을 벌인 사업가처럼' 이라는 아도르노적인 평가가 일반적이다. 사이드는 R 슈트라우스가 '현실에서 퇴각', 즉 복고주의라는 방식을 통해서 당시 화성혁신으로 대표되는 '총체성의 바그너'에 저항하는 특징을 읽어낸다. 바그너의 오페라가 담고 있는 세계관은 분열적이기는 하지만 헤겔식의 역사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이드는 이를 '과거의 과거성'이라고 말한다. 이는 바흐와 굴드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등장하는 '인벤션'(창안)의 개념과도 연결이 가능하다. 이 둘의 관계에 대해 사이드는 아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바흐와 굴드 모두가 시대착오적이며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이다. '가장 앞서간 통주저음의 대가이자 구시대적인 다성음악가' 로서의 바흐는 재발견되어야하는 주체성의 자율적 공간을 스스로에게 할당해 놓았다. 그리고 이런 '인벤션'(창안)의 가치를 제대로 읽어내고 해석의 자율적 공간 안에 다시 위치시켜놓은 것이 바로 글렌 굴드이다. 사이드는 여기서 글렌 굴드에게 '지적 비르투오소'라는 왕관을 씌워준다. 이 말은 브루주아 문화의 결과로 태어난 존재적 한계와 그에 대한 반작용적 존재로서의 자리이다. 굴드에게는 그저 뛰어난 실력의 연주자로서의 만족이 아니라 연주와 미학적 행위가 '작곡가'에 이어지는 단계로까지 발전한다. 사이드가 높이 평가하는 부분은 그가 새로운 기술의 발견을 통해 미학적 지평을 확산했다는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작업을 '지적 비평 전통'하에 놓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인 연주자가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여 담론을 만들어내는 지식인들의 영역'에 그를 위치시키는 것이다. 짧으면서도 명쾌한해설이다. 물론 이런 굴드 역시 시대착오적이며 긴장감을 해소시키지 않는 말년성의 특징을 내포한 존재로 이해된다. 

이 책에는 이외에도 모차르트의 <코피 판 투테>에 대한 '반도덕적 해석'의 흥겨움을 보여준다. 재미와 즐거움이 또한 하나의 저항 양식이 될 수 있음을 상징하는 대목이다.  모차르트의 '농담'과 베토벤의 '근엄'을 대비하여 '가변적 주체'와 '고정된 정체성'의 예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베토벤의 '계몽성' (베토벤은 열혈 계몽주의자였다. 박홍규의 <베토벤평전>은 지나칠 정도로 정치적인 베토벤에 시선을 꼽는다.) 은  모차르트의 후기 오페라들에서 불편해질 수 밖에 없다. 사이드는 '코지판 투테'의 내러티브와 별 비중없지만 극의 모티브가 된 돈 알폰소에 집중한다. 그를 동시대에 살았던 사드에 비유하기도 한다.(사이드는 푸코를 인용하지만 <계몽의 변증법>에도 사드가 등장한다.) 모차르트는 이 오페라에서 이동과 불안정,방탕함과 조작의 상징들을 동원했다. 그리고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부주의하고 무의미해보이는 이야기'들을 결합해내었다고 사이드는 말한다. 그리고 하울러 그 불편함이 주는 불길한 비전에 주목할 것을 유의하라고 말한다.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는 사실 예술의 역사 속에서 '말년성' 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또한 이 유고집을 내게된 저자 사이드의 말년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도르노가 개념의 틀을 제공하고 주인공으로 등장했듯이 사이드는 이 책의 서술자이면서 빙의된 형태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러기 위해서 등장한 또 하나의 '분열적 인간'이 바로 '장 주네'이다. 그는 '계속적으로 투쟁 중인 다른 정체성과의 동일시를 통해 황홀경을 느끼려는' 인생이 말년적인 인간이다. 이 사람의 과거 행각과 사이드가 직접 만난 이미지는 처음부터 모종의 긴장감을 형성한다. 사이드는 장 주네의 팔레스타인과의 관계를 그의 말년 작품을 통해서 읽어낸다.그러면서 <오리엔탈리즘>의 저자이자 팔레스타인으로서 서방세계의 정치관과 자신의 철학을 은연중에 빗대어 설명한다. 가장 사적인 글이면서 지적인 유명인사들의 티테이블 엿듣는 재미를 건네준다. 행동하는 지성으로 온갖 총애를 받는 사르트르에게 '비겁한 자'라는 평가를 내리는 대목은 '말년성'의 특징인 '배반'의 쾌감을 준다. 또한 선비같은 아도르노와 시골장돌뱅이의 이미지가 남아있는 주제를 비교하는 대목도 흥겹다. 장 주네를 표현하는 이런 차이를 표현하면서도 '말년성'의 의미를 이해하게 도와준다. 

