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 혁명의 노래 - 라틴아메리카 문화기행
우석균 지음 / 해나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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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인 되기' 는 즐거운 경험이다.낯선 외국땅에 떨여져 있을 때 더욱 그렇다.알아 들을 수 없는 외국어가 나를 제외한 모든 공간을 채우고 있을 때 내 안에서는 불안감과 호기심이 동시에 솟아 오른다.그리고 곧이어 나의 감정은 사라져버린 자의 해방감을 경험하게된다.  나의 형체만 오려내고 나머지는 그대로인 단체 졸업 사진속의 공간에 들어온 것이다.

나는 드디어 길을 잃은 것이다.특히 대도시에서 길을 잃는 다는 것은  달콤한 쾌락이다.나는 세상에 존재 하지 않는자가 된다.눈에 보이는 모든 것,귀에 들리는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다.내가 들을 수 있는 소리는 내 머리속을 울리고 있는 내 목소리일 뿐이다.

도쿄의 마지막 밤에는 비가 내렸다.많은 비는 아니었으나 욕망과 쾌락으로 가득찬 도시를 잠시 위무할 정도의 양은 되었다.도쿄 젊은이들이 최근 즐겨 찾는다는 록본기에 갔다.거리를 돌아다니다 저녁 무렵 록본기 힐스라는 빌딩에 발이 닿았다.그 건물 52층에는 전망대와 모리미술관이 있었다.주로 현대 일본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데 그날은 사진전이 있었다.또한 특별전으로 다빈치 과학노트전시회가 있었다.큰 감흥은 없었다.나의 시큰둥한 감상은 나의 보폭을 넗혔다. 결국 나는 일행들을  잃었다.너무 빨리 전시장을 나와 버린 것이다.도쿄 52층 상공에서 나는 다시 이방인이 되었다.일행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혼자 전망대로 향했다.비에 젖은 도쿄는 아름다왔다.연인들이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밀어를 나누고 있었다.그들의 데이트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한쪽 구석에 자리를 차지했다.그리고 검은색 가방에서 CD플레이어를 꺼냈다.한때는 첨단을 달렸던 포터블 CD플레이어였다. 하지만 지금은 촌스럽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어디가면 가방속에 숨겨놓는다.도쿄의 야경을 앞에 두고 수업시간 도시락꺼내 먹듯 조심스럽게 CD를 얹었다.

아타왈타 유팡키의 83년 아르헨티나 공연실황 ..."안녕하세요 부에노스 동포여러분"...... 유팡키의 기타는 도쿄에 내리는 비처럼 조용했다.그의 목소리에는 안데스를 휘돌아 도쿄까지 날아온 바람의 온기가 묻어있었다.나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었다.내가 세상의 어디에 가있든 또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사람이 만들었던 음악이 나의 동반자가 되어 주고 있었다.내 귀에 몇가지 들리던 일본어는 나를 소외시켰지만 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유팡키의 스페인어는 나를 안아주었다.시끄럽지 않게 그리고 나의 고즈넉함을 방해하지 않으며 그렇게 유팡키는 나를 포옹했다.

<바람의 노래,혁명의 노래>는 남미음악 여행기이다.여행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시작된다.세계 3대미항으로 알려진 그곳에는 탱고가 있다.탱고 음악은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있다.아마 영화<여인의 향기>에서 알파치노의 탱고씬 이후 라디오방송을 많이 타서 일 것이다.내게 탱고 춤 자체는 좀 부담스럽다.뭔가 은밀한 욕망이 이글거리고 있는 느낌이어서 낯뜨겁기 까지 하다.저자를 인용하면 '수직적욕망의 수평적 표현'이라고 한단다.하지만 탱고음악은 좋아한다.전영이 불렀던 <서울야곡>(원곡은 현인선생곡이지만)이 아마 제일처음 좋아했던 탱고음악일 듯 하다.하지만 본격적으로 탱고가 귀에 들린 건 영화<춘광사설-해피투게더>를 본 이후이다.그 영화에서 왕가위는 처음부터 끝까지 피아졸라의 탱고로 도배를 했다.물론 방송을 많이 탄 것은 터틀스의 <해피투게더>였지만 나는 '밀롱가트리스테'나'오블리비온' 이 듣기 좋앗다.그 곡을 들으면 영화 후반부 장국영이 세상의 끝으로 가는 장면이 떠오른다.탱고가 가진 흐느적거리면서도 절도를 잃지 않는 비장미는 매력적이다.늦가을 퇴근길 어두워지는 도시를 바라보며 듣는 탱고란...

저자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벗어나서 안데스쪽으로 방향을 잡는다.안데스의 음악하면 결국 유팡키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저자는 팡키가 정치적 망명을 한 이후 가끔 고국에 들를 때마다 칩거하던 세로콜로라도를 찾는다.그는 안데스의 가우초들의 음악을 현대화시켜낸 장본인이다.유팡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안데스의 자연과 사람들의 정신이었을 것이다. 우루과이의 목소리가 예쁜 젊은 가수들에게 대한 유팡키의 비판은 화장기없는 자연과 삶에 대해 그들이 외면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을 것이다.유팡키는 그들에게 바람의 친구가 되지 못한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유팡키에게 안데스의 바람은 중요한 요소였을 것이다.그것은 고지대를 여행하는 가우초들의 친구였으며 자유로운 영혼이었을 것이다.또한  몰락한 역사와 쇠락한 현실 사이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유일한 존재였을 것이다.

