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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방랑자 - 서른 한 살 슈베르트, 그 슬픈 환희의 노래
김문경 지음 / 밀물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위대한 20세기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음악이 내게 의미하는 것을 전부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리고 <논리철학 논고>의 가장 유명한 말이 있다. "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 우리는 침묵해야만 한다."
그래서 음악을 말로 표현해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음표들의 높낮이를 정하고 길이를 정하고 그와 유사한 어울림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동시에 운행한다. 기술적으로 보면 그게 '음악'이다. 이것은 공기를 울리고 고막을 울리고 뇌파로 전송된다. 뇌에 도착한 이 뇌파화된 진동은 사람을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고 우울하게도 하고 심오하게도 한다. 기술적으로 보자면 이게 음악이다. 이런 과학적인 방식 말고 '음악'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실로 난망하다. 다 아는 듯 하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그런 질문들이다. 또한 '왜 저 음악이 좋냐?" 라고 물어도 몇 가지 단어외엔 설명하기 쉽지 않다. 어떤 이들은 구조의 완결성을 말하고 멜로디의 탁월함을 말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구조여도 별반 반응이 없을 수 있고 뛰어난 멜로디 라인은 가끔 저속함의 상징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결국 '음악'은 언어로 말하는 것보다는 '침묵'하는 것이 나은 전술에 가까운 영역이다. 그래서일까? 사실 좋은 '음악책'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서점에 가서 만날 수 있는 좋은 음악책이라 해봐야 '가이드책'일뿐이다. '명반 100선', '음악여행 에세이' 등등 이 그런 류의 책들이다. 조금 더 학술적인 책들은 음악학에 대한 기본적 소양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조금 어렵거나 딱딱할 수 도 있다. 그런 면에서 전문가같은 아마추어 김문경의 <구스타브 말러>시리즈는 그 틈새를 잘 포착해낸 책이었다. 나 역시 그 책을 상당히 좋아하고 요즘도 말러 음악을 들을 때 가끔 펼쳐놓고 본다. 사실 김문경이 <구스타프 말러>시리즈에서 본인 스스로 이루어낸 것은 책 부록에 나오는 말러 음반 리뷰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러>시리즈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간의 방대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적당히 잘 조합해낸 아마추어의 열정과 애정때문이다. <말러>시리즈로 일약 김문경은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시선을 끄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슈베르트의 '재발견'이라고 할만한 <천상의 방랑자>는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별 두개를 겨우 줄 정도다. 그럼에도 별 하나를 더 준 것은 뒤에 붙어 있는 CD가 이 책에 소개된 곡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어서이다. 또 하나는 나름 독자도 가지고 강연도하면서 클래식 팬을 몰고다니는 사람의 책에 별 두개를 주었다가 악성댓글과 씨름해야할까봐 서이다. 일단 이 책에서 가장 불만족스러운 부분은 작가의 슈베르트의 재발견이라는 흥분에 덩달아 춤추기가 안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서두부터 음악팬들이 늘상하는 예의 그 과장된 표현들을 쓰면서 흥분에의 공감을 말한다.
'루체른페스티벌에서 공연한 슈베르트의 현악5중주 D956는 나의 어설픈 슈베르트관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거대한 지진과도 같았다......인간사의 모든 감정을 세세히 그려내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나 역시 가끔 음악을 듣고 짧은 글을 쓸 때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해 감정을 과장하는 수사를 쓰곤 한다. 하지만 이게 상당히 쓰면서도 탐탁치 않고 듣기도 싫다. 그럼에도 음악팬들 중에는 이런 수사가 본질적 의미에 닿아있는 듯 착각하며 남발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우선 말로 표현하기 힘든것을 표현하려는 결과이기도 하지만 본인이 '순수한 영혼', '영적인 쾌유', '존재의 그림자' 뭐 이런 단어를 어떤 음악에 씌우면서 그런 음악을 향유하고 있는 본인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그런 공간에 있는 그와 우리들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내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대중들의 그런 감상태도 자체와 더불어 그를 재생산하고 확증해주는 '키치적 음악비평'의 태도이다. 대개 이런류의 음악에세이 작가들은 정서적 술어를 유추적으로 확대하여 사용한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상호관련성마저 희박해보이는 의미를 부여하여 작곡가와 곡,그리고 그걸 공유하는 청자에 아부한다. (가끔 듣는 클래식 FM의 진행자들을 보면 이런 주례사 비평을 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가 확실히 구분된다. 후자의 경우를 보면 '명연주 명음반'의 정만섭씨가 그렇다. 그는 담백하게 말하고 만다. 이런 식이다. " 이미 명연으로 소문난 음반이니 더 여러 말을 다는게 필요없겠지요....발군의 기량을 보여준 연주가 아닌가 싶습니다..등" 그런데 반대의 경우 -최근에 차를 타고 오면서 들었는데 도대체 어디까지 하나 싶어서 계속 들었다- 저녁시간 대에 하는 모 교수인지 평론가인지 하는 사람이다. 온갖 미사어구와 벅찬 감동의 수사가 흘러넘친다. 예술적 촉수가 더 발달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전체적으로 과함이 특징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곡'이라는 저속한 마케팅 구호처럼 립스틱 범벅이다.)