주네에게 악마든 신이든 절대자는 인간의 정체성이나 인격화된 신으로는 인식될 수 없고, 오직 모든 것이 말해지고 행해진 뒤에도 가라앉지 않는 것, 포섭되거나 길들여지지 않는 것으로만 인식된다. 그와 같은 힘은 어쨌든 거기에 몸담은 사람들을 통해 표현되고 배려되어야 하는데 그럴 경우 자체적으로 노출되거나 인격화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 주네의 최종적이면서 가장 완고한 역설이다.  

이 외에 내가 처음 들어보는 작가인 람페두사,3대 비극작가인 에우리피데스 (그의 <바카소스의 여인들>이 분석대상이 되는데 이 텍스트는 테리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의 도입부에 '디오니스소적 폭력/아폴로의 과잉폭력'이라는 대립구도 속에도 등장한다.) 그리고 토마스 만, 브리튼, 비스콘티가 '말년성'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 또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마지막 세사람이 모두 '베네치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소설 <베네치아의 죽음>과 관련되어있다. 비스콘티의 영화때문에 이제는 말러도 넣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사이드는 이들을 엮어낸 '베네치아'라는 도시마저 '말년성의 형식'으로 분석한다.(내가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곳 중에 하나다.) 사이드는 베네치아가 '영광과 부패,창조성과 타락의 역사' 를 아무렇지 않게 결합하고 있는 도시라고 말한다.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은 도시가 또 어디있겠나 싶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두번째 대목이다. 이 도시가 항상 '외부자'에 의해 씌여지며 그렇기에 이미 '어떤 이미지를 바탕으로 하고,이것이 다시 텍스트에 의해 강화된다'는 점이다.즉 베네치아는 항상 이미 보고 이미 읽은 것일 뿐만 아니라 이미 씌어진 것이다. 우리는 주관과 객관이 혼재하고, 동양과 서양이 섞이며, 존재와 비존재가 혼합되어 버린 도시의 그림을 얻게된다. 비코가 말하는 '인게니움' (인벤션과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인 듯 하다.) 인간의 역사를 인간의 마음이 작용한 산물로 파악하는 능력.즉 풍부한 상상력의 도화지를 펼쳐주는 창안적 발산의 공간으로서, '말년성'과 혼연일체되어 있는 베네치아를 만나게 된다.   

나는 문득 어느 벽 앞에 당도했다. 벽에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여기서 너의 미래가 시작된다>  

                                                                             -옥타비오 빠스 '불면의 기록'중에서'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인가? 죽음이 또다른 미래의 시작이라는 건가? 아니다. 사이드는 살아서도 그 벽을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그 말년성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길을 갈수 있다고 했다.그것이 그의 사후에 나온 이 책이다.  

자..이제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의 리뷰를 끝내자. 식습관과 관련된 가벼운 이야기로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나는 앞으로도 비빕밥,자장면, 팥빙수를 잘 섞어 먹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내 나이 30을 넘던 어느날, 나도 모르게 알게 된 내 습관이다.   

후기) ... 이 책을 내가 분명히 좋아할 거라고 보내준 친구에게 감사한다. 음...좋았다. 나 역시 이 책을 상당히 좋아할 친구에게 보냈다. ...그리고 이 책은 거짓말 안보태고 정말 한달음에 읽을만큼 재미있다. 물론 한가지 개념을 가지고 주구장창 끌어가는 것이 답답할 수도 있고 반면에 일관적이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만약 앞의 생각이라면 '바리에이션'은 원래 싫어하는 사람이겠거니 한다.(당근 바흐의 비수면용 수면음악도, 모차르트의 '반짝 반짝 작은별'도,.베토벤의 애인 이름같지만 그렇지 않은 디아벨리로 모두 싫어할 것 같다.) 이 책은 조금은 이런 서양 예술에 관심이 있어야지 볼 수 있다.  'R 슈트라우스가 새해되면 신년 음악회 매번 하는 그 사람이지' 하면 좀 곤란하다. 최소한 옛날에 MBC 9시 뉴스 타이틀 음악이지 정도로 구분은 되어야...아 몰라.정말. 스탠리 큐브릭의 유인원 뼈다귀 던지는 그 장면...그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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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방랑자 - 서른 한 살 슈베르트, 그 슬픈 환희의 노래
김문경 지음 / 밀물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위대한 20세기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음악이 내게 의미하는 것을 전부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리고 <논리철학 논고>의 가장 유명한 말이 있다. "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 우리는 침묵해야만 한다."  