책은 남미의 누에바깐시온 가수들에 촛점을 맞추어 계속된다.그나마 우리나라에 좀 알려져있는 메르세데스 소사-최근에 새로운 음반이 나왔다-,그리고 빅토르 하라.비올레타 파라등이 등장한다.빅토르 하라는 그의 음악보다도 그의 비극적 죽음으로 인해 세인의 관심을 더 끌었던 듯 하다.이사벨 아엔데의 소설<영혼의 집>을 보면 빅토르 하라를 모델로 한 등장인물이 나온다.페드로 였던 것 같다.소작농의 아들로 주인의 딸을 사랑하게 된다.결국 고향을 떠나 사회주의에 헌신하며 노래로 민중들의 마음을 끌어낸다.그리고 아엔데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소설속 페드로는 빅토르 하라처럼 스타디움에서 죽임을 당하지는 않는다.이사벨아엔데의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빅토르 하라의 음반 자켓중에서 가장 멋진 것은  이 책 표지에도 있는 마추피추를 배경으로 망토와 기타를 들고 있는 하라의 모습이다.마치 빅토르 하라가 Manifiesto를 부르고 있을 것만 같다.

"내가 노래하는 건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나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지. 기타도 감정과 이성을 갖고 있기에 나는 노래 부르네. 내 기타는 대지의 심장과 비둘기의 날개를 갖고 있지. 마치 성수와 같이 기쁨과 슬픔을 축복하지. 여기서 내 노래는 고귀해지네. 비올레따가 말할 것처럼. 봄의 향기를 품고 열심히 노동하는 기타" (선언 중에서)

책은 민중가수들로 시작해서 파블로 네루다로 끝을 맺는다.영화<우편배달부>로 친숙해진 그는 남미 문화와 정치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나는 그의 민중시들 보다도 그의 사랑시들이 더 맘에 든다.하지만 낭만적 혁명주의자였던 네루다에게 어느 한쪽만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그에게 낭만성과 혁명성은 자웅동체의 한 운명이었을 것이다.

"행복한 두 연인은 이미 하나의 빵이고 풀잎 속에서 달이 비친 한 방울의 이슬이다."

"난 내 조국이 나뉘어지는 걸 원치 않네.피묻은 일곱개의 칼로도 나눌수 없지"


<바람의 노래,혁명의 노래>가  남미 음악과 그들의 이야기를 전부 전해줄 수 없다.음악이야기에 대한 내용은 그다지 치밀하지 못하고 구체적 역사를 이야기하기에도 지면이 부족하다.하지만 문화기행 책의 가장 큰 목적은 사람들에게 '세상에 이런 것도 있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특히 전문가들을 상대로 한 책이 아니라면 말이다.어떤 분들은 이 책을 보고 남미음악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고 남미의 질곡많은 역사에 대해 조금 눈여겨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아니 역사나 민중의 한에 대해서 잘 몰라도 된다.음악은 그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할 것이니까...그렇다면 이 책의 소임은 다 한 것 아닐까? 

p.s) 이 책에서 주로 거론한 음악가들은 남미의 누에바깐시온 가수들이다.우리로 친다면 민중가수들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조금더 거슬러 올라서면 한대수 같은 의식있는 포크 가수들까지 선이 닿는다.이 책에 소개된 음악들은 사실 동시대의 남미음악은 아니다.월드뮤직에 대한 개념정의까지 풀어야되는 부분이라서 다 이야기하지는 않겠다.어쨋거나 이 책에 소개된 음악 듣고 칠레젊은이를 만나서 "어..나...빅토르하라 잘 아는데.." 해봐야 그쪽에서 잘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은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이다. 요즘 20대초반 젊은 친구한테 가서 "야...한대수 알어?"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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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11-07 09:31   좋아요 0 | URL
추천이나 하렵니다.
 
사랑과 죽음의 교향곡 - 브루노 발터가 만난 구스타프 말러
브루노 발터 지음, 김병화 옮김 / 마티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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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클래식 듣기 힘든 계절이다.아무래도 날씨도 덥고 습도도 높고 하니 오랜 시간 음악에 집중하기 힘들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이런 패턴은 뜨거운 바람에 살짝 냉기가 묻기 시작하면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하지만 올 여름 초입은 말러 덕분에  오랜 습관에 예외가 생겼다.장마기간 내내 말러 음악을 주구장창 들었다.주빈메타의 훌륭한 <부활>연주 덕분이다.교향곡 2번의 그 장대함에 감동먹으며 예전에 들었던 아바도,래틀의 연주도 다시 꺼내 듣게 되었다.또 내친김에 뛰어난 균형감으로 기억되는 클리블랜드와 도흐나니의 1번 <타이탄> 조금 심심하지만 명연으로 알려진 쿠벨릭,불꽃같이 활활 타오르는 텐슈테트의 5,6번 연주에 이어 쨍쨍한 불레즈의 연주까지....물론 번스타인을 빼놓을 수도 없다.

말러는 생전에 '머지 않아 나의 시대가 온다'라는 말로 시대의 몰이해와 자기 예술에 대한 확신성을 표현했다.말러 사후 100년도 지나지 않아서 이말은 사실로 입증되었다.전 세계적으로 콘서트홀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이 바흐도 베토벤도 아닌 말러라고 한다.지휘자들 역시 '말러 치클루스'를 한 번 정도 해야 메이저에서 인정받는다.그렇다면 왜 수십년 전 부터 말러 열풍이 불고 있을까?  브루노 발터는 이렇게 말한다.