저자의 놀라운 발견 중 하나는 슈베르트가 아이의 세계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 ) 음악의 한쪽에는 방긋 웃는 아이가 보여주는 천사의 미소가 있고, 반대쪽에는 깊은 상처를 받은 아이의 트라우마가 존재한다."
저자는 슈베르트만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실험해보자. 모짜르트를 넣으면 저 문장이 어색하게 들릴까? 쇼팽을 넣으면 어떨까? 심각하게 들릴 지는 모르지만 무리하자면 베토벤을 넣고도 저 문장의 의미를 강요할 수 있다. 좀 퇴폐미가 흐르지만 말러는 아닐까? 말러의 음악에도 그의 어린 시절 기억이 묻어있는 민속리듬들이 들어간다. 군악대 행진도 들어간다. 요즘말로 하면 좀 까진 아이로 말러를 취급하면 저 문장에 끼여도 그리 어색함은 없다. 저자는 천진한 세계와 광적인 발작의 세계라는 양극성을 말하기 위해서 슈베르트만을 저 문장 속에 포획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거의 모든 예술가들이 저 스펙트럼 사이에 있다. 좀 더 넓게 보면 인간이 저 도상 위에 있을 수도 있다.
물론 말장난처럼 들릴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는 어떤가? 저자는 이 책에서 슈베르트의 재발견 흥분감에 비추어 '예술사적 존재'로의 슈베르트의 문제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책의 3분의 1이 괴테의 <빌헬름마이스터의 수업시대>로 이루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저자가 한 일이란 괴테의 소설을 요약하고, 그 안에 나오는 마뇽과 노인의 시를 정리하고, 슈베르트 자료들을 모은 것 뿐이다. 그리고 그나마 안타까와 하는 이야기가 '괴테가 슈베르트를 몰라봐줘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정도이다. 저자가 강조한 슈베르트의 특성인 '양극성'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를 재인용한 슈베르트의 '불완정성' '불연소성'의 문제는 과연 슈베르트만의 문제였을까? 이미 <클래식으로 읽는 인생>이라는 -책은 읽지 않았지만 책 추천사는 음악,인생,예술,철학을 집대성하는 이란 말이 나온다- 책을 썻다면 저자가 결코 '초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적 특성에 대해 몰랐을리가 없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관계성에 대한 부분은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아쉬운 부분이다. 슈베르트는 사실 음악예술사에서 가곡의 왕이지만 또한 낭만주의의 증인이다. 쉽게 말하면 슈베르트의 음악과 그의 예술적 교류, 세계관 등은 그런 낭만주의의 도래와 무관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런 관련성은 직접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반면에 이 책에는 낭만주의의 숭고미를 상징하는 프리드리히 카스파르 다비트의 그림이 여러번 나온다. 이 그림들은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의 CD자켓에 아주 빈번히 사용된다. 이 그림과 슈베르트 사이의 관계는- 저자가 지난 책에서 말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 연관이 없는 것 일까? 결국 이 부분을 삭제하다 슈베르트가 마치 독자적인 예술천재로서만 그려지고 있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이 책의 전체적 시각은 서가에 꽂힌 책을 폈다가 이제는 기억도 없는 멋진 문장에 친 밑줄을 보고 감동하는 것과 유사하다. 나쁜 의미만은 아니다. 그런 정도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내게는 그 점이 <말러>시리즈에 비해 아쉽다는 것이다.