그래서 음악을 말로 표현해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음표들의 높낮이를 정하고 길이를 정하고 그와 유사한 어울림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동시에 운행한다. 기술적으로 보면 그게 '음악'이다. 이것은 공기를 울리고 고막을 울리고 뇌파로 전송된다. 뇌에 도착한 이 뇌파화된 진동은 사람을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고 우울하게도 하고 심오하게도 한다. 기술적으로 보자면 이게 음악이다. 이런 과학적인 방식 말고 '음악'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실로 난망하다. 다 아는 듯 하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그런 질문들이다. 또한 '왜 저 음악이 좋냐?" 라고 물어도 몇 가지 단어외엔 설명하기 쉽지 않다. 어떤 이들은 구조의 완결성을 말하고 멜로디의 탁월함을 말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구조여도 별반 반응이 없을 수 있고 뛰어난 멜로디 라인은 가끔 저속함의 상징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결국 '음악'은 언어로 말하는 것보다는 '침묵'하는 것이 나은 전술에 가까운 영역이다. 그래서일까? 사실 좋은 '음악책'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서점에 가서 만날 수 있는 좋은 음악책이라 해봐야 '가이드책'일뿐이다. '명반 100선', '음악여행 에세이' 등등 이 그런 류의 책들이다. 조금 더 학술적인 책들은 음악학에 대한 기본적 소양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조금 어렵거나 딱딱할 수 도 있다. 그런 면에서 전문가같은 아마추어 김문경의 <구스타브 말러>시리즈는 그 틈새를 잘 포착해낸 책이었다. 나 역시 그 책을 상당히 좋아하고 요즘도 말러 음악을 들을 때 가끔 펼쳐놓고 본다. 사실 김문경이 <구스타프 말러>시리즈에서 본인 스스로 이루어낸 것은 책 부록에 나오는 말러 음반 리뷰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러>시리즈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간의 방대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적당히 잘 조합해낸 아마추어의 열정과 애정때문이다. <말러>시리즈로 일약 김문경은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시선을 끄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슈베르트의 '재발견'이라고 할만한 <천상의 방랑자>는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별 두개를 겨우 줄 정도다. 그럼에도 별 하나를 더 준 것은 뒤에 붙어 있는 CD가 이 책에 소개된 곡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어서이다. 또 하나는 나름 독자도 가지고 강연도하면서 클래식 팬을 몰고다니는 사람의 책에 별 두개를 주었다가 악성댓글과 씨름해야할까봐 서이다. 일단 이 책에서 가장 불만족스러운 부분은  작가의 슈베르트의  재발견이라는 흥분에 덩달아 춤추기가  안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서두부터 음악팬들이 늘상하는 예의 그 과장된 표현들을 쓰면서 흥분에의 공감을 말한다. 

'루체른페스티벌에서 공연한 슈베르트의 현악5중주 D956는 나의 어설픈 슈베르트관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거대한 지진과도 같았다......인간사의 모든 감정을 세세히 그려내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나 역시 가끔 음악을 듣고 짧은 글을 쓸 때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해 감정을 과장하는 수사를 쓰곤 한다. 하지만 이게 상당히 쓰면서도 탐탁치 않고 듣기도 싫다. 그럼에도 음악팬들 중에는 이런 수사가  본질적 의미에 닿아있는 듯 착각하며 남발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우선 말로 표현하기 힘든것을 표현하려는 결과이기도 하지만 본인이 '순수한 영혼', '영적인 쾌유', '존재의 그림자' 뭐 이런 단어를 어떤 음악에 씌우면서 그런 음악을 향유하고 있는 본인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그런 공간에 있는 그와 우리들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내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대중들의 그런 감상태도 자체와 더불어 그를 재생산하고 확증해주는 '키치적 음악비평'의 태도이다. 대개 이런류의 음악에세이 작가들은 정서적 술어를 유추적으로 확대하여 사용한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상호관련성마저 희박해보이는 의미를 부여하여 작곡가와 곡,그리고 그걸 공유하는 청자에 아부한다. (가끔 듣는 클래식 FM의 진행자들을 보면 이런 주례사 비평을 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가 확실히 구분된다. 후자의 경우를 보면 '명연주 명음반'의 정만섭씨가 그렇다. 그는 담백하게 말하고 만다. 이런 식이다. " 이미 명연으로 소문난 음반이니 더 여러 말을 다는게 필요없겠지요....발군의 기량을 보여준 연주가 아닌가 싶습니다..등" 그런데 반대의 경우 -최근에 차를 타고 오면서 들었는데 도대체 어디까지 하나 싶어서 계속 들었다- 저녁시간 대에 하는 모 교수인지 평론가인지 하는 사람이다. 온갖 미사어구와 벅찬 감동의 수사가 흘러넘친다. 예술적 촉수가 더 발달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전체적으로 과함이 특징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곡'이라는 저속한 마케팅 구호처럼 립스틱 범벅이다.)