"...말러의 작품이 가진 최고의 가치는 모험적이고 과감하며 개척자적이거나 기괴한 것이라는 진기함 때문이 아닙니다.그보다는 이 진기함이 아름답고 영감에 가득하고 심오한 음악 속에 녹아들어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그것이 고도로 창조적인 예술성과 의미 깊은 인간성이라는 영속적인 가치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 말입니다....."(p177)

브루노 발터가 지금으로 부터 50여년전에 썼던 이 책은 천재적이며 문제적 인간 말러와 그의 예술에 대한 가장 함축적인 입문서이다.먼저 좀 생소할 수 있는 저자 브루노 발터부터 이야기 하자.그는 20세기 초반에 활약 했던 세계적인 지휘자-멩겔베르크,토스카니니,푸르트뱅글러,클렘페르 등 과 같은 반열에 있는 훌륭한 연주가이다.그가 연주한 모짜르트,베토벤,말러등은 아직도 명연으로 사랑받고 있다.그의 베토벤 <전원>교향곡과 초연자의 자부심도 있음직한 말러의 <대지의 노래>등은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뛰어넘는 연주가 쉽게 나오지 않고 있다.그의 연주는 그의 알려진 성품처럼 온화하고 인간적인 피가 돈다.과도한 자기표현이나 현학적 자세등은 찾아볼 수 없다.오래된 한옥의 소나무 기둥에서 느낄 수 있는 깊고 편안한 울림,물굽이 마을의 휘도는 강물을 바라볼때 느끼는 유려함.... 초기 스트레오로 녹음된 말년의 발터 연주에서는 이런 느낌이 든다. 브루노 발터가 음악계에 발을 들여 놓았던 청년기에 그는 위대한 말러를 만난다.발터는 이때의 강렬함과 이후 그와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고 한다. 발터가 이 책에서 말러에 대해 서술하는 방식은 그래서 객관적이지 않다. 객관적으로 공과 실을 따지는 책을 그는 쓸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발터는 그가 가까이서 보고 경험한 말러,그리고 그의 삶과 철학이 반영될 수 밖에 없는 교향곡들에 대해 지극한 애정을 가지고 이 글을 쓴 것이다.말러의 성격이 그다지 온화하진 못했다고 한다.괴팍함과 독설로 동시대에 많은 적들도 만들었다.발터 역시 그의 비사회적 성격에 대해 어느정도는 인정한다.하지만 여기에도 애정이 묻어있다. 예술가들의 기벽이나 괴팍성은 오히려 긍정적 캐릭터로 그려지기도 한다.베토벤도 그랬고 슈만,리스트,바그너 등등....

이 책은 구성면에서도 아주 읽기 용이하다.첫장에서는 브루노 발터의 개인적 경험에 바탕을 둔 말러의 삶을 그리고 있다.말러와의 첫만남부터 함께 일했던 기억들,그리고 서신 교환을 통한 관계등등...발터가 가까이서 또는 멀리서 바라본 이야기들이 중간중간 일화등을 통해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다.가까이서 바라본 말러를  그는 '부글 부글 끓어오르는 나일강 중류'에 비유한다.즉 '변덕스러움'에 대한 발터 나름대로의 비유이다.말러음악을 들으며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는 것은 그의 이러한 변덕스러움이 음악에 반영되기 때문일 것이다.말러의 변덕은 그냥 변덕이 아니다.베토벤의 교향곡적 전통,베를리오즈의 악마적 낭만성,슈베르트,브루크너의 멜로디,민요의 전통,어린시절 유모따라가서 매일 들었다는 오스트리아 행진곡의 영향...이 모든 것이 교향곡 전통의  확대발전의 틀 속에서 변덕을 부린다.

다음으로 지휘자로서의 말러에 대해 이야기한다.말러가 빈에 들어가서 자신의 창작력을 펼치고 싶어했던 욕심,그리고 빈 단원들과의 불화,빈에서의 막강한 카리스마등이 이 장에 나온다.말러가 오페라 개혁에 앞장섰다는 것은 처음 듣는 재미있는 이야기였다.아무래도 지휘자 말러를 본적이 없이 작곡자 말러의 음악만을 들었던 시대적 갭이 아닐까 싶다.그는 오페라 감독으로 박수부대를 없애고 지각하는 관객들의 출입도 막았다고 한다.신인 가수들을 기용하여 기존의 자만심만 높은 가수들을 퇴출시켰다.빈 오페라단의 히딩크였던 셈이다.또 말러가 지휘자로서 연극,드라마의 요소를 강조했다는 것도 새롭게 안 사실이다.요즘이야 일반화된 사실이겠지만 그는 '오페라의 일체성'이란 목적을 위해 빈에서의 10년을 분주하게 보냈다.오페라의 일체성이란 것은 종합예술로써 오페라가 갖는 음악,드라마,무대,조명,의상 등에 대해 총체적 완결성을 높이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말러의 개혁드라이브는 풍요와 낭만의 빈  전통과 갈등을 빚게 된다.결과적으로 빈 필과의 계약은 종결된다.이후 빈필이 상임을 두지 않기로 했다고 하는데 그 전통이 말러와의 결별 이후라는 것 역시 재미있는 일화이다.