슈베르트의 시대는 프랑스 혁명 이후의 시대이다. 아놀드 하우저같은 경우에 이 시기의 예술가들이 자기 나라에서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고향상실, 고독한 감정들은 세계적인 정서가 되었다고 말이다. 이것은 고향에 대한 향수, 무한에 대한 동경, 미지의 것에 대해 일종의 숭고함을 갖는 반응으로 나타난다. 결국 이것은 생의 낭만화 경향으로 조응하고 낭만적 유토피아 건설에 대해 꿈을 꾸기도 한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에서 저자는 이 곡이 영원한 아웃사이더의 노래라고 말한며 한과 자기혐오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과거에 '그까짓 사랑때문에 한심한 지식인 같으니"라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깊은 속을 헤아린 겨울나그네는 존재의 상처때문에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이것이 비단 슈베르트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단 한번도 지적하지 않는다.
앞서 말한 슈베르트의 '양극성' 측면도 보자. 저자는 슈베르트가 기괴함과 아름다움 사이를 오고간 작가였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가곡들도 많지만 '난장이'같은 (불륜과 파멸을 소재로 한다.)곡들도 상당량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미의 역사>의 한 대목을 그대로 인용해 보자. 낭만주의 미학을 잘 정리한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낭만주의의 무엇보다도 독창적인 면은 다양한 형식들 사이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관계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이성에 의해 맺어진 것으로 모순점들을 배제시키거나 반명제(유한/무한, 전체/일부, 삶/죽음, 정신/마음)를 해소시키지 않고 그것들을 공존하게 하는데 낭만주의의 진정한 특성이 있다.'
유명한 소설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이 씌여진 것이 1818년 슈베르트 21살때 일이다. 왜 <프랑켄슈타인>을 예로 들었는지는 알아서 생각해 볼 일이다. 음산함, 그로테스크 함 같은 것들은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아이템이 된다. 음악교과서에서 표제음악의 선두로 말하여지는 -그리고 단두대 장면으로 유명한-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이 1830년 ,즉 슈베르트 사후 2년 뒤에 나온다. 만약 슈베르트가 살아있었다면 33살이다.
저자는 독일 가곡이 슈베르트 이후 퇴보했다고 말한다. 이유는 저자가 곡과 멜로디가 최적상태를 유지하는 고전주의적 가곡관을 지향하고 있기때문이다. 바그너나 말러는 물론이고 볼프같은 이들도 이 최적상태를 유지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언어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 이런 류의 문장은 내 기억에 이 책에서 두 번이 등장한다. 문제는 '슈만'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것이다. 첫번째에는 슈만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나는 왜 슈만을 언급하지 않지? ' 라고 벼루면서 보고 있었는데 책 후반부에 다시 슈베르트 가곡의 고전적 완성미를 강조하며서 단 한번 비로소 슈만이 등장한다. 슈만은 그나마 가곡의 황태자 대접은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멜로디라인에서 대중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앞으로도 슈베르트 가곡의 수준에 이르지는 호응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동감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저자는 특이하게도 슈베르트의 재발견에 들어가면서 멜로디 라인이 떨어져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슈베르트의 곡들에 힘을 실어서 말한고 있다. 슈베르트와 슈만의 비교에서 슈만이 멜로디 라인이 대중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인기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걸 그대로 슈베르트의 곡들 사이의 비교로 적용해 본다면 어떨까? 현재 인기가 없는 슈베르트의 곡은 그런 단점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슈베르트의 가곡이 최고 수준은 아니다. 책 전체적으로는 겨울나그네나 들장미,아베마리아 같은 곡들이 있지만 저자의 시선은 숨겨진 곡을 찾는데 있다. 저자가 인정하듯이 음악팬들의 '지적 스노비즘' 의 한 예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고 있다. (그런 방식에는 나도 자유롭지 못하다.)