저자의 놀라운 발견 중 하나는 슈베르트가 아이의 세계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         ) 음악의 한쪽에는 방긋 웃는 아이가 보여주는 천사의 미소가 있고, 반대쪽에는 깊은 상처를 받은 아이의 트라우마가 존재한다." 

저자는 슈베르트만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실험해보자. 모짜르트를 넣으면 저 문장이 어색하게 들릴까? 쇼팽을 넣으면 어떨까? 심각하게 들릴 지는 모르지만 무리하자면 베토벤을 넣고도 저 문장의 의미를 강요할 수 있다. 좀 퇴폐미가 흐르지만 말러는 아닐까? 말러의 음악에도 그의 어린 시절 기억이 묻어있는 민속리듬들이 들어간다. 군악대 행진도 들어간다. 요즘말로 하면 좀 까진 아이로 말러를 취급하면 저 문장에 끼여도 그리 어색함은 없다. 저자는 천진한 세계와 광적인 발작의 세계라는 양극성을 말하기 위해서 슈베르트만을 저 문장 속에 포획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거의 모든 예술가들이 저 스펙트럼 사이에 있다. 좀 더 넓게 보면 인간이 저 도상 위에 있을 수도 있다.    

물론 말장난처럼 들릴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는 어떤가? 저자는 이 책에서 슈베르트의 재발견 흥분감에 비추어 '예술사적 존재'로의 슈베르트의 문제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책의 3분의 1이 괴테의 <빌헬름마이스터의 수업시대>로 이루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저자가 한 일이란 괴테의 소설을 요약하고, 그 안에 나오는 마뇽과 노인의 시를 정리하고, 슈베르트 자료들을 모은 것 뿐이다. 그리고 그나마 안타까와 하는 이야기가 '괴테가 슈베르트를 몰라봐줘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정도이다.  저자가 강조한 슈베르트의 특성인 '양극성'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를 재인용한 슈베르트의 '불완정성' '불연소성'의 문제는 과연 슈베르트만의 문제였을까?  이미 <클래식으로 읽는 인생>이라는 -책은 읽지 않았지만 책 추천사는 음악,인생,예술,철학을 집대성하는 이란 말이 나온다- 책을 썻다면 저자가 결코 '초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적 특성에 대해 몰랐을리가 없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관계성에 대한 부분은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아쉬운 부분이다. 슈베르트는 사실 음악예술사에서 가곡의 왕이지만 또한 낭만주의의 증인이다. 쉽게 말하면 슈베르트의 음악과 그의 예술적 교류, 세계관 등은 그런 낭만주의의 도래와 무관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런 관련성은 직접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반면에 이 책에는 낭만주의의 숭고미를 상징하는 프리드리히 카스파르 다비트의 그림이 여러번 나온다. 이 그림들은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의 CD자켓에 아주 빈번히 사용된다. 이 그림과 슈베르트 사이의 관계는- 저자가 지난 책에서 말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 연관이 없는 것 일까?  결국 이 부분을 삭제하다 슈베르트가 마치 독자적인 예술천재로서만 그려지고 있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이 책의 전체적 시각은 서가에 꽂힌 책을 폈다가 이제는 기억도 없는 멋진 문장에 친 밑줄을 보고 감동하는 것과 유사하다. 나쁜 의미만은 아니다. 그런 정도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내게는 그 점이 <말러>시리즈에 비해 아쉽다는 것이다.