발터는 작곡자로서의 말러에 대해 가장 비중있게 다룬다.말러 음악이 가진 다양성의 토양,말러 음악이 가진 시기별 구분,또 그에 따른 작곡가의 인식 변화등을 지휘자이자 말러전문가로써 차분하게 설명한다. 말러학자들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긴 하지만 발터는 1-4번,5-8번,<대지의 노래>와 9번의 세 시기로 나누어 각곡들이 가진 의미와 말러 내부의 인식 변화를 밝히고 있다. 예를 들어 교향곡 1번<타이탄>을 발터는 말러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고 비유한다.말러의 음악에 영향을 준 괴테의 독일정신을 고려한다면 가장 적절한 비유가 아닐까 싶다.1번 교향곡의 1악장은 새소리를 연상시키듯 참신하게 시작한다.스케르초 악장은 전혀 뜻밖의 행진곡풍의 음악이 전개된다.장송곡 풍의 행진곡을 통해 시니컬하면서도 모순적인 감정을 표현한다.이 모순은  마지막 악장의 대반전을 준비한다.마지막 악장에서는 이모든 관계들로 부터의 해방을 위학 위협적이라 할 만한 폭발이 기다리고 있다.발터는 2번 교향곡은 삶에 대한 비가,3번은 환희의 지혜 4번은 동화,5,6,7번은 순음악적 변화,8번은 삶에 대한 긍정....<대지의 노래>,9번 교향곡은 눈앞에 있는 죽음에 대한 숭고한 변형을 이야기 하고 있다고 본다.

 말러는 끊임없이  회의하고 부정하는 정신이었다.그는 이상은 그가 온전히 자신을 바친 음악을 통해 세계를 구축하고 인간과 신의 심연에 대해 이해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빈에서는 말러에 대한 찬반이 팽팽했다고 한다.인기면에서는 오히려 슈트라우스 부자의 왈츠가 훨씬 많은 사랑을 받았을것이다.하지만 그의 시대가 오리라던 말러의 말처럼 '말러의 시대 20세기'에는 당대의 어느 작곡가도 말러에 필적하지 못했다.말러는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기 몇년전에 죽었다. 만약 그가 살아서 1차 대전의 수많은 죽음과 폭력을 목격했다면 그의 음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상상만으로도 그 음악의 무게감에 소름이 돋는다. .... 말러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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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2005-07-06 19:45   좋아요 0 | URL
한 때 말러에 심하게 경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좀 많이 시들해졌지만 말입니다. 드팀전님의 리뷰를 읽고 다시 한번 말러의 cd를 꺼내들게 되네요. 아바도가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말러 2번을 꺼내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러 만세입니다. ^^

드팀전 2005-07-07 11:54   좋아요 0 | URL
ㅋㅋ..그 음반은 최근 꺼군요.DVD도 나왔다고 하는.... 실황을 언제 한번 들을 기회가 있어야 진짜 좋은 지 알텐데...기회가 좀처럼 없군요.저두 이 책 보다가 이것 저것 꺼내듣게 된 셈입니다.
 
소리의 황홀 - 윤광준의 오디오이야기
윤광준 지음 / 효형출판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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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에 처음 오디오란게 생긴 건 중학교2학년때 이다.거의 1년을 '오디오 오디오' 타령을 했다.부모님들은 늘 그렇듯이 얄팍한 조건을 -당신들은 동기유발이라 믿겠지만-달면서 오디오를 부상으로 내거셨다.조건이란건 누구가 알다시피 시험 성적이다.결과가 좋았는지 아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해 여름이 가기 전에 내방엔 나만의 오디오가 생겼다.당시에 우리 반에서 자기방에 오디오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정말 귀했다.(잘사는 동네가 아니어서 그럴 수 도 있겠지만..) 한 30만원 돈 되는 인켈 오디오였다.내 방 한쪽 면을 거의 장악하다시피했다.그 당시 오디오는 기술발전의 혜택을 덜 누려서 그런지 성능에 비해 좀 비대했다. 동가격대의 요즘 나오는 것들에 비하면 훨씬 많은 면적을 차지했다. 작은 내 방은 새로 들어온 오디오의 존재 하나로 꽉찬 느낌을 주었다. 그날 이후 주구장창 음악을 듣고 음반을 사모으기 시작했다.아마 내가 처음 산 LP음반이 'WHAM','들국화 1집' 이었던 것 같다.

좋은 소리는 한번 들으면 그 감흥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예전에 가끔 시내 나가서 오디오 전시장에서 흘러나오는 좋은 소리를 듣곤 한 적이 있다. 이게 '후천 개벽'하는 소리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쿵쾅거린다.그리고 저걸 집에서도 듣고 싶다는 욕심이 마구마구 생긴다.하지만 가격대를 알아보곤 맘을 접는다.눈으로는 아쉬움을 귀로는 감동의 여운을 남긴채 샵을 나가야만 했다.그러면서 다짐만 한다. '다음에 이사가면...다음에....'  결국 나에게는 하이앤드는 공간과 가격이라는 벽때문에 늘 미루어온 욕심이다.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면 매니아라는 중독성 명사에 대한 나의 회피때문이다.무슨 이유 때문인지 나는 매니아가 좋게 들리지 않는다.사람들은 매니아를 한 분야에 자신의 열정을 토해내는 아름다운 사람들로 묘사한다.저자 역시 오디오 매니아로서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 애정을 느끼고 스스로도 프라이드를 느끼고 있는 듯 하다.물론 매니아들에 대한 곱지 않는 시선도 있다. 대게 매니아들이 열광하는 대상에 대한 의구심때문인 듯 하다.그 기준은 무색무취한 일반인의 시각이다.그런 시각으로 보면 어른이 다돼서 인형옷이나 입고 다니고 징그러운 거미를 집에서 키우고 세상의 온갖 나이키운동화를 모으고 하는 것들이 정상의 영역에서 벗어나 보인다.