저자의 슈베르트에 대한 과잉은 가곡 '마왕'의 예에서 나타난다.'마왕'은 드라마라는 구조뿐만이 아니라 성악과 반주면에서 탁월한 곡이다. 딱 떨어지는 느낌을 준다. 저자는 4분짜리 완벽한 곡을 만든 이가 어떻게 기악곡 등에서는 구조의힘이 떨어졌는지 묻는다. 요즘 말로하자면 CF 잘 만드는 감독이 왜 극영화는 실패하냐는 투다. 질문부터 웃음이 묻어났다. CF 잘만드는 것과 영화 잘만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 호흡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물로 저자는 하루키를 인용하면서 스스로 답을 제기한다. 베토벤식의 튼튼한 구조에 대한 애착이 전도된 질문이라는 것이다. 베토벤식의 구조는 슈베르트에게 의미 없었음을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우리는 낭만주의의 일부 특징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낭만주의는 기본적으로 어떤 종류의 객관적 예술법칙의 타당성도 부인한다.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일종의 집단에 대한 개인의 투쟁이었고 이런 흐름은 현재까지도 예술가들의 작업을 규정하는 한 축이 된다. 당연히 개성적 표현법칙과 기준은 개인화된다. 그렇다면 하이든,모차르트 시대의 고전적 양식으로 부터의 탈피는 슈베르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게 된다. 베토벤의 작품 속에서도 이리 그러한 변화의 징조들이 나타난다는 것이 교과서적 접근 아닌가. 슈베르트의 '불연소성', '반복성' 같은 것은 그런 전체 차원에서 조망해 볼 수도 있을 법하다. 저자 슈베르트 개인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결론을 맺는다. 물론 구조와 개인의 상호 관계문제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슈베르트라는 개인 하나만 놓고 보면 음악계에 있어서 낭만주의의 원인이자 결과이기 때문이다. 요점은 슈베르트라는 개인을 둘러싼 영향들에 대해 저자는 사적인 관계들 외에 거의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슈베르트라는 한 천재의 작품으로 낭만주의 음악과 슈베르트의 작품들을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 지점이 못내 아쉽다는 것이다.
슈베르트를 말할 때 '슈베르티아데' 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슈베르트가 여인보다 친구들과의 예술적 관계를 더 소중히 여겼다고 말한다. 이것 역시 슈베르트에게만 일어난 일은 아니다. 혁명 이후 과거 예술계층에 분화가 오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시민적 예술애호층들이 늘어나고 그룹으로 발전하게 된다. 슈베르트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저자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든 슈베르트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그 모임 자체를 상당히 수준높은 예술가들의 모임정도로만 말한다. 그리고 슈베르트의 사인-매독에 의한-같은 것들은 날라리 친구 한 명의 꾐에 빠진 한 번의 실수라는 식으로 대충 지나간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저자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언가를 생각해보면 슬쩍 웃음이난다. 영웅적인 베토벤 상이 후대의 이미지이듯 천상의 방랑자, 순결한 청년의 영혼 슈베르트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한 노력말이다. 요즘 대세가 '퀴어'라서 그런지 나는 슈베르티아데에서 '퀴어'의 향기가 난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영화적 상상력으로 슈베르트 영화를 만든다면 나는 '퀴어'로 만들겠다. 요즘같으면 매독이 아니라 AIDS라 해야 이해받을지도 모르겠다. 요즘이야 매독으로 죽는 이들은 거의 없을테니...좀 모독적이라는 생각이들기도 한다. 밀로스 포먼이 아직도 모짜르트와 소송 중이라니 그 판례를 보고 수위를 조절해 볼 생각이다.
이 책은 내가 최근 가장 빨리 읽은 책이다. 그다지 어려운 내용도 많지 않고, 나는 읽지 않을 <빌헬름마이스터>를 읽느라 고생한 흔적도 보인다. 여러가지 안좋은 소리를 해서 좀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하자. 이 책의 표지는 정말 최악이다. 디자인에 대한 아무런 고민이 없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지 여실히 보여준다. 리어카에서 파는 CD 자켓도 이 책의 디자인보다는 낫다.
슈베르트에 대한 책이 거의 없다는 저자의 문제의식에는 공감을 한다. 그런면에서 또 한번 틈새를 노린 점은 훌륭했다. 그러나 결코 좋은 점수를 주긴 힘들다. 말러에서 보여준 공력을 기대어 다음 번 슈베르트 책은 진일보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