슈베르트의 시대는 프랑스 혁명 이후의 시대이다. 아놀드 하우저같은 경우에 이 시기의 예술가들이 자기 나라에서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고향상실, 고독한 감정들은 세계적인 정서가 되었다고 말이다. 이것은 고향에 대한 향수, 무한에 대한 동경, 미지의 것에 대해 일종의 숭고함을 갖는 반응으로 나타난다. 결국 이것은 생의 낭만화 경향으로 조응하고 낭만적 유토피아 건설에 대해 꿈을 꾸기도 한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에서 저자는 이 곡이 영원한 아웃사이더의 노래라고 말한며 한과 자기혐오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과거에 '그까짓 사랑때문에 한심한 지식인 같으니"라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깊은 속을 헤아린 겨울나그네는 존재의 상처때문에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이것이 비단 슈베르트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단 한번도 지적하지 않는다.  

앞서 말한 슈베르트의 '양극성' 측면도 보자. 저자는 슈베르트가 기괴함과 아름다움 사이를 오고간 작가였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가곡들도 많지만 '난장이'같은 (불륜과 파멸을 소재로 한다.)곡들도 상당량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미의 역사>의 한 대목을 그대로 인용해 보자. 낭만주의 미학을 잘 정리한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낭만주의의 무엇보다도 독창적인 면은  다양한 형식들 사이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관계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이성에 의해 맺어진 것으로 모순점들을 배제시키거나 반명제(유한/무한, 전체/일부, 삶/죽음, 정신/마음)를 해소시키지 않고 그것들을 공존하게 하는데 낭만주의의 진정한 특성이 있다.'

유명한 소설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이 씌여진 것이 1818년 슈베르트 21살때 일이다. 왜 <프랑켄슈타인>을 예로 들었는지는 알아서 생각해 볼 일이다. 음산함, 그로테스크 함 같은 것들은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아이템이 된다. 음악교과서에서 표제음악의 선두로 말하여지는 -그리고 단두대 장면으로 유명한-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이 1830년 ,즉 슈베르트 사후 2년 뒤에 나온다. 만약 슈베르트가 살아있었다면 33살이다. 

저자는  독일 가곡이 슈베르트 이후 퇴보했다고 말한다. 이유는 저자가 곡과 멜로디가 최적상태를 유지하는 고전주의적 가곡관을 지향하고 있기때문이다. 바그너나 말러는 물론이고 볼프같은 이들도 이 최적상태를 유지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언어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 이런 류의 문장은 내 기억에  이 책에서 두 번이 등장한다. 문제는 '슈만'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것이다. 첫번째에는 슈만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나는 왜 슈만을 언급하지 않지? ' 라고 벼루면서 보고 있었는데 책 후반부에 다시 슈베르트 가곡의 고전적 완성미를 강조하며서 단 한번 비로소 슈만이 등장한다. 슈만은 그나마 가곡의 황태자 대접은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멜로디라인에서 대중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앞으로도 슈베르트 가곡의 수준에 이르지는 호응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동감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저자는 특이하게도 슈베르트의 재발견에 들어가면서 멜로디 라인이 떨어져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슈베르트의 곡들에 힘을 실어서 말한고 있다. 슈베르트와 슈만의 비교에서 슈만이 멜로디 라인이 대중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인기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걸 그대로 슈베르트의 곡들 사이의 비교로 적용해 본다면 어떨까? 현재 인기가 없는 슈베르트의 곡은 그런 단점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슈베르트의 가곡이 최고 수준은 아니다. 책 전체적으로는 겨울나그네나 들장미,아베마리아 같은 곡들이 있지만 저자의 시선은 숨겨진 곡을 찾는데 있다. 저자가 인정하듯이 음악팬들의 '지적 스노비즘' 의 한 예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고 있다. (그런 방식에는 나도 자유롭지 못하다.) 