내가 매니아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매니아들이 갖는 자기영역의 구획화와 자기 전문성에 대한 스스로의 맹신때문이다.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하지만 매니아임을 자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 분야말고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 허다하다.자신이 취미든 전공이든 얻게된 지식이 다른 모든 것과 유기적 소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결국 한우물만 열심히 파서 우물안에 개구리가 되어버리는 것을 쉽사리 발견할 수 있다. 또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대한 겸손은 밥먹듯 잊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예를 들어 인라인 동호회라고 치자.거기에는 자주참가하는 주도세력이 있고 또 가끔 참가하는 사람도 있다.또 이제 갓 시작을 한사람도 있을 것이다.갓 시작한 사람이 들어오면 얼마나 시끄러운지 아는가? 관심과 애정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의 경험과 지식에 대한 설이 대부분이다.이럴때 이렇게 해라 저럴땐 저렇게 해라....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또 어떤 잘난 이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마치 자신이 갑자기 아이가 되어버린 듯 하다.경험과 지식이 스스로를 너무 당당하게 만들어버린다.매니아들은 그러한 함정에 늘 노출되어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오디오에 관심이 있는 예비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쓴 듯하다.그렇다면 나는 적절한 수혜자인 셈이다.이 책을 보는 동안 좋은 기기들에 마음을 빼앗겼고 또 거기서 나오는 소리를 스스로 상상하며 즐거웠다.기계적인 이야기만 장황하게 늘어 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길수 있다.여기에 등장하는 오디오기기들은 디자인적으로도 아주 훌륭하다.그래서 많진 않지만 사진보는 즐거움도 크다.린의 턴테이블,탄노이 킹덤,골드문트 아폴로그,소누스 파베르의 과르네리오마주 스피커등등. 그냥 내부 기기들을 모두 빼버리고 장식용으로 설치해 놓아도 인테리어의 수준을 높여줄 만한 탐나는 디자인들이다.저자는 좋은 오디오가 기술적 발전 하나만 가지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오디오라는 것은 인간의 예술적감각,인문학적 감성들과 직접적 소통이 이루어진다.제작사가 이러한 점에 대한 소신있는 철학을 가지고 있지 못한 한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없다.이점때문에 하이앤드오디오가 일반 가전제품과 다른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한마디로 장인정신이 없다면 오디오도 없는 셈이라는 것이다.그런 의미라면 오디오기기들은 제품이라기 보다는 작품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 같다.

장인의 기가 배어있는 작품이 하이앤드의 세계이다 보니 역시 가격은 어마어마하다.저자가 이 책에 소개한 기기들,보기에 아름답고 좋아보여 하나 살까 생각하는 분들은 인터넷 한번 뒤져보시면 생각이 좀 바뀔 것이다.강남의 부자들이 선호했다는 탄노이같은 경우 대략 프론트스피커만 2천만원 수준이다.예쁘장하게 생긴 윌슨베니쉬의 서클턴테이블은 4백만원대이다.(모양진짜 예쁘다)골드문트의 풀에필로그는 2억원대의 가격이다.물론 한 브렌드에서도 가격대비 천차만별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조금 한다 하면 집전세값은 거져날릴 정도의 가격이니 취미치고는 상당히 돈이 많이 들아가는 취미이다.내가 오디오계에 아직 발을 못붙이고 있는 것도 더 좋은 소리를 찾아헤매다 거지될까봐서이다.저자는 말한다.진짜 오디오파일중 넉넉한 사람들은 없다고 다들 적금깨고 부인몰래 카드 할부하고... 나름대로 좋은소리에 대한 집념처럼 들리기는 하는데.... 카드 할부에 적대적인 나는 그런게 영맘에 들지 않는다.없으면 없는 선에서 멈출지 알아야하는데 소리 욕심에 삶이 부대끼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따지고 보면 그러한 소리 욕심의 대부분은 르네지라르가 예기한 '타인의 욕망''매개된 욕망'일수 있을 텐데 말이다.그러한 욕망은 절대 채워질 수 없는 것이라고 그도 말하지 않았던가.

마지막으로 진짜 맘에 안드는 얄팍함에 대해 지적하자.