저자의 슈베르트에 대한 과잉은 가곡 '마왕'의 예에서 나타난다.'마왕'은 드라마라는 구조뿐만이 아니라 성악과 반주면에서 탁월한 곡이다. 딱 떨어지는 느낌을 준다. 저자는 4분짜리 완벽한 곡을 만든 이가 어떻게 기악곡 등에서는 구조의힘이 떨어졌는지 묻는다.  요즘 말로하자면 CF 잘 만드는 감독이 왜 극영화는 실패하냐는 투다. 질문부터 웃음이 묻어났다. CF 잘만드는 것과 영화 잘만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 호흡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물로 저자는 하루키를 인용하면서 스스로 답을 제기한다. 베토벤식의 튼튼한 구조에 대한 애착이 전도된 질문이라는 것이다. 베토벤식의 구조는 슈베르트에게 의미 없었음을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우리는 낭만주의의 일부 특징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낭만주의는 기본적으로 어떤 종류의 객관적 예술법칙의 타당성도 부인한다.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일종의 집단에 대한 개인의 투쟁이었고 이런 흐름은 현재까지도 예술가들의 작업을 규정하는 한 축이 된다. 당연히 개성적 표현법칙과 기준은 개인화된다. 그렇다면 하이든,모차르트 시대의 고전적 양식으로 부터의 탈피는 슈베르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게 된다. 베토벤의 작품 속에서도 이리 그러한 변화의 징조들이 나타난다는 것이 교과서적 접근 아닌가. 슈베르트의 '불연소성', '반복성' 같은 것은 그런 전체 차원에서 조망해 볼 수도 있을 법하다.  저자 슈베르트 개인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결론을 맺는다. 물론 구조와 개인의 상호 관계문제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슈베르트라는 개인 하나만 놓고 보면 음악계에 있어서 낭만주의의 원인이자 결과이기 때문이다. 요점은 슈베르트라는 개인을 둘러싼 영향들에 대해 저자는 사적인 관계들 외에 거의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슈베르트라는 한 천재의 작품으로 낭만주의 음악과 슈베르트의 작품들을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 지점이 못내 아쉽다는 것이다.

슈베르트를 말할 때 '슈베르티아데' 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슈베르트가 여인보다 친구들과의 예술적 관계를 더 소중히 여겼다고 말한다. 이것 역시 슈베르트에게만 일어난 일은 아니다. 혁명 이후 과거 예술계층에 분화가 오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시민적 예술애호층들이 늘어나고 그룹으로 발전하게 된다. 슈베르트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저자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든 슈베르트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그 모임 자체를 상당히 수준높은 예술가들의 모임정도로만 말한다. 그리고 슈베르트의 사인-매독에 의한-같은 것들은 날라리 친구 한 명의 꾐에 빠진 한 번의 실수라는 식으로 대충 지나간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저자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언가를 생각해보면 슬쩍 웃음이난다. 영웅적인 베토벤 상이 후대의 이미지이듯 천상의 방랑자, 순결한 청년의 영혼 슈베르트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한 노력말이다.  요즘 대세가 '퀴어'라서 그런지 나는 슈베르티아데에서 '퀴어'의 향기가 난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영화적 상상력으로 슈베르트 영화를 만든다면 나는 '퀴어'로 만들겠다. 요즘같으면 매독이 아니라 AIDS라 해야 이해받을지도 모르겠다. 요즘이야 매독으로 죽는 이들은 거의 없을테니...좀 모독적이라는 생각이들기도 한다. 밀로스 포먼이 아직도 모짜르트와 소송 중이라니 그 판례를 보고 수위를 조절해 볼 생각이다. 

이 책은 내가 최근 가장 빨리 읽은 책이다. 그다지 어려운 내용도 많지 않고, 나는 읽지 않을 <빌헬름마이스터>를 읽느라 고생한 흔적도 보인다. 여러가지 안좋은 소리를 해서 좀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하자. 이 책의 표지는 정말 최악이다. 디자인에 대한 아무런 고민이 없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지 여실히 보여준다. 리어카에서 파는 CD 자켓도 이 책의 디자인보다는 낫다.  

슈베르트에 대한 책이 거의 없다는 저자의 문제의식에는 공감을 한다. 그런면에서 또 한번 틈새를 노린 점은 훌륭했다. 그러나 결코 좋은 점수를 주긴 힘들다. 말러에서 보여준 공력을 기대어 다음 번 슈베르트 책은 진일보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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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황홀 - 보이는 것의 매혹, 그 탄생과 변주
마쓰다 유키마사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눈의 황홀>에 자극 받아서 두 편의 영화를 봤다.그리고 LP 한 장의 기억을 떠올렸다.