저자는 오디오와 음악을 통해 삶을 배웠다고 한다.이러한 표현은 사실 매니아들의 상투적 표현방식이다.정말 그랬을 것이다.독재반대투쟁에 사람들이 실려갈때도 저자는 고개를 파묻고 음반만 돌려다고 스스로 부끄러워한다.세상모든 사람이 다 돌들고 병들고 할 필요는 없다.그냥 부끄럽다 하면 아무도 뭐라 안한다.그런데 저자는 그 부끄러움을 음악에 돌렸다. '나는 숨죽여 흐느끼며 존바에즈의 '우리승리하리라' 밥딜런의 '블로잉인더 윈드'를 들었다,나는 위대한 아티스트들로부터 자유와 희망,절망과 고독을 하나씩 배워갔다.' 이게 무슨 풀뜯어먹는 백해무익한 변명이란 말인가.내가 답답한부분은 자신의 비겁함에 대한 사후 피난처로 음악을 끌고 들어가는 태도때문이다.흔히들 예술가들이나 예술가인 척 하는 사람들인 정치적 변동기에 자주 취하는 방식이다.아닌가? "세상이 혼란할때 음악과 미술의 한차원 높은 세계에 계시다 세상이 안정되면 그때 나는 다른세계에 잠시 가있어서 ...잘 모르고...좀 미안하기도 하구...그러네. 이거 아닌가?"  내가 무슨 극렬행동가는 아니다.단 매니아들이 -특히 예술적 매니아-이 예술을 등에 없고 둘러내는 변명에 자다가 뺨맞는 예술이 불쌍해서 그런 소리한번 해본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예술을 등에 없은 저자의 얇팍한 상상력은 이런 형태의 글을 남긴다.좋은 CD플레이어가 들어왔다는 가게주인의 이야기에 오디오가게로 가면서 하는 말이다.

"오디오숍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착잡하다.아니 즐겁다.조금 후면 성공한 뉴욕의 여피족들이 사용한다는 '와디아'CD플레이어가 내 것이 된다.영화에서 보았던, 마천루의 야경이 창 밖에 비치는 푸른 색조의 세련되 거실에 놓여 있던 바로 그 기종이다.갑자기 내가 그들과 같은 반열에 올라선 기분이 든다."

좋으셨을 것 같다.그 훌륭하신 뉴욕의 여피님들과 어렵사리 같은 반열에 오르셨으니.!!  생각은 저정도 수준의 경박함이나 오디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아는 저자다. 나는 매니아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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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7-19 18:05   좋아요 0 | URL
아, 드팀전님... 제가 어찌 당신의 손을 들어드리지 않을 수 있으리오....

보르헤스 2006-06-10 16:03   좋아요 0 | URL
역시 드팀전님! 기대를 져버리시지 않는군요.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하더군요. 오디오란 음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던가요? 그의 오디오 찬양엔 음악의 자리는 없더군요. 음향만이 있을 뿐이지. 하이엔드 오디오에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에 이르는 돈을 쓰느니 차라리 연주회나 음악회에 한번이라도 더 가는게 나을듯 합니다. 그가 그렇게나 추구하려는 진정한 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면 말이죠 ^^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동문선 현대신서 102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 / 동문선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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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글렌 굴드에 큰 애정이 없다.그의 연주가 형편없다거나 그의 스타일이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은 아니다.그에 대한 호불의 평가는 지극히 상대적 평가이다.군웅이 할거하는 피아니스트계에는 글렌 굴드 말고도 난다 긴다는 피아니스트들이 수두룩하다.카리스마와 장난스러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폭풍과 사색의 스비아토 슬라브 리히터,변덕와 신비함의 아루트르 베네데티 미켈란젤리,섬세함과 애절함의 디누 리파티,냉철함과 선명함의 마우리치오 폴리니.....등등. 글렌 굴드의 미덕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나누어 주기에 나의 애정은 너무 다극화되어 있다.글렌 굴드가 동시대 선후배 피아니스트들에 비해 내 눈밖에 있었던 이유는 그의 레퍼토리가 가진 한계성도 한 몫을 했다.글렌 굴드의 레퍼토리는 저자도 말한 가장 비파아노적인 곡들이다.바하,슈트라우스,바그너등 ...물론 그도 브람스도 연주하고 리스트도 연주하였다.하지만 아무래도 그의 주종목은 바하이다.글렌 굴드가 활약하던 시대의 피아니스트들의 레퍼토리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요즘 피아니스트들은 레퍼토리 확장에 아무래도 좀더 신중한 듯 하다.뭐 장단점이 있겠지.어쨋든 과거 마당발 피아니스들은 -예를 들자면빌헬름 켐프,클라우디오 아라우,스비아토 슬라브 리히터- 바하부터 베토벤,쇼팽, 그리고 후기낭만주의 곡들까지 다루었다.글렌 굴드는 피아노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고전과 낭만주의 시대곡들을 혐오했다.그러니 그의 레퍼토리는 바흐에서 훌쩍 건너뛰어 베르크로 넘어온다.내공 있는 멀티플레이어들이 중원에 가득했는데 몇가지 비기로 무장한 글렌 굴드가 내게 주목받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는 너무도 매력적이다.중원의 맹주가 될 수는 없었지만 영향력 있는 봉건영주가 되기엔 충분했다.저자가 호로비츠와 굴드를 비교해 놓은 것을 보면 재미있다.둘은 스타일면에서는 확연이 달랐지만 분명히 공통된 점이 있었다는 것이다.원래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저자는 글렌 굴드의 능력을 더 높이 평가한다.어쨋든 글렌 굴드의 비기는 다음과 같다.논레가토로 무장한 무념한 음색,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캐릭터.녹음 연주 중에 들리는 흥얼거림.강함만이 카리스마가 아니라면 글렌굴드도 나름대로 충분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연주자이다다.단 그의 카리스마는 정치인이나 장군들이 가진 카리스마라기 보다는 신비주의적 종교 지도자가 가진 그것과 비슷하다. 