첫번째 영화는 <브이 포 벤데타>이다. 영화에는 독재자의 상징이 등장한다. 검은 바탕에 붉은 '로렌의 십자가'.크리스마스 씰에 있는 전봇대 같은 십자가라 생각하면 된다. 책의 저자 마쓰다 유키마사는 영화 속의 이 상징이 나치의 그것만큼 강렬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이유는 나치의 하겐크로이츠는 나선형의 운동감을 고양하고 있고 있는 데 반해 영화 속에서는 그런 이미지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나치에게 중요한 것은 '상승을 향한 운동감' 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미지보다는 메시지의 현재성때문에 마음에 남는다. 특히 주인공 V의 대사( V는  종종  세익스피어의 대사들도 매력적으로 인용한다.<멕베드>,<십이야> 등) 들이다.

"가장 큰 잘못은 정부이고 댓가를 치룰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경이 되도록 방관한 것은 여러분입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두려웠던 거죠. 전쟁,테러, 질병....수 많은 문제가 연쇄작용을 일으켜 여러분의 이성과 상식을 마비시켰죠....공평함, 정의, 자유가 단순한 단어가 아니며 관점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요."  

V가 앵무새 국영방송국을 점령하여 방송한 내용이다. 

또 하나의 영화는 개봉 중인 작품이었다. 타셈 싱의 <더 폴>이다. 나는 이 영화의 예고를 보고 과거에 본 영화를 떠올렸다. 제니퍼 로페즈가 나왔던 <더 쉘>이다. 미장센과 영상미학에 유사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뒤에 알아봤더니 같은 감독의 작품이었다. 속길 잘하는 눈이지만 늘 그런 것 만은 아닌 듯 하다. <더 폴>의 스토리는 별 볼일 없다. 영화는 정말 색의 즐거움에 봉사하는 작품이다. 색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음을 글로 표현하는 것 만큼 난감하다. 특히 타셈 싱의 영화의 색은 원초적인 색의 충돌을 통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영화는 별로 일지 모르지만 그 색을 보기 위해서 컴퓨터나 DVD로 봐서 곤란한 영화다.

 마쓰다 유키마사의 <눈의 황홀>은 백과사전 같은 황홀함을 준다. 책의 디자인 부터가 범상치 않다. 책의 옆면 (책의 배)를 48미리정도 펼쳤을 때 좌우로 나타나는 인물이 다르다. 서점에서 봤을 때부터 눈길을 사로 잡았다. 책의 배라는 단어도 사실 처음 알았을 뿐 만 아니라 내가 가진 모든 책 중에서 책의 배에 그림을 집어 넣은 책은 이 책이 유일하다.(물론 어린 시절 교과서나 참고서에는 이름도 써놓고는 했다.그걸 아직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 <눈의 황홀>이라는 것은 출판사가 정한 제목인데 원제목은 <기원의 이야기, 디자인의 시선>이다. 일본어 제목이 책의 내용에 비중을 둔 것이라면 우리의 책제목은 책의 이미지에 더 높은 비중을 둔 것이다. 작가가 디자이너 출신이고 이 책에서 우리는 '이미지의 기원과 변화' 에 대해 새로운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제목도 나쁘지 않다. 

책은 우리가 흔히들 '상징'이나 '표시' 또는 '디자인 패턴' 등으로 알고 있는 시각적인 결과물들의 역사를 계보적으로 쫓아가 본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런 '시각물'들은 자연발생적인 것도 있고, 문화적인 것들도 있다. 저자는 이런 시각 이미지들이 다른 이미지가 더해짐으로써 팽창하기도 하고 의미가 역전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를 '몽상'이라는 개념으로 말하려고 한다. 여기서 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개념인 '오브제'나 '레디 메이드'같은 것들도 '몽상'의 이름으로 설명된다.

앞서 말했듯이 <눈의 황홀>은 백과사전같은 느낌을 준다. 이 말은 다양하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너무 많은 주제와 정보들이 눈을 어지럽히기도 한다는 말이다. 책은 '쌍'이라는 관념, '속도와 시각의 변화', '직선과 사각형의 탄생', '반전하는 이미지들', '섞는다는 행위',' 가둔다는 것' '오브제' 등 시각문화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종횡무진 펼친다.

특히 저자는 '근대의 시각'의 기원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근대의 시각'은 또한 현재 우리들의 시각문화의 기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산업혁명과 함께 시작된 철도 문화에 대해 저자가 여러번 이야기하는 것도 그런 연원에서 이다. 이 책에는 빅토르 위고의 편지가 인용된다. 위고가 기차 차장을 통해 본 것을 묘사한 장면이다. "밭 언저리에 핀 꽃은 이미 꽃이 아니라 색채의 반점, 아니 오히려 빨갛고 하얀 띠일 뿐입니다."  저자는 여기서 근대적 '추상'의 한 예로 발견한다. 이 근대적 추상의 극단에서 저자는 유명한 밀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을 인용한다. 저자의 시각은 기술문명의 발전과 함께 달라지는 시각의 철학에 주목한다. 다시 한번 철도를 이야기 하자. 철도는 자연에 없는 직선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고, 철도의 속도는 추상을 만들어 낸다. 속도는 폭력을 동반한다. 속도는 '자기를 잃는 것'이라는 폴 바릴리오의 말을 통해 저자는 시각 문화의 변화와 함께 근대성의 문제를 넌지시 독자에게 던진다. 바릴리오는 "파시즘이 전체주의였던 것은 철두철미하게 속도 체제가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빠른 속도에 의탁할 수 밖에 없는 속도의 시대는 사실 모든 것을 추상화 해버린 시대인 셈이다.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 클럽>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마지막에 '민들레를 구경하기 위해 야구공 찾기를 포기한 아마추어 선수' 다. 속도의 추상에서 민들레 꽃 잎 하나 하나에 시선을 두기 위해서 우리는 근대의 '속도 강박'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렇다. 걸으면 우리는 다른 것을 본다.또 멈추면 우리는 다른 것을 본다. 그것은 '볼 견'을 넘어서 '볼 관'이 되는 것이다. '응시'가 되는 것인 셈이다. 

이 책 <눈의 황홀>은 마치 오래된 창고에 쌓아둔 물건을 뒤적이는 즐거움을 준다. 언제 거기 있었는지 모르는 것들을 하나씩 꺼내는 기쁨 같은 것 말이다. 저자의 시각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인문학적 사고의 든든함은 지적인 포만감 같은 것을 준다. (배부른 자의 불만처럼 나는 이 '포만감'에서 오히려 일종의 '결핍감'을 느낀다.) 서양의 수직문화와 대비되는 일본의 수평문화, 원근법과 일신론이야기, 메르카토르도법과 중국의 우주관, 스트라이프의 변천사, 앙상블라주와 섞는 것의 역사, 책의 글자체를 둘러싼 논쟁들, 변형을 뜻하는 '데모르메'이야기...무궁무진하다. 미술사에서 한 번쯤 접해본 내용들일 수 있지만 다채로움으로 인해 충분히 그 약점을 상쇄한다.

포만감 속에 약간 부족한 탄닌이 끝까지 아쉽기 하다. 하지만 책의 기획, 참신한 디자인, 잘 배치된 사진, 동서양 문화의 비교, 흥미를 끌만한 시각 정보의 역사들을 생각해보면 'Well-made book' 이다.  책에 대한 자긍심과 고집으로 한 해 한 권씩만 만들어 낸다는 저자 일인 출판사의 철학 역시 후광효과를 발휘한다.  

 이제 <눈의 황홀>이 건넨 문제의 LP에 대해 마지막으로 말할 때이다. 이 책에는 레드 제플린의 앨범 <프레즌스>에 나오는 오브제를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 이 오브제는 나를 잠깐 미치게 했다. 내가 레드 제플린의 앨범을 사모으기 시작한 것은 고1때 쯤이었다. 비록 오래된 일이지만 나는 그 앨범에서 오벨리스크풍의 네모난 기둥을 본 적이 없다. 내가 기억을 못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창고 속에 봉해져 있는 박스를 뜯어서 확인해야 하나?  결국 그런 번잡한 과정을 실행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약간은 비겁하며서도 설득력 있는 가설로 이런 불편함을 잠시 미봉해 두었다. 옛날에 라이센스 음반을 낼 때는 앨범 자켓이 공륜에 의해서 수정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오지 오스본의 2집<diary of mad man>음반 LP에는 원래 있는 피흘리는 오스본이 없다. 레드 제플린의 5집 음반<house of the holly>만 해도 아이들이 옷벗고 신전을 기어가는 사진은 사용되지 않았다.

이런 미봉책은 사실 만족스럽지 못하다.

"내 기억이 맞아서 만약 검은 기둥이 앨범에 없었다면 도대체 왜 그걸 지웠을까?". 다시 질문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 그 앨범 자켓이 그 기둥이 있었던가"

눈은 믿음직 하지 못한 동료이며 기억은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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