이 책은 기인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에 대한 전기이다.하지만 그의 외면적 삶에 대한 전기가 아니어서 독특하다.오히려 그의 예술적이고 내면적인 삶에 대한 보고서와 같다.이 책에 등장하는 글렌 굴드의 일대기나 그의 행적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모든 내용이 현재의 글렌 굴드가 만들어내는 피아노, 또는 음악이라는 소실점을 향해 모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천재들이 그렇듯이 글렌 굴드 역시 어려서부터 남달랐다.어린 글렌 굴드에게 동년배들이 관심을 갖는 유아기적 장난과 성적 호기심들은 다른 나라의 이야기였다.글렌은 항상 그 넘어있는 무언가를 응시하는 소년이었다고 한다.그의 이러한 이미지가 책 전반에 걸쳐 글렌 굴드의 아우라를 형성한다. 피아니스트이면서 피아노를 싫어한 사람,음악가이면서 음악의 뒤를 보려고 했던 사람.그의 기행 속에 가려진 글렌의 내면에 대해 저자는 진지한 애정을 가지고 쫓아간다.글렌 굴드에 대한 시류의 평가는 괴팍하고 기벽이 있는 천재피아니스이다.대외적 관계의 미숙과 결벽증적인 태도는 그를 기인이라는 유리병속에 가두어 놓는다.이는 사실 글렌 굴드가 스스로 원했던 방식이기도 하다.글렌 굴드는 대중과의 소통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다.그가 30대에 콘서트를 그만 두고 스튜디오에 박혀버린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대중들의 이미지속에 글렌 굴드가 '유리병속 피아니스트'가 된 것은 그의 무취색 피아노 음색과 더불어 그의 대중과의 단절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대중들은 대게 여기서 생각을 접고 그의 기벽만을 쫓는다.저자가 뛰어난 점은 글렌 굴드의 그러한 행동에 이유를 애정을 가지고 쫓는다는 것이다.

글렌 굴드는 수도자다.대개 피아니스트들이 수도자와 같은 정서상태를 갖는 다고 한다.물론 아르투르루빈슈타인처럼 낙천적인 스타일도 있지만 말이다.어떤 이에게 음악은 신과도 같다.그 아래 종사하는 음악가는 사제가 될 수 밖에 없.그에겐 악보와  피아노,그리고 자신의 예지력외엔 아무런 것도 없다.링위에 오른 권투선수는 외롭다고 한다.링 안에서는 자신의 예감외엔 아무런 의지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피아노 앞에 앉은 연주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글렌 굴드는 스스로를  세상으로 부터 단절시킴으로써 음악이란 신의 얼굴을 보려고 한다.그의 연주에서는 과도한 액션이나 대중을 현혹시킬 요소들이 들어 있지 않다.어떻게 보면 무미건조하고 어떻게 보면 소박하다.페달을 자제하기 때문에 울림자체도 다른 피아니스트들에 비해 큰 편이 아니다.리히터나 길레스,호로비츠의 광풍같은 연주는 대중을의 환호를 이끌기 쉽다.하지만 그 폭죽같은 연주의 장쾌함 만이 음악의 길은 아닐 것이다.장쾌함과 호방함에만 현혹되면-물론 위의 연주자들이 이런 미덕만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음악의 깊은 세밀함을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글렌 굴드는 화려함대신 자신의 유니크한 스타일로 소박함이 가진 한계를 넘어선다.

글렌 굴드가 고립과 차가움을 통한 길을 통해 신의 얼굴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최근의 연구는 바흐 건반음악의 연주에 있어 피아노는 바흐미학의 전범을 살릴 수 없다고 한다.정격연주가들은 현대쳄발로의 부박함을 없앤 개량 쳄발로와 복원한 클라브생으로 바흐 음악을 연주한다.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연주보다 피아노로 연주한 바흐음악을 더 좋아한다.한참 바흐 음악에 몰입하고 있는 페라이어나 쉬프의 낭만적인 연주도 좋다.하지만 피아노로 연주한 바흐의 최고봉은 역시 글렌 굴드이다.그가 없었다면 바흐의 건반음악이 얼마나 따분해졌을까....

이 책을 보는 동안 줄 곧 글렌 굴드의 음반을 들었다.골든베르크 변주곡,파르티타,토카타,스카를라티,하이든그리고 편집음반에 있는 브람스의 간주곡과 생소하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피아노 소나타....이 책을 놓으며 글렌 굴드에 대해 조금 더 깊은 애정이 생겼음을 느꼇다.알면 더 사랑하게 된다고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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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19 18: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예술 음악과 대중 음악, 그 허구적 이분법을 넘어서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90
최유준 지음 / 책세상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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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벌써 몇년 전일이다.전 한국종합예술학교 총장인 이강숙 선생의 강의를 들었다. 강의의 주제가 무었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지금 남아 있는 이야기는 두가지.

 하나는 그분이 처음 음악에 관심을 두게 된 사건이다.중학교 시절 베토벤의 '월광'소나타 첫 마디를 들었단다.그게 쳐보고 싶어서 학교 음악실에서 그냥 한음 한음 눌러가며 그 첫소리를 내었단다.자신이 만들어낸 '월광'의 '단단다 단단다...'하는 소리에 감동을 먹고 말았다고 한다. 그 인연이 결국 음악학자가 되게 만든 첫 사건이었다.

두번째 기억나는 이야기는 이렇다. " 우리가 대개 듣는 클래식이란거.사실 인류역사와 함께 시작한 음악의 역사에 견주어 볼때 아주 한정된 지역,한정된 시대에 나온 음악인 겁니다. 대개 클래식 듣는 사람들이 바하부터 쇼스타코비치,스트라빈스키...뭐 이정도까지 듣는데.그게 유럽을 중심으로 한 300여년 정도의 음악아니겠어요.근데 음악은 인류가 생겼을 때 부터 북치고 장구치고 했으니 그 시간의 광대함에 비추어 보면 세발의 피죠." 이런 류의 이야기였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관습적으로 수용되어 온 음악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다.여기서 말하는 관습적 수용은 음악을 이분화 시킨 것을 말한다.즉 '예술음악'과 '대중음악'이다. 특히 저자는 서구 중심적인 예술음악계가 음악의 헤게모니를 쥐고 제도권 교육을 장악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우선 클래식을 전공한 엘리트들의 대중음악에 대한 망상적 자의식과 대중음악계의 뿌리깊은 콤플렉스가 원인이 된다.이미 구조화된 음악의 위계는 서로의 배타성으로 인해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이는 음악종사자들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일반인들의 의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클래식'은 예술적이고 좀 있어보이고 좀 졸린 음악.'대중음악'은 멋지고 느낌이 확 오지만 클래식에 비해 격이 조금 떨어지는 음악.이러한 무의식적 음악위계는  상호 소통불가를 통해 더욱 공고화 되어간다.

저자는 현재 한국에서 왜곡된 음악적 위계에 대해 이데올로기적 기득권인 '예술음악'계에 혐의를 두는 듯하다. 우선 저자는 동시대의 음악,즉 대중음악이 버려진 자식에서 제 위치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짜르트와 비틀즈음악 사이의 이질성과 모짜르트와 쇤베르크의 이질성 중 어떤게 더 큰가?" (단언컨대 쇤베르크와의 이질성이 크다.청자의 입장에서...)

저자는 대중음악을 복원하기 위해 '음악의 합리화'란 개념을 도입한다.즉 근대음악의 역사적 흐름은 단순화,수학화 라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데카르트와 바하가 수학이란  도구를 가지고 합리성의 이름으로 만나게 된다.호모포니와 평균율은 음악 역시 '근대 프로젝트'에 대응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이것이 대량생산과 복제라는 테크롤로지를 만나며 20세기 대중음악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현대음악계는 이 과정을 불연속적으로 파악한다.저자는 이 역사가 연속성을 띠고 있으므로 음악계에서 등한시되어온 20세기 대중음악의 가치 인정을 주장하는 것이다.

저자는 음악에 대한 관습적 해석이 가져온 몰이해를 해소하기 위해 새판을 짜는 개념을 동원한다.'실용음악'과 '자율음악'이란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관점은 음악을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하기'라는 관계성으로 파악하는 것이다.우선 이러한 시도가 음악에 대한 사회적 접근과 범주의 개혁을 통한 소통이란 측면에서는 솔깃한 내용이다.하지만 의문도 생긴다.

우선 '실용음악=대중음악' 이란 것이 잘못 쓰이고 있음을 지적한다.맞는 말이다.저자는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 과거 클래식이란 음악들이 미사곡이나 장송곡,자장가등 실용적 목적에서 쓰였다고 말한다.이것 역시 맞는 말이다.결국 "모든 음악은 실용음악이다" 라는 결론까지 도달하게 된다.이것은 범주의 오류를 잡기위해 환원론의 오류로 빠져드는 것 처럼 보인다. 음악뿐 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이 처음 등장하게 되는 이유는 필요때문이다. 성당의 벽화,초상화,도자기,각종 제례악 등등...이 모든 걸 다 '실용예술'이다 해버리면 그만이다.그렇다면 인류가 발전시키고 쌓아온 예술적 업적과 성과가 도매급으로 넘어가버린다.또 한가지가 있다.실용-자율의 구분이 대중음악의 범위를 넓히고 무시되온 대중음악의 위상을 제대로 하는데는 기여할 수 있지만 결국 이것 역시 음악을 이분화 하고 있지 않은가? 저자는 '음악하기'라는 말을 통해 장르적 유연성을 확보한다고 믿는 듯 하다.하지만 이것 역시 음악을 도구화 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있다.아름다운 벽에 걸어놓으면 국보급 작품이다.하지만 종이없을 때 화장실 벽에 걸려있으면 휴지나 마찬가지이다. 결국 <세한도>의 심미적 가치나 예술적 가치는 전적으로 환경과 관계성속에서만 지배받는다.이것은 '예술은 무예술이다.' 라는 결론까지 이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지금의 세대는 예술-대중음악의 이분법적 이데올로기에 상대적으로 편견이 없다.' 라고 희망적 입장를 밝힌다.뭐 차츰 나아지겠지 하는 소망이랄까? 일견 맞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또 그렇지 않기도 하다.여기서 말하는 젊은 세대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다.허나 이들이 클래식에 대해 덜 주눅든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아마 90년대 이후 한국 대중음악의 질적 성숙도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이들 역시 예술음악에 대한 장벽은 그대로 갖고 있다. 편견없는 그 세대들 역시 저자가 그토록 원하던 소통을 위한 준비는 조금도 안되어 있다고 생각한다.100명쯤 정원인 대학교 아무 학과에 가서 물어보라. "가장 흔한 클래식.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끝까지 다 들어본 사람 손들어 보세요?" 라고 ....  100명중 10명 이상이면 내가 한말을 취소할 수 있다. 예술음악이 소외받는 현상을 예술 음악자체의 한계에서만 찾는다면 현 대중음악 소비자들의 자본주의적 음악소비에 대해 너무 관